이즈음 의외의 좋은 영화들로 감정이 너울을 타고 있습니다.
다시 스포일러성 영화 후기 올립니다.
또 가족영화이다. ‘나무없는 산’을 본 많은 분들이 한국판 ‘아무도 모른다’라고했는데
‘걸어도 걸어도’의 감독이 우연찮게도 바로 그 분, ‘고레에다 히로카즈’이다.
‘레브레터’ 이래로 일본 영화의 풍경을 예사롭지 않게 보게 되었는데(사실 어쩌면
이웃집 토토로 부터일지도…) 언젠가 본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처럼’ 이나
‘스윙걸즈’가 떠오르는 바다가 보이는 아늑한 소도시를 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꽤나
목가적으로 보인다. 긴장이 저절로 풀리는 영화의 서두.
평범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처럼 보이는 초반부 가족들의 소소한 이야기나 에피소드들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일본영화다운 작은 갈등이 있지만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미더운 가족이야기인가
지레 짐작해볼 따름.
명절이나 된 듯 다소 와자지껄하게 모두가 모인 자리. 초반 유머속에 살짝살짝 그림자를 비추던
영화의 속내는 이제 비로소 그 평범함속에 비수같은 칼날을 일상의 틈바구니속, 가족간의 대화속에도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휘두르기 시작한다.
어머니, 재치있는 말솜씨와 코미디언 뺨치는 흉내로 정말 쿨한 할머니시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어머니의 무한한 헌신과 희생, 그 사랑속엔 그러나 늘 그만큼의
깊은 그늘이 있다. 절대로 생색을 내거난 내색하진 않지만 마음속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남편과 사별후 둘째와 결혼한 며느리 유카리와 전남편 소생인 아츠시를 끝끝내 유카리상,
아츠시군이라 부르고 친딸에게는 사별한지 얼마되었는데 벌써 결혼이냐며 새며느리가 탐탁지 않음을
드러내더니 아예 며느리에게 료타와의 사이엔 자식을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술을 많이 마신 며느리에게 술은 받아도 잔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는 훈시는 덤이다.
아츠시를 데리고 시댁으로 향하는 유카리는 료타를 설득해 하룻밤 시댁에 묵고 가려 한다.
재혼에 아이까지 있는 유카리로서는 조금이라도 시댁에 점수를 따야할 판이다.
매사에 싹싹하고 상냥한 유카리, 하지만 그녀도 시어머니가 아들에게만 잠옷을 마련해주니
섭섭하기 그지없어 남편에게 투정을 부린다. 전남편을 완전히 잊지도 않지만 료타와 그 가족에게도
적응하려는 그녀의 투정은 그래서 작아 보인다. 누구나 완벽할 순 없지 않은가?
료타와 유카리, 아츠시가 한 방에 누워 비밀스레 하나의 가족이 되자는 장면은 유쾌하고 아름답다.
아버지, 그는 정말 우리 아버지들의 전형이다. 한때 작은 마을 병원장이었던 그는 여전히
고지식하고 소심하고 무뚝뚝하다. 한때는 의사였기에 가게 심부름을 부탁해도 편의점 포장봉투든
모습이 보이기 싫어 묵묵부답이고 딸이 자식들에게 할머니집에 오니 좋지?라고 얘기하자
따로 딸에게 이 집은 자기 돈으로 지은 자기집이라고 따지질 않나 둘째 료타가 옥수수 튀김 에피소드의
의 재치어린 답변은 첫째가 아닌 자신이 했다고 하자 그런 작은 일에 시비를 가리려고 하느냐고 나무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애에피소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는 엔카를 불렀던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아버지는 절대 엔카는 부르지 않았다고 버팅긴다. 가족사진의 변두리로 밀려나자 아예 휭하니 자리를
뜨는 소심남 아버지. 장남에 대한 깊은 편애로 둘째 료타와는 대놓고 불편한 사이지만 괜히 강한 척하는
그도 아츠시에겐 부드럽게 대하며 마치 큰아들이나 된 듯 의사가 될 것을 권한다. 앞집 할머니가 위급해
앰블런스에 실려가는데 한때는 의사였다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응급요원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둘째 료타의 시선속엔 측은함이 있다.
그러나 그걸 알리 없는 아버지. 그냥 가셔도 될 걸 료타의 잠옷차림에 또 한말씀 던지시고 가신다.
가족이란 그렇게 너무 익숙해서 서로에게 쉬운 존재인걸까?
둘째 아들 료타, 누구보다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아버지와 둘만 남은 식사자리, 우연히 마주친
화장실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방에서 사사건건 아버지와 티격태격이다. 유카리가 하룻밤 자고 갈 것을
권하며 이제는 장남이지 않느냐고 하자 료타는 반발이라도 하듯 자신은 차남이라고 외친다.
자존심에 실직한 상태를 숨기고 불편한 아버지로 인해 하룻밤 자고 가는 것조차 피하고 싶어하지만
아버지가 측은하기도 한 료타. 실상 그는 어린시절 일기속에 적힌 것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의사가
되고 싶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한 에덴의 동쪽의 장남 칼이었다.
스스로 찢어버린 일기장을 다시 붙이는 료타, 아츠시도 함께간 바닷가 산책길에서 아버지와 함께
축구장에 갈 것을 약속하는 료타. 죽은 준페이가 대신 살린 요시오가 기일마다 찾아오는 것도
이젠 그만 풀어주자는 료타, 그는 신경질적이고 때론 무심하지만 실직자임에도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리고 아직 마음을 트지 못한 아츠시와도 소통하려하는 여리고 착한 성품의 소유자이다.
딸, 지나미. 약간의 푼수끼는 있지만 날카로운 어머니에 비해 오히려 그녀는 매우 유연하다.
어머니에게나 아버지에게 격이 없이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 남편인 사위 역시
딸을 능가하는 푼수지만 그래서 영화는 날카로운 비수를 도드라지게하는 백그라운드 유머를 제공한다.
실리적인 이유로 친정댁으로 들어와 살려는 그녀의 깍쟁이짓이 마냥 밉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하긴 어느 자식이라서 부모덕을 보고 싶지 않으랴? 늘 내리사랑덕에 손해보는 것은
부모요 챙기는 것은 자식이라. 이 또한 대물림이니 결국 셈셈인걸까?
아츠시, 일명 무표정 왕자님. 어린 것이 이리 잔 정이 없나 싶지만 새아버지 료타을 뭐라 부르냐는
사촌들에게 거짓말이지만 아버지라 부른다 하고 홀로 마당에 서서 죽은 아버지를 따라
‘피아노 조율사’가 되거나 아니면 료짱의 어릴 적 소원대로 ‘의사’가 될 것을 서원한다.
엄마와 료타, 아츠시가 이룬 새 가정은 큰 탈없이 순항할 것 같다.
요시오, 십년전 큰아들 준페이가 살려준 아이. 준페이는 죽고 대신 살아남아 매년 기일마다
찾아오는 요시오는 이제 청년이다. 헌데 준페이몫까지 잘 살겠다는 이 청년은 주체할 길
없이 몸이 불은 초고도비만에 변변찮은 직업도 구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다 양말을 때투성이에 눈치없이 주는 대로 음식만 받아먹질 않나 다리에 쥐가 나서
료타의 부축으로 겨우 일어서는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대책없이 한심해 보이는 인생이다.
천성이 순진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요시오. 그는 일본이라는 촘촘한 사회속에서 과연 준페이 몫까지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일본 사회의 몫과 탓이 내겐 더 커보인다.
(청년백수의 상징처럼 보이는 요시오, 한국 역시도 마찬가지리라.)
이제 다시 어머니다. 요시오를 그만 놓아주자는 료타의 말에 어머니는 답한다. 겨우 십년 지났을
뿐이라고 준페이가 죽은 고통을 매일 당하는 당신은 일년에 한번 요시오를 그 죄책감으로 벌하는
거라고… 그날 하루 정도의 고통을 주는 벌은 해도 괜찮다고… 일순 갑자기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요시오를 그렇게 밝게 웃으며 보내고 내년에도 꼭 또 오라고 하던 마냥 인자해뵈던
어머니의 속마음이 이런 것이었구나 라는 실체를 알았을 때의 그 섬뜩함이라니…
아들의 잃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짐작이나 하랴마는 어머니의 이중적인 태도속에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숨겨진 어두운 면모를, 그 진수를 보게된다.
하지만 영화의 진짜 압권은 이런 섬찍함을 넘어선다. 제목 ‘걸어도 걸어도’가 가사에 나오는 엔카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격조높으신 양반답게 엔카는 생전 부르지 않았다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추억의 엔카라며
가족들의 저녁 식사자리에서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음반을 틀어달라고 한다. 낡은 LP판을 따라 흐르는
애잔한 선율 그리고 조금씩 취한 듯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어머니. 어머니는 추억속엔 과연 어떤 낭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식사가 끝난 후 잠자리에 들기 전 차례대로 욕실에서 몸은 씻는 가족들.
아버지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욕실밖 바깥문이 드르륵 열리고 어머니가 빨래를 정리하러
들어온다. 빨래를 너는 그녀는 뜬금없이 젊은 시절 바람난 아버지를 찾아 아기였던 료타를 등에 업고
남편 정부의집에 찾아갔던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꺼낸다. 찾아간 집앞에서 남편은 애인을 위해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부르고 차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녀는 다시 아기를 업은 채 집으로
돌아와 그 음반을 샀다고 한다. 그렇게 마치 무슨 남의 일이냥 이야기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드르륵
문을 닫고 나가는 어머니.
어머니가 욕실에서 홀로 목욕하다 문득 틀니를 빼서 씻는 장면은 앞서의 섬뜩함이 저절로 애잔한 처연함으로
넘어서게 되어버린다.
설이 되면 다시 오겠지 생각하는 부모와 달리 아들은 이번에 왔으니 설엔 안와도 되겠구나 생각한다.
어쩜 이리 똑같냐? 일본이나 한국이나 인지상정은 매일반일까?
어머니가 얘기한 스모선수 이름을 기억해내며 늘 항상 한발 늦는다고 자책하는 아들, 료타.
그 말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돌아가시고 료타는 아버지와의 축구시합 관람 약속도,
아들차 타고 쇼핑해보고 싶다는 어머니와의 약속도 모두 지키지 못한 채 그저 가족들과
부모의 기일날 묘지를 찾아 기도드리고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자세히 탐구해보면 그 복잡 미묘한 사람과 사람의 얾힘속엔 진정 인간 본연의 그 무엇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연옥(코스비 가족이라고 천국일까?)이 아닐까 싶다. 하여
가족이 이루는 그 복잡 미묘하고 다기한 삶의 모습과 결들을 경이롭고 섬세하게 포착한
영화를 보고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과연 그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
아마도 가족속의 내 모습,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모습중 가장 나에게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첫댓글 8월 말에 이거 보려고 극장을 이리저리 뒤져봤는데 하는 곳이 없더군요. ㅡㅡ;;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극장은 많은데 상업 영화만 판치고 다른 영화는 찬밥 신세입니다. 위 내용은 등장인물이 좀 많아서 (저는 3명 이상이면 헷갈려요;;) 다시 차근차근 읽어 봐야겠네요. ㅎㅎ
지난 주말까지 하이퍼텍 나다에서 하루 1회 상영을 했습니다. 지금은 상영관이 안타깝게도 없는 것 같네요TT. 멀티상영관이 되어서도 실제로는 극장마다 모두 고만고만한 영화만 틀어주니 단관 극장 시절보다 오히려 선택의 폭이 대폭 줄어든 것 같아요. 21세기 인터넷 시대인데 진지한 영화를 극장에서 보려면 정말 열심히 정보를 찾아 헤메야 하는 이 아이러니이 어쩌스까요?
저도 봤어요. 선재에서.. 씨네큐브가 없어진다니 많이 섭섭해요=.=
씨네큐브-미로스페이스-광화문 교보문고로 이어지는 서울 나들이 라인의 한축이 무너졌습니다. 이대앞 아트 하우스 모모로 옮겼다는데 거기까지 가지니 웬지 멀게만 느껴지고... 저두 TT입니다요. 암튼 그래도 부지런히 발품 팔아 괜찮은 영화들 보러 다녀야지요. 바람소리.님은 잘 지내고 계신거지요?
어제 드디어 봤습니다. 절편님이 너무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짚어가며 이야기를 해 주시니 영화를 다시 본 듯한 느낌이네요 ㅎㅎ 저도 기억에 남는 것이, 어머니가 요시오에 대한 원망을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거 완전 공포영화네..?' 했는데 절편님도 마찬가지셨군요. ^^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도 목구멍에 콱! 박힌 가시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허공을 응시하는 듯 중얼거리는 부분이 목욕탕 문 너머 어머니의 모습보다 더 서늘하게 느껴지더라구요. 하지만 영화 전반에 느껴지는 정취는 굉장히 편안하고 아늑해서 다시 한 번 일본에 가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