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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부처께서는
말법시대가 되면 샹가(襄伽,Sankha)라는 전륜성왕과 미륵(Metteya)부처가 한시대에 등장한다고 '전륜성왕 사자후경(轉輪聖王 獅子吼經,Cakkavattisihanada Sutta)'에서 이례적으로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입멸하지 말라. 내 불법이 다할 때까지 남은 후에 입멸하라. 마하가섭은 입멸하지 말고 미륵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려라.” <미륵하생경>
"고약한 병들이 잇달아 번지리라. 이 때에 그 통일의 하늘에 계시는 미륵부처님이 바다에 둘러싸인 동방의 나라에 강세 하리라."
"이 곳은 병든 세계를 고치는 위대한 대왕(大醫王)이 머무는 곳이니라." "그 때에 미륵부처님이 집에 계신지 오래지 않아서 집을 떠나 도를 닦으시리라. 계두성이 멀지 않은 곳에 보리수가 있나니 그 이름은 용화(龍華)라. 미륵부처님께서 그 나무 밑에 앉으시어 무상의 도과(道果)를 이루시느니라.
이 때에 양커라 하는 법왕(法王)이 출세하여 정법(正法)으로 다스려 칠보(七寶)를 성취하니 무기를 쓰지 않고도 자연히 전 영토에서 항복을 받게 되느니라. 미륵부처께서 우주의 새 생명 세계를 열어 모든 인간을 부처(진리에 눈뜬자)로 태어나게 하시니, 이것이 땅위의 조화낙원인 용화세계로다.
이곳은 병든 세계를 고치는 위대한 대왕(大醫王)이 머무시는 곳이니, 그 때는 기후가 고르고 사시(四時)가 조화되며 여러 가지 병환이 없어지고 인심이 골라서 다 한뜻이 되는 울단월(鬱單越)의 세계와 같다." 하니라. 『 미륵 하생경』
신라 10현 중 한 사람으로 이두문자를 집대성한 설총은 신라 경덕왕 때의 대학자다. 또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문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는 요석공주다.
일찍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은 그는 말년에 [설총결]이라는 비결서를 남겼다.
漢陽之運過去除에 龍華世尊末代來라.
金剛山上大石立하니 一龍萬處次弟應이라. 一萬二千文明化에 瑞氣靈峰運氣新이라.
한양의 운수가 끝날 무렵 용화세존이 말대에 오시리라. 금강산에 새 기운이 서려 있으니, 상서로운 청룡 백호가 굽이굽이 응해 있도다. 일만 이천 도통 군자를 출현시킬 새 문명의 꽃이여, 서기 넘치는 영봉에 그 운기 새롭구나.
百年後事百年前하니 先聞牛聲道不通이라.
백 년 후의 일을 백년 전에 와서 집행하시니
먼저 믿는 자들이 소울음소리는 들었으나 도는 통하지 못하리라.
前步至急後步綏하니 時劃方寸綏步何오.
먼저 믿는 자들의 걸음걸이는 지극히 급하였건만 늦게 믿는 자들의 걸음은 어이 그리 더딘고. 남은 개벽의 시간 방촌에 불과하건만 게으른 신앙의 발걸음은 어찌할 것인고
背恩忘德無義兮여 君師之道何處歸오. 無禮無義人道絶하니 可憐蒼生自盡滅이라.
배은망덕하고 의리 없음이여, 군사의 도는 다 어디로 갔는고. 예절도 의리도 없이 인륜의 도가 다 끊어졌도다.아, 가련토다, 창생들이여! 모두 제 죄로 멸망당하는구나!
진표율사에 관한 기사는 『송고승전(宋高僧傳)』 외에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비교적 상세한 편이어서 『진표전간眞表傳簡』’조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조에 중복되어 나오고 진표의 제자들 이야기도 『심지계조心地繼祖』’조에 실려 있다.
신라와 백제시대 때 부터 꽃피기 시작한 도솔천의 천주님(미륵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진표 대성사로 부터 영글어 민중신앙으로 개화되었다.
법상종의 개조(開祖)이기도 한 그는, 일찍이 12세 때 어머니와 아버지(眞乃末)의 출가 허락을 받고 고향(전주 만경현 대정리)을 떠나 곧장 전북 김제군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숭제법사로부터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그리고 미륵님으로부터 직접 법을 구하여 대도를 펴겠다는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전국 명산을 순행하다가, 27세 되던 경덕왕 19년(庚子, 760)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 들어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초인적인 정열을 발휘하며 구도에 정진하였다.
쌀 두 가마를 쪄서 말린 양식을 가지고 입산한 그는 하루에 두어 홉씩 먹으며 미륵불상 앞에서 지극정성으로 참회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천상으로부터 장차 도를 통하게 되리라는 암시적인 한소식[授記]을 받지 못하자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는데, 이 순간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진표 대성사를 손으로 받아 바위에 올려 놓고 사라졌다.
이에 용기를 얻고 서원을 세워 21일을 기약하고 생사를 걸고 더욱 정근(精勤)하며 온몸을 돌에 던지고 수없이 참회하자, 3일이 되었을 때는 팔굽과 두 무릎이 터져 피가 흐르고 힘줄이 드러났다.
7일째 밤에 지장보살이 주장자를 짚고 나타나 몸을 간호해 주고 가사(架裟)와 바리때를 전해주자, 더욱 확신을 갖고 혈심으로 정진하여 21일이 끝나는 날 마침내 정각 도통을 하여 천안(天眼)을 열었다. 이에 지장보살 등 수많은 도솔천중(兜率天衆)을 거느리고 오시는 도솔천의 천주님이신 미륵존불을 친견하고, 다음과 같이 점찰경(占察經) 두 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 189개를 받는다.
“장하도다. 대장부여! 계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신명을 아낌 없이 지성으로 참회함이여! … 이중 제8간자는 본래 깨달은 불종자를 표시함이요, 제9간자는 새로 닦아 나타나는 불종자를 표시함이니 이것으로 장래의 과보를 알리라. 이 뒤에 그대는 이 몸(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후에 도솔천에 나리라.” 하시고 천상으로 환어하셨다. 이 때가 율사 30세 되던 임인(762)년 4월 27일이었다. 『三國遺事』
우리나라의 미륵불 신앙은 진표율사로부터 대중화되었다. 진표율사에 대한 문헌은 <삼국유사>에 ‘진표전간眞表傳簡’ 이 있고, ‘관동풍악발연수 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가 있다. 그리고 <송고승전>에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이 있다. <송고승전>에 있는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은 988년에 쓰여졌기 때문에 <삼국유사>보다 빠른 시기에 나왔지만 중국인이 기록했기 때문에 문헌적으로나 사료적으로 <삼국유사>보다 떨어진다고 평가되고 있다.
‘진표전간’은 <삼국유사>를 편찬하신 일연스님이 직접 쓰신 글이다. ‘관동풍악발연수석기’는 금강산 발연사의 주지인 영잠瑩岑스님이 1198년에 쓴 것을 일연스님의 제자인 무극無極스님이 <삼국유사>에 넣었다.
진표율사가 미륵부처님으로부터 전수받은 189개의 간자는 고려중기까지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의 제자인 영심永深스님이 속리산에서 간자 전수를 통해 법통을 계승해서 점찰법회를 열었고, 이어 심지心地스님이 간자를 전수받았다고 나온다.
신라 말기에는 석충釋沖스님이 진표율사의 가사와 간자 189개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고려 16대 예종은 팔공산 동화사에 보관돼 있는 간자를 대궐 안에 가져다가 공양을 하고 예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원각(圓覺) 대도통을 하신 진표 대성사는 자신의 때로부터 천 수백 년 후에 일어나는 천지 대개벽의 환난을 훤히 내다보고, 그 때 미륵 천주께서 동방의 이 강토에 강세해 주실 것과 자신을 큰 일꾼으로 써주실 것을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였다. 그러자 미륵존불로부터 금산사내에 있는“사답(寺沓) 칠두락七斗洛” 정도 넓이의 연못인 용추못(龍沼)을 메우고 미륵존불의 불상을 세우라고 계시를 받는다.
진표율사는 불상을 세우기 위해 처음(762년 건립시작)에는 흙으로 연못을 메웠는데, 이튿날 보면 다 파헤쳐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 때 지장보살이 나타나서 숯으로 메우라고 일러준다.
이에 진표율사는 도력(道力)을 써서 안질을 퍼뜨린 후 `누구든지 안질을 앓는 자는 금산사 용소에 숯을 한 짐 집어넣고 못물로 눈을 닦으면 낳는다.'는 소문을 낸다. 안질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숯을 집어넣으니 그제야 연못은 메워지게 되었다.
진표율사는 연못이 숯으로 메워지자 미륵불상을 받쳐 세우기 위해 연못 한 가운데에다 연꽃모양을 조각한 큰 바위(석조 연화대 또는 석련대, 현재 보물 23호)를 세웠으나, 무슨 조화에서인지 석련대(石蓮臺)는 밤 사이에 20여 미터나 떨어진 위치(현재 석련대가 있는 위치)로 옮겨져 버린다.
하루는 미륵부처님이 꿈에 현몽하여 “시루를 걸고 미륵불상을 세우라”고 계시한다. 이에 다시 진표율사는 연못 중앙에다 밑이 없는 대형 시루(甑증)를 걸고 그 위에 우물 정(井)자 형태의 받침목을 얹은 다음 쇠로 된 미륵불상을 세우게 된다(4년에 걸쳐 766년 완공).
지금도 금산사 미륵불상 밑에는 밑없는 거대한 시루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동서고금에 없는 기이한 형태이며, 세계 최대의 미륵존불상이다. 3층 미륵전과 함께 국보 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사답(寺沓) 칠두락七斗洛과 시루 위에 미륵부처님을 조성하게 된 까닭은?
임진왜란
살아자수(殺我者誰,죽이는 것)오 여인대화(女人戴禾)가 인부지(人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살리는 것)오 십팔가공(十八加公)이라.
女人禾=倭의 파자(破字)
十八加公=松의 파자(破字)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
병자호란
살아자수(殺我者誰,죽이는 것)오 우하횡산(雨下橫山)이 천부지(天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살리는 것)오 부토(浮土)는 온토(溫土)니 종토(從土)하라.
청태종이 10만 대군을 엄동설한(1636년 12월 9일)의 혹한기 때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다.
雨下橫山=雪의 파자(破字) 겨울에 얼어 죽음
부토(浮土)는 온토(溫土)니 종토(從土)하라, 피난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것
앞으로의 대변국
살아자수(殺我者誰,죽이는 것)오 소두무족(小頭無足)이 신부지(神不知)라.
활아자수(活我者誰,살리는 것)오 사답칠두락(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엄택곡부(奄宅曲阜)라. 삼인일석(三人一夕)은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도하지(道下止)하라.
小頭無足 神不知, 천지신명이 인간세상을 한번 정리한다는 것
寺沓七斗洛에 부금(浮金)은 냉금(冷金)하니 종금(從金)하라, 금산사 미륵부처님이 奄宅曲阜인간으로 오신다는 것
三人一夕(닦을 수修 파자(破字), 이재전전(利在田田)하니 田田은 태전(太田) 도하지(道下止)하라.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1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2 이 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3 “이제 말세의 개벽 세상을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4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隻)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정심 수도하여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
5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6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7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8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하시고
9 “시속에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을 밥’이라는 말이 있나니
10 대저 무체(無體)면 무용(無用)이라. 서(西)는 금(金)인 고로 김(金)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하시니라.
11 이로부터 형렬의 집에다 식주인(食主人)을 정하고 머무르시면서 도문(道門)을 열어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12 형렬에게 신안(神眼)을 열어 주시어 신명(神明)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어명(御命)을 받드는 모습을 참관케 하시니라.
13 형렬이 모시면서 보니 밤이면 상제님께서 기거하시는 방에서 ‘웅웅웅’ 하고 벌이 나는 듯한 소리가 나더라.
(증산도 道典 2:15)
무극대운. 우주일년의 시간 질서 가운데 가을 천지의 운수를 무극대운이라 하며, 우주의 가을철에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 그 운수를 주재하시어 인간의 삶 속에 열어 주신 새 문화, 성숙된 문화를 무극대도라 한다.
4절 15:4 천지공정. 천지공사를 집행하여 세계의 새 질서를 심리하기 위해 천지신명과 인간이 참여하는, 주역자들이 함께 모여 가을의 대개벽세계를 여는 새 역사 창조의 무대.
6절 15:6 대법국 천개탑. 대법국은 로마의 바티칸 시국(市國), 천개탑은 교황청의 중심 건물인 베드로 성당을 말한다. 기독교 문명을 서양으로 전파한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므로 천개탑이라 한다.
10절 15:10 무체면 무용. 천지의 모든 변화는 그 근원이 없으면 작용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변화의 본체와 본체의 구체적인 작용과의 일체적 상관관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10절 15:10 서는 금인 고로. 상제님께서는 가을 기운인 금(金)기운을 취하시어 김형렬 성도를 식주인으로 정하시고 금산(金山), 김제(金堤), 동곡(銅谷) 등을 천지공사의 주무대로 삼으셨다. 또한 김형렬 성도를 4월 4일 원평 장터에서 만나시고 충청도에 들러 9일간 공사 보신 후 4월 13일에 다시 그의 집을 찾으신 것도 ‘4·9金’ 원리에 따른 것이다.
모두 내 비결이니라
1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운가사에 새 기운이 갊아 있으니 말은 소장(蘇張)의 구변이 있고, 글은 이두(李杜)의 문장이 있고, 알음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나니
2 다 내 비결이니라.” 하시니라.
3 또 성도들로부터 ‘금산사의 미륵불이 조만간에 출세하면 천하가 한집안같이 되어 무량한 신선의 세계가 된다.’는 말을 들으신 후에 흔쾌히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4 “세간에는 혹 내 일을 아는 자가 있어 사람들이 모르는 앞세상의 운수를 왕왕 그와 같이 말하는 수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32)
소장. 소진(蘇秦, ?∼서기전 317)과 장의(張儀, ?∼서기전 309). 전국 시대의 달변가이다.
1절 32:1 이두. 이백(李白, 701∼762)과 두보(杜甫, 712∼770). 성당(盛唐) 시기의 대시인으로 각기 시선(詩仙), 시성(詩聖)으로 추앙 받는다.
1절 32:1 소강절(邵康節, 1011∼1077). 중국 송대의 유학자로 이름은 옹(雍). 상수(象數) 학설에 기초한 우주관과 자연철학에 독보적인 인물이다. 우주 시간대의 1년 개벽수(129,600년)를 처음으로 밝혔다.
우주의 삼신이 천지와 인간 생명의 기틀
1 하루는 상제님께서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天皇地皇人皇後에 天下之大金山寺라
천황지황인황후 천하지대금산사
진표와의 큰 인연
2 한 성도가 여쭈기를 “전해 오는 비결(秘訣)에 ‘모악산 아래에 있는 금부처가 능히 말을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세간에 금부처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하니
3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표는 나와 큰 인연(大緣)이 있느니라.
4 ‘육장금불(六丈金佛)이 화위전녀(化爲全女)라.’ 하였나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5 내가 미륵이니라.
6 금산사 삼층전 미륵은 손바닥에 불(火)을 받았으나 나는 입에다 물었노라.
7 옛날에 주대명(朱大明)이 금산사 미륵에게 기도하고 소원을 이루었으되
8 민중전(閔中殿)은 각처의 사찰에 빠짐없이 기도하였으나 오직 금산사에는 들지 못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66)
천황 지황 인황. 천지인이 인격화되어 문명을 연 주인공들. 삼황(三皇)이라고도 한다.
7절 66:7 주대명(朱大明, 1328∼1398). 명나라를 창업한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경남 진해에 있는 천자봉(502m)에는 주원장이 우리 민족의 혈통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진해 웅천 향토문화 연구회,『진해 땅이름 이야기』>
미륵불의 이치를 모르는 자는
1 상제님께서 하루는 성도들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이 어찌 모악산에 있을까?
2 또 어찌 금산사 삼층전에 있고 솥 위에 서 있으며, 용(龍)이 없는데도 어찌 여의주(如意珠)를 손에 받고 있을까? 잘 생각해 보라.” 하시고
3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 이치를 알면 용화세계를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시니라.
4 하루는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금산사 미륵불이 솥 위에 서 있으니, 솥이라 하는 것은 항시 새것을 취하는 법이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2:67)
천조(天朝)를 맡기고 강세하심
1 나의 일은 비록 부모, 형제, 처자라도 알 수가 없나니 나는 서양 대법국 천개탑 천하대순이로다.
2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나니
3 천지간의 모든 신명들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나에게 탄원하므로
4 내가 천조(天朝)의 대신(大臣)들에게 ‘하늘의 정사(政事)를 섭리하라.’고 맡기고
5 서양 천개탑에 내려와 천하를 둘러보며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 걱정을 살피다가
6 너의 동토(東土)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무르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7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 갑자(八卦甲子)에 응하여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이 세상에 내려왔노라.
8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니라.
9 최제우는 유가(儒家)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나니 나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니라.
10 동학교도가 모두 수운(水雲)의 갱생(更生)을 기다리나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느니라.
11 내가 수운을 대신해 왔나니 내가 곧 대선생이니라.
(증산도 道典 2:94)
팔괘 갑자. 최수운에게 내린 천명과 신교를 거두신 해, 갑자(甲子, 1864)년으로부터 8년 후를 뜻한다.
8절 94:8 궁을가. 북창 정렴이 인류 구원의 법방에 대해 적은 비결. 전 인류의 생명줄을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가 천지일월의 사체(四體, 弓弓乙乙)로 우리나라에 출세하는 이치를 담고 있다. 동학신도들이 많이 불렀다.
9절 94:9 참동학.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9년 천지공사를 집행하시어, 당신의 무극대도 시대를 선포한 ‘후천개벽, 천주님 강세, 무극대도 출세’ 라는 동학의 이상을 실현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서 상제님께서 스스로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셨다.
김형렬 집에 찾아오심
1 그 후 4월 13일에 형렬이 제비창골 집에 있는데 산 너머 금산사(金山寺) 쪽에서 “형렬아, 형렬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거늘
2 형렬이 ‘어디서 들리는가?’ 하고 소리나는 곳을 따라 서전재(西殿峙)를 넘어가 보니
3 상제님께서 금산사 돌무지개문(虹霓門) 위에 앉아서 부르고 계시더라.
4 형렬이 크게 반가워하며 상제님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돌아 집 앞에 이르러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하니
5 말씀하시기를 “자네 집에 산기(産氣)가 있네그려.” 하시거늘
6 형렬이 놀라 여쭈기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삼신(三神)이 말을 몰고 자네 집으로 들어가므로 알았노라.” 하시니라.
7 또 말씀하시기를 “여기가 제비창골(帝妃創谷)이라지?” 하시매 형렬이 “예, 그렇습니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하고 대답하니
8 말씀하시기를 “응, 촉나라 길이 험하다 하여도 한신(韓信)이가 알더라고, 천하사(天下事)를 하러 다니는 사람이 제비창골을 모르겠나. 감나무 아래로 가세.” 하시어 그 아래에 마주앉으시니라.
(증산도 道典 3:10)
서전재. 하운동 제비창골에서 금산사 서전(西殿)으로 넘어가는 산길의 통칭.
3절 10:3 부르고 계시더라. 『대순전경』과 『성화진경』 등에는 4월 13일에 하운동으로 찾아오신 것만 기록되어 있으나 김형렬 성도의 후손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한다. 김현식은 무진(道紀 118, 1988)년 답사 때, 하운동의 집터에서 할아버지(김형렬)와 아버지(찬문),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금산사 돌무지개문 쪽을 가리키며 증언했다.
4절 10:4 상제님을 모시고. 김형렬 성도가 금산사 돌무지개문에서 상제님을 모시고 집으로 간 이 사건은, 그가 온 인류를 대표해서 인간으로 오신 미륵부처님을 한 속가로 모시고 간다는 의미가 있다. ‘온 인류가 도솔천의 천주님을 모시는(侍天主)’ 역사의 첫 발자국을 떼 놓은 순간을 상징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인 것이다.
4절 10:4 용화동. 하운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이름은 용와동(龍臥洞)이었다고 한다.
신천지 개벽공사의 시종을 김형렬 집에서
1 하루는 형렬에게 “쇠머리 한 개를 사 오고 떡을 찌라.” 하시고 “제비창골 일을 해야 한다.” 하시더니
2 감나무 밑에 음식을 차리게 하시고 감나무를 잡고 ‘만수(萬修)’를 부르시며 성주풀이를 하시니 이러하니라.
3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帝妃院) 솔씨 받아
소평(小坪) 대평(大坪) 던지더니
4 밤이면 이슬 맞고 낮에는 볕뉘 쐬어
그 솔이 점점 자라 청장목(靑壯木)이 되었구나.
황장목(黃腸木)이 되었구나.
낙락장송이 쩍 벌어졌구나.
5 태평전(太平殿) 대들보가 되어
어라 만수(萬修) 어라 대신(大神)이야.
6 대활연(大豁然)으로 이 땅으로 설설이 내립소사.
시(始)도 여기서 일어나고 종(終)도 여기서 마치리라.
7 이렇게 노래 부르신 후에 금산사를 넘어다보시고 “여기를 큰집으로 할까, 작은집으로 할까. 제비 새끼 치는 날에 제비창골이 가득 차리라.” 하시고 쇠머리를 땅에 묻으시니라.
8 형렬의 집에 계실 때 하루는 상제님께서 “여기가 어찌 제비창고(帝妃創庫)일까?” 하시더니
9 말씀하시기를 “옛집을 다시 찾는다는 말이니라. 이곳은 제비창골이 아니요 제업창골(帝業創谷)이니라.” 하시니라.
10 하루는 하운동에 사는 박성태(朴成台)에게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제비창골에 날마다 백 명씩은 왕래하리라.” 하시고
11 “그러나 여지가 좋지 못하다.”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3:13)
성주풀이. 조선시대의 잡가로 성조가(成造歌)라고도 한다. 집터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성주신(成造神: 成造는 단군 성조 때 궁실 건축을 담당한 실존 인물)과 성주 부인에게 제를 지낼 때 부른다.
3절 13:3 안동 땅 제비원. 성주풀이의 본향(本鄕)으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미륵불이 있으며, 이 불상에 비바람을 가릴 전각을 지어 주려 한 ‘연(燕)이’라는 여인의 전설이 내려온다. 여기서는 천지공사의 주인을 안동 김씨로 정하시는 굿풀이를 뜻한다.
4절 13:4 황장목. 오래 되어 심(心)이 붉게 된 품이 좋은 소나무를 말하며 임금의 관재(棺材)나 대궐의 기둥으로 쓰였다.
형렬에게 법신을 드러내 주심
1 하루는 형렬이 ‘금산사로 오라.’는 상제님의 기별을 받고 금산사로 가니
2 절 앞 다릿목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미륵불상이 금빛을 발하면서 걸어 나오는지라
3 형렬이 놀라 땅에 엎드려 몸을 떨고 있는데 잠시 후 “그만 일어나거라.” 하는 소리가 들리거늘
4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상제님께서 웃음을 띠고 서 계시더라.
5 이로부터 형렬이 깍듯이 존댓말을 쓰니 다른 성도들도 따르니라.
(증산도 道典 3:19)
미륵불은 혁신불
1 상제님께서 금산사를 집처럼 자주 가시는데 상제님께서 가시면 금산사 중들이 “미륵존불, 미륵존불.” 하고 불공을 드리니라.
2 4월에 하루는 금산사로 가시는 길에 계룡봉(鷄龍峯) 옆을 지나시며 말씀하시기를
3 “태전(太田)은 현룡재전(見龍在田)이요 여기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니라.” 하시고
4 금산사에 이르시어 공사를 행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은 혁신불(革新佛)이니라.” 하시니라.
5 또 “여기가 배코같이 된다.” 하시고 천왕문(天王門), 시왕전(十王殿), 삼성각(三聖閣), 나한전(羅漢殿)으로 다니며 제를 지내시니라.
너희들은 절할 곳이 없느니라
6 하루는 어느 절에 가시어 성도들과 함께 지장각(地藏閣)의 여러 보살을 둘러보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절할 곳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3:84)
계룡봉. 모악산 계룡 마을 에 있는 계룡산의 봉우리. 딱지봉, 닭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2절 84:2∼4 김형렬 성도가 세운 미륵불교에서 신앙한 최선애(1922
~ ) 증언.
3절 84:3 현룡재전. 『주역』‘건괘(乾卦)’ 두 번째 효의 효사(爻辭). 원문은 ‘見龍在田 利見大人(드러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 이다. 앞으로 인종씨를 추리는 대개벽기를 맞아 생사판단을 하는 인사의 절대자가 출세하는 이치를 예고한 글귀이다.
3절 84:3 비룡재천. ‘건괘’의 다섯 번째 효의 효사. 원문은 ‘飛龍在天 利見大人(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 이다. 여기서 비룡은 상제님이며 당신의 조화권능으로 앞세상의 이정표를 질정하신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4절 84:4 혁신불. 미륵부처님은 천지 분열 운동의 극기(선천 말기)에 출세하여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인류를 가을 우주로 인도해 주시는 구원의 메시아다.
5절 84:5 배코. 상투를 앉히려고 머리털을 깎아 낸 자리.
내가 천지일월과 같거늘
5 공신이 평소에 상제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간직하고 싶어하다가 하루는 기회를 보아 사진 찍으시기를 여쭈니
6 상제님께서 마다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지일월(天地日月)과 같거늘 무슨 사진이 필요하더냐.” 하시고
7 또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삼층전 미륵불을 보소.” 하시니라.
8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사진을 많이 찍지 마라. 정기가 모손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3:219)
미륵전 앞을 넓히는 공사
1 하루는 약방 후원에 푸른 대나무 10여 그루를 친히 심으신 뒤에
2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비품 물목을 깨끗한 종이에 차례로 적으시고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3 世界有而此山出하니 紀運金天藏物華라
세계유이차산출 기운금천장물화
應須祖宗太昊伏인댄 何事道人多佛歌오
응수조종태호복 하사도인다불가
세계가 생겨나고 이 산이 나왔으니
후천 (가을)문명을 여는 운수가 이 산에 갊아 있느니라.
마땅히 선천 문명의 조종(祖宗)은 태호 복희씨인데
웬일로 도 닦는 자들이 허다히 부처 타령들이냐!
4 상제님께서 그 글을 공우와 광찬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5 “금산사 미륵전 앞에 대장전(大藏殿)이 있어 불편하니 너희 두 사람은 이 물목기(物目記)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6 대장전 석가불상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편으로 옮겨 세운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종이를 불사르라.” 하시니
7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8 그 뒤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대장전을 마당 서편으로 옮겨 세우니 비로소 미륵전 앞이 넓어지니라.
(증산도 道典 5:282)
응수조종태호복, 하사도인다불가. 태호 복희씨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의 막내아들로 성은 풍(風), 이름은 방아(方牙)이다. 복희씨는 성씨(姓氏)의 시조요, 역(易)철학의 시조이며 문자를 만들고 일부일처의 혼인제도를 세우는 등, 인륜 도덕의 푯대를 세운 명실상부한 인도문명사(人道文明史)의 첫 개벽자로서 선천 문명의 조종(祖宗)이시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사실(史實)도 모른 채 뿌리를 잃어버리고 남의 조상을 꿔다가 믿으며 구원을 달라고 열렬히 노래 부르고 있는 선천 종교인들의 한심한 작태를 나무라신 것이다.
3절 282:3 내장산에 가시어 이 글을 쓰셨다는 말도 전해 온다.
8절 282:8 그 뒤. 1922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이곳이 제왕지지니라
1 상제님께서 얼마를 더 가시다가 문득 한 자리에 멈추어 서시더니 오른발로 땅을 힘껏 세 번을 구르시며 큰 소리로 외치시기를
2 “이곳이 제왕지지(帝王之地)니라! 여기서 왕이 나온다! 장차 여기에서 전무지후무지법(前無知後無知法)이 나오리라.
3 태전을 집을 삼고 인신합덕을 하리니 태전이 새 서울이 된다.” 하시고
4 또 말씀하시기를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이 아니라 오로봉전태전이니라.” 하시니라.
5 이 때 상제님께서 글 한 수를 읽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6 萬國活計南朝鮮이요 淸風明月金山寺라
만국활계남조선 청풍명월금산사
文明開化三千國이요 道術運通九萬里라
문명개화삼천국 도술운통구만리
만국을 살려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의 금산사로다.
가을의 새 문명은 삼천 나라로 열려 꽃피고
도술 문명의 대운은 우주 저 끝까지 통하리라.
7 이후 상제님께서 틈만 나면 이 노래를 부르시니 성도들도 따라서 종종 읊조리니라.
(증산도 道典 5:306)
제왕지지. 김천수 씨 외에 박공우 성도의 3대 제자 중 한 명인 전이진의 아들 전수재(1917∼ )도 부친과 함께 박공우 성도에게 직접 듣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2절 306:2 여기서 왕이 나온다. 차경석 성도의 재종 차봉수(1930∼ )의 증언. 차봉수는 이 공사에 참여했던 차순옥의 딸이다.
3절 306:3 태전이 새 서울. 박공우 성도 교단에서 평생을 바쳐 신앙한 아버지를 따라 일심신앙을 한 전수재 증언.
6절 306:6 남조선. 일찍이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리기 이전에 상제님께서 이미 남조선 도수로 갈라놓으시고 ‘남조선’이란 말을 즐겨 쓰셨다. 남조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환국-배달-조선-북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대진국·후(통일)신라-고려-조선-임시정부-대한민국(남북분단 시대)’으로 전개되어 온 국통의 맥을 인류사의 시각에서 보는 총체적인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6절 306:6 청풍명월금산사. 세운과 도운의 귀결처인 태전에서 의통 구호대 공사를 보며 내려 주신 시이다. 남조선 도수가 충청도 땅에서 매듭지어진다는 뜻이다. 박공우 성도를 아버지처럼 모신 김일화의 아들 김천수가 여러 차례 증언하였고 문공신 성도의 아들 문복환도 문공신 성도가 이 구절을 평생 노래하였음을 증언한 바 있다.
6절 306:6 증산도 안운산 종도사님은 해방 후 제2변 개창 당시 ‘건곤일실(乾坤一室)에 평화낙원(平和樂園)이라.’ 하시며 우주촌 일가 문명 건설의 운수를 말씀하신 바 있다.
똑똑히 들어 두어라
1 하루는 형렬이 상제님께서 출세하실 때를 여쭈니 “응.” 하시고 “나의 말을 듣기가 어렵다.” 하시며
2 “잦히고 눕히고 엎치고 뒤치고 들어치고 내치고 좌(左)로 돌리고 우(右)로 돌리고…, 알겠느냐? 똑똑히 들어 두어라.
3 내가 도솔천궁에 있다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으로 내려와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에 머물며 경주용담 구경하고
4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탄생하여 기해년에 포(胞)하고 경자년에 득천문(得天文)하고 신축년에 대원사에서 도통하고
5 임인년에 너와 상봉하고 계묘년 봄에 동곡에 들었노라.
6 나의 말은 쌀에서 뉘 가리기와 같으니라. 알아듣겠느냐?
7 알기 쉽고 알기 어렵고 두 가지다. 알아듣겠느냐?
8 우리 일은 쉽고도 어려운지라, 알고도 어렵고 모르고도 쉬우니라.
9 똑똑한 것이 병통이니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아는 것도 병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6:11)
도솔천궁. 미륵불이 머무시는 천상의 정토로 외원·내원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원궁은 보살들이 중생 교화를 위해 하생을 준비하는 곳이다. 상계의 하늘들은 너무나 고요하여 대개 다시 태어나 자비를 내려 하지 않으나 중생을 끝까지 교화하려는 보살들은 굳이 도솔천에 강생하여 법을 받으려 한다.
4절 11:4~5 ‘天開於子-地闢於丑-人起於寅-物生於卯’ 하는 천지의 개벽 시간대 원리에 맞추어 하신 말씀이다.
개벽 후 금산 일대는 아무도 살지 못하는 참배 성지
1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산사 황금대맥은 천지의 대용맥(大龍脈)이니 누구든지 가히 범접치 못하리라.” 하시니라.
2 상제님께서 구릿골 앞 큰 정자나무 밑에서 소풍하실 때 항상 금산 안과 용화동(龍華洞)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3 “이곳이 나의 기지(基址)라. 장차 꽃밭이 될 것이요, 이곳에 인성(人城)이 쌓이리라.” 하시고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니라.” 하시니라.
4 또 말씀하시기를 “천황지황인황후(天皇地皇人皇後)에 천하지대금산사(天下之大金山寺)라.” 하시니라.
5 하루는 성도들이 여쭈기를 “금산 산골짜기가 좁은 것 같사옵니다.” 하니
6 말씀하시기를 “장차 부(符) 한 장만 그려 신명에게 명하면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옮기고 땅을 개척하리라.” 하시고
7 산을 향해 막대기로 내리그으시며 “장차 제비산과 송장산을 세 번 불칼로 깎아야 하리니
8 제비산과 비재와 송장산은 발 한번 구르면 서해 바다로 나가느니라.” 하시니라.
9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서 동구를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저곳에 물이 차서 못이 되리라.
10 내가 출세할 때는 금산사로부터 물 찬 방죽 사이에는 너희들이 살지 못할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곳이 금암문이니라
11 또 하루는 구릿골 앞 금난바위(金生巖)를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12 “이곳이 금암문(金巖門)이니라. 이곳에서부터 금산사까지는 문(門) 안이요, 이곳에서 원평 쪽으로는 문 밖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7:77)
땅 탐하는 외공장을 징벌하심
1 상제님께서 금산사에서 여러 날 동안 머무르시며 공사를 행하시니라.
2 이 때 낙수동(洛水洞)의 한 외공장(外工匠)이 땅 탐을 많이 하더니 무슨 일로 자기 땅을 남에게 빼앗기게 생겼거늘
3 상제님께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며 도움을 청하니 “이놈아! 내가 네 얘기 해 주려고 생긴 사람이냐?” 하고 꾸짖으시니라.
4 외공장이 그래도 말씀을 기다리며 “선생님은 다 아시니 어찌하면 좋을지 좀 일러 주십시오.” 하니
5 “네 땅 가지고 네가 말하지 왜 날더러 말하라냐, 내 땅이간디?” 하시거늘
6 형렬이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 땅이라도 뺏기게 되면 뺏기는 것이니, 주고 싶으면 주지 물어볼 것 없소.
7 더 물어 보려 했다가는 당신 턱이 없어질 테니 그렇게 아시오.” 하니라.
8 이에 외공장이 형렬에게 눈을 흘기며 “내가 뭔 죄를 졌다고 당신 앞에서 굴복을 해야 하나?” 하니
9 상제님께서 이를 아시고 “야, 이놈아! 너는 늙었고 저이는 젊다고 그렇게 말하느냐? 네놈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하고 호통치시거늘
10 순간 외공장의 목이 뚝 떨어져 금산사 문지기의 머리 위에 가서 붙는지라
11 문지기가 목이 아파서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니 상제님께서 “문지기가 막대기인 줄 알았더니 사람이더냐?” 하시고
12 외공장의 목을 작대기에 꿰어 금산사 입구에 세워 놓으시니라.
(증산도 道典 9:40)
외공장. 조선시대에 지방 관아에 소속되어 필요시 무상으로 공역에 종사하여 지방 특산물이나 진상품을 납품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공장세를 물고 자유롭게 수공업을 했던 장인.
나를 보고 싶거든
1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무 악하여 몸둘 곳이 없으므로 장차 깊이 숨으려 하니 어디가 좋겠느냐?” 하시니
2 채사윤은 “내장사(內藏寺)로 가심이 좋겠습니다.” 하고
3 신원일은 “부안 변산(扶安 邊山)의 내소사(來蘇寺)로 가심이 좋겠습니다.” 하거늘
4 상제님께서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시더니 잠시 후에 “나는 금산사에 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하시니라.
5 또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륵이니라. 금산사 미륵은 여의주를 손에 들었거니와 나는 입에 물었노라.” 하시고
6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
7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六丈)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0:33)
내장사. 전북 정읍시 내장산에 있으며 백제 무왕 37년(636)에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칭했다. 그간 여러 차례의 수난으로 정확한 연혁을 알기가 어렵다.
3절 33:3 내소사.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남단에 있는 절. 백제 무왕 33년(633)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지었다. 본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이며 내소사라 불리운 것은 19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4절 33:4 불양답. 절에 딸린 논밭.
7절 33:7 육장 반. 1장(一丈)은 여섯 자(六尺). 태모님께서 미륵전에 가시어 요강의 오줌을 부은 지 6년 6개월이 지난 갑술(1934)년 3월 9일 밤에 미륵전에 원인 모를 불이 나 미륵불이 타 버리고 무인(1938)년 9월 3일 지금의 미륵불상을 39척 높이로 다시 조성했다. 11편 375장 참조.
태모님은 내원궁 법륜보살
1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산사 미륵전 남쪽 보처불(補處佛)은 삼십삼천(三十三天) 내원궁 법륜보살(內院宮 法輪菩薩)이니, 이 세상에 고씨(高氏)인 나로 왔느니라.
2 내가 법륜보살로 있을 때 상제님과 정(定)한 인연으로 후천 오만년 선경세계를 창건하기로 굳게 서약하고
3 세상의 운로에 맞춰 이 세상과 억조창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상제님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왔느니라.” 하시니라.
수부, 잘 만났구나
4 이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에 오려고 모악산 산신으로 내려와 있던 중에, 상제님께서 오시기에 금산 미륵불로 인도하고 시종하다가
5 상제님께서 개 구(狗) 자 아홉 드는 구구지(九狗地)의 중앙인 시루산 아래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나시기로
6 나는 9년 만에 담양땅 고씨문(高氏門)에 태어나서 신씨와 인연타가 상부(喪夫)를 당한 후에
7 수부공사(首婦公事)로 상제님과 만났을 적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8 ‘나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노라. 수부, 잘 만났구나. 만날 사람 만났으니 오죽이나 좋을쏘냐.’ 하셨느니라.” 하시니라.
9 또 말씀하시기를 “뇌성(雷聲)은 백 리를 가고, 지동(地動)은 천 리를 가고, 번개는 천하를 비치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11:20)
남쪽 보처불에 대해서는 공통되게 태모님으로 나오는데 북쪽 보처불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어 기록하지 않았다.
1절 20:1 법륜보살. 내원궁 법륜보살로 계셨다는 말씀을 듣고 성도들이 태모님의 성호를 법륜당(法輪堂)이라 하였다.
5절 20:5 구구지의 중앙. ‘미륵구지’를 말함.
8절 20:8 제주 번개를 잡아 쓰노라. 태모님의 성씨가 본래 제주 고씨다. 이 말씀은 상제님께서 당신의 종통 계승자로 고수부님을 택하셨다는 뜻이다.
상제님의 성령이 미륵전을 떠나셨느니라
1 21일에 태모님께서 성도들에게 명하여 “가마를 대령하라.” 하시고 “요강을 실으라.” 하신 다음
2 고찬홍, 전준엽, 이근목 등 성도 10여 명을 데리고 금산사로 행차하시니라.
3 금산사에 당도하여 미륵전에서 치성을 올리신 뒤에 대중을 향해 큰 소리로 선언하시기를 “상제님의 성령이 이제 미륵전을 떠나셨느니라.” 하시고
4 성도들에게 “요강 가져오너라.” 하시니 금산사 중들이 거세게 만류하는지라
5 이에 크게 호통치시니 중들이 꼼짝을 못하거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륵전 법당 안에서 요강에 오줌을 누시어
6 근목에게 그 요강을 주시며 이르시기를 “저 미륵에게 끼얹어라. 헛것이니라.” 하시니라.
7 근목이 깜짝 놀라 당황하며 감히 행하지 못하거늘 태모님께서 성화같이 독촉을 하시는지라
8 근목이 할 수 없이 요강을 들고 다가가다가 짐짓 넘어지는 체하며 미륵전 마룻바닥에 오줌을 엎질러 버리니라.
9 태모님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너희는 여기다 절도 하지 말고 오지도 마라. 허상이니라.” 하시고
10 대적광전으로 가시어 석가불에게 이르시기를 “너 어찌 여지껏 있느냐. 빨리 가거라.” 하시며 담뱃대로 석가불상의 머리를 때리시니라.
(증산도 道典 11:178)
이 공사를 보신 후 갑술(道紀 64, 1934)년에 미륵불상이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조성되었다. 11편 375장 참조.
금산사 미륵불 화재 사건
1 이 달 9일 밤에 금산사 미륵전에서 불공을 드리던 사람들이 실수하여 육장(六丈)의 미륵불상에 화재가 일어나니라.
2 오금해(吳錦海)가 구릿골에서 그 화광(火光)을 보고 금산사가 모두 불타 없어지는 줄 알았더니
3 좌우에 시립한 보처 보살과 미륵전은 그슬리지 않고, 가운데에 서 있는 미륵불만 불에 타서 왼쪽으로 넘어졌더라.
4 그 뒤 미륵불을 다시 조성할 때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금산사 건너편에 있는 청련암(靑蓮庵)에 큰 은행나무가 있으니 그 나무로 목불을 조성함이 좋을 것이라.’ 하거늘
5 금산사 주지 황성렬(黃成烈)이 청련암에 건너가 살펴보니 그만하면 됨직하여 얼마 후 그 은행나무를 베어 와서 자로 재어 보매 그 길이가 39척(尺)이더라.
6 이에 장공 김복진(金復鎭)이 조각을 시작한 지 2년 9개월 만에 완성하여 무인(戊寅 : 道紀 68, 1938)년 9월 3일에 육장 반(六丈半)의 미륵불을 모시거늘
7 이로써 일찍이 상제님께서 “금산사 미륵불은 육장이나 나는 육장 반으로 오리라.” 하신 말씀이 응험되니라.
(증산도 道典 11:375)
오금해(吳錦海, ?~?). 금산사의 승려로 상제님의 시중을 들었던 인물이다. 2편 14장 본문 및 측주 참조.
4절 375:4 미륵불. 옥내 입불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39척(11.82m)이다. 귀의 크기만 다섯 뼘이나 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서울에서 만들어 트럭으로 날랐다. 석고로 만든 불상이 거대하여 청련암에서 잘라 온 은행나무를 뼈대로 받치고 불상을 세웠다.
6절 375:6 김복진(金復鎭, 1901∼1940). 한국의 근대 조각가. 호 정관(井觀). 충북 청원 출생.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였고 최초로 서양 조각을 한국 화단에 도입하였다.
김경학 성도 등의 수련 공부를 돌봐 주심
1 9월 7일에 김경학(金京學)과 김영학(金永學)이 태모님을 찾아와 뵙고 여쭈기를
2 “저희들이 모악산 수왕암(水王庵)에서 수련을 행하던 중에 상제님의 성령이 나타나시어 수십 년 동안 사모님과 막혀 지낸 것을 꾸짖으시고
3 ‘이 길로 가서 너희들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지난 모든 일을 풀고 이전 정의(情誼)를 다시 계속하지 않으면 화(禍)가 있으리라.’ 하고 말씀하시므로
4 저희 두 사람이 일동을 대표하여 왔사오니 저희들의 이전 과실을 깊이 용서하시고 함께 가시어 앞으로 사흘 동안 수련 법석(法席)을 주재하여 주옵소서.” 하며 회오(悔悟)의 눈물을 흘리는지라
5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난 일은 한갓 꿈과 같을 뿐이나 칠십 노인이 멀리 와서 이렇듯 간곡히 말하니 내가 비록 건강이 허락지 않을지라도 멀리할 수 없노라.” 하시고 두 사람과 함께 수왕암에 가시니라.
6 이 때 박공우가 주창(主唱)하여 김경학, 김영학, 이성영, 김수응, 이중성(李重盛) 내외 등이 모여서 수련 공부를 하는데
7 태모님께서 공부를 주재하시매 김수응이 신력을 얻어 풍운조화를 자유자재로 일으키니라.
사람을 잘 맞아들이라
8 사흘 뒤 공부가 파하매 태모님께서 11일에 금산사에 들르셨다가 용화동에 이르시어 이틀 동안 머무르시며
9 상호와 성영을 불러 명하시기를 “개사한 영정이 많이 틀렸으니 다시 개사하라.” 하시니라.
10 또 오성산에서 오실 때 가져오신 용봉기(龍鳳旗)를 꺼내어 손수 꽂아 놓으시고 일러 말씀하시기를
11 “이 자리는 용화세존(龍華世尊)의 꽃밭이 되리니 사람을 잘 맞아들여야 하느니라.” 하시고
12 13일에 용화동을 떠나 오성산 도장으로 돌아오시니라.
(증산도 道典 11:384)
이중성(李重盛, 1897∼1958). 이중성은 도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때 둘째 딸을 낳은 지 3일 만에 아내와 함께 수련 공부에 참석하였다.(이중성의 딸이자 박공우 성도의 자부인 이옥수 증언) 자녀들이 태을주를 하루에 3천 독씩 염주를 돌리면서 안 읽으면 굶겼으며, 자신이 태을주를 읽다가 깜빡 잠이라도 들면 깨어나서 ‘나 자는 사이에 나보다 더 읽은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땅을 쳤다고 한다. 박공우 성도와 사돈을 맺은 것도 상제님께서 박공우 성도에게 의통을 전수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0절 384:10 전선필 성도와 사제지의를 맺은 김경도(金京道)가 쓴 『대순전경』에 있는 내용.
신교총화(神敎叢話)
今人身爲惡, 而祈福于物象, 何福之有! 可愧者, 此也 修道者之行, 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而已
수도자의 행실은 남이 안 보는 데에서도 언행을 삼가해서 양심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만 하나니라.
後天井有萬二千道, 有萬二千人 人能日行萬里, 飛揚天地如鳶飛, 處處生不夜城, 然後眞正大敎主出矣
후천 벽두에 1만 2천 명의 도인이 출세한다. 이때에는 사람마다 하루에 만리를 가는데 천지를 날아다니는 것이 솔개가 하늘을 나는 모양 같다. 곳곳에 사람 사는 모습은 밤이 없는 성[不夜城]과 같다. 이러한 대문명이 열린 후에 참되고 올바른[眞正] 세계통일의 대교주(大敎主)가 출세하리라.
우리 동방(東方)은 인목(寅木)이다. 임(壬)은 곧 북방 수(水)로서 수생목(水生木)하는 천지의 생성원리 때문이다. 단군 임검의 도(道)는 반드시 임성인(壬年)에 태어나는 인물이 먼저 이끌어 갈 것이라.(『신교총화』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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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륵금상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오훗길 행복한 시간 되세요
네, 감사합니다.
쇠시루 위에 앉으신 부처님을
처음알고 뵈었네요/불자는 아니지만 신비롭네요!
네,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