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 동안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의 진취적 인물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자 안성맞춤인 학교가 바로 진명여자고등학교이다.
이는 진명여고를 설립케 했던 엄순헌(嚴純獻) 황귀비의 지혜로 고종황제를 살린 현모양처상과 1910년대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등의 글을 발표해 오늘날 여성운동의 개척자가 된 나혜석, 그리고 1989년 전대협을 대표해 북한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해 민족통일운동의 새로운 씨앗이 된 임수경 씨가 웅변으로 말해준다.
진명여고는 엄 황귀비로부터 학교 부지를 하사받아 동생 엄준원(嚴俊源) 선생이 1906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여성사학이다. 진명은 4서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진덕계명(進德啓明)의 뜻으로 진덕수업진총명(進德修業進聰明)을 의미했다. 즉 “부덕(婦德)을 쌓고 학업을 닦아서 나의 빛으로 겨레와 온 나라를 밝게 비추어 굴함이 없이 전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설립자 엄준원 선생이 여성에게 진리 탐구와 개척정신을 강조한 선구자적 건학이념이다. 엄 선생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치마를 둘렀으나 여자가 아니다”고 가르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진보적 여성상 구현에 앞장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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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설립자 엄준원 선생 동상 |
우선 진명여고 탄생배경부터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과거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남성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상민의 자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집 여질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인 덕행을 전수 받을 뿐 자기의 개성 신장을 위한 학식의 연마는 바랄 수 없었다.
그러나 개화사상이 퍼지고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폐쇄된 사회의 장막이 걷혀짐에 따라 차츰 억눌린 여권(女權)이 해방되기 시작했다. 1900년을 전후해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각성과 사회적 기풍이 일어났다.
단 한 명으로 시작했지만 1886년에 설립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 일부에서는 외국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여성을 양녀(佯女)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무너지는 봉건적 폐쇄 사회의 마지막 장탄식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진명(進明)이 창립되기 전 여학교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배화학당, 누씨여학교, 호수돈여학교, 진성여학교 등 6개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전부 외국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운은 기울어지고 민족의 자주권마저 위태롭게 되는 비통어린 상황을 맞았다. 때마침 재실재산정리국의 직제를 신설하여 일본인들이 궁실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려 했다.
이에 엄 황귀비는 친정 남매간인 엄준원 선생에게 명성황후 통역을 지낸 신여성 여몌례황의 진언(眞言)을 받아들여 여성교육에 큰 뜻을 가지고 학교 설립에 관한 일을 일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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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교장선생님 |
엄 황귀비는 1906년 4월 11일 한성부 북서순화방 창성동 제 54통(창성동 옛 進明의 남관자리)에 있던 창선궁터 1,300여 평의 교지를 하사했다. 엄준원 선생은 여몌례황과 상의하여 학교개교를 서둘렀다.
엄 황귀비로부터 교지를 하사 받았으나 그 교지위에 있는 가옥으로는 학교를 개설하기가 부적당했다. 그래서 한성부 북서순화방 창성동 54통 4, 5, 7, 8호의 길씨(吉氏)소유 민가를 구입 수리하여 교사(校舍)로 쓰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학생 모집이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진명여학교의 출발은 요즘의 초등학교와 같은 보통과로 시작했다. 8세 내지 10세가 되는 여 아이들을 모집해 보통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학생 모집을 했으나 많은 학생이 오지 않았다.
친 지인들을 통해 아는 집안의 여아들을 연줄연줄 이야기하기도 하고 직접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교육의 필요성도 역설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실시했다.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가정의 반응은 비교적 좋은 편이였다. 많은 신고(辛苦)끝에 70여명의 여아들을 모집하여 입학시키고 교문을 열었다. 이 역사적 개교일이 1906년(光武 10年) 4월 21일이다.
당시 진명은 뒤에는 푸른 백악, 서쪽으로 인왕산과 동쪽으로는 경복궁 영추문, 경무대가 있고, 남으로 남산을 바라보는 자리에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진명여고는 우리나라 여성교육을 통한 여권신장의 초석이 되었다. 진명여고는 ‘나의 빛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나아간다’는 건학이념과 진실(眞實), 협조(協調), 창의(創意)의 교훈을 바탕으로 꿈과 능력을 길러 미래를 열어가는 전인적 인성을 갖춘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진명여고의 학교배지인 교표(校標)와 상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선명한 두 줄의 교장(校裝)이 특이하다. 교표는 진(進)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해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돛단배의 모습을 상징했고 명(明)은 원형을 17개 획 조각으로 나누어 둘레의 광채를 표현했다. 이는 진명인의 빛나는 진취적 기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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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훈 및 교표 |
교장은 진명여고를 상징하는 표시로 백선 두 줄로 구성되며 이는 각각 진과 명을 상징하고 여성의 순결과 정직을 의미한다. 학교 나무는 감나무로서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순수함을 바탕으로 인내와 풍요를 상징한다. 학교의 상징 꽃은 우리나라 전국 산과 들에 널려있는 토종 패랭이꽃으로 고결하면서 담백한 품위와 소박하고도 끈끈한 인정미가 넘친다.
진명여고는 1925년부터 입학고사를 치름으로서 명문학교로 부상,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지금의 목동 신시가지에 터 잡은 진명여고는 오는 21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호준(李鎬浚)교장선생은 그 감회가 남다르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진명여고는 올곧고 기품 있는 현모양처와 진취적 기상으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발전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이제 새로운 100년은 선배들의 현모양처상과 진취적 전통은 물론 능력과 창조성을 갖춘 전문인으로서 지구촌 세계를 당당하게 누비는 실력 있는 여성을 양성하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먼저 100주년을 맞아 1943년 5월24일 저희학교 설립자이신 엄준원 선생의 동상을 일제 해군이 강탈해간 망행을 강력 규탄하며 원상회복을 일본해상자위대와 일본대사관에 당당히 요구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 몇 푼의 물질적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자존심, 나아가 민족 자존심을 되찾고 명예를 회복하며 진명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교장선생은 “글로벌 인재 육성을 통한 제2의 도약을 위해서도 먼저 진명인이 정체성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반드시 우선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장선생은 진명여고의 자랑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진명인들은 실력 있고 인성을 갖춘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교훈에서 알 수 있듯 진명인은 빛나는 덕을 쌓아 남을 베풀고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살 줄 알며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여성을 배출해왔다고 자부했다.
무엇보다 진명인은 덕성과 총명함은 물론 개척정신을 겸비한 여성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진명인은 최고의 며느리감으로 자타가 공인해 오고 있다.
둘째, 인성교육의 도장으로서 전국 최고수준의 도서관을 최초로 갖췄다는 점이다. 중앙도서관인 의석관(宜石館)은 정보종합도서관으로서 인터넷과 멀티미디어 시설까지 갖춰 학생들이 언제고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했다. 특히 어머니 자원봉사자 30명이 중심이 되어 도서관을 운영함으로써 학생들이 편하게 세미나와 토론회를 통해 자기 발표력을 향상시키도록 하고 있다.
또 양식과 한식의 예절교육관, 가사실을 새롭게 확장하고 단장해 예절과 가사교육을 강화함으로써 진명인의 정체성을 깨우쳐 주고 있다.
셋째, 노인들과 이웃을 돌보는 ‘보수연’을 50년이상 계속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연은 1950년 부산 피난학교가 있는 보수동에서 유래했다. 1953년 6월7일 피난생활의 곤궁을 위로하고 교사와 학생의 생일을 서로 축하해 주기위해 ‘보수연(保壽宴)’을 개최했다.
이후 이 행사는 지금까지 3개월마다 한번 씩 이어오고 있다. 학생들이 직접 빚은 떡으로 잔치상을 만들어 선생님과 불우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보수연은 진명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 3만여 동문들을 끈끈히 뭉치게 하고 우애를 돈독케 하는 최고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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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엄 선생 동상을 강탈해가자 대신 올린 둥근 돌 |
이 교장선생은 “진명은 개교 100주년을 계기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며 ‘진명 100년의 힘, 교육 1000년의 빛’이란 표어가 말해주 듯 이제 진명여고는 글로벌 인재 육성에 매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수년전부터 일본문화 체험단, 백두산 탐방단을 운영해 세계적 견문을 넓히고 있다.
이 교장선생은 “LA, 캐나다, 밀라노 등 세계에 퍼져있는 동문회들을 중심으로 학생교류를 확대할 방침”이라며 “올해 여름방학 때 LA동문회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금 식당을 짓고 있는데 이곳을 토론회장과 세미나실로도 활용하고 역사관도 세울 계획”이라며 “진명 100년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이 교장선생은 이밖에 진명여고는 예체능 교육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이고 있다며 골프를 집중육성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진명인 출신 중에는 언론인과 문화인들이 유난히 많다.
정관계에는 이윤자. 한양순 전 국회의원이 있고, 학계에는 김재순 카톨릭대 부총장, 김경희 건국대 재단이사장, 윤순희 숭의학원 재단이사장, 박명숙 경희대 예술학부 교수, 전미숙 한국예술종합대학무용원장 등이 있다.

문화계는 미술가이자 최초 여성운동가인 나혜석을 필두로 김오남. 노천명. 손호연 시인, 김희진 매듭장인, 전양자. 최화정 탤런트, 박정자. 김성녀 연극인, 김청자 성악가, 김인숙 소설가, 유지나 영화평론가, 이영헌 가수 등이 눈에 띈다.
이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판사 황윤석, 한국 장애인들의 대모 황연대, 우복희 이화여대 의료원장, 이선희. 심연수. 윤경아 판사, 신은경. 노현정 전현 KBS 아나운서,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위원, 임수경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조경자 대한탁구협회 부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