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사랑은 계약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형제들이 많이 묻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가 그리스도교 국가냐는 거다. 수도원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수많은 빨간 십자가를 보고 하는 질문이다. 천주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제자로 충실히 산다면 우리나라는 이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였을 거다. 있는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명 중 하나만 있어도 그 공동체는 밝고 따뜻하고 평화로울 거다.
오늘 둘째 독서에서 요한은 성령께 사로잡혀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았다고 한다. 그곳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보석처럼 빛나고 수정처럼 맑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 성전은 없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덕분에 더 이상 하느님을 만나고 예배드리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게 됐다. 그분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우리 마음속에 계셔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과 은밀하게 단둘이 만나 대화하며 인격적 관계, 우정을 키워갈 수 있다. 하느님을 뵌 적은 없어도 그분이 주신 계명과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거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3-24) 이 말씀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고 계약이라는 게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은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거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게 다 뜬구름 잡는 소리이고 심약한 이들이나 하는 망상 같을 거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그분, 내 한계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우정을 나누고 나아가 하나가 되는 장소, 참된 성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다. 여기서는 사기도 있고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도 계약이 파기되기도 하지만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결코 그럴 일이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죄인과 맺은 계약으로 처음부터 불평등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먼저 제안 시작하셨고, 죄인은 본래 불성실해도 하느님은 이랬다저랬다 할 수 없는 분이다. 묵시록에서 요한이 ‘성령에게 사로잡혔다는’(묵시 21,10) 건 그가 ‘그의 영으로 보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고 한다. 하느님, 하늘나라는 지극히 내적인 세상이라서 개인적이고 매우 은밀하다. 그런 탓에 주관적이거나 광신적 맹신적일 수 있는데, 계약 조건이 사랑이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게 될 위험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이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이 사랑을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가능하게 하신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니 그분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은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로마 8,26)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예수님을 감히 친구라고 부르고 대화할 수 있는 게 다 성령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버지, 예수님을 친구라는 부르는 건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색하고 쑥스러워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자주 고백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님께 모든 걸 말씀드린다.
예수님, 주님을 친구라고 부른다고 주님과 어떻게 맞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친근하게 주님을 부르며 대화하고 청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은 저에게 저보다 더 가까이 계신 줄 압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아드님께 가까이 가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