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먹고 맴맴
이 글은 필자가 한국을 떠나기 전, 영양사로 재직하던
때의 에피소드를 담은 두 번째 글입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양사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주어진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빠르게 지나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늦게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무언가를 하고는 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음이 실로 안타까웠으나 하루하루를 소중히 아껴쓰는 것으로 대신 하였다. 나는 이십
대 청춘이 가진 최고의 선물인 젊음과 열정을 지닌 채 매일 맞닥뜨리는 다양한 삶이 가져다주는 감동과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양재동에 위치한 일동제약 본사에서 책임 영양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식수 인원은 300여 명, 주방장 외에
세 명의 조리보조 아줌마들, 수련중인 인턴 영양사와 나는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일동제약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사옥 빌딩으로 매우 쾌적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하 구내 식당은 특별히 직원들을 위한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아름답고 편안하게 꾸며져 있어 인기가 많았다. 채광창을 통하여
쏟아지는 은은한 태양빛과 분수의 시원한 물줄기는 충분히 우리에게 무한한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었고 까페에서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듯 매일 싱그러운
느낌을 갖게 하였다.
때는 여름,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 예보에 맞추어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심 배식할 음식을 대강 준비해놓고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어이, 방배! 이 꼬추 잠
하나 먹어보소. 시골서 곰방 따가꼬 왔단 말이시.”
아줌마들 중에서 제일 연장자인 성남 아줌마의 권유였다. 그들은 이름을
부를 적에는 각 자의 동네 이름을 가져다 불렀다. “자기네들끼리만 먹을 참이여?! 의리없이 말이야.” 입맛을 다시며
냉큼 주방장이 다가 들었다.
“앗따, 그라믄 안되제! 우리 대장인디. 맛 잠 보소. 마포도 얼른
한 술 뜨고. 그라고 우리 선상들도 많이 먹소!”
“거시기, 괜찮을랑가?! 아가씨들이
꼬추맛을 봐도 될랑가 몰러.” 순간 방배 아줌마의 우스개 소리에 모두들 배꼽을 쥐었다. 나는 그런
아줌마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나보다 어린 인턴 영양사를 돌아다보았다. 이미 오선생의 양 볼은 발그레했다. 나는 식욕이
동하지 않았으나 성의를 생각해서 제일 조그만 풋고추를 쌈장에 찍었다. 첫 맛이 톡 쏘는 것이 엄청 맵게 느껴져 씹지않고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후식으로
커피를 준비했다. 고된 일을 하는 식구들을 위하여 식후의 커피만큼은 늘 내가 준비하였다. 그들은 정성어린
나의 서비스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하루의 시작을 즐겁게 출발하는 거였다.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는데 순간적인 통증이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집무실로 돌아와
책상앞에 앉는데 더욱 강한 통증이 위장을 파도처럼 덮쳤다. 화장실이라도 가 볼 요량으로 일어서는데 오선생이 들어오다말고 나를 보더니 기겁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저 아무말도 못하고 허공에다 손만 내저었다. 복도벽을 짚으며
한 발자국씩 화장실로 향하던 나는 다시 뒤로 돌아섰다. 너무나 강렬한
통증과 함께 수족이 떨리고 온 몸에서 식은땀이 돋고 눈 앞이 노랗게 흐려왔다. 가까스로 사무실
문 앞에 당도한 나는 그만 단말마를 내뱉고 쓰러지고 말았다. 인턴은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곧 이어 주방
식구들이 달려와 쓰러진 나를 일으켜 소파에 눕히고 마사지를 한다, 미음을 먹인다며 한바탕 부산을 떨어댔다. 가운을 입은
그대로 약국으로 내달았던 오선생은 급성 위경련이라는 약사의 처방약과 함께 주의 사항을 전달해주었다. 아마도 매운
고추를 뱉지않고 그냥 삼킨데다 빈 속에 마신 커피때문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식구들의 정성으로
미음과 약을 먹고 얼마간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통증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시간을 보니
점심 배식할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메뉴는 새로 선보이는 것이라 은근히 걱정이 일었다. 주방으로 나가니
모두들 바쁜 와중에도 한마디씩 챙겼다. ‘영양밥’이라는 신메뉴는 수삼, 대추, 버섯, 소고기, 잣, 밤등을 넣고
쌀과 함께 밥을 지어 양념장에 비벼 먹는 것이었다. 모두들 자신만만한 얼굴들이어서 준비한 메뉴를 따로 체크하지 않았다. 이윽고 배식
시간이었다.
직원들이 저마다 식권을 들고 줄을 서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식당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테이블에 놓여진 반찬들을 살피던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밥솥
뚜껑을 들고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성남 아줌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 황급히 배식대로
가보니 영양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생쌀만이 가득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니
새삼 가라앉았던 통증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듯 했다. 부랴부랴 줄을
선 직원들에게 양해의 코멘트를 남기고 총무과로 부리나케 달음질쳤다. 식당 담당자를
만나 사정을 말하고 점심 시간을 연장받았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나는 탈진한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시골 친정에서
가져왔다는 그 말썽많은 고추는 참으로 여러 사람을 울려댔다. 기막힌 꼬추맛(?)을 본 성남 아줌마는 아예 밥솥의 스위치를 누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일동제약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구내방송을 통하여 전 직원의 점심시간을 한 시간 뒤로 연기하였고 모든 직원들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각 자의 위치로 돌아가 업무를
보았다. 더군다나 비서실을 통해 구내 식당을 이용하던 사장단과 임원진들이 사전 예고도 없이 외국 손님들을 대동하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주방은 흡사 폭격을 맞은 듯 아수라 장이었다. 특정 식품에 대한 알러지가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그 와중에 없는 요리까지 만들어내느라 모두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희귀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식사를 끝마치고 사장은 몹시 미안해하는 얼굴로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왁자지껄 식당문을 나서는 그들의 등 뒤에 대고 성남 아줌마는 장난스럽게 한 마디 덧붙였다.
“앗따, 쬐깨 그 꼬추들을
좀 맛보라고 할 것인디 그랬어!” 그 말을 들은 우리 모두는 일제히 고개를 들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으악!” “아줌마!!” “안돼욧!!” “그만!!!”
그런 우리들의 머리 위로 언제나왔는지 태양이 환히 웃으며 포근하게 쏟아졌다.
첫댓글 7월 26일자 밴쿠버 중앙일보 [문학가산책]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