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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IS IS TOTAL WAR 원문보기 글쓴이: 젤레돈
죠몽시대...도구 재료에 따른 구분법인 삼시대 체계(석기-동기-철기)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에 들어가지만 일본은 이 시대를 자기들만의 명명법인 죠몽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야요이 시대의 경우도 초반부는 신석기 시대에 넣어야 하는데 문제는 죠몽시대와 야요이시대는 문화적으로 확실히 달라서 이 둘을 같은 신석기의 범주로 넣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왜 죠몽시대는 죠몽으로 불리는가? 그 이유는 사실 일본 최초의 과학적인 고고학 발굴인 1877년 에드워드 모스가 이끈 오오모리 패총(貝塚: 순수 한국말로는 조개무지라 불리고 패총은 일본식 한자어입니다. 하지만 용도가 조개무덤이 아닌 쓰레기장이라는 것에서 봤을 때 적절한 용어는 아닙니다.) 발굴에서 발견된 토기 파편들에서 새끼줄 무늬가 많이 나타났고[繩文:승문]의 일본식 발음인 죠몽에서 따와 이 토기가 나오는 시대를 죠몽이라고 일컬어지게 됩니다.
그 이후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되면서 특히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패총 발굴이 본격화되면서 죠몽인들의 과거를 많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참고로 패총 발굴은 지층과 달리 제대로 쌓인 층이 아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쓰레기를 버리던 곳이어서 발굴 자체가 엄청나게 힘듭니다)
물론 패총 이외에도 죠몽시대 주거지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럼 죠몽시대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현재 죠몽시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보통 죠몽토기의 제작이 된 시기로 보고 있는데 편년이 보통 기원전 13000년 또는 기원전 11000년까지 존재합니다.(보통 13000년 전은 너무 오래된 걸로 보고 있고 11000년이 맞을 것으로 봅니다)
즉 보통 다른 지역이 구석기 시대일 때 일본은 토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뜻하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진 토기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상당히 재밌는 것은 이 죠몽토기의 편년을 밝힌 것은 바로 1950년대에 라비에 의해 만들어진 탄소연대측정법이며 탄소연대측정법이 가장 큰 활약 중 하나로 꼽힐 정도입니다.
이는 상당히 고고학계에서 충격적이었는데 흔히 문화의 흐름은 중동에서 중국으로 흘러가 한반도-일본으로 갔는데 이 죠몽토기는 가장 오래되었고(당시 중동지역은 기원전 9600~6900년까지 무토기 신석기 시대)게다가 죠몽시대는 농경의 증거가 거의 희박한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토기를 만들었던 겁니다. 즉 국사 또는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토기=농경은 전혀 상관없다는 겁니다!!!(죠몽은 토기를 만들었지만 농경을 안하고 이와 반대로 중동지역은 아직 본격적인 농경시작은 아니지만 곡물 순화 단계가 나타나지만 토기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오모리현 산나이 마루야마(三內丸山)유적에서는 기원전 5500~4000년까지 무려 1500년간 정주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농경의 증거도 없습니다. 즉 농경=정주생활마저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물론 일본에서는 산다이 마루야마 인들은 식물 자원 중 80%를 먹으며 주식으로 삼은 밤의 경우 품종 개량한 흔적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을 농경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헌데 이런 현상은 일본만이 아닌 한국의 신석기에서도 확인되면서 결국 농경=토기제작=정주생활 공식은 우리의 상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고민을 가지게 되실 겁니다. 도대체 왜 토기를 만들었고 농경이 없는데 어떻게 정주생활이 가능한겨?? 그리고 거꾸로 이런 의문도 품게 될 겁니다. 농경이 없는데도 정주생활할 만큼 살만했으면 왜 농경을 시작한겨??
사실 이를 설명하려면 단순히 한국-일본고고학의 범주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말 그대로 범세계적인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여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고 특히 농경의 시작에 대한 미스터리는 근 30~50년이나 되는 논쟁 끝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설명을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이와 관련해서 주요 5개 이론으로 고든차일드의 오아시스 이론, 브레이드우드의 경사면이론, 빈포드의 인구압이론, 린도스의 자연적 진화이론, 헤이든의 계급적 연회이론 등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농경을 안하고도 정주생활을 할 정도로 살았고 토기를 만들게 되었나? 사실 이는 전세계적으로 구석기 후반 일본으로 치면 죠몽초창기에 나타나는 광역 혁명 즉 먹을 수 있는 생물종의 증가와 관련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이 당시는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했는데 죠몽 초창기에는 지금의 도쿄와 나고야가 해수면 아래 있었습니다)
즉 이전에는 잘 먹지 않았던(물론 안 먹은 것은 아니지만)작은 동물이 많아지고 많이 먹던 큰 동물들이 멸종하면서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 도구들이 발달했다.(산다이 마루야마 유적 동물뼈에서는 멧돼지-사슴보다 토끼-날다람쥐를 많이 먹었습니다)
게다가 패총의 연구결과 인류는 바다와 하천의 어폐류들을 먹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먹거리가 풍부해졌다(미야기현 사또가마 패총에서는 잠수병의 일종인 외이도 골종이 나타난 인골 다수 확인)
그리고 토기와 관련해서는 토기가 필요해진 이유는 다른 것보다. 도토리 자원을 이용하면서 부터인데 도토리는 적당한 열량을 가지고 있지만 탄닌 때문에 떫은 맛이납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인류는 토기를 만들어서 물에 도토리를 불려 탄닌을 제거하고 또한 도토리를 쿠키 형태로 만들어 먹기 위해서 토기를 사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실제로 일본과 한국의 토기 제작에 대한 이유는 농경보다는 도토리 가공과 관련이 있을 것 이라는게 현재 주류 이론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왜 일본에서 그렇게 일찍 토기를 제작했는지는 현재도 의문이고(물론 최근 10년 동안 아무르강 유역과 남중국에서 죠몽토기와 비슷한 시기의 토기가 나오고 중국 측 주장에 의하면 남중국에서 나온 토기가 죠몽토기보다 오래되었다고 합니다만 중국은 언제나 편년을 마음대로 올리니 그 신뢰성이 떨어져 패스~~현재 한반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일본학자들은 한반도에서도 계속 발굴을 하다보면 아무르-남중국-일본과 비슷한 시기의 토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죠몽시대의 농경 시작에 대해서도 지금도 논란이 많죠(최근에는 죠몽 중후기에도 수전도작은 아니지만 밭벼를 재배한 흔적이 나타나고 죠몽 후기~말기에는 수전도작이 나온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논란이 많습니다)
그럼 이 죠몽토기는 계속 똑같은 모양을 유지했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매번 국사시간에 신석기=빗살무늬토기만 배워서 한국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만 있는 줄 알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습니다.(게다가 오산리 유적 발굴로 인하여 시베리아 기원설도 틀렸습니다) 생각보다 한국 신석기 시대에는 융기문 토기, 압인문, 태선문, 이중구연 등 다양한 문양과 기형이 등장합니다. 이는 일본도 같은데 아래 사진을 보면
(시기는 일부러 뒤죽박죽으로 선생님이 해놨으니 저기에 적어 놓은 시기를 통해 보시길)
상당히 다양한 문양과 기형이 등장하며 솔직히 말하면 한국의 토기들과 비교하면 넘사벽일 정도로 화려합니다. 물론 화려한 문양과 장식을 단 토기가 20%정도면 대부분 단순한 모양이 80%를 차지하는데 이는 단순한 모양의 죠몽토기는 대부분 실생활 용기로 쓰여서 자주 불을 맞게 되고 이 때문에 자주 파기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이중에서 만기에 나오는 가메가오카식 토기는 일본 토호쿠 지방(동북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문양 디자인, 적색안료 채색, 부조 등의 제작기법으로 미술적-공예적으로 죠몽토기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하지만 이 이후에는 한국에서 들어온 무문토기가 지배하는 현실 ㅋㅋㅋ)
물론 토기 말고도 일본은 다양한 점토로 만든 물건들이 있는데 일례로 토우, 토판, 토제 귀걸이를 들 수 있습니다.
위에 메이가 들고 있는 토우는 일본내에서도 상당히 잘 알려진 토기로 외계인 같이 생겼죠 하지만 이 토기의 정식 이름은 차반기 토우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저 외계인 눈 같은 차반기는 에스키모 인들이 쓰는 목제 눈안경과 비슷해서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저 요상한 눈은 차반기 토우와 관련 있다고 봅니다.
(찰흙으로 만든 죠몽 토우 머리 과방에 있음)
그리고 일부 토우중에는 일부러 다리와 팔 등을 부러뜨린 흔적이 나타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은 아픈 부위의 부분을 떼어내서 주술적인 치료 효과를 보려는 것 같다고 합니다(생각해보면 좀 재밌는게 이런 의식이 훗날 가면 저주의식인데 당시는 치료의식 이었다는게 ㅋㅋㅋ)
토판은 어떤 용도인지 모르겠지만 어린아이의 발바닥이 찍혀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발견되는 것이 어른들의 묘로 생각되는 토광묘로 생각되는데 이는 먼저 죽은 아이를 추억하기 위해 남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토제 귀걸이의 기원은 사실 중국식 옥결(玦)과 비슷한 모양의 사문암으로 만든 귀걸이가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다만 이때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귀걸이로 사용했을 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귀걸이가 토제로 바뀌고 나중에는 원주형 귀걸이가 되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귀에 걸 수 있는 형태가 아니죠...그래서 최근 민족지학과 연계해서 해석해본 결과 이 귀걸이는 귓바퀴에 구멍을 뚫고 구멍을 넓혀서 그 구멍에 넣었던 걸고 생각합니다(귀 뚫는 것은 비교도 안되는 아픔이 ㅎㄷㄷ)
(그림을 보면 이해가 약간 될 것임 ㅋㅋㅋ)
물론 죠몽시대는 점토를 이용한 물건 이외에도 석기와 골기도 만들었습니다. 다만 약간 독특한 방식의 도구들이 좀 나오는데 일단 갈돌, 갈판이 한국과 중국과는 달리 약간 사각형의 갈판에 원기둥의 갈돌이 아닌 둥그런 갈돌에 원형의 갈판을 씁니다.
(왼쪽이 일본식 오른쪽이 한국과 중국식)
게다가 낚시바늘의 경우에도 한국과 같은 결합식 바늘뿐 아니라 일체형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옛 인디언들이 쓴 흑요석 검인 마쿠아휘틀 같은 흑요석 검도 등장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석기들은 한반도와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후기로 갈수록 투창보다 화살이 증가합니다.
주거지는 한반도와 비슷해서 반지하식 주거지 일명 한국에서 말하는 수혈식 주거지를 주를 이룹니다. 게다가 원거리 교역을 한 증거도 나오는데 위에서 언급한 산나이 마루야마 유적의 경우 비취옥을 니가타 현에서 수입하고 아키타 현에서 아스팔트를 수입했으며(아스팔트는 석촉의 접착제로 쓰였다고 함)심지어 오키나와산의 장식 조개도 수입을 했을 정도입니다.
풍습 중에는 특이하게도 발치(拔齒)가 있습니다. 현재 이 발치 풍습은 아무래도 여러 행사에서 뽑은 걸고 보이는데 주로 성인식에는 윗니 2개를 뽑고 결혼 후의 경우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은 아랫니 2개를 뽑고 그 마을에서 결혼한 자는 아래 아랫니를 포함해서 아래 앞니를 다 뽑았습니다(ㅎㄷㄷ) 하지만 몇몇 인골 중에는 너무나 많은 치아를 뽑은 경우도 있어서 아마 슬플 때도 뽑았던 것 같습니다.
무덤양식은 주로 토광묘가 주를 이루며(주로 한국-중국과는 달리 신전장 즉 몸을 패서 뭏는게 아니라 굴장 웅크려서 묻습니다)이외에 자갈을 토광 속 또는 밖에 배치한 배석묘, 석관묘 형식과 비슷한 석조석관묘, 토광묘 주위에 자갈을 둘러 쌓은 환상열석묘, 토기관묘(한반도 청동기 시대와 야요이 시대에 등장하는 옹관묘와는 다릅니다. 이 토기관묘는 실생활에 쓰는 토기를 그대로 씁니다), 버려진 집을 사용하는 폐옥묘, 몇 년 동안 살이 썩게 나두고 뼈만 추려 모아놓는 집골묘도 있습니다.
이중 환상열석묘는 아키타현의 대탕유적이 유명한데 만좌와 야중당 2개가 확인되며 이들은 단순한 집단묘가 아닌 모든 구성원이 묻히지 못하는 계급적 특성 지니는 걸로 보이며(참고로 마르크스 사관으로는 신석기 시대를 원시공산주의의 평등사회라고 하지만 실상 대부분 나라들의 신석기 유적을 살펴보면 이미 신석기 시대에 계층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야중당 중심부에서 만좌 중심부 보면 하지에 해가 뜨는 방향인데다. 시계의 12시, 3시, 6시, 9시 방향에 둥근 돌 설치하고 나머지 부분에는 세장방형 돌을 설치해서 이 조성목적도 공동묘지, 제사장, 해시계 등 여러 설이 나올 지경입니다.
또 토기관묘는 보통 훗날 옹관묘 시대에 나오는 결합식보다는 토기 하나만을 쓰며 어른의 토기관 구경이 어린이 토기관보다 작은데 이는 어린이는 토기에 바로 넣어서 묻지만 어른의 경우는 뼈를 추려서 넣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죠몽인들 풍습중에서는 식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맨 위에 나오는 오오모리 패총 발굴로 유명한 에드워드 모스가 처음 제기했고(골수 빼먹기 위해 뼈를 훼손한 흔적이 보인다는 의견)이에 대해서 스즈키라는 고고학자가 반대하며 인골 조사했는데...오히려 칼자국이 발견되면서 결국 죠몽인의 식인풍습을 인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식인에 대해서는 족외식인(보복적 성향이 강함)인지 족내식인(장례의식인 경우 많음)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갔고 이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족내식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죠몽시대를 정리해보면
1. 토기가 조낸 빨리 나왔어염 뿌뿡 그런데 농경은 상관 없어염 에헷~~생선 맛있어염 도토리 맛있어염~~~
2. 한반도의 토기와 비교하면 우월하게 잘 만들었음 에헴~~아 위에는 언급 안했는데 죠몽토기는 한반도 남부지역과 아무르 강 유역에서도 나올 정도로 교역이 됐어요(한반도 남부지역은 이외에도 일본에서 흑요석도 수입했음 그리고 일본에서도 한국 동물 뼈 등 발견)
3. 이외에도 토우와 토판도 나오는데 모두 여러 가지 의식 또는 아픈 기억이 있어염 ㅠ.ㅠ;;
4. 토제 원주형 귀걸이 한번 해보실분??
5. 석기들 중 일부는 좀 독특해요 그래도 대부분은 한반도와 비슷함
6. 원거리 교역도 했어요
7. 같이 멀쩡한 생니 뽑으실 분?
8. 무덤에서 약간 계층 분화가 나타나요
9. 맛있고 몸에 좋은 인간고기 우걱우걱
첫댓글 재밋다. 고고학에도 수십년 논쟁 중인 게 있네요.
오... 이렇고 저런 이야기이구만 =_=... page d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