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imt, Gustav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다나에 1907 2.황금빛 입맞춤- Kiss 3.여자의 일생(유년,장년,노년)190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 - 1918, 오스트리아)
꽃들이 잔뜩 핀 벼랑 끝에 남녀가 서로를 껴안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그 감흥에 몰입해 있다. 여자의 손가락이 말려들어가는 모습에서 그 감흥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남녀 모두 금빛 찬란한 옷을 입었는데, 남자의 옷은 직사각형의 패턴으로 그 남성성을, 여자의 옷은 원형의 패턴으로 그 여성성을 각각 강조하고 있다. 금장식은 남녀의 옷에 그치치 않고 여자의 발뒤꿈치에서 남자의 어깨 부분까지 금빛후광을 형성하면서 화면전체가 밝게 빛나고 있다.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1순위에 오르는 그림들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이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 「키스」가 소장돼 있는 곳은 오스트리아 빈의 옛 궁전이다.
이 궁전은 18세기 오스만 터키와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영웅 오이겐 공의 여름 별궁이었던 곳으로, 바로크풍의 화려한 자태가 인상적인 건물이며 이 곳이 오스트리아 회화관과 중세 바로크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전시 되어있는 작품을 관람하던 젊은 연인들은 이 ‘키스’라는 작품이 발산하는 강력한 마력에 도취되어 스스럼없이 열정적인 키스신을 연출한다고 한다.
그의 여러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만큼 클림트는 여성을 사랑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다혈질이었고,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클림트는 옷을 갈아 입으려다 뇌일혈 발작으로 오른쪽 반신이 마비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과 그의 동생도 뇌일혈로 사망하였기에 클림트는 늘 자신도 그같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는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소망했지만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스페인 독감으로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를 추종하던 에곤 실레는 클림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비엔나종합병원의 지하실에서 죽은 그를 화폭에 담았다. 후에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만다
생전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클림트의 예술에는 곳곳마다 남녀간의 긴장과 갈등이 강렬하게 표현돼 있다.
그것은 클림트가 성장발달 과정상의 문제로 어머니로부터 정상적인 독립을 획득하지 못하고 어머니에 대한 고착과 퇴행성을 보여주었다는 문제의식 -자연히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심을 지니게 됐다고 하는 판단- 과, 유사 이래 전례없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현대의 격변기를 맞아 서양의 남성우월주의와 자유주의적 에고가 흔들리는 모습이 그의 예술에 특별히 진한울림으로 반영됐다는 사실 등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에밀리 플뢰게 부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다. 그 중 '미치 짐머만'은 클림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주었고, 마리아 우치키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두 여인 모두 첫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구스타프'라 지었다.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플라토닉한 구원의 연인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그는 이 무렵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다.
클림트 사후에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대신해 상속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클림트를 만날 당시 18살이었던 에밀리 플뢰게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생전의 클림트가 시시콜콜하게 일상적인 얘기나 적어 보낸 엽서 800여통만이 남겨졌다. 그러나 결국 에밀리 플뢰게는 죽은 클림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남겨진 유산을 분배해주는 역할을 했다.
가난하고 어두웠던 어린시절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비엔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보헤미아 출신의 동판조각사이자 금세공사였고, 모친인 안나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구스타프는 아들 셋, 딸 넷 중 장남이었는데, 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에른스트는 28세로 생을마감할 때까지 형을 도와 미술계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구스타프의 아버지 에른스트는 8세 때 양친을 따라 비엔나로 이주하여 동판 조각사가 되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은 탓인지 워낙 다혈질이었던 탓이었는지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종종 격노하여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클림트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녀와 막내딸을 잃은 양친은 남은 다섯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잘 길러보려 했지만 장남인 구스타프를 짐나지움(독일계 학제에서 짐나지움은 우리식으로 하자면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의 삶이 예정된 고등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슐레는 실업계 직업교육학교)에 입학시킨다.
이토록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1876년 '비엔나 장식미술학교'전문적인 미술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와 같이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며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가 비엔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화가로서 나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관습적인 주제를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리는 벽화가였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국립극장 장식, 피우메의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을 함께 해나갔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수상자가 되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1892년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이자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크가 젊은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하고, 그 얼마 뒤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에른스트 마저 뇌일혈로 사망하고 만다.
아직 한창 젊음을 구가해야 할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늘 공존하는 까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비판과 찬사 그리고 영광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클림트의 작품들이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 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 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 접어든 프랑스 등에서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고,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즈"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그 는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 시대"를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에게 있어서도 황금기였다. 그는 <다나에>, <여자의 일생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 조차도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femme fatale]인가? *팜므 파탈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타고난 여성. 따라서 팜므 파탈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남성 역시 팜므 파탈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남성을 압도하는 섬뜩한 매력과 강인한 흡인력 앞에서 남성은 끝내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 옮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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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
보리뱅이님......
역시 선배님...
Gustav Klimt /키스 명화 올리셨군요.
수고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보리뱅이님의 건강과 평안을 빕니다.
모리츠님 안녕 ..
비가 오는 흐린날입니다
지난밤 님의 댓글 포토뉴스에 올리신것 보고
답댓글 못드리고 바로 작업 들어갔습니다
글이 너무 빼곡하여 편집하여 올리고
작품그림 미처 다 못올리고 자리에 들어갔어요
동생이 와서 컴 끄라고 잔소리 군소리 다 하는 바람에..ㅎ
그렇게 두세시간 앉아 있어서 뭐 건강이 안조아졌다나.ㅎ
생각하는것은 좋은데 시어머니 따로없네요.
오늘아침도 눈치보며 이제야 산책좀 다녀와서
미처 못올린 작품 마져 올렸습니다
이만..
좋은날 되세요
무리 하지 마시구요.
꼭.꼭..
모든 예술작품들은 그 시대의 자화상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어린시절을 너무 불행하게 보내면 노후로 갈수록 삶이 윤택해져도
잠재되었던 배경이 살아나 결국... 연구결과가 있어요
인간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다는 설, 결코 무관하지 않아요
엑박의 이미지들 아쉽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보리뱅이님^^
구스타프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해설.
고맙습니다. 보리뱅이님.
무리하지 마시고 쉬엄쉬엄 하세요
공감도 하루 한편만 올립니다
집안일 매장일하며 무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이제 퇴행성관절로
일어나지 못하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보리뱅이님 고맙습니다
감사~
멋과 맛으로 고은 하루 즐거운 시간 행복하시고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