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분은 누구신가요? 유관순, 안중근 등이 생각이 나는데 이번에 해외에서 노력하신 독립운동가인 헤이그 특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종이 헤이그에 비밀리에 파견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네덜란드로 향했다.
이들은 평화회의에 참가할 자격을 얻기 위해 활동을 했다. 의장인 넬리도프를 만났지만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에게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과 발원권을 거부했다. 이 특사 일행은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실채했다. 하는 수 없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뒤, 그 것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했다. 특사들은 7월 9일, 영국의 유명한 언론인이 자심이 책임지는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 참석하고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외국에를 잘하는 이위종이 세계에 언론인에게 한국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리고 주권 회복의 도움을 받기 위해 관객에 공감을 샀다. 결국, 한국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만장일치를 하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끝내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 하자 답답하고 걱정을 가진 이준은 7월 14일에 순국하게 되었다.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것은 실패했지만 세계 강국에게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또, 일제의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것을 최초로 알린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글을 보니 역사에 더 관심이 가지 않나요? 일제의 저항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분들이 더 자랑스럽게 느껴지네요.^^
이준, 이위종, 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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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 평화 회의[萬國平和會議]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Hague Convention of 1899/Hague Convention of 1907)
1899년과 1907년에 헤이그에서 개최되어 군비 축소, 전쟁에 관한 규칙, 평화 유지 방안을 논의했던 국제회의.
제1차 회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1918)의 제창으로 1899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총 26개국 대표가 참석하였고,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조약’에 합의했다. 그 결과 1901년에 국제중재재판소가 헤이그에 설치되었다.
제2차 회의
미국 대통령 테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의 제안으로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총 44개국 대표가 참석하였고, 전쟁에 관한 규칙과 중립 및 중재에 관한 내용 등을 담은 13개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3.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① 을사늑약의 무효와 ②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1907년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를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대한제국 특사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특사들은 현지 언론을 대상으로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고발하였다. 한편 이준은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현지에서 사망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純宗, 재위 1907~1910)을 즉위시켰다.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고하는 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에 의해 헤이그 평화 회의 대표로 파견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 전 상트 페테르부르크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의 전 서기관 이위종(李瑋鍾)은 존경하는 각하 제위들에게 우리나라 독립이 1884년 여러 강대국에 보장⋅승인되었음을 주지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독립은 현재까지도 귀 국가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상설은 일본이 완전히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와 여러분들 나라와의 사이에 오늘날까지도 유지되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강제적으로 단절하고자 했던 그 음모를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 폭력으로 위협함은 물론, 인권과 국법을 침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의 소행을 각하 제위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보다 명료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규탄 이유를 아래 3가지 경우로 나누어 진술하고자 합니다.
1.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정식 허가 없이 행동하였다. 2.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했다. 3.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국법과 관례를 무시한 채 행동했다.
각하 제위께서 공명정대함으로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사실이 국제 협약에 명백히 위반되었는지 여부를 판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와 우방 국가 사이에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독립국가인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단절케 되고 극동 평화를 끊임없이 위협하도록 방임할 수 있겠습니까?
본인들은 황제 폐하로부터 파견된 대한제국의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떠나 오던 날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취해진 모든 수단과 자행된 행위들을 요약하여 본 서한에 첨부하오니, 우리 조국을 위하여 지극히 중대한 본 문제에 호의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전권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각하 제위들의 요청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과 여러 국가 간의 외교 관계 단절은 한국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나라의 권리를 침해한 결과라는 점에 비추어, 우리는 각하 제위들께 우리가 헤이그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인들의 수단과 방법을 폭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도록 대표 여러분들의 호의적인 중재를 허용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먼저 감사드리오며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서명 이상설 서명 이준 서명 이위종 『나라사랑』20집, 1975
이 사료는 1907년(대한제국 융희 1년) 7월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 특사로 참석한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준(李儁, 1859~1907)⋅이위종(李瑋鍾, 1887~?) 등이 일본의 공작으로 평화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일제의 폭압적인 한국 침략과 부당한 을사늑약의 무효함을 알리고자 작성한 글이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해외 주재 공관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그 불법성을 비밀리에 알렸다. 제2차 만국 평화 회의는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에 따른 분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1899년(광무 3년)에 개최된 제1차 회의에 이은 것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개최되었다.
밀사인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구성은 의미 있는 조합이었다. 이상설은 을사조약 강제 체결 당시를 목격한 인물이었고, 이준은 법률가로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설파할 수 있었으며, 이위종은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통역관이었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대한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었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명의 특사는 제2차 만국 평화 회의 본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와 을사조약을 특별히 문제 삼지 않던 열강들의 무관심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의를 취재하던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각국 기자들은 세 명의 대한제국 특사 활동을 언론에 보도하였다. 특히 영국인으로 평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스테드(William Thomas Stead)의 전폭적인 지지로 6월 30일자 〈만국 평화 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에 세 명의 특사가 연명한 「공고사(控告詞, 고하는 글)」를 게재할 수 있었다.
글에서 밀사들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 특히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 불법성을 규탄하였으며,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협조를 정당히 요구하였다. 첨부된 문서에는 일본이 을사늑약을 어떻게 강제하였는지, 그리고 한국인이 여기에 어떻게 저항하였는지를 밝혔다.
7월 8일 기자협회는 국제협회 건물로 세 명의 특사를 연사로 초대하였다. 여기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일본의 부당한 침략과 을사늑약의 파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강렬한 열망을 담은 이 연설은 회합에 참석한 각국 대표와 배석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결의문이 만장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이위종의 연설 내용은 바로 다음 날인 9일 〈헤이그 신보(Haagsche Courant)〉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참석은 끝내 좌절되었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을 얻어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로 돌아와 이준의 장례를 치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 파견 사실을 알고는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이완용(李完用, 1858~1926)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하였다. 8일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이완용⋅송병준(宋秉畯, 1858~1925) 등으로 하여금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하였다. 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純宗, 1874~1926)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려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고 정미 7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 놓게 되었다. 통감부는 밀사 세 명에게 결석재판 형식으로 이상설에는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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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종은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자 했다. 특사에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헐버트를 은밀히 따로 불러 특명을 전달했다. 제4특사였던 그는 전방위 감시망을 따돌리고 극비리에 헤이그로 가서 대한제국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한편 헐버트가 일제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세 분 특사들은 무난히 헤이그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1907년 7월, 헐버트는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사실상 추방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그곳에서 서재필, 박용만, 이승만 등 미주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의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했다. 그는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고,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했다.
헐버트의 한글 사랑은 극진했다. 그는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내는 힘의 일관성에서 한글보다 우수한 문자는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한글, 이두, 한문’을 비교한 논문인 <이두, ITU>를 발표하면서 세종을 가리켜 고대의 ‘알파벳 문자’를 발명했다는 페니키아인에 못지않은 문자 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이 논문에서 ‘이보다 더 간단하게, 이보다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시스템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설은 1907년 7월 5일 회의장에서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1907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
이상설과 함께 초청됐다. 이 자리에서는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을 해 주목받았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위기를 공론화하고 구미 언론에서 이 문제를 보도하게 만드는 성과는 있었으나 끝내 공식 회의 석상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이준이 순국하자 헤이그 니우 에이컨 다위넌(Nieuw Eiken Duinen)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트집잡혀 강제 퇴위당했으며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한 뒤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덴버 등을 순방하며 한인 교포를 결속시키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 동지 대표회에 연해주 한인 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러시아-만주 국경 지방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했다.
이어 1910년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는데
퇴위당한 고종에게도 13도의군의 편성을 상주하고 도총재 유인석과 함께 고종 망명을 시도했다.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 합병 반대 운동을 전개했는데 독립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고 미국, 러시아, 청나라 등에
기후가 온화한 니콜스크우수리스키로 옮겼지만 끝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이상설의 임종을 지켰던 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이상설의 유언대로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이상설의 유해를 화장했으며 문고와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살라 바다에 날렸다.
다음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
일평생을 실패만 반복하고 산 사람인데 젊어서는 공직에 출사했으나 곧 나라가 망했고 헤이그 특사 사건은 회의 참석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동료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하기까지 했다.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열었지만 다음 해 일제가 간판을 떼버렸고 성명회와 권업회는 동맹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제정 러시아 당국이 뭉개버렸다. 신한혁명당은 고종 망명 성공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됐고 결국 48세에 만리 타국 추운 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야말로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에 분사(憤死)한 것. 그의 일생을 생각하면 이상설의 유언은 서리서리 맺힌 한과 비애가 느껴진다.
이 와중에 이위종은 우연히 세 특사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의 눈에 띠어
1907년 7월 5일자 <만국평화회의보>에 대서 특필된다.
이 신문은 당시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모인 와중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던 매체로
이위종은 이 인터뷰에서 직설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한다.
위 인터뷰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되는데
이것이 기회로 연결되어 4일 후인 1907년 7월 9일 세 특사는 각국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 초청받는다.
이위종은 이 자리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코리아의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펼치는데 이 연설문 전문은 윌리엄 스테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고[10]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시민 활동가들을 상대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듯하다.
이위종은 현지 언론에 '대한 제국의 왕자' 쯤으로 소개되는데 물론 이위종이 전주 이씨이기는 한데
이미 조선 초에 왕통에서 갈라져나온 방계인 광평대군파다.
1907년 7월 11일 이위종은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러시아로 떠난다.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죽음을 맞자 이위종은 1907년 7월 18일 헤이그로 돌아왔으며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을 돕는 것으로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고, 짧은 생애 중 대부분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범진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도 제정 러시아의 연금을 받으며 공관을 버리고 아파트로 옮겨 여권 발급 등의 공사 업무를 계속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를 돕는 것도 주요한 일이었는데 수입원이 없어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받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신한촌 등에 자금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인 신문 창간 등을 주장하고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 연해주에서 크게 활약했던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과 형제였는데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이범윤과 이위종은 당시 일본의 항의를 받아 연해주 일대의 한인 사회를 감시하던 러시아 측의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1908년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이 들려준 군자금 1만 루블을 들고 장인 놀켄 남작[14]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한다.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리더 격으로 부상한 최재형과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중심으로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 조직이 구성되었는데 이위종은 자금 지원과 함께 이 조직의 회장으로 중심적인 활약을 한다.
1908년 7월 함경북도회령과 경성 등지로 진출하기도 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경찰부장은 이위종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끈질기던 이범진도 경술국치 소식에 끝내는 탈진했는지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단 채 권총을 쏘아 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