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다듬지도 않고 많은 인용을 한것이라 따로 정리를 해야 할 글들입니다.... 저는 초안을 질펀하게 어질러 놓고 찬찬히 다시 치우지요... 이제 막 생각한 글 1부가 끝나는 것 같네요.... 다음 달은 추석도 있지만 도서관 강의도 연이어 있어서 글 맥이 또 끊길 것입니다..... 잘들 지내세요.... 재충전까지....
글 제목 : 부동산 잡설 행상
지은이: 조성원
1부: 서울공화국 부동산 불패 그 서막은
2부: 진화의 땅 안양 30년
3부: 구즉 마을의 송강동 별곡
머리말
차례
1부: 서울공화국 부동산 불패 그 서막은
1. 세상이 야속타는 것은
2. 마당 깊은 집
3. 가난의 대명사 판자촌 그리고 달동네
4. 연료( 연탄가스)
5. 쥐잡기 운동
6. 전기 (110볼트 선풍기)
7. 쌀 (고봉의 흰 쌀밥과 통일 벼 )
8. 서울은 만원이다.
9. 서울에는 서울 사람이 시골에는 시골사람이
10. 한강의 기적과 빈민 항쟁
11. 성남시 단대리
12.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13. 나는 모래섬, 율도
14. 여의도가 서울의 섬인가
15. 마포종점
16. 강남 불패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17. 반포 압구정 그리고 잠실
18. 잡설 1부 총론 (쓸까말까 고민 중)
13. 나는 모래섬, 율도
나는 가벼운 모래섬. 나도 여직 그렇게 알고 살았으니.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야. 매년 불어난 모래가 태산아래 닿았으니. 감히 나는 태산 아래라고 했다. 고릿적 내가 또 그랬으니까. 이래봐도 나는 단단한 암반층을 기반으로 생겨난 존재. 침식작용으로 생긴 크고 작은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절벽이 내 모습이었다면 믿을텐가. 믿거나말거나 그 시절 ‘작은 해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 또한 아름다웠지. 지금은 어떠냐고. 1999년 8월 10일 자연생태계보전지역이라는 명함이 생긴 이래 줄곧 버드나무와 물쑥, 갈풀, 물억새 등 194종의 식물과 흰꼬리수리, 해오라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꿩, 붉은머리오목눈이, 까치 등등 77종의 조류가 나를 지키니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그래도 알아 줄만한 존재가 아닌가말이야.
나를 우습게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야. 뿌리 깊은 역사가 바로 나거든. 조선왕조실록 태종1년인 1401년 기사에서 ‘부평부(富平府) 율도(栗島)의 돌이 저절로 6백 70척(尺)이나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1척이 대략 30센티미터니까 요즘의 미터법으로 치면 율도에 있던 돌 하나가 저절로 약 200미터 이상 움직였다는 기록이 아니겠는가. 태종 1년이면 조선이 막 태동했을 때니까, 이는 백성들에게 상서로운 움직임이 나였음을 알려주는 예시가 아닌가.
기록에서 보듯 내 이름은 바로 율도, 예전엔 사람도 살았다. 고려시대 후기. 죄인들이 귀양을 와 본격 정착한 뒤 이후 뽕나무 주산지로, 배 만드는 기술자들의 터전으로 거듭 변신을 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에 대한 기록이 수십 번도 더 등장하는데 뭐 그쯤 내 명성도 자자했다는 말씀, 대부분이 양잠에 대한 기사, 세종 5년인 1423년의 기사를 한 번 볼까?
<‘잠실 별좌(蠶室別坐)인 대호군(大護軍) 이사흠(李士欽)과 전(前) 지군사(知郡事) 서계릉(徐係陵) 등이 계하기를, “경복궁(景福宮) 안의 뽕나무 3천 5백 90주(株)와 창덕궁(昌德宮) 안의 뽕나무 1천여 주와 밤섬[栗島]의 뽕나무 8천 2백 80주(株)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명하여 경복궁•창덕궁의 두 잠실(蠶室)에 각기 누에 종자 21냥을 주게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듯이 이미 조선시대 초기부터 뽕나무 심기가 장려되었고 1452년인 문종 1년의 기사에도 밤섬에 백성들의 개간을 금하고 뽕나무를 심게 하자는 상소가 있었으며 성종7년인 1475년에도 뽕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잎이 크고 질이 좋아서 언제나 최상품이 아니었나 싶은데. 옛 기록을 좀 더 뒤져보면 흥미롭기도 해. 고종 때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비고>에는 이런 기록도 나오지.
< 율주(栗洲)는 일명 율도(栗島)라고도 하고, 일명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길이가 7리인데, 경성의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마포(麻浦) 남쪽이다. 상림(桑林)이 있는데 곧 공상(公桑)이며, 약전(藥田)은 지금 내의원(內醫院)에 속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고도 한다. 모래 섬 중에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전하기를, 고려의 김주(金澍)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
섬에는 누가 살았을까. 희귀 성씨인 마씨, 인씨, 석씨,선씨 등이 이름을 올렸어.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탓에 특히 섬사람들의 대부분은 배 만드는 기술자. 아낙들은 뽕나무를 관리하고 남자들은 배를 만들거나 수리해서 넉넉치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삼시세끼 굶지 않고 살았다. 아쉽게도 일제시대에 배 만드는 기술자로 강제 징용된 청년이 17명이었으니 작은 섬치고는 솜씨 알만한 일터가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한강 주변엔 배 짓는 곳이 많았는데 그 중 밤섬 기술자들의 실력이 단연 으뜸이었지. 솜씨가 좋아 강화도나 서해는 물론 멀리 단양, 영월에서도 주문이 들어왔을 정도니까. 만든 배의 종류도 열 개가 넘었다고 해. 길이가 18미터에 이르는 짐배로부터 15미터의 조깃배, 강 상류로 이동이 용이한 12미터짜리 늘배, 비슷한 길이의 황포돛배도 단골 주문배였지. 강을 건널 때 사람이나 짐을 싣는 9미터짜리 나룻배도 제조했고 기생을 싣고 다녔던 놀이배를 만들어 주기도 했어.
배를 만드는 일 뿐만 아니라 선박 수리도 중요한 일이었는데 마포나루에 새우젓과 조기, 쌀 등을 부려놓은 지방 배들은 내려가기 전 밤섬에 배를 대고 수리를 맡겼다가 서강 쪽 공소태에서 얼음을 싣고 나갔다. 뱃사람들은 밤섬에서 술을 마시며 기다리곤 했는데 이 때문에 술을 만들어 파는 주막들이 호황을 누리기도 했던거지. 배 만드는 일이 한창일 때는 서강 쪽 넘은둥개에 노상 수십 척의 배들이 정박했었다. 정말 사람 냄새 나던 시절이었지.
<대동지지>는 율도가 서강 남쪽에 있는 섬으로 전체가 수십 리 모래로 되어 있으며 거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워 선비들은 밤섬을 마포팔경의 하나인 ‘율도명사(栗島明沙)'라 불렀지. 율도명사란 모래가 연달아 있어 강물과 섬의 풍치가 잘 어우러진 곳이라는 뜻이야. 정조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밤섬은 한성부 서강방 율도계로 불렸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되었어. 1933년 말 자료에 의하면 여율리에는 일본인이 사는 집이 한 채, 한국인 거주 호수는101가구였다.사람이 가장 많이 거주했던 시기가 이 즈음이었을 거야. 그 운치 상상할만 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꼭 개발 값으로 치부할텐가.
참 빠진 게 있네. 내 앞에 빤히 보이는 곳 잉화도,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예전 나와 마포 사이에 작은 섬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지. 이곳엔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어. 궁중에 고기를 대던 사축서의 관원들이 섬에 집을 짓고 살면서 돼지와 양 등을 길렀던 거지. 그런데 오랫동안 외부와 고립돼 살다 보니 근친혼이 성행하여 명종 11년 임금이 명을 내려서 섬에는 남자만 남게 하고 여자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웃지 못할 기록이 남아 있지.
신앙 또한 마찬가지야. 외부와 고립된 밤섬에선 부군신과 삼불제석님, 군웅 등 세 신을 모시며 신당을 만들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어. 나중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강 건너 와우산 자락으로 옮겨갔는데 신당을 이전하여 창전동동부군당을 짓고 해마다 음력 1월2일에 동제를 지낸다고 하지. 91년부터는 한국전쟁 때 사라진 마포나루굿을 재현하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으며 밤섬의 구군당굿은 2004년부터 서울시 무형문화재 35호로 등록되기도 했어.
뭐 이쯤 이력에 관록에 덧붙여 그 시절 자태가 지금에 고스란히 전해진다면 아마 서울 제일의 관광명소가 바로 내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지금의 나,,,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신세지 뭐..말해 못해. 한심한 게 한치 앞만 보는 사람들인게지. 사람들을 그를 가리켜 불도저니 무데뽀니 하던데 나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해. 그 불도저가 나를 이꼴로 만들었지. 그 얘긴 꺼내기도 싫으니 속 좁은 인간들한테나 물어봐. 아무튼 난 지금 행복해.
기적이 일어나고 있어. 해가 갈수록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일들이 일어나잖아. 물에 잠겼던 딱딱한 암반층에 강물에 떠밀려온 흙이 쌓이더니 생명들을 불러 모으는거야. 폐허의 섬에 철새가 날아들고 온갖 곤충과 식물이 자라면서 도심 속 진정한 낙원으로 변모한 거야. 한강의 진정한 기적은 바로 내게서 일어나는 거야. 삐죽삐죽 솟은 아파트들 철 지나 흉물에 제 값 받겠다고 아우성치고 싸움질인데 여기 어디 그런데가 있는가 말이야. 내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다들 죽은 줄 알았을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대 말이지 4만7,490평이었던 것이 늘고 늘어 이젠 거의 십만평. 매일매일 기쁜 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때문이지. 땅값 오른다고 좋아하는 인간들, 내 땅값 불어난만 하겠어. 돈으로 얼만데.
다들 놀러들 와!. 뭐 어딘 줄 알고 가느냐고. 이쯤 설명이면 다들 알지 않을까. 내 이름 '율도' 우리말로는 밤섬이야. 서울 서북쪽에 오면 나를 만날 수 있어.마포와 여의도의 중간 지점, 서울의 상징인 63빌딩과 멀리로는 관악산, 월드컵의 성지나 다름없는 상암동 월드컵경기장과도 가까운 곳이지. 정확히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한강의 하중도(河中島). 내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 서강대교 로 달려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면 금상첨화겠지?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운치가 있을 거야. 강물을 거슬러온 안개가 한 마리 늙은 용처럼 몸을 뒤틀며 천천히 교각을 감싸고 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더 재수가 좋은 날엔 서강대교 북단, 와우산 기슭에 걸려 있는 쌍무지개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누구든 살다보면 슬픔은 있게 마련이지만 내 아픔엔 이를게 아니었지.1968년 2월의 어느 날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해. 그 이야기는 불도저한테 물어보시고. 자연은 자연스럽게 풍광을 지켜주어야 해. 이제 이야기를 끝마칠 시간이야. 그럼 다들 잘들 지내..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