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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曹丕)
卷二‧魏書二 文帝紀第二
2007/05/1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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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皇帝諱丕,字子桓,武帝太子也。中平四年冬,生于譙。 魏書曰:帝生時,有雲氣青色而圜如車盖當其上,終日,望氣者以為至貴之證,非人臣之氣。年八歲,能屬文。有逸才,遂博貫古今經傳諸子百家之書。善騎射,好擊劔。舉茂才,不行。 獻帝起居注曰:建安十五年,為司徒趙溫所辟。太祖表「溫辟臣子弟,選舉故不以實」。使侍中守光祿勳郗慮持節奉策免溫官。
建安十六年,為五官中郎將、副丞相。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휘(諱)를 비(丕)라 하고, 자(字)를 자환(子桓)이라고 하며, 무제(武帝) 태조의 맏아들이다.
동한(東漢) 영제 중평(中平) 4년(187) 겨울 초현에서 태어났다.(1)
(1) 위서(魏書) - 문제가 태어날 때, 푸른 색 운기(雲氣)가 둥근 모양으로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이것을 바라본 자들은 지극히 존귀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조비는 나이 여덟에 이미 글을 잘 지었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 경전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꿰뚫었다. 또한 말 타기와 활쏘기에도 뛰어났고, 검술을 좋아하였다. 무재(茂才 : 秀才)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는 않았다.
건안 16년(211)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에 임명되었고, 부승상(副丞相)이 되었다.
二十二年,立為魏太子。 魏略曰:太祖不時立太子,太子自疑。是時有高元呂者,善相人,乃呼問之,對曰:「其貴乃不可言。」問:「壽幾何?」元呂曰:「其壽,至四十當有小苦,過是無憂也。」後無幾而立為王太子,至年四十而薨。
太祖崩,嗣位為丞相、魏王。 袁宏漢紀載漢帝詔曰:「魏太子丕:昔皇天授乃顯考以翼我皇家,遂攘除羣凶,拓定九州,弘功茂績,光于宇宙,朕用垂拱負扆二十有餘載。天不憖遺一老,永保余一人,早世潛神,哀悼傷切。丕奕世宣明,宜秉文武,紹熈前緒。今使使持節御史大夫華歆奉策詔授丕丞相印綬、魏王璽紱,領兾州牧。方今外有遺虜,遐夷未賔,旗鼓猶在邊境,干戈不得韜刃,斯乃播揚洪烈,立功垂名之秋也。豈得脩諒闇之禮,究曾、閔之志哉?其敬服朕命,抑弭憂懷,旁祗厥緒,時亮庶功,以稱朕意。於戲,可不勉與!」
尊王后曰王太后。改建安二十五年為延康元年。
22년(217) 위나라의 태자에 옹립되었다.(2)
(2) 위략(魏略) - 태조가 생각지도 않은 시기에 태자를 세웠으므로 조비는 스스로 의아해했다. 그 당시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高元呂)라는 사람이 있어 불러서 물어보자, “그 고귀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수명은 얼마나 되오?”라고 물으니, 고원려는 “그의 수명은 40세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결국 40세 때 죽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승상이 되었고 위왕이 되었으며, 자신의 모친 왕후(王后) -태조의 비(妃), 변후(卞后)를 가리킴- 를 왕태후(王太后)라고 했다.(3)
(3) 원굉한기재한제조왈(袁宏漢紀載漢帝詔曰):
건안 25년(220) 연강 원년(延康元年)으로 바꾸었다.
元年二月 魏書載庚戌令曰:「關津所以通商旅,池苑所以御災荒也。設禁重稅,非所以便民;其除池籞之禁,輕關津之稅,皆復什一。」辛亥,賜諸侯王將相已下大將粟萬斛,帛千匹,金銀各有差等。遣使者循行郡國,有違理掊克暴虐者,舉其罪。 壬戌,以大中大夫賈詡為太尉,御史大夫華歆為相國,大理王朗為御史大夫。置散騎常侍、侍郎各四人,其宦人為官者不得過諸署令;為金策著令,藏之石室。
연강 원년(220) 2월 16일(4) 태중대부(太中大夫) 가후를 태위로, 어사대부(御史大夫) 화흠(華欽)을 상국(相國)으로 삼았고, 대리(大理) 왕랑(王郞)을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했다. 아울러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시랑(侍郞)을 각각 네 명씩 두고, 환관 중에서 벼슬을 하는 자는 각 부서의 령(令) 이상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런 명령을 황금으로 된 간책에 기록하게 하여 돌로 된 방에 보존케 하였다.
(4) 위서재경술령왈(魏書載庚戌令曰)
初,漢熹平五年,黃龍見譙,光祿大夫橋玄問太史令單颺:「此何祥也?」颺曰:「其國後當有王者興,不及五十年,亦當復見。天事恒象,此其應也。」內黃殷登默而記之。至四十五年,登尚在。三月,黃龍見譙,登聞之曰:「單颺之言,其驗茲乎!」 魏書曰:王召見登,謂之曰:「昔成風聞楚丘之繇而敬事季友,鄧晨信少公之言而自納光武。登以篤老,服膺占術,記識天道,豈有是乎!」賜登穀二百斛,遣歸家。
이전 한나라 희평(熹平) 5년(176) 황룡(黃龍)이 초현에 출현하자, 광록대부(光祿大夫) 교현(橋玄)이 태사령(太史令) 단양(單颺)에게 물었다.
“이는 무슨 상서로운 조짐이오?”
단양이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 나중에 반드시 왕 노릇하는 자가 일어날 것이니, 50년이 채 못 되어 황룡이 당시 한 번 출현할 것입니다. 하늘이 안배한 일은 반드시 예견된 조짐이 있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뜻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내황(內黃) 은등(殷登)은 말없이 듣고는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 이로부터 4,50년이 지나서도 은등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3월 황룡(黃龍)이 초현에 출현하자, 은등은 소식을 듣고서 말했다.
“단양의 말이 이렇게 증명되는구나.”(5)
(5) 위서(魏書) : 위왕 조비는 은등을 불러서 말했다. 예전에 세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관자(管子: 관중(管仲), 관이오(管夷吾), 관경중(管敬仲): 경(敬)은 그의 시호) 등신(鄧晨)은 관상가 채소공(蔡少公)을 믿었기 때문에 광무제를 따랐고?
已卯,以前將軍夏侯惇為大將軍。濊貃、扶餘單于、焉耆、于闐王皆各遣使奉獻。 魏書曰:丙戌,令史官奏修重、黎、羲、和之職,欽若昊天,歷象日月星辰以奉天時。 臣松之案:魏書有是言而不聞其職也。 丁亥令曰:「故尚書僕射毛玠、奉常王脩、涼茂、郎中令袁渙、少府謝奐、萬潛、中尉徐奕、國淵等,皆忠直在朝,履蹈仁義,並早即世,而子孫陵遲,惻然愍之,其皆拜子男為郎中。」
3월 3일 전장군(前將軍) 하후돈(夏侯惇)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예맥(濊貊)과 부여(夫餘)의 선우(單于) 언기(焉耆), 우전(于闐)의 왕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6)
(6) 위서(魏書)
夏四月丁巳,饒安縣言白雉見。 魏書曰:賜饒安田租,勃海郡百戶牛酒,大酺三日;太常以太牢祠宗廟。 庚午,大將軍夏侯惇薨。 魏書曰:王素服幸鄴東城門發哀。孫盛曰:在禮,天子哭同姓於宗廟門之外。哭於城門,失其所也。
여름 4월 12일 요안현(饒安縣)에 흰 꿩이 나타났다는 말이 있었다.(7)
25일 대장군 하후돈이 서거했다.(8)
(7) 위서(魏書) -
(8) 위서(魏書) - 이때 문제는 흰 상복을 입고 업성(鄴)의 동쪽 성문까지 행차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손성(孫盛)이 말하길 - 그러나 예법에 의하면 같은 성씨를 가진 경우에는 종묘의 문 밖에서 곡을 해야 하는데, 성문까지 나가서 곡을 한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다.
五月戊寅,天子命王追尊皇祖太尉曰太王,夫人丁氏曰太王后,封王子叡為武德侯。 魏略曰:以侍中鄭稱為武德侯傅,令曰:「龍淵、太阿出昆吾之金,和氏之璧由井里之田;礱之以砥礪,錯之以他山,故能致連城之價,為命世之寶。學亦人之砥礪也。稱篤學大儒,勉以經學輔侯,宜旦夕入侍,曜明其志。」
是月,馮翊山賊鄭甘、王照率衆降,皆封列侯。 魏書曰:初,鄭甘、王照及盧水胡率其屬來降,王得降書以示朝曰:「前欲有令吾討鮮卑者,吾不從而降;又有欲使吾及今秋討盧水胡者,吾不聽,今又降。昔魏武侯一謀而當,有自得之色,見譏李悝。吾今說此,非自是也,徒以為坐而降之,其功大於動兵革也。」
5월 3일 천자(헌제)는 위왕에게 명령하여 황조(皇祖)의 태위(太尉: 조숭(曹嵩))를 추존하여 태왕(太王)이라고 일컫게 했으며, 그의 부인 정씨(丁氏)를 태왕후(太王后)라고 일컫게 했고, 위왕의 아들 조예(曹叡 : 명제)를 무덕후(武德侯)에 봉했다.(9)
(9) 위략(魏略) -
같은 달에 풍익(馮翊)의 산적 정감(鄭甘)과 왕조(王朝)가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오자, 모두 열후에 봉했다.(10)
(10) 위서(魏書) -
酒泉黃華、張掖張進等各執太守以叛。金城太守蘇則討進,斬之。華降。 華後為兖州刺史,見王淩傳。
주천군(酒泉郡)의 황화(皇華)와 장액군(張掖郡)의 장진(張進) 등은 각기 태수를 잡아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소칙(蘇則)이 장진을 토벌하고 그를 참수했다. 황하가 항복했다.(11)
(11) 황하(華)는 후에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었는데, 이 기록은 왕릉전(王淩傳)에 보인다.
六月辛亥,治兵于東郊, 魏書曰:公卿相儀,王御華蓋,視金鼓之節。
庚午,遂南征。 魏略曰:王將出征,度支中郎將新平霍性上踈諫曰:「臣聞文王與紂之事,是時天下括囊無咎,凡百君子,莫肯用訊。今大王體則乾坤,廣開四聦,使賢愚各建所規。伏惟先王功無與比,而今能言之類,不稱為德。故聖人曰『得百姓之歡心』。兵書曰『戰,危事也』是以六國力戰,彊秦承弊,豳王不爭,周道用興。愚謂大王且當委重本朝而守其雌,抗威虎卧,功業可成。而今刱基,便復起兵,兵者凶器,必有凶擾,擾則思亂,亂出不意。臣謂此危,危於累卵。昔夏啟隱神三年,易有『不遠而復』,論有『不憚改』。誠願大王揆古察今,深謀遠慮,與三事大夫筭其長短。臣沐浴先王之遇,又初改政,復受重任,雖知言觸龍鱗,阿諛近福,竊感所誦,危而不持。」奏通,帝怒,遣刺姦就考,竟殺之。旣而悔之,追原不及。
6월 7일 동쪽 교외에서 열병(閱兵) 의식을 거행했다. (12)
(12) 위서(魏書) - 이 의식은 삼공(公)과 구경(卿)이 돕고, 왕은 화려한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종과 큰 북소리에 따라 행진하는 군대를 열병하는 것이다.
26일 마침내 남방 정벌을 떠났다.(13)
(13) 위략(魏略) -
秋七月庚辰,令曰:「軒轅有明臺之議,放勛有衢室之問,皆所以廣詢于下也。 管子曰:黃帝立明臺之議者,上觀於兵也;堯有衢室之問者,下聽於民也;舜有告善之旌,而主不蔽也;禹立建鼓於朝,而備訴訟也;湯有總街之廷,以觀民非也;武王有靈臺之囿,而賢者進也:此古聖帝明王所以有而勿失,得而勿忘也。 百官有司,其務以職盡規諫,將率陳軍法,朝士明制度,牧守申政事,縉紳考六藝,吾將兼覽焉。」
가을 7월 6일 조비가 명을 내렸다.
- 화제 헌원(軒轅)은 명대(明臺)에서 정사를 의론하는 것을 들었고, 요임금 방훈(放勛)은 구실(衢室)에서 백성들이 하는 의론을 물었는데, 모두 광범위하게 아랫사람에게서 의견을 경청한 것이다.(14)
조정의 문무 백관과 관원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대해 바르게 놓고 해야 한다. 출정을 떠나는 장수들은 조법에 대해서 모두 진술해야 하고, 조정의 선비들은 제도를 밝히고, 주목(州牧)이나 군수들은 정무(政務)를 밝히며, 사대부들은 육예(六藝)를 고찰해야 한다. 짐은 장차 이것들을 자세하게 살필 것이다.
(14) 관자(管子) -
孫權遣使奉獻。蜀將孟達率衆降。武都氐王楊僕率種人內附,居漢陽郡。 魏略載王自手筆令曰:「吾前遣使宣國威靈,而達即來。吾惟春秋襃儀父,即封拜達,使還領新城太守。近復有扶老攜幼首向王化者。吾聞夙沙之民自縛其君以歸神農,豳國之衆襁負其子而入酆、鎬,斯豈驅略迫脅之所致哉?乃風化動其情而仁義感其衷,歡心內發使之然也。以此而推,西南將萬里無外,權、備將與誰守死乎?」
손권이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하는 물품을 바쳤다. 촉나라 장수 맹달(孟達)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투항했다. 무도(武都)의 저족(氐族) 왕 양복(楊僕)도 족인(族人)들을 이끌고 위나라에 복속하자, 그들을 한양군(漢陽郡)에 거주하게 했다.(15)
(15) 위략재왕자수필령왈(魏略載王自手筆令曰) -
甲午,軍次于譙,大饗六軍及譙父老百姓于邑東。 魏書曰:設伎樂百戲,令曰:「先王皆樂其所生,禮不忘其本。譙,霸王之邦,真人本出,其復譙租稅二年。」三老吏民上壽,日夕而罷。丙申,親祠譙陵。
孫盛曰:昔者先王之以孝治天下也,內節天性,外施四海,存盡其敬,亡極其哀,思慕諒闇,寄政冢宰,故曰「三年之喪,自天子達于庶人」。夫然,故在三之義惇,臣子之恩篤,雍熈之化隆,經國之道固,聖人之所以通天地,厚人倫,顯至教,敦風俗,斯萬世不易之典,百王服膺之制也。是故喪禮素冠,鄶人著庶見之譏,宰予降朞,仲尼發不仁之歎,子頹忘戚,君子以為樂禍,魯侯易服,春秋知其不終,豈不以墜至痛之誠心,喪哀樂之大節者哉?故雖三季之末,七雄之弊,猶未有廢縗斬於旬朔之閒,釋麻杖於反哭之日者也。逮于漢文,變易古制,人道之紀,一旦而廢,縗素奪於至尊,四海散其遏密,義感闕於羣后,大化墜於君親;雖心存貶約,慮在經綸,至於樹德垂聲,崇化變俗,固以道薄於當年,風穨於百代矣。且武王載主而牧野不陣,晉襄墨縗而三帥為俘,應務濟功,服其焉害。魏王旣追漢制,替其大禮,處莫重之哀而設饗宴之樂,居貽厥之始而墜王化之基,及至受禪,顯納二女,忘其至恤以誣先聖之典,天心喪矣,將何以終!是以知王齡之不遐,卜世之期促也。 八月,石邑縣言鳳皇集。
7월 20일 조비가 거느리는 대군이 초현에 머물게 되었는데, 조비는 성읍의 동쪽에 모든 병사와 초현의 장로(長老)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향연을 크게 벌였다.(16)
(16) 위서(魏書) -
손성(孫盛)이 말하길 -
8월 석읍현(石邑縣)에 봉황(鳳皇)이 모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冬十一月癸卯,令曰:「諸將征伐,士卒死亡者或未收斂,吾甚哀之;其告郡國給槥 槥音衞 櫝殯斂,送致其家,官為設祭。」 漢書高祖八月令曰:「士卒從軍死,為槥。」應劭曰:「槥,小棺也,今謂之櫝。」應璩百一詩曰:「槥車在道路,征夫不得休。」陸機大墓賦曰:「觀細木而悶遲,覩洪櫝而念槥。」 丙午,行至曲蠡。
겨울 10월 1일 명을 내렸다. - 여러 장수들이 정벌을 할 때, 사망한 사병들 중에서 간혹 유해를 거두어 오지 못한 자가 있는데, 나는 이 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각 군(郡)과 국(國)에 명령하니 작은 관을 갖추어 전사한 사병의 유해를 그 속에 넣어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17)
(17) 한서고조팔월령(漢書高祖八月令曰) -
4일, 조비는 군대를 이끌고 곡려(曲蠡)까지 갔다.
漢帝以衆望在魏,乃召羣公卿士, 袁宏漢紀載漢帝詔曰:「朕在位三十有二載,遭天下蕩覆,幸賴祖宗之靈,危而復存。然仰瞻天文,俯察民心,炎精之數旣終,行運在乎曹氏。是以前王旣樹神武之績,今王又光曜明德以應其期,是歷數昭明,信可知矣。夫大道之行,天下為公,選賢與能,故唐堯不私於厥子,而名播於無窮。朕羨而慕焉,今其追踵堯典,禪位于魏王。」
한 헌제는 모든 신하들이 위왕(조비)이 황제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대신들을 소집하여,(18)
(18) 원굉한기재한제조(袁宏漢紀載漢帝詔曰) - 짐이 재위한지 3십년 동안 천하가 탕복蕩覆(흔들리고 뒤집힘)했으나 다행히 조종祖宗의 혼령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 다시 존립했소. 그러나 이제 천상天象을 우러르고 민심을 굽어 살피니 화정炎精의 기수 이미 끝나고 행운行運(운세)이 조씨에게 있소. 이에 전왕前王(조조)은 이미 신무 神武의 공을 세우고 금왕今王(조비)도 명덕을 비춰 그 기대에 응했소. 역수曆數가 이렇게 분명하니 믿어 알 수 있소. 무릇 대도지행大道之行(대도가 행해짐)이면 천하위공天下為公(천하를 모두 향유하게 됨)이라 했소. 당요唐堯(요임금)는 아들을 위해서 삿되지 아니해 이름을 무궁히 전하소. 짐도 남몰래 이를 우러러 본받고자 했소. 이제 마땅히 요임금의 모범을 따라 승상 위왕에게 선위하니 위왕은 사양치 마시오!’
告祠高廟。使兼御史大夫張音持節奉璽綬禪位,冊曰:「咨爾魏王:昔者帝堯禪位于虞舜,舜亦以命禹,天命不于常,惟歸有德。漢道陵遲,世失其序,降及朕躬,大亂茲昏,羣兇肆逆,宇內顛覆。賴武王神武,拯茲難于四方,惟清區夏,以保綏我宗廟,豈予一人獲乂,俾九服實受其賜。今王欽承前緒,光于乃德,恢文武之大業,昭爾考之弘烈。皇靈降瑞,人神告徵,誕惟亮采,師錫朕命,僉曰爾度克恊于虞舜,用率我唐典,敬遜爾位。於戲!天之歷數在爾躬,允執其中,天祿永終;君其祗順大禮,饗茲萬國,以肅承天命。」
고조(高祖 : 劉邦)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겸어사대부(兼御士大夫) 장음(張音)에게 부절을 주어 천자의 옥새와 수대(綬帶)를 위왕에게 바치게 하고 황제의 지위를 양위하고 조서에 말했다.
- 위왕(魏王)에게 고하노니, 옛날에 황제(帝) 요(堯)는 우순(虞舜)에게 양위했고, 순(堯) 역시 대우(大禹)에게 양위했으니 천명(天命)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오직 덕망이 있는 자에게로 돌아갈 뿐이다. 한나라의 도의는 점점 쇠미하여, 천하는 그 질서를 잃었으며, 나의 시대에 이르러 큰 변란이 세상을 뒤흔들고, 수많은 흉포한 자들이 제멋대로 천명을 거역하여 천하는 전복될 지경이 되었다. 다행히 무왕(武王)은 신과 같은 용무(勇武)를 갖고 있어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이 혼란을 구하고, 중화 땅을 맑게 다스리고, 우리 한나라의 종묘를 안전하게 보호하였으니, 나 한 개인만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것인가? 천하가 모두 실제로 그의 은덕을 받았으니 이제 왕은 선왕의 사업을 받아 계승하고, 덕을 빛내 문무 양쪽의 대업을 확충시켜 망부의 큰 업적을 발휘시킬지어다.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을 내리고, 사람과 신이 길조를 예견하였으며, 사람들은 큰 일을 밝히고 짐의 사명을 서술했다. 모든 태도는 우순과 같기 때문에 나는 상서(尙書) 요전(堯典)에 따라 황제의 위치를 공경스럽게 그대에게 주노라. 아! 하늘은 사명을 그대에게 주었으니 성실하게 중용의 도를 운용하면 하늘이 준 행복은 영원히 계속되리라. 그대는 공손하게 대례(大禮)를 따르고, 모든 나라를 다스림에 엄숙하게 천명을 받으라.(19)
아, 너 위왕이여! 옛날에 당요(唐堯)는 우순(虞舜)에게 선위하셨고 순 역시 우(禹)에게 선위하셨다. 천명(天命)은 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덕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나라의 도통(道統)은 쇠약하여 세상이 그 질서를 잃더니 짐의 대에 이르러서는 큰 난리가 더욱 혼란해지고 흉악한 무리가 멋대로 반역을 하여 우내(宇內:천하)가 전복되려 하였는데 무왕(武王:조조)의 신무(神武)에 힘입어 사방(四方:나라)을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구하(區夏:천하)를 안정시켜 나의 종묘(宗廟)를 평안하게 보호했으니 어찌 나 한 사람이 안정시킬 수 있었겠느냐? 구복(九服:천하)은 실로 그가 주어 받은 것이다. 이제 왕은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덕을 밝히고 문무(文武)의 대업(大業)을 넓히며 네 아비의 큰 공업(功業)을 더욱 밝게 빛내어라. 황령(皇靈)이 상서를 내리고 인신(人神)이 징조를 알리니 모든 일을 순리로 풀라고 여러 사람이 말하여 짐은 명하는 것이다. 모두가 말하기를 ‘너는 우순의 극협(克協:조화를 이룸)을 헤아리라’ 하여 나는 당전(唐典:요의 법칙)을 써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니 삼가고 겸허하게 너의 위(位:자리)를 지켜라. 오! 하늘의 역수(曆數)가 너에게 있으니 성실하게 중도(中道)를 잡아 하늘이 주신 복록(福祿)을 영구히 누리라. 군(君)은 대례(大禮:선위 절차)를 공경하고 순종하여 만국(萬國)을 받고 엄숙하게 천명(天命)을 받들지어다.(정소문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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獻帝傳載禪代衆事曰:左中郎將李伏表魏王曰:「昔先王初建魏國,在境外者聞之未審,皆以為拜王。武都李庶、姜合羈旅漢中,謂臣曰:『必為魏公,未便王也。定天下者,魏公子桓,神之所命,當合符讖,以應天人之位。』臣以合辭語鎮南將軍張魯,魯亦問合知書所出?合曰:『孔子玉版也。天子歷數,雖百世可知。』是後月餘,有亡人來,寫得冊文,卒如合辭。合長於內學,關右知名。魯雖有懷國之心,沈溺異道變化,不果寤合之言。後密與臣議策質,國人不協,或欲西通,魯即怒曰:『寧為魏公奴,不為劉備上客也。』言發惻痛,誠有由然。合先迎王師,往歲病亡於鄴。自臣在朝,每為所親宣說此意,時未有宜,弗敢顯言。殿下即位初年,禎祥衆瑞,日月而至,有命自天,昭然著見。然聖德洞達,符表豫明,實乾坤挺慶,萬國作孚。臣每慶賀,欲言合驗;事君盡禮,人以為諂。況臣名行穢賤,入朝日淺,言為罪尤,自抑而已。今洪澤被四表,靈恩格天地,海內翕習,殊方歸服,兆應並集,以揚休命,始終允臧。臣不勝喜舞,謹具表通。」王令曰:「以示外。薄德之人,何能致此,未敢當也;斯誠先王至德通于神明,固非人力也。」
헌제전(獻帝傳)에는 선양에 관한 글이 있다. 좌중랑장(左中郎將) 이복(李伏)이 표를 올려 위왕에게 말했다. "예전에 선왕(先王: 조조)이 위국(魏國)을 건국하였을 때 변경지방, 국가 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모두들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위국이 건립되고 조조는 위공이 되었는데, 위왕이 된 것으로 착각한 것임, 변경지방이라 잘못된 소문이 전달 무도(武都) 이서(李庶), 강합(姜合)은 그때 한중(漢中)에 있으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틀림없이 조조는 위공(魏公)에 올랐을 것이고 위왕(魏王)은 아닐 것이다. 천하를 평정할 사람은 위공(魏公) 자환(子桓)이다. 이것은 신(神)의 뜻으로 예언서에 그렇게 적혀져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강합과 같이 진남장군(鎮南將軍) 장로(張魯)에게 가서 말했더니, 장로가 당신이 말한 그 예언서는 도대체 무엇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장합은 '공자옥판(孔子玉版)입니다. 천자들의 운명을 알 수 있습니다. 수백대까지 알 수 있습니다'하고 마랬습니다. 그후 한달쯤 지나니, 어떤 백성이 찾아와서 책문을 주고 갔는데, 寫得冊文, 강합이 말한 내용과 똑같았습니다.
강합은 내학(內學: 예언술)을 오랫동안 공부하여, 관우(關右)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장로(張魯)는 비록 국가를 만들 생각을 꿈꾸고는 있었지만, 이상한 법도(異道)에 몰입해 있어서, 강합의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장로는 회의를 하다가, 사람들끼리 서로 의견이 달랐는데, 어떤 사람은 서쪽의 유비를 찾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장로가 노하며 대답했습니다. "위공의 노비로 사는 것이 유비의 생각이 되는 것 보다는 낫다"고 ㅎ였습니다.
강합은 젤 먼저 왕사(王師: 왕의군대: 즉 조조의 군대)를 맞아들였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업(鄴)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저는 조정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이런 이야기들을 올리려 하였으나, 시기가 마땅하지 않고, 또한 말을 함부러 할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올초에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상서롭고 복스러운 조짐이 자주 일어나고, 때가 되었고, 하늘의 뜻이 있음이 점점 확연해 졌습니다.
성덕(聖德)이 통탈하고, 예언서에 나와있고, 실로 하늘과 땅이 모두 축하하고, 모든 나라가 귀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경하드리옵고 강합의 이야기를 하였으나,
저는 이름도 보잘 것 없고, 입조한 경력도 일천하고, 말을 잘못한거 아닐까 하여, 그동안 참아왔습니다. 지금
조비는 말했다. "보시다시비, 저는 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찌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魏王侍中劉廙、辛毗、劉曄、尚書令桓階、尚書陳矯、陳羣、給事黃門侍郎王毖、董遇等言:「臣伏讀左中郎將李伏上事,考圖緯之言,以效神明之應,稽之古代,未有不然者也。故堯稱歷數在躬,璿璣以明天道;周武未戰而赤烏銜書;漢祖未兆而神母告符;孝宣庂微,字成木葉;光武布衣,名已勒讖。是天之所命以著聖哲,非有言語之聲,芬芳之臭,可得而知也,徒縣象以示人,微物以效意耳。自漢德之衰,漸染數世,桓、靈之末,皇極不建,曁于大亂,二十餘年。天之不泯,誕生明聖,以濟其難,是以符讖先著,以彰至德。殿下踐阼未朞,而靈象變于上,羣瑞應于下,四方不羈之民,歸心向義,唯懼在後,雖典籍所傳,未若今之盛也。臣妾遠近,莫不鳧藻。」王令曰:「犂牛之駮似虎,莠之幼似禾,事有似是而非者,今日是矣。覩斯言事,良重吾不德。」於是尚書僕射宣告官寮,使咸聞知。
위왕(魏王)의 시중(侍中)인 유이(劉廙), 신비(辛毗), 유엽(劉曄), 상서령(尚書令) 환개(桓階), 상서(尚書) 진교(陳矯), 진군(陳羣),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 왕필(王毖), 동우(董遇) 등이 말했다. "저희들은 엎드려 좌중랑장 이복의 표를 읽어보았고, 도위(圖緯---하도(河圖)와 위서(緯書). 모두 미래(未來)의 일과 점술(占術)에 관(關)하여 기술(記述)한 책(冊)임---)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는데, 신명(神明)이
辛亥,太史丞許芝條魏代漢見讖緯於魏王曰:「易傳曰:『聖人受命而王,黃龍以戊己日見。』七月四日戊寅,黃龍見,此帝王受命之符瑞最著明者也。又曰:『初六,履霜,陰始凝也。』又有積蟲大穴天子之宮,厥咎然,今蝗蟲見,應之也。又曰:『聖人以德親比天下,仁恩洽普,厥應麒麟以戊己日至,厥應聖人受命。』又曰:『聖人清淨行中正,賢人福至民從命,厥應麒麟來。』春秋漢含孳曰:『漢以魏,魏以徵。』春秋玉版讖曰:『代赤者魏公子。』春秋佐助期曰:『漢以許昌失天下。』故白馬令李雲上事曰:『許昌氣見於當塗高,當塗高者當昌於許。』當塗高者,魏也;象魏者,兩觀闕是也;當道而高大者魏。魏當代漢。今魏基昌於許,漢徵絕於許,乃今效見,如李雲之言,許昌相應也。佐助期又曰:『漢以蒙孫亡。』說者以蒙孫漢二十四帝,童蒙愚昏,以弱亡。或以雜文為蒙其孫當失天下,以為漢帝非正嗣,少時為董侯,名不正,蒙亂之荒惑,其子孫以弱亡。孝經中黃讖曰:『日載東,絕火光。不橫一,聖聦明。四百之外,易姓而王。天下歸功,致太平,居八甲;共禮樂,正萬民,嘉樂家和雜。』此魏王之姓諱,著見圖讖。易運期讖曰:『言居東,西有午,兩日並光日居下。其為主,反為輔。五八四十,黃氣受,真人出。』言午,許字。兩日,昌字。漢當以許亡,魏當以許昌。今際會之期在許,是其大效也。易運期又曰:『鬼在山,禾女連,王天下。』臣聞帝王者,五行之精;易姓之符,代興之會,以七百二十年為一軌。有德者過之,至於八百,無德者不及,至四百載。是以周家八百六十七年,夏家四百數十年,漢行夏正,迄今四百二十六歲。又高祖受命,數雖起乙未,然其兆徵始於獲麟。獲麟以來七百餘年,天之歷數將以盡終。帝王之興,不常一姓。太微中,黃帝坐常明,而赤帝坐常不見,以為黃家興而赤家衰,凶亡之漸。自是以來四十餘年,又熒惑失色不明十有餘年。建安十年,彗星先除紫微,二十三年,復掃太微。新天子氣見東南以來,二十三年,白虹貫日,月蝕熒惑,比年己亥、壬子、丙午日蝕,皆水滅火之象也。殿下即位,初踐阼,德配天地,行合神明,恩澤盈溢,廣被四表,格于上下。是以黃龍數見,鳳皇仍翔,麒麟皆臻,白虎效仁,前後獻見於郊甸;甘露醴泉,奇獸神物,衆瑞並出。斯皆帝王受命易姓之符也。昔黃帝受命,風后受河圖;舜、禹有天下,鳳皇翔,洛出書;湯之王,白鳥為符;文王為西伯,赤鳥銜丹書;武王伐殷,白魚升舟;高祖始起,白虵為徵。巨跡瑞應,皆為聖人興。觀漢前後之大災,今茲之符瑞,察圖讖之期運,揆河洛之所甄,未若今大魏之最美也。夫得歲星者,道始興。昔武王伐殷,歲在鶉火,有周之分野也。高祖入秦,五星聚東井,有漢之分野也。今茲歲星在大梁,有魏之分野也。而天之瑞應,並集來臻,四方歸附,襁負而至,兆民欣戴,咸樂嘉慶。春秋大傳曰:『周公何以不之魯?蓋以為雖有繼體守文之君,不害聖人受命而王。』周公反政,尸子以為孔子非之,以為周公不聖,不為兆民也。京房作易傳曰:『凡為王者,惡者去之,弱者奪之。易姓改代,天命應常,人謀鬼謀,百姓與能。』伏惟殿下體堯舜之盛明,膺七百之禪代,當湯武之期運,值天命之移授,河洛所表,圖讖所載,怛然明白,天下學士所共見也。臣職在史官,考符察徵,圖讖效見,際會之期,謹以上聞。」
태사증(太史丞) 허지(許芝)
역전(易傳)에는 "성인(聖人)이 명을 받고 일어난 것이 왕이라고 했고, 황룡(黃龍)은 무기(戊己)일에 보인다"고 했습니다. 7월4일 무인(戊寅)일날 황룡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왕이 명을 받들라는 조짐 주에서 제일로 ㄴ눈에 띄는 전조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겨울이 왔다는 것이다(?) 履霜,陰始凝也. 또한 천자의 궁궐에 버레들이 들끓었다는데, 황충(蝗蟲)이 보인다는 것은 어쪽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王令曰:「昔周文三分天下有其二,以服事殷,仲尼歎其至德;公旦履天子之籍,聽天下之斷,終然復子明辟,書美其人。吾雖德不及二聖,敢忘高山景行之義哉?若夫唐堯、舜、禹之蹟,皆以聖質茂德處之,故能上和靈祇,下寧萬姓,流稱今日。今吾德至薄也,人至鄙也,遭遇際會,幸承先王餘業,恩未被四海,澤未及天下,雖傾倉竭府以振魏國百姓,猶寒者未盡煖,饑者未盡飽。夙夜憂懼,弗敢遑寧,庶欲保全髮齒,長守今日,以沒于地,以全魏國,下見先王,以塞負荷之責。望狹志局,守此而已。雖屢蒙祥瑞,當之戰惶,五色無主。若芝之言,豈所聞乎?心慄手悼,書不成字,辭不宣心。吾間作詩曰:『喪亂悠悠過紀,白骨從橫萬里,哀哀下民靡恃,吾將佐時整理,復子明辟致仕。』庶欲守此辭以自終,卒不虛言也。宜宣示遠近,使昭赤心。」
於是侍中辛毗、劉曄、散騎常侍傅巽、衞臻、尚書令桓階、尚書陳矯、陳羣、給事中博士騎都尉蘇林、董巴等奏曰:「伏見太史丞許芝上魏國受命之符;令書懇切,允執謙讓,雖舜、禹、湯、文,義無以過。然古先哲王所以受天命而不辭者,誠急遵皇天之意,副兆民之望,弗得已也。且易曰:『觀乎天文以察時變,觀乎人文以化成天下。』又曰:『天垂象,見吉凶,聖人則之;河出圖,洛出書,聖人效之。』以為天文因人而變,至於河洛之書,著于洪範,則殷、周效而用之矣。斯言,誠帝王之明符,天道之大要也。是以由德應錄者代興於前,失道數盡者迭廢於後,傳譏萇弘欲支天之所壞,而說蔡墨『雷乘乾』之說,明神器之存亡,非人力所能逮也。今漢室衰替,帝綱墮墜,天子之詔,歇滅無聞,皇天將捨舊而命新,百姓旣去漢而為魏,昭然著明,是可知也。先王撥亂平世,將建洪基;至於殿下,以至德當歷數之運,即位以來,天應人事,粲然大備,神靈圖籍,兼仍往古,休徵嘉兆,跨越前代;是芝所取中黃、運期姓緯之讖,斯文乃著於前世,與漢並見。由是言之,天命乆矣,非殿下所得而拒之也。神明之意,候望禋享,兆民顒顒,咸注嘉願,惟殿下覽圖籍之明文,急天下之公義,輒宣令外內,布告州郡,使知符命著明,而殿下謙虛之意。」令曰:「下四方以明孤款心,是也。至於覽餘辭,豈余所謂哉?寧所堪哉?諸卿指論,未若吾自料之審也。夫虛談謬稱,鄙薄所弗當也。且聞比來東征,經郡縣,歷屯田,百姓面有饑色,衣或短褐不完,罪皆在孤;是以上慙衆瑞,下愧士民。由斯言之,德尚未堪偏王,何言帝者也!宜止息此議,無重吾不德,使逝之後,不愧後之君子。」
신비, 유엽, 산기시랑 부선(傅巽), 위진(衞臻), 상서령(尚書令) 환계(桓階), 상서(尚書) 진교(陳矯), 진군(陳羣), 급사중박사 기도위(給事中博士騎都尉) 소림(蘇林), 동파(董巴)가 표를 올려다.
癸丑,宣告羣寮。督軍御史中丞司馬懿、侍御史鄭渾、羊祕、鮑勛、武周等言:「令如左。伏讀太史丞許芝上符命事,臣等聞有唐世衰,天命在虞,虞氏世衰,天命在夏;然則天地之靈,歷數之運,去就之符,惟德所在。故孔子曰:『鳳鳥不至,河不出圖,吾已矣夫!』今漢室衰,自安、和、沖、質以來,國統屢絕,桓、靈荒淫,祿去公室,此乃天命去就,非一朝一夕,其所由來乆矣。殿下踐阼,至德廣被,格于上下,天人感應,符瑞並臻,考之舊史,未有若今日之盛。夫大人者,先天而天弗違,後天而奉天時,天時已至而猶謙讓者,舜、禹所不為也,故生民蒙救濟之惠,羣類受育長之施。今八方顒顒,大小注望,皇天乃眷,神人同謀,十分而九以委質,義過周文,所謂過恭也。臣妾上下,伏所不安。」令曰:「世之所不足者道義也,所有餘者苟妄也;常人之性,賤所不足,貴所有餘,故曰『不患無位,患所以立』。孤雖寡德,庶自免於常人之貴。夫『石可破而不可奪堅,丹可磨而不可奪赤』。丹石微物,尚保斯質,況吾託士人之末列,曾受教於君子哉?且於陵子仲以仁為富,栢成子高以義為貴,鮑焦感子貢之言,棄其蔬而槁死,薪者譏季札失辭,皆委重而弗視。吾獨何人?昔周武,大聖也,使叔旦盟膠鬲於四內,使公召約微子於共頭,故伯夷、叔齊相與笑之曰:『昔神農氏之有天下,不以人之壞自成,不以人之卑自高。』以為周之伐殷以恭也。吾德非周武而義慙夷、齊,庶欲遠苟妄之失道,立丹石之不奪,邁於陵之所富,蹈栢成之所貴,執鮑焦之貞至,遵薪者之清節。故曰:『三軍可奪帥,匹夫不可奪志。』吾之斯志,豈可奪哉?」
乙卯,冊詔魏王禪代天下曰:「惟延康元年十月乙卯,皇帝曰:咨爾魏王,夫命運否泰,依德升降,三代卜年,著于春秋,是以天命不于常,帝王不一姓,由來尚矣。漢道陵遲,為日已乆,安、順已降,世失其序,沖、質短祚,三世無嗣,皇綱肇虧,帝典頹沮。曁于朕躬,天降之災,遭無妄厄運之會,值炎精幽昧之期。變興輦轂,禍由閹宦。董卓乘釁,惡甚澆、犬壹 ,劫遷省御太僕宮廟,遂使九州幅裂,彊敵虎爭,華夏鼎沸,蝮蛇塞路。當斯之時,尺土非復漢有,一夫豈復朕民?幸賴武王德膺符運,奮揚神武,芟夷兇暴,清定區夏,保乂皇家。今王纘承前緒,至德光昭,御衡不迷,布德優遠,聲教被四海,仁風扇鬼區,是以四方效珍,人神響應,天之歷數實在爾躬。昔虞舜有大功二十,而放勳禪以天下;大禹有疏導之績,而重華禪以帝位。漢承堯運,有傳聖之義,加順靈祇,紹天明命,釐降二女,以嬪于魏。使使持節行御史大夫事太常音,奉皇帝璽綬,王其永君萬國,敬御天威,允執其中,天祿永終,敬之哉?」
오오 위왕이여(咨爾魏王), ......... 幸賴武王德膺符運: 다행히 무왕 조操가 그 덕망으로써 부운符運을 받고 신무神武를 떨쳐 흉폭한 무리를 삼제芟除(제거)해 구하區夏(중원)를 청정清定했소
於是尚書令桓階等奏曰:「漢氏以天子位禪之陛下,陛下以聖明之德,歷數之序,承漢之禪,允當天心。夫天命弗可得辭,兆民之望弗可得違,臣請會列侯諸將、羣臣陪隷,發璽書,順天命,具禮儀列奏。」令曰:「當議孤終不當承之意而已。猶獵,還方有令。」尚書令等又奏曰:「昔堯、舜禪於文祖,至漢氏,以師征受命,畏天之威,不敢怠遑,便即位行在所之地。今當受禪代之命,宜會百寮羣司,六軍之士,皆在行位,使咸覩天命。營中促狹,可於平敞之處設壇場,奉荅休命。臣輒與侍中常侍會議禮儀,太史官擇吉日訖,復奏。」令曰:「吾殊不敢當之,外亦何豫事也!」侍中劉廙、常侍衞臻等奏議曰:「漢氏遵唐堯公天下之議,陛下以聖德膺歷數之運,天人同忻,靡不得所,宜順靈符,速踐皇阼。問太史丞許芝,今月十七日己未宜成,可受禪命,輒治壇場之處,所當施行別奏。」令曰;「屬出見外,便設壇場,斯何謂乎?今當辭讓不受詔也。但於帳前發璽書,威儀如常,且天寒,罷作壇士使歸。」旣發璽書,王令曰:「當奉還璽綬為讓章。吾豈奉此詔承此貺邪?昔堯讓天下於許由、子州支甫,舜亦讓於善卷、石戶之農、北人無擇,或退而耕潁之陽,或辭以幽憂之疾,或遠入山林,莫知其處,或攜子入海,終身不反,或以為辱,自投深淵;且顏燭懼天撲之不完,守知足之明分,王子搜樂丹穴之潛處,被熏而不出,柳下惠不以三公之貴易其介,曾參不以晉、楚之富易其仁:斯九士者,咸高節而尚義,輕富而賤貴,故書名千載,于今稱焉。求仁得仁,仁豈在遠?孤獨何為不如哉?義有蹈東海而逝,不奉漢朝之詔也。亟為上章還璽綬,宣之天下,使咸聞焉。」
己未,宣告羣寮,下魏,又下天下。 輔國將軍清苑侯劉若等百二十人上書曰:「伏讀令書,深執克讓,聖意懇惻,至誠外昭,臣等有所不安。何者?石戶、北人,匹夫狂狷,行不合義,事不經見者,是以史遷謂之不然,誠非聖明所當希慕。且有虞不逆放勛之禪,夏禹亦無辭位之語,故傳曰:『舜陟帝位,若固有之。』斯誠聖人知天命不可逆,歷數弗可辭也。伏惟陛下應乾符運,至德發聞,升昭于天,是三靈降瑞,人神以和,休徵雜沓,萬國響應,雖欲勿用,將焉避之?而固執謙虛,違天逆衆,慕匹夫之微分,背上聖之所蹈,違經讖之明文,信百氏之穿鑿,非所以奉荅天命,光慰衆望也。臣等昧死以請,輒整頓壇場,至吉日受命,如前奏,分別寫令宣下。」王令曰:「昔柏成子高辭夏禹而匿野,顏闔辭魯幣而遠跡,夫以王者之重,諸侯之貴,而二子忽之,何則?其節高也。故烈士徇榮名,義夫高貞介,雖蔬食瓢飲,樂在其中。是以仲尼師王駘,而子產嘉申徒。今諸卿皆孤股肱腹心,足以明孤,而今咸若斯,則諸卿遊於形骸之內,而孤求為形骸之外,其不相知,未足多怪。亟為上章還璽綬,勿復紛紛也。」
輔國將軍等一百二十人又奏曰:「臣聞符命不虛見,衆心弗可違,故孔子曰:『周公其為不聖乎?以天下讓。是天地日月輕去萬物也。』是以舜嚮天下,不拜而受命。今火德氣盡,炎上數終,帝遷明德,祚隆大魏。符瑞昭晢,受命旣固,光天之下,神人同應,雖有虞儀鳳,成周躍魚,方今之事,未足以喻。而陛下違天命以飾小行,逆人心以守私志,上忤皇穹眷命之旨,中忘聖人達節之數,下孤人臣翹首之望,非所以揚聖道之高衢,乘無窮之懿勳也。臣等聞事君有獻可替否之道,奉上有逆鱗固爭之義,臣等敢以死請。」令曰:「太古聖王之治也,至德合乾坤,惠澤均造化,禮教優乎昆蟲,仁恩洽乎草木,日月所照,戴天履地含氣有生之類,靡不被服清風,沐浴玄德;是以金革不起,苛慝不作,風雨應節,禎祥觸類而見。今百姓寒者未暖,饑者未飽,鰥者未室,寡者未嫁;權、備尚存,未可舞以干戚,方將整以齊斧;戎役未息於外,士民未安於內,耳未聞康哉之歌,目未覩擊壤之戲,嬰兒未可託於高巢,餘糧未可以宿於田畒:人事未備,至如此也。夜未曜景星,治未通真人,河未出龍馬,山未出象車,蓂莢未植階塗,萐莆未生庖廚,王母未獻白環,渠搜未見珍裘:靈瑞未效,又如彼也。昔東戶季子、容成、大庭、軒轅、赫胥之君,咸得以此就功勒名。今諸卿獨不可少假孤精心竭慮,以和天人,以格至理,使彼衆事備,羣瑞效,然後安乃議此乎,何遽相愧相迫之如是也?速為讓章,上還璽綬,無重吾不德也。」
侍中劉廙等奏曰:「伏惟陛下以大聖之純懿,當天命之歷數,觀天象則符瑞著明,考圖緯則文義煥炳,察人事則四海齊心,稽前代則異世同歸;而固拒禪命,未踐尊位,聖意懇惻,臣等敢不奉詔?輒具章遣使者。」奉令曰:「泰伯三以天下讓,人無得而稱焉,仲尼歎其至德,孤獨何人?」
庚申,魏王上書曰:「皇帝陛下:奉被今月乙卯璽書,伏聽冊命,五內驚震,精爽散越,不知所處。臣前上還相位,退守藩國,聖恩聽許。臣雖無古人量德度身自定之志,保己存性,實其私願。不寤陛下猥損過謬之命,發不世之詔,以加無德之臣。且聞堯禪重華,舉其克諧之德,舜授文命,采其齊聖之美,猶下咨四嶽,上觀璿璣。今臣德非虞、夏,行非二君,而承歷數之諮,應選授之命,內自揆撫,無德以稱。且許由匹夫,猶拒帝位,善卷布衣,而逆虞詔。臣雖鄙蔽,敢忘守節以當大命,不勝至願。謹拜章陳情,使行相國永壽少府糞土臣毛宗奏,并上璽綬。」
辛酉,給事中博士蘇林、董巴上表曰:「天有十二次以為分野,王公之國,各有所屬,周在鶉火,魏在大梁。歲星行歷十二次國,天子受命,諸侯以封。周文王始受命,歲在鶉火,至武王伐紂十三年,歲星復在鶉火,故春秋傳曰:『武王伐紂,歲在鶉火;歲之所在,即我有周之分野也。』昔光和七年,歲在大梁,武王始受命,為時將討黃巾。是歲改年為中平元年。建安元年,歲復在大梁,始拜大將軍。十三年復在大梁,始拜丞相。今二十五年,歲復在大梁,陛下受命。此魏得歲與周文王受命相應。今年青龍在庚子,詩推度災曰:『庚者更也,子者滋也,聖命天下治。』又曰:『王者布德於子,治成於丑。』此言今年天更命聖人制治天下,布德於民也。魏以改制天下,與時協矣。顓頊受命,歲在豕韋,衞居其地,亦在豕韋,故春秋傳曰:『衞,顓頊之墟也。』今十月斗之建,則顓頊受命之分也,始魏以十月受禪,此同符始祖受命之驗也。魏之氏族,出自顓頊,與舜同祖,見于春秋世家。舜以土德承堯之火,今魏亦以土德承漢之火,於行運,會於堯舜授受之次。臣聞天之去就,固有常分,聖人當之,昭然不疑,故堯捐骨肉而禪有虞,終無恡色,舜發壠畒而君天下,若固有之,其相受授,間不替漏;天下已傳矣,所以急天命,天下不可一日無君也。今漢期運已終,妖異絕之已審,陛下受天之命,符瑞告徵,丁寧詳悉,反覆備至,雖言語相喻,無以代此。今旣發詔書,璽綬未御,固執謙讓,上逆天命,下違民望。臣謹按古之典籍,參以圖緯,魏之行運及天道所在,即尊之驗,在於今年此月,昭晰分明。唯陛下遷思易慮,以時即位,顯告天帝而告天下,然後改正朔,易服色,正大號,天下幸甚。」令曰:「凡斯皆宜聖德,故曰:『苟非其人,道不虛行。』天瑞雖彰,須德而光;吾德薄之人,胡足以當之?今讓,兾見聽許,外內咸使聞知。」
壬戌,冊詔曰:「皇帝問魏王言:遣宗奉庚申書到,所稱引,聞之。朕惟漢家世踰二十,年過四百,運周數終,行祚已訖,天心已移,兆民望絕,天之所廢,有自來矣。今大命有所底止,神器當歸聖德,違天不順,逆衆不祥。王其體有虞之盛德,應歷數之嘉會,是以禎祥吉符,圖讖表錄,神人同應,受命咸宜。朕畏上帝,致位于王;天不可違,衆不可拒。且重華不逆堯命,大禹不辭舜位,若夫由、卷匹夫,不載聖籍,固非皇材帝器所當稱慕。今使音奉皇帝璽綬,王其陟帝位,無逆朕命,以祗奉天心焉。」
於是尚書令桓階等奏曰:「今漢使音奉璽書到,臣等以為天命不可稽,神器不可瀆。周武中流有白魚之應,不待師期而大號已建,舜受大麓,桑蔭未移而已陟帝位,皆所以祗承天命,若此之速也。故無固讓之義,不以守節為貴,必道信於神靈,符合於天地而已。易曰:『其受命如響,無有遠近幽深,遂知來物,非天下之至賾,其孰能與於此?』今陛下應期運之數,為皇天所子,而復稽滯於辭讓,低回於大號,非所以則天地之道,副萬國之望。臣等敢以死請,輒勑有司脩治壇場,擇吉日,受禪命,發璽綬。」令曰:「兾三讓而不見聽,何汲汲於斯乎?」
甲子,魏王上書曰:「奉今月壬戌璽書,重被聖命,伏聽冊告,肝膽戰悸,不知所措。天下神器,禪代重事,故堯將禪舜,納于大麓,舜之命禹,玄圭告功;烈風不迷,九州攸平,詢事考言,然後乃命,而猶執謙讓于德不嗣。況臣頑固,質非二聖,乃應天統,受終明詔;敢守微節,歸志箕山,不勝大願。謹拜表陳情,使并奉上璽綬。」
侍中劉廙等奏曰:「臣等聞聖帝不違時,明主不逆人,故易稱通天下之志,斷天下之疑。伏惟陛下體有虞之上聖,承土德之行運,當亢陽明夷之會,應漢氏祚終之數,合契皇極,同符兩儀。是以聖瑞表徵,天下同應,歷運去就,深切著明;論之天命,無所與議,比之時宜,無所與爭。故受命之期,時清日晏,曜靈施光,休氣雲蒸。是乃天道恱懌,民心欣戴,而仍見閉拒,於禮何居?且羣生不可以一日無主,神器不可以斯須無統,故臣有違君以成業,下有矯上以立事,臣等敢不重以死請。」王令曰:「天下重器,王者正統,以聖德當之,猶有懼心,吾何人哉?且公卿未至乏主,斯豈小事,且宜以待固讓之後,乃當更議其可耳。」
丁卯,冊詔魏王曰:「天訖漢祚,辰象著明,朕祗天命,致位于王,仍陳歷數於詔冊,喻符運於翰墨;神器不可以辭拒,皇位不可以謙讓,稽於天命,至于再三。且四海不可一日曠主,萬機不可以斯須乏統,故建大業者不拘小節,知天命者不繫細物,是以舜受大業之命而無遜讓之辭,聖人達節,不亦遠乎!今使音奉皇帝璽綬,王其欽承,以荅天下嚮應之望焉。」
相國華歆、太尉賈詡、御史大夫王朗及九卿上言曰:「臣等被召到,伏見太史丞許芝、左中郎將李伏所上圖讖、符命,侍中劉廙等宣叙衆心,人靈同謀。又漢朝知陛下聖化通于神明,聖德參于虞、夏,因瑞應之備至,聽歷數之所在,遂獻璽綬,固讓尊號。能言之倫,莫不抃舞,河圖、洛書,天命瑞應,人事恊于天時,民言恊于天序。而陛下性秉勞謙,體尚克讓,明詔懇切,未肯聽許,臣妾小人,莫不伊邑。臣等聞自古及今,有天下者不常在乎一姓;考以德勢,則盛衰在乎彊弱,論以終始,則廢興在乎期運。唐、虞歷數,不在厥子而在舜、禹。舜、禹雖懷克讓之意迫,羣后執玉帛而朝之,兆民懷欣戴而歸之,率土揚謌謠而詠之,故其守節之拘,不可得而常處,達節之權,不可得而乆避;是以或遜位而不ㄨ厷 ,或受禪而不辭,不ㄨ厷 者未必厭皇寵,不辭者未必渴帝祚,各迫天命而不得以已。旣禪之後,則唐氏之子為賔于有虞,虞氏之冑為客于夏代,然則禪代之義,非獨受之者實應天福,授之者亦與有餘慶焉。漢自章、和之後,世多變故,稍以陵遲,洎乎孝靈,不恒其心,虐賢害仁,聚斂無度,政在嬖豎,視民如讎,遂令上天震怒,百姓從風如歸;當時則四海鼎沸,旣沒則禍發宮庭,寵勢並竭,帝室遂卑,若在帝舜之末節,猶擇聖代而授之,荊人抱玉璞,猶思良工而刊之,況漢國旣往,莫之能匡,推器移君,委之聖哲,固其宜也。漢朝委質,旣願禪禮之速定也,天祚率土,必將有主;主率土者,非陛下其孰能任之?所謂論德無與為比,考功無推讓矣。天命不可久稽,民望不不可久違,臣等慺慺,不勝大願。伏請陛下割撝謙之志,脩受禪之禮,副人神之意,慰外內之願。」令曰:「以德則孤不足,以時則戎虜未滅。若以羣賢之靈,得保首領,終君魏國,於孤足矣。若孤者,胡足以辱四海?至乎天瑞人事,皆先王聖德遺慶,孤何有焉?是以未敢聞命。」
己巳,魏王上書曰:「臣聞舜有賔于四門之勳,乃受禪于陶唐,禹有存國七百之功,乃承祿於有虞。臣以蒙蔽,德非二聖,猥當天統,不敢聞命。敢屢抗疏,略陳私願,庶章通紫庭,得全微節,情達宸極,永守本志。而音重復銜命,申制詔臣,臣實戰惕,不發璽書,而音迫於嚴詔,不敢復命。願陛下馳傳騁馹,召音還臺。不勝至誠,謹使宗奉書。」
相國歆、太尉詡、御史大夫朗及九卿奏曰:「臣等伏讀詔書,於悒益甚。臣等聞易稱聖人奉天時,論語云君子畏天命,天命有去就,然後帝者有禪代。是以唐之禪虞,命在爾躬,虞之順唐,謂之受終;堯知天命去己,故不得不禪舜,舜知歷數在躬,故不敢不受;不得不禪,奉天時也,不敢不受,畏天命也。漢朝雖承季末陵遲之餘,猶務奉天命以則堯之道,是以願禪帝位而歸二女。而陛下正於大魏受命之初,抑虞、夏之達節,尚延陵之讓退,而所枉者大,所直者小,所詳者輕,所略者重,中人凡士猶為陛下陋之。沒者有靈,則重華必忿憤於蒼梧之神墓,大禹必鬱悒於會稽之山陰,武王必不恱於商陵之玄宮矣。是以臣等敢以死請。且漢政在閹宦,祿去帝室七世矣,遂集矢石于其宮殿,而二京為之丘墟。當是之時,四海蕩覆,天下分崩,武王親衣甲而冠冑,沐雨而櫛風,為民請命,則活萬國,為世撥亂,則致升平,鳩民而立長,築宮而置吏,元元無過,罔於前業,而始有造於華夏。陛下即位,光昭文德,以翊武功,勤恤民隱,視之如傷,懼者寧之,勞者息之,寒者以暖,饑者以充,遠人以恩復,寇敵以恩降,邁恩種德,光被四表;稽古篤睦,茂于放勛,網漏吞舟,弘乎周文。是以布政未朞,人神並和,皇天則降甘露而臻四靈,后土則挺芝草而吐醴泉,虎豹鹿兔,皆素其色,雉鳩燕雀,亦白其羽,連理之木,同心之瓜,五采之魚,珍祥瑞物,雜沓於其間者,無不畢備。古人有言:『微禹,吾其魚乎!』微大魏,則臣等之白骨交橫于曠野矣。伏省羣臣外內前後章奏,所以陳叙陛下之符命者,莫不條河洛之圖書,據天地之瑞應,因漢朝之款誠,宣萬方之景附,可謂信矣省矣;三王無以及,五帝無以加。民命之懸於魏邦,民心之繫於魏政,三十有餘年矣,此乃千世時至之會,萬載一遇之秋;達節廣度,宜昭於斯際,拘牽小節,不施於此時。久稽天命,罪在臣等。輒營壇場,具禮儀,擇吉日,昭告昊天上帝,秩羣神之禮,須禋祭畢,會羣寮於朝堂,議年號、正朔、服色當施行。」
上復令曰:「昔者大舜飯糗茹草,將終身焉,斯則孤之前志也。及至承堯禪,被珍裘,妻二女,若固有之,斯則順天命也。羣公卿士誠以天命不可拒,民望不可違,孤亦曷以辭焉?」 庚午,冊詔魏王曰:「昔堯以配天之德,秉六合之重,猶覩歷運之數,移於有虞,委讓帝位,忽如遺跡。今天旣訖我漢命,乃眷北顧,帝皇之業,實有大魏。朕守空名以竊古義,顧視前事,猶有慙德,而王遜讓至于三四,朕用懼焉。夫不辭萬乘之位者,知命達節之數也,虞、夏之君,處之不疑,故勳烈垂于萬載,美名傳於無窮。今遣守尚書令侍中覬喻,王其速陟帝位,以順天人之心,副朕之大願。」於是尚書令桓階等奏曰:「今漢氏之命已四至,而陛下前後固辭,臣等伏以為上帝之臨聖德,期運之隆大魏,斯豈數載?傳稱周之有天下,非甲子之朝,殷之去帝位,非牧野之日也,故詩序商湯,追本玄王之至,述姬周,上錄后稷之生,是以受命旣固,厥德不回。漢氏衰廢,行次已絕,三辰垂其徵,史官著其驗,耆老記先古之占,百姓協謌謠之聲。陛下應天受禪,當速即壇場,柴燎上帝,誠不宜久停神器,拒億兆之願。臣輒下太史令擇元辰,今月二十九日,可登壇受命,請詔三公羣卿,具條禮儀別奏。」令曰:「可。」
乃為壇於繁陽。庚午,王升壇即阼,百官陪位。事訖,降壇,視燎成禮而反。改延康為黃初,大赦。 獻帝傳曰:辛未,魏王登壇受禪,公卿、列侯、諸將、匈奴單于、四夷朝者數萬人陪位,燎祭天地、五嶽、四瀆,曰:「皇帝臣丕敢用玄牡昭告于皇皇后帝:漢歷世二十有四,踐年四百二十有六,四海困窮,王綱不立,五緯錯行,靈祥並見,推術數者,慮之古道,咸以為天之歷數,運終茲世,凡諸嘉祥民神之意,比昭有漢數終之極,魏家受命之符。漢主以神器宜授於臣,憲章有虞,致位于丕。丕震畏天命,雖休勿休。羣公庶尹六事之人,外及將士,洎于蠻夷君長,僉曰:『天命不可以辭拒,神器不可以久曠,羣臣不可以無主,萬機不可以無統。』丕祇承皇象,敢不欽承。卜之守龜,兆有大橫,筮之三易,兆有革兆,謹擇元日,與羣寮登壇受帝璽綬,告類于爾大神;唯爾有禪,尚饗永吉,兆民之望,祚于有魏世享。」遂制詔三公:「 上古之始有君也,必崇恩化以美風俗,然百姓順教而刑辟厝焉。今朕承帝王之緒,其以延康元年為黃初元年,議改正朔,易服色,殊徽號,同律度量,承土行,大赦天下;自殊死以下,諸不當得赦,皆赦除之。」 魏氏春秋曰:帝升壇禮畢,顧謂羣臣曰:「舜、禹之事,吾知之矣。」 干竇搜神記曰:宋大夫邢史子臣明於天道,周敬王之三十七年,景公問曰:「天道其何祥?」對曰:「後五年五月丁亥,臣將死;死後五年五月丁卯,吳將亡;亡後五年,君將終;終後四百年,邾王天下。」俄而皆如其言。所云邾王天下者,謂魏之興也。邾,曹姓,魏亦曹姓,皆邾之後。其年數則錯,未知邢史失其數邪,將年代久遠,注記者傳而有謬也?
10월 경오일(28일) 왕은 제단에 올라 제위를 이었으며, 관위에 따라 백관을 배석시켰다. 의식이 끝나자 제단을 내려와서 섶을 불살라 하늘에 제사 지내어 의례를 끝내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연호를 연강에서 황초(黃初)로 바꾸고 천하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黃初元年十一月癸酉,以河內之山陽邑萬戶奉漢帝為山陽公,行漢正朔,以天子之禮郊祭,上書不稱臣,京都有事于太廟,致胙;封公之四子為列侯。追尊皇祖太王曰太皇帝,考武王曰武皇帝,尊王太后曰皇太后。賜男子爵人一級,為父後及孝悌力田人二級。以漢諸侯王為崇德侯,列侯為關中侯。以潁陰之繁陽亭為繁昌縣。封爵增位各有差。改相國為司徒,御史大夫為司空,奉常為太常,郎中令為光祿勳,大理為廷尉,大農為大司農。郡國縣邑,多所改易。更授匈奴南單于呼廚泉魏璽綬,賜青蓋車、乘輿、寶劔、玉玦。十二月,初營洛陽宮,戊午幸洛陽。 臣松之案:諸書記是時帝居北宮,以建始殿朝羣臣,門曰承明,陳思王植詩曰「謁帝承明廬」是也。至明帝時,始於漢南宮崇德殿處起太極、昭陽諸殿。 魏書曰:以夏數為得天,故即用夏正,而服色尚黃。 魏略曰:詔以漢火行也,火忌水,故「洛」去「水」而加「隹」。魏於行次為土,土,水之牡也,水得土而乃流,土得水而柔,故除「隹」加「水」,變「雒」為「洛」。
황초 원년(220) 11월 1일
조비는 한 헌제 유협에게 하내군(河內郡) 산양현(山陽縣) 마을 1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한 헌제를 산양공(山陽公)이라고 하였다. 또 한나라 조정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하고 천자의 의례에 따라 하늘에 제사지내게 했으며, 상서를 올릴 경우에도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게 하고, 수도에서 태묘에 제사를 행할 때에도 그에게 공물을 주었으며 공(유협)의 네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황제의 조부 태왕(太王: 조숭)을 추존하여 태황제(太皇帝)라고 하였으며, 부친 무왕(태조)에게 무황제(武皇帝)의 칭호를 바쳤으며, 왕태후(王太后)를 존중하여 황태후(皇太后)의 칭호를 주었다. 천하의 남자 각각 작위를 한 등급씩 올리고, 부친을 이어 가장이 된 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을 존경하고 농사를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각기 작위를 두 등급씩 올려 주었다. 한나라의 제후왕을 숭덕후(崇德侯)에, 열후를 관중후(關中侯)에 봉했다.
영음(潁陰)의 번양정(繁陽亭)을 번창현(繁昌縣)이라 하고, 조정 대신들 가운데 봉작, 관위의 승진을 사람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아울러 상국을 사도로, 어사대부를 사공(司空)으로, 봉상(奉常)을 태상(太常)으로, 낭중령(郎中令)을 광록훈(光祿勳)으로, 대리(大理)를 정위(廷尉)로, 대농(大農)을 대사농(大司農)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군이나 국의 현, 읍도 변경한 것이 많았다. 흉노 남선우호주천(南單于呼廚泉)에게 위나라의 옥새와 혁대를 수여하고, 청개거(靑蓋車), 승여(乘輿), 보검, 옥결(玉玦: 한 곳이 끊어진 둥근 모양의 옥)을 하사했다.
12월 낙양궁을 수축하기 시작했다. 17일 낙양에 도착했다.(21)
(21)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案) - 여러 서적을 보면 이때 문제는 북궁(北宮)에 머물고 있었고, 건시전(建始殿)에서 많은 신하들을 만났고, 궁문의 이름을 승명(承明)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진사왕 조식의 시에 알제승명려(謁帝承明廬)라는 작품은 이런 것과 연관성이 있다. 명제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한의 남궁(南宮)인 숭덕전(崇德殿)이 있던 장소에 태극(太極)과 소양(昭陽)의 여러 궁전을 지었다.
是歲,長水校尉戴陵諫不宜數行弋獵,帝大怒;陵減死罪一等。
이 해(220) 장수교위(長水校尉) 대릉(戴陵)은 문제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문제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가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로 경감시켰다.
二年春正月,郊祀天地、明堂。甲戌,校獵至原陵,遣使者以太牢祠漢世祖。乙亥,朝日于東郊。 臣松之以為禮天子以春分朝日,秋分夕月;尋此年正月郊祀,有月無日,乙亥朝日,則有日無月,蓋文之脫也。案明帝朝日夕月,皆如禮文,故知此紀為誤者也。
初令郡國口滿十萬者,歲察孝廉一人;其有秀異,無拘戶口。辛巳,分三公戶邑,封子弟各一人為列侯。壬午,復潁川郡一年田租。 魏書載詔曰:「潁川,先帝所由起兵征伐也。官渡之役,四方瓦解,遠近顧望,而此郡守義,丁壯荷戈,老弱負糧。昔漢祖以秦中為國本,光武恃河內為王基,今朕復於此登壇受禪,天以此郡翼成大魏。」
황초 2년(221) 봄 정월 문제는 교외로 나가 천지와 명당(明堂 : 정교의 전당)에 제사를 지냈다.
3일 나무로 만든 울타리로 짐승의 퇴로를 막고 사냥하기 위해 원릉(原陵)까지 가서 사자를 파견하여 태뢰(太牢 : 소, 돼지, 양 등 희생)를 받들고 한나라 세조(光武帝)에게 제사를 올렸다.
4일 동쪽 교외에서 태양에 제사지냈다.(22)
(22)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 - 예법에 천자는 춘분(春分)에 태양에 제사지내고 추분(秋分)에 달에 제사 지낸다. 이 해 정월, 하늘에 제사지낸 것을 살펴보면 달은 있었지만 해는 없었고, 을해일에 태양을 제사지낸 경우, 해는 있지만 달은 없었다. 명제가 태양에 제사지내고 달에 제사지낼 때의 일을 조사하면 예(禮)의 문장과 같다. 그러므로 이 본기(本紀)가 착오가 있는 것이다.
최초의 법령에서는 군국의 인구가 10만 명일 경우, 1년마다 효렴 한 명씩을 추천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인구 수에 한정되지 않았다.
10일 삼공의 식읍으로부터 한 부분씩 떼어낸 토지로써 봉지(封地)로 삼았다.
11일 선제가 의병을 일으켰던 영천군(潁川郡)에 1년간 토지세를 면제하였으며,(23)
(23) 위서(魏書) -
改許縣為許昌縣。以魏郡東部為陽平郡,西部為廣平郡。 魏略曰:改長安、譙、許昌、鄴、洛陽為五都;立石表,西界宜陽,北循太行,東北界陽平,南循魯陽,東界郯,為中都之地。令天下聽內徙,復五年,後又增其復。
허현(許縣)을 허창현(許昌縣)이라고 바꾸었다. 위군(魏郡)의 동쪽 지역의 경계를 양평군(陽平郡)으로, 서쪽 지역의 경계를 광평군(廣平郡)으로 바꿨다.(24)
(24) 위략(魏略) - 장안(長安), 초(譙), 허창(許昌), 업(鄴), 낙양(洛陽)을 오도(五都)로 바꾸고 돌로 표지를 세웠다. 서쪽은 의양(宜陽)을 경계로 하고, 북쪽은 태행(太行)산맥에 이어져 있고, 동북쪽은 양평(陽平)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노양(魯陽)에 이어져 있으며, 동쪽은 담(郯)을 경계로 하여 중도(中都)지역으로 정했다. 천하 사람들에게 이 안으로 이주할 것을 허락하고, 5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었는데, 나중에 또 면제기간을 연장했다.
詔曰:「昔仲尼資大聖之才,懷帝王之器,當衰周之末,無受命之運,在魯、衞之朝,教化乎洙、泗之上,悽悽焉,遑遑焉,欲屈己以存道,貶身以救世。于時王公終莫能用之,乃退考五代之禮,脩素王之事,因魯史而制春秋,就太師而正雅頌,俾千載之後,莫不宗其文以述作,仰其聖以成謀,咨!可謂命世之大聖,億載之師表者也。遭天下大亂,百祀墮壞,舊居之廟,毀而不脩,襃成之後,絕而莫繼,闕里不聞講頌之聲,四時不覩蒸甞之位,斯豈所謂崇禮報功,盛德百世必祀者哉!其以議郎孔羨為宗聖侯,邑百戶,奉孔子祀。」
令魯郡脩起舊廟,置百戶吏卒以守衞之,又於其外廣為室屋以居學者。
문제는 조칙을 내렸다.
- 옛날에 공자는 위대한 성인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제왕의 도량을 품고 있었으나, 쇠락해가는 주나라의 말기에 처하여 천명을 받을 운세가 없었다. 그는 노나라와 위나라에 살면서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유역에서 처량하고 황공해하면서 자신을 굽혀 천도를 보존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신분을 낮춤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에 각 나라의 왕이나 제후들은 결국 그 누구도 그를 임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물러나 오대(五代 : 唐, 虞, 夏, 殷, 周)의 예법을 연구하고 제위에 있지 않았던 왕들의 일을 수찬하고자 생각하여, 노나라의 역사 기록에 기초하여 춘추를 편찬하고, 태사(太師 : 약관의 우두머리)에 나아가 아송(雅頌 : 시경 중의 하나)을 바로잡았으므로, 천 년이 지난 이후에도 모두 그의 문장에 의거하여 창작하고, 그의 성스러운 도리를 우러러보고 모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 정녕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성인이며, 억만 년 스승의 표상이다. 천하에 큰 혼란을 만나서 각종 제사가 타락하고 훼손되어 버렸고, 그가 옛날에 살던 묘당이 훼손되었어도 고칠 사람이 없다. 그의 후예는 일찍이 한나라 조정에서 포성후(褒成侯)에 봉해졌으나, 지금은 이런 작위도 계승할 사람이 없다. 그의 고향 궐리(闕里)에는 경서를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매년 사계절에도 제사를 치를 사람이 없으니, 이 어찌 예를 중시하고 공훈에 보답하는 것이며, 위대한 은덕을 세운 사람을 백 세대 이후라도 반드시 제사지낼 수 있음인가? 의랑(議郞) 공선(孔羨)을 종성후(宗聖侯)에 봉하였고, 1백 호의 봉토를 누리게 하여 공자의 후예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할 뿐이다.
문제는 노군(魯郡)에 명령을 내려 공자의 옛 묘당을 새로 개수하고, 1백 호의 관리와 병졸을 두어 그것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제묘의 바깥을 넓혀 방을 만들고 학자들이 살면서 학습하도록 했다.
三月,加遼東太守公孫恭為車騎將軍。初復五銖錢。夏四月,以車騎將軍曹仁為大將軍。五月,鄭甘復叛,遣曹仁討斬之。六月庚子,初祀五嶽四瀆,咸秩羣祀。 魏書:甲辰,以京師宗廟未成,帝親祠武皇帝于建始殿,躬執饋奠,如家人之禮。 丁卯,夫人甄氏卒。戊辰晦,日有食之,有司奏免太尉,詔曰:「災異之作,以譴元首,而歸過股肱,豈禹、湯罪己之義乎?其令百官各虔厥職,後有天地之眚,勿復劾三公。」
봄 3월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공(公孫恭)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을 겸하도록 했다. 처음으로 오주전(五鑄錢)을 부활시켰다.
여름 4월 거기장군(車騎將軍) 조인(曹仁)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였다.
5월 정감(鄭甘)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을 파견하여 토벌하고 그를 참수시키도록 했다.
6월 1일 처음으로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에 제사지내기 시작했고, 모든 제사의 규칙을 제정했다.(25)
[25] 위서(魏書) -
28일 부인 견씨(甄氏)가 세상을 떠났다.
29일 일식이 나타나자, 담당 관리가 태위(太尉)를 면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하니 조칙을 내렸다.
- 재해나 이변이 출현하면 그 우두머리를 견책하는 것이거늘, 신하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은 어찌 우임금이나 탕임금이 자신들에게 죄를 물은 의로움과 부합되겠는가? 지금 명하노니 백관들은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할 것이며, 이후에 천지의 재난이 있어도 다시 삼공(三公)을 탄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秋八月,孫權遣使奉章,并遣于禁等還。丁巳,使太常邢貞持節拜權為大將軍,封吳王,加九錫。冬十月,授楊彪光祿大夫。 魏書曰:己亥,公卿朝朔旦,并引故漢太尉楊彪,待以客禮,詔曰:「夫先王制几杖之賜,所以賔禮黃耇襃崇元老也。昔孔光、卓茂皆以淑德高年,受茲嘉錫。公故漢宰臣,乃祖已來,世著名節,年過七十,行不踰矩,可謂老成人矣,所宜寵異以章舊德。其賜公延年杖及馮几;謁請之日,便使杖入,又可使著鹿皮冠。」彪辭讓不聽,竟著布單衣、皮弁以見。 續漢書曰:彪見漢祚將終,自以累世為三公,恥為魏臣,遂稱足攣,不復行。積十餘年,帝即王位,欲以為太尉,令近臣宣旨。彪辭曰:「甞以漢朝為三公,值世衰亂,不能立尺寸之益,若復為魏臣,於國之選,亦不為榮也。」帝不奪其意。黃初四年,詔拜光祿大夫,秩中二千石,朝見位次三公,如孔光故事。彪上章固讓,帝不聽,又為門施行馬,致吏卒,以優崇之。年八十四,以六年薨。子脩,事見陳思王傳。
以穀貴,罷五銖錢。 魏書曰:十一月辛未,鎮西將軍曹真命衆將及州郡兵討破叛胡治元多、蘆水、封賞等,斬首五萬餘級,獲生口十萬,羊一百一十一萬口,牛八萬,河西遂平。帝初聞胡決水灌顯美,謂左右諸將曰:「昔隗嚻灌略陽,而光武因其疲弊,進兵滅之。今胡決水灌顯美,其事正相似,破胡事今至不久。」旬日,破胡告檄到,上大笑曰:「吾策之於帷幕之內,諸將奮擊於萬里之外,其相應若合符契。前後戰克獲虜,未有如此也。」 己卯,以大將軍曹仁為大司馬。十二月,行東巡。是歲築陵雲臺。
가을 8월 손권이 사자를 파견하여 표장(表章)을 상주하고 아울러 우금(于禁) 등을 보내어 돌아오게 했다.
19일 문제는 태상 형정(邢貞)에게 부절을 갖게 하여 강동에 이르러 손권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오왕을 책봉했으며 구석(九錫)을 하사했다.
겨울 10월 양표(楊彪)에게 광록대부의 직책을 주었다.(26)
[26] 위서(魏書) -
곡물의 가격이 폭등하였으므로, 오주전의 사용을 폐지했다.
11월 13일(27)
[27] 위서(魏書) -
대장군 조인을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했다.
12월 동쪽 지역을 순시했다.
이해(221) 능운대(陵雲臺)를 수축했다.
三年春正月丙寅朔,日有蝕之。庚午,行幸許昌宮。詔曰:「今之計考,古之貢士也;十室之邑,必有忠信,若限年然後取士,是呂尚、周晉不顯於前世也。其令郡國所選,勿拘老幼;儒通經術,吏達文法,到皆試用。有司糾故不以實者。」 魏書曰:癸亥,孫權上書,說:「劉備支黨四萬人,馬二三千匹,出秭歸,請往埽撲,以克捷為效。」帝報曰:「昔隗嚻之弊,禍發栒邑,子陽之禽,變起扞關,將軍其亢厲威武,勉蹈奇功,以稱吾意。」
3년(222) 봄 정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5일, 허창궁으로 행차했으며 조칙을 내렸다.
- 지금의 계리(計吏)와 효렴은 고대에는 공사(貢士 : 여러 지방에서 추천된 인물)였다. 그러나 10가구가 있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믿음있는 선비가 있다. 만일 나이를 제한하여 인재를 취한다면, 여상(呂商)이나 주진(周晋 : 주나라 태자 晋)은 이전 시대에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명하노니, 군국에서 선발함에 있어서 늙음이나 젊음에 제한을 두지 말 것이며, 경학에 정통한 유학자와 법률에 통달한 관리는 즉시 전원 시험삼아 등용하라. 이 일에 관여한 사람 중에서 고의로 사실에 맞지 않게 추천을 한 자가 있으면 규탄하겠다.(28)
[28] 위서(魏書) -
二月,鄯善、龜茲、于闐王各遣使奉獻,詔曰:「西戎即叙,氐、羌來王,詩、書美之。頃者西域外夷並款塞內附, 應劭漢書注曰:款,叩也;皆叩塞門來服從。 其遣使者撫勞之。」是後西域遂通,置戊己校尉。
2월 서역의 도시 국가 선선(鄯善), 귀자(龜玆), 우전(于闐)의 왕이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품을 바치니, 조칙에서 말하였다.
- 서방의 오랑캐족이 우임금에 귀의하고, 저족(氐族), 강족(羌族)이 주나라 조정에 복종한 것은 시경과 상서에서도 크게 칭송했다. 최근에 서역의 외민족이 자주 변방에 와서 속국이 되기를 원하고 있으니,(29) 사자를 파견하여 그들을 위로하라.
이후, 서역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디었으며, 무기교위(戊己校尉)를 설치했다.
[29] 응소한서주(應劭漢書注曰) -
三月乙丑,立齊公叡為平原王,帝弟鄢陵公彰等十一人皆為王。初制封王之庶子為鄉公,嗣王之庶子為亭侯,公之庶子為亭伯。甲戌,立皇子霖為河東王。甲午,行幸襄邑。夏四月戊申,立鄄城侯植為鄄城王。癸亥,行還許昌宮。五月,以荊、揚、江表八郡為荊州,孫權領牧故也;荊州江北諸郡為郢州。
3월 1일 제공(齊公) 조예(曹叡)를 평원왕(平原王)으로 책봉하고 문제의 동생 언릉공(鄢陵公) 조창(曹彰) 등 11명을 모두 왕으로 책봉했다. 봉왕(封王 :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서자를 향공(鄕公)으로 봉했고, 사왕(嗣王)의 서자를 정후(亭侯)로, 공의 서자를 정백(停伯)이라고 하는 제도를 처음으로 정했다.
10일, 아들 조림(曹霖)을 하동왕(河東王)으로 봉했다. 30일, 양읍으로 행차했다.
여름 4월 14일 견성후(鄄城侯) 조식(曹植)을 견성왕(鄄城王)에 봉했다. 29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5월 형주와 양주의 강남에 있는 여덟 군을 모두 형주(荊州)라고 했는데, 손권이 주목(州牧)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주 강북으로 있는 여러 군을 영주(郢州)라고 했다.
閏月,孫權破劉備於夷陵。初,帝聞備兵東下,與權交戰,樹柵連營七百餘里,謂羣臣曰:「備不曉兵,豈有七百里營可以拒敵者乎!『苞原隰險阻而為軍者,為敵所禽』,此兵忌也。孫權上事今至矣。」後七日,破備書到。
윤달(태음력에서 날짜와 계절이 어긋나는 것을 막기 위해 때때로 더해주는 한 달)
손권이 유비를 이릉(夷陵)에서 격파시켰다. 그 이전에 문제(文帝)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樹冊)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유비는 병법을 이해하지 못하오. 어찌 7백여 리에 이르는 군영을 만들어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고원, 습지, 험한 곳을 감싸고 군대의 진영을 구축하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오. 이것은 병법에서도 금기하는 것이오. 전쟁에 대한 손권의 상주가 이제 도착할 것이오.”
그후 7일 만에 유비를 깨뜨렸다는 서신이 도착했다.
秋七月,兾州大蝗,民饑,使尚書杜畿持節開倉廩以振之。八月,蜀大將黃權率衆降。 魏書曰:權及領南郡太守史郃等三百一十八人,詣荊州刺史奉上所假印綬、棨戟、幢麾、牙門、鼓車。權等詣行在所,帝置酒設樂,引見於承光殿。權、郃等人人前自陳,帝為論說軍旅成敗去就之分,諸將無不喜恱。賜權金帛、車馬、衣裘、帷帳、妻妾,下及偏裨皆有差。拜權為侍中鎮南將軍,封列侯,即日召使驂乘;及封史郃等四十二人皆為列侯,為將軍郎將百餘人。
가을 7월 기주에서는 병충해의 피해가 심각하여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상서 두기(杜幾)에게 부절을 갖게 하고, 관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8월 촉나라 대장 황권(黃權)이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30)
[30] 위서(魏書) -
九月甲午,詔曰:「夫婦人與政,亂之本也。自今以後,羣臣不得奏事太后,后族之家不得當輔政之任,又不得橫受茅土之爵;以此詔傳後世,若有背違,天下共誅之。」 孫盛曰:夫經國營治,必憑俊喆之輔,賢達令德,必居參亂之任,故雖周室之盛,有婦人與焉。然則坤道承天,南面罔二,三從之禮,謂之至順,至於號令自天子出,奏事專行,非古義也。昔在申、呂,實匡有周。苟以天下為心,惟德是杖,則親疏之授,至公一也,何至后族而必斥遠之哉?二漢之季世,王道陵遲,故令外戚憑寵,職為亂階。於此,自時昏道喪,運祚將移,縱無王、呂之難,豈乏田、趙之禍乎?而後世觀其若此,深懷酸毒之戒也。至於魏文,遂發一概之詔,可謂有識之爽言,非帝者之宏議。 庚子,立皇后郭氏。賜天下男子爵人二級;鰥寡篤癃及貧不能自存者賜穀。
9월 3일 조칙에 말했다.
-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31)
[31] 손성(孫盛) -
9일 황후 곽씨(郭氏)를 세웠다. 천하의 남자들에게 작위를 두 등급씩 주고, 홀아비, 과부, 중병에 걸린 사람, 빈궁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에게 곡물을 하사했다.
冬十月甲子,表首陽山東為壽陵,作終制曰:「禮,國君即位為椑, 椑音扶歷反。 存不忘亡也。 臣松之按:禮,天子諸侯之棺,各有重數;棺之親身者曰椑。 昔堯葬穀林,通樹之,禹葬會稽,農不易畝, 呂氏春秋:堯葬於穀林,通樹之;舜葬於紀,市廛不變其肆;禹葬會稽,不變人徒。 故葬於山林,則合乎山林。封樹之制,非上古也,吾無取焉。壽陵因山為體,無為封樹,無立寑殿,造園邑,通神道。夫葬也者,藏也,欲人之不得見也。骨無痛痒之知,冢非棲神之宅,禮不墓祭,欲存亡之不黷也,為棺槨足以朽骨,衣衾足以朽肉而已。故吾營此丘墟不食之地,欲使易代之後不知其處。無施葦炭,無藏金銀銅鐵,一以瓦器,合古塗車、芻靈之義。棺但漆際會三過,飯含無以珠玉,無施珠襦玉匣,諸愚俗所為也。季孫以璵璠斂,孔子歷級而救之,譬之暴骸中原。宋公厚葬,君子謂華元、樂莒不臣,以為棄君於惡。漢文帝之不發,霸陵無求也;光武之掘,原陵封樹也。霸陵之完,功在釋之;原陵之掘,罪在明帝。是釋之忠以利君,明帝愛以害親也。忠臣孝子,宜思仲尼、丘明、釋之之言,鑒華元、樂莒、明帝之戒,存於所以安君定親,使魂靈萬載無危,斯則賢聖之忠孝矣。自古及今,未有不亡之國,亦無不掘之墓也。喪亂以來,漢氏諸陵無不發掘,至乃燒取玉匣金縷,骸骨并盡,是焚如之刑也,豈不重痛哉!禍由乎厚葬封樹。『桑、霍為我戒』,不亦明乎?其皇后及貴人以下,不隨王之國者,有終沒皆葬澗西,前又以表其處矣。蓋舜葬蒼梧,二妃不從,延陵葬子,遠在嬴、博,魂而有靈,無不之也,一澗之閒,不足為遠。若違今詔,妄有所變改造施,吾為戮尸地下,戮而重戮,死而重死。臣子為蔑死君父,不忠不孝,使死者有知,將不福汝。其以此詔藏之宗廟,副在尚書、祕書、三府。」
겨울 10월 3일 수양산(首陽山) 동쪽을 수릉(壽陵)을 만들 곳으로 지정하고, 장례제도를 제정하여 말하였다.
- 예(禮)에 따르면 한 나라의 임금이 즉위하여 관을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중에도 죽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32)
[32]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按) -
옛날에 요(堯)임금은 곡림(穀林)에 매장되었지만 사방에 나무를 심었으며, 우(禹) 임금은 회계(會稽)에 매장되었지만 농민들은 묘를 만들기 위해서 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산림에 매장하면 산림과 부합되어야 한다.(33) 묘를 만들고 나무를 심는 제도는 상고에 없었으므로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나의 묘는 산세에 의지하는 것을 주체로 삼아야지, 흙을 쌓아 놓은 언덕을 만들고 사방에 나무를 심지 말 것이며, 침전(寢殿 : 전시분묘위의 정전)을 건축하고 원읍(園邑 : 능을 지키는 촌락)을 만들며 신도(神道 : 분묘로 향하는 길)를 뚤흔 것은 하지 마라. 무릇 안장이라는 것은 몸을 감추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죽은 자의 뼈에는 통증이나 가려움 따위의 지각도 없고, 부묘에는 정신이 깃들 만한 자리도 없다. 예법에 따라 분묘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관곽(棺槨 : 내관과 외관)을 만들어도 뼈는 썩기 마련이며, 의복과 피륙이 있어도 살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릉 중에서도 아무것도 성장할 수 없는 땅을 선택하여 분묘를 만들고, 조대가 바뀐 후에는 그 장소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희망한다. 분묘에는 갈대나 석탄을 놓지 말고, 그 속에 금, 은, 동, 구리를 감춰두지 말며, 한결같이 질그릇을 사용하고, 도거(塗車 : 진흙 수레), 추령(芻靈 : 띠풀로 만든 인마)을 사용하는 고대의 제도에 부합되도록 하라. 관은 칠(漆)을 사용하여 판 이음매 세 곳을 칠하고, 입에 넣는 주옥(珠玉)을 사용하지 말며, 구슬을 입혀 만든 옷을 옥갑 속에 가득히 넣지 마라. 이것은 어리석고 우매한 사람이 만든 것이다.
---- 계손(季孫)이 허리에 차는 아름다운 옥을 상자에 넣어 묻으려고 할 때, 공자는 급히 계단으로 올라와 그것을 구하며, 그 거동이 죽은 자의 유골을 들녘에 드러내는 것에 비유했다. 송나라 임금이 후한 장례를 지내려고 하자, 식견있는 사람들은 화원(華元), 낙영(樂營)이 신하로써의 도리를 못하여 주군을 악의 한가운데로 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한나라 문제의 묘가 들춰지지 않은 것은 패릉(覇陵 : 문제의 능)에 도적들이 욕심내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무제의 묘가 파헤쳐진 것은 원릉(原陵)에 흙을 많이 쌓고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패릉이 보존된 것은 장석지(張釋之)의 공적이고, 원릉이 파헤쳐진 것은 명제(明帝 : 광무제의 아들)에게 그 죄가 있다. 그것은 장석지는 충성으로써 주군에게 이익을 주었고, 명제는 애정으로써 부모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충신과 효자는 당연히 공자, 좌구명, 장석지의 말을 생각해야 하고, 화원, 낙영, 명제의 잘못된 교훈에 비추어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임금과 부모의 유골을 안정되게 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만년이 될 때까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바로 성현이 충성하고 효도하는 원칙이다.
---- 옛날부터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파헤쳐지지 않은 분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동한이래 한 왕실의 여러 능묘는 모두 파헤쳐졌으며, 심지어 신체에 감는 옥갑과 그것을 잇는 금실을 불사르고 취하여 유해도 모두 타 없어졌다. 이렇게 태워버리는 것은 마치 분형(焚刑)을 가하는 것과 같은데, 어찌 격한 침통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재난은 장례를 후하게 하고 분묘 주변에 나무를 심는 데서 비롯된다. 장례를 후하게 한 전한의 신하 상홍양(桑弘羊)과 곽우(霍禹)는 나의 교훈이 된다고 한 장연수(張延壽)의 말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황후로부터 귀인(貴人 : 문관의 지위)이하 비빈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아들을 따라 영국(領國)으로 가지 않고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모두 낙양에 붙어있는 윤수(潤水) 서쪽에 매장할 것이므로 이전에 또 그곳을 묘지로 지정해두었다. 때문에 순임금은 창오(蒼梧)에 매장되었지만, 두 명의 비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고, 연릉(延陵)의 계자(季子), 오나라 공자(公子)는 아들을 멀리 영(嬴), 박(博)에 매장했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갈 수 없는 곳이 없으니, 일한(一澣)의 거리가 결코 멀다고 할 수는 없다.
---- 만일 지금의 이 조칙을 누군가 위반한 후 변경하여 조작한다면, 내가 사후에 땅속에서 주검을 찢기고, 찢긴 후에 또다시 찢기게 되는 것이다. 신하나 아들로서 이금이나 아버지에 대하여 치욕과 죽음을 가중시키는 것은 불충이요, 불효다. 죽은 자가 만일 지각을 갖고 있다면, 그런 자에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조칙을 종묘에 넣어두고, 베낀 조칙을 상서(尙書), 비서(秘書), 삼부(三府)에 놓으라.
[33] 여씨춘추(呂氏春秋) :
是月,孫權復叛。復郢州為荊州。帝自許昌南征,諸軍兵並進,權臨江拒守。十一月辛丑,行幸宛。庚申晦,日有食之。是歲,穿靈芝池。
이 달, 손권이 다시 모반하였다. 영주(郢州)를 회복하여 형주(荊州)라고 했다. 문제가 허창으로부터 출정하여 남방의 손권을 정벌하러 나섰으며, 여러 군대의 병사들이 나란히 진격하니, 손권은 장강을 앞에 두고 저항했다.
11월 11일 문제의 군대가 완(宛)성에 도착했다. 30일, 일식이 나타났다.
이 해(222) 영지지(靈芝池)를 팠다.
四年春正月,詔曰:「喪亂以來,兵革未戢,天下之人,互相殘殺。今海內初定,敢有私復讎者皆族之。」築南巡臺于宛。三月丙申,行自宛還洛陽宮。癸卯,月犯心中央大星。 魏書載丙午詔曰:「孫權殘害民物,朕以寇不可長,故分命猛將三道並征。今征東諸軍與權黨呂範等水戰,則斬首四萬,獲船萬艘。大司馬據守濡須,其所禽獲亦以萬數。中軍、征南攻圍江陵,左將軍張郃等舳艫直渡,擊其南渚,賊赴水溺死者數千人,又為地道攻城,城中外雀鼠不得出入,此几上肉耳!而賊中癘氣疾病,夾江塗地,恐相染污。昔周武伐殷,旋師孟津,漢祖征隗嚻,還軍高平,皆知天時而度賊情也。且成湯解三面之網,天下歸仁。今開江陵之圍,以緩成死之禽。且休力役,罷省繇戍,畜養士民,咸使安息。」 丁未,大司馬曹仁薨。是月大疫。
황초 4년(223) 봄 정월 조치을 내렸다.
- 동란 이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천하 사람들은 서로를 잔혹하게 죽였다. 이제 천하가 겨우 평정되었는데, 이후에 감히(다른 사람에게) 사사로이 복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씨족을 모두 죽일 것이다.
완성(宛城)에 남순대(南巡臺)를 구축했다.
3월 8일 완성에서 궁으로 돌아왔다. 15일, 달이 심수(心宿) 중앙의 대성(大星)을 침범하여 운행했으며,(34)
19일, 대사마 조인(曹仁)이 세상을 떠났다. 이 달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
[34] 위서재병오조(魏書載丙午詔曰) :
夏五月,有鵜鶘鳥集靈芝池,詔曰:「此詩人所謂污澤也。曹詩『刺恭公遠君子而近小人』,今豈有賢智之士處于下位乎?否則斯鳥何為而至?其博舉天下儁德茂才、獨行君子,以荅曹人之刺。」 魏書曰:辛酉,有司奏造二廟,立太皇帝廟,大長秋特進侯與高祖合祭,親盡以次毀;特立武皇帝廟,四時享祀,為魏太祖,萬載不毀也。
여름 5월 사다새가 영지지(集靈芝)에 모이자, 조칙을 내렸다.
- 이곳은 시인들이 말하는 오택(汚澤)이 있다. 시경 조풍(曹風)의 시(후인의 서문)에 ‘공공(恭公)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풍자했다’고 했지만, 지금 어찌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비가 낮은 관직에 머물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새는 무슨 이유로 날아왔겠는가? 그것은 고상하고 빼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과 품행에 돈독한 군자를 천하에 널리 추천함으로써 조나라 사람의 풍자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35)
[35] 위서(魏書) -
六月甲戌,任城王彰薨于京都。甲申,太尉賈詡薨。太白晝見。是月大雨,伊、洛溢流,殺人民,壞廬宅。 魏書曰:七月乙未,大軍當出,使太常以特牛一告祠于郊。臣松之按:魏郊祀奏中,尚書盧毓議祀厲殃事云:「具犧牲祭器,如前後師出告郊之禮。」如此,則魏氏出師,皆告郊也。
秋八月丁卯,以廷尉鍾繇為太尉。 魏書曰:有司奏改漢氏宗廟安世樂曰正世樂,嘉至樂曰迎靈樂,武德樂曰武頌樂,昭容樂曰昭業樂,雲翹舞曰鳳翔舞,育命舞曰靈應舞,武德舞曰武頌舞,文昭舞曰大昭舞,五行舞曰大武舞。
辛未,校獵于熒陽,遂東巡。論征孫權功,諸將已下進爵增戶各有差。九月甲辰,行幸許昌宮。 魏書曰:十二月丙寅,賜山陽公夫人湯沐邑,公女曼為長樂郡公主,食邑各五百戶。是冬,甘露降芳林園。臣松之按:芳林園即今華林園,齊王芳即位,改為華林。
6월 17일 임성왕(任城王) 조창(曹彰)이 수도 낙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27일, 태위 가후가 죽었으며,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이달, 폭우가 내려 이수와 낙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을 익사시키고 가옥을 파괴했다.(36)
[36] 위서(魏書) -
가을 8월 11일 정위 종요(鍾繇)를 태위로 임명했다.(37)
[37] 1 위서(魏書) -
15일, 영양(榮陽)에서 목책을 만들어 사냥을 하고, 동쪽으로 순시했다. 손권을 정벌한 공적을 논하였고, 여러 장수 이하는 각각 공적에 따라 구분하여 작위를 승진시키고 식읍도 증가시켜 주었다.
9월 19일 허창궁(許昌宮)에 도달했다.(38)
[38] 위서(魏書) -
五年春正月,初令謀反大逆乃得相告,其餘皆勿聽治;敢妄相告,以其罪罪之。三月,行自許昌還洛陽宮。夏四月,立太學,制五經課試之法,置春秋穀梁博士。五月,有司以公卿朝朔望日,因奏疑事,聽斷大政,論辨得失。秋七月,行東巡,幸許昌宮。
八月,為水軍,親御龍舟,循蔡、頴,浮淮,幸壽春。揚州界將吏士民,犯五歲刑已下,皆原除之。九月,遂至廣陵,赦青、徐二州,改易諸將守。冬十月乙卯,太白晝見。行還許昌宮。 魏書載癸酉詔曰:「近之不綏,何遠之懷?今事多而民少,上下相弊以文法,百姓無所措其手足。昔泰山之哭者,以為苛政甚於猛虎,吾備儒者之風,服聖人之遺教,豈可以目翫其辭,行違其誡者哉?廣議輕刑,以惠百姓。」 十一月庚寅,以兾州饑,遣使者開倉廩振之。戊申晦,日有食之。
5년(224) 봄 정월 반역한 것과 대역죄의 경우는 밀고하여도 좋지만, 그 밖의 경우는 듣거나 다스리지도 않을 것이며, 감히 다른 사람을 무고하는 자가 있으면, 밀고당한 자의 죄를 가지고 밀고한 자를 단죄하겠다고 처음으로 명을 내렸다.
3월 허창에서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태학(太學)을 세우고 오경(五經)의 시험방법을 제정하였으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강의하는 박사를 두었다.
5월 담당관리는 공경이 1일과 15일에 황제를 알현하여 의문나는 일을 상주하고, 정치에 관한 중대사를 청취하여 판단하며, 득실에 따라 논의하고 분별한다고 했다.
가을 7월 동쪽으로 순시하러 나가 허창궁에 도착했다.
8월 수군을 만들었고 천자는 직접 어용주(禦龍舟)에 탔으며, 채수(蔡水), 영수(潁水)를 따라 회수(淮水)로 들어가 수춘(壽春)에 도달했다. 양주 경내에 있는 장병과 백성들 중에서 5년 이하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들을 모두 사면시켰다.
9월 광릉까지 가서 청주와 서두 두 주에 사면령을 내리고, 수비하는 여러 장수들을 바꾸었다.
겨울 10월 16일 태백(太白)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39]
[39]
11월 11일
기주가 기근에 빠졌으므로 사자를 파견하여 관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9일, 일식이 출현했다.
十二月,詔曰:「先王制禮,所以昭孝事祖,大則郊社,其次宗廟,三辰五行,名山大川,非此族也,不在祀典。叔世衰亂,崇信巫史,至乃宮殿之內,戶牖之間,無不沃酹,甚矣其惑也。自今,其敢設非祀之祭,巫祝之言,皆以執左道論,著于令典。」是歲穿天淵池。
12월 조칙을 내렸다.
- 선왕이 제사의 예법을 정한 것은 효도를 밝히고 조상을 섬기기 위함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교(郊)와 사(祀)이고, 그 다음은 선조에게 제사지내는 종묘(宗廟) 제사다. 삼신(三神 : 日, 月, 星), 오행(五行 : 木, 化, 土, 金, 水),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는 것은 예법의 종류가 아니므로 경전에 기록해야 되는 제사가 아니다. 말세에 이르면 쇠미하고 혼란스러워지므로 무사(巫史)를 숭배하고 믿어, 궁전 안과 창문 사이에 술을 뿌리고 귀신에게 제사지내니 심하도다! 그 미혹됨이여! 지금부터 감히 제사지낼 수 없는 제사를 진행하고, 무당의 말을 사용하는 자에 대해서는 모두 사악한 도를 받드는 것으로 논할 것이니, 이런 규칙을 법전에 기술하라.
이 해(224) 천연지(天淵池)를 팠다.
六年春二月,遣使者循行許昌以東盡沛郡,問民所疾苦,貧者振貸之。 魏略載詔曰:「昔軒轅建四面之號,周武稱『予有亂臣十人』,斯蓋先聖所以體國君民,亮成天工,多賢為貴也。今內有公卿以鎮京師,外設牧伯以監四方,至於元戎出征,則軍中宜有柱石之賢帥,輜重所在,又宜有鎮守之重臣,然後車駕可以周行天下,無內外之慮。吾今當征賊,欲守之積年。其以尚書令潁鄉侯陳羣為鎮軍大將軍,尚書僕射西鄉侯司馬懿為撫軍大將軍。若吾臨江授諸將方略,則撫軍當留許昌,督後諸軍,錄後臺文書事;鎮軍隨車駕,當董督衆軍,錄行尚書事;皆假節鼓吹,給中軍兵騎六百人。吾欲去江數里,築宮室,往來其中,見賊可擊之形,便出奇兵擊之;若或未可,則當舒六軍以遊獵,饗賜軍士。」 三月,行幸召陵,通討虜渠。乙巳,還許昌宮。并州刺史梁習討鮮卑軻比能,大破之。辛未,帝為舟師東征。五月戊申,幸譙。壬戌,熒惑入太微。
6년(225) 봄 2월
사자를 파견하여 허창 동쪽에 있는 패군(沛郡)의 모든 지역을 순시하고 질곡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을 위문하였으며,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내어 구제하였다. [40]
[40] 위략재조(魏略載詔曰) -
3월 소릉(召陵)에 행차하여 토로거(討虜渠 : 운하 이름)를 개통했으며, 28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병주자사 양습(梁習)이 선비족 가비능(軻比能)을 토벌하고 격파했다.
윤달 3월 24일 문제가 수군을 정비하여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하러 나섰다.
5월 2일 초현에 도착했다. 16일, 화성이 태미성(太微星) 구역으로 들어갔다.
六月,利成郡兵蔡方等以郡反,殺太守徐質。遣屯騎校尉任福、步兵校尉段昭與青州刺史討平之;其見脅略及亡命者,皆赦其罪。
6월 이성군(利成郡)의 병사 채방(菜方) 등이 군을 점령하고 모반하였으며, 태수 서질(徐質)을 살해했다. 따라서 둔기교위 임복(任福)과 보병교위 단소(段昭)를 파견하여 청주자사(王凌)와 협력하여 그들을 토벌하고 평정하도록 했다. 그들에게 협박당하여 난을 일으키자 도망한 자는 모두 죄를 면해주었다.
秋七月,立皇子鑒為東武陽王。八月,帝遂以舟師自譙循渦入淮,從陸道幸徐。九月,築東巡臺。冬十月,行幸廣陵故城,臨江觀兵,戎卒十餘萬,旌旗數百里。 魏書載帝於馬上為詩曰:「觀兵臨江水,水流何湯湯!戈矛成山林,玄甲曜日光。猛將懷暴怒,膽氣正從橫。誰云江水廣,一葦可以航,不戰屈敵虜,戢兵稱賢良。古公宅岐邑,實始翦殷商。孟獻營虎牢,鄭人懼稽顙。充國務耕殖,先零自破亡。興農淮泗間,築室都徐方。量宜運權略,六軍咸恱康;豈如東山詩,悠悠多憂傷。」
是歲大寒,水道冰,舟不得入江,乃引還。十一月,東武陽王鑒薨。十二月,行自譙過梁,遣使以太牢祀故漢太尉橋玄。
가을 7월 문제가 아들 조감(曹鑒)을 동무양왕(東武陽王)으로 세웠다.
8월 문제가 수군을 통솔하여 초현을 출발해 와수(渦水)를 지나 회수로 들어갔으며, 육로를 지나 서주(徐州)에 도착했다.
9월 동순대(東巡臺)를 만들었다.
겨울 10월 광릉 고성(古城)에 도달하여 장강가에서 열병 의식을 진행하였다. 병졸은 10여 만 명이었고, 군기가 수백 리에 이어 펄럭였다. [41]
[41] 위서(魏書) -
이 해(225) 독한 추위로 수로가 얼어 배를 장강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으므로,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왔다.
11월 동무양왕 조감(曹鑒)이 세상을 떠났다.
12월 초현을 출발하여 양(梁)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사자를 파견하여 태뢰(太牢)를 바쳐 한나라 태위(太尉) 교현(橋玄)에게 제사지냈다.
七年春正月,將幸許昌,許昌城南門無故自崩,帝心惡之,遂不入。壬子,行還洛陽宮。三月,築九華臺。夏五月丙辰,帝疾篤,召中軍大將軍曹真、鎮軍大將軍陳羣、征東大將軍曹休、撫軍大將軍司馬宣王,並受遺詔輔嗣主。遣後宮淑媛、昭儀已下歸其家。丁巳,帝崩于嘉福殿,時年四十。 魏書曰:殯於崇華前殿。
7년(226) 봄 정월 허창에 도착하려고 할 때, 허창성의 남쪽 문이 이유도 없이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문제는 마음속으로 불길하게 생각하고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10일, 낙양궁으로 돌아갔다.
3월 구화대(九華臺)를 세웠다.
여름 5월 16일 문제는 위독하여 중군대장군 조진(曹眞), 진군대장군 진군(陳群), 정동대장군 조휴(曹休), 무군대장군 사마의(司馬懿)를 불렀다. 그들은 유조(遺詔)를 받아 장차 황위를 이을 어린 임금 조예를 보좌했다.
후궁 숙원(淑媛)과 소의(昭儀) 이하 궁녀를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17일, 문제는 가복전(嘉福殿)에서 붕어하니 이때, 향년 40세였다. [42]
[42] 위서(魏書) - 시신을 숭화전(崇華) 앞에 두었었다.
六月戊寅,葬首陽陵。自殯及葬,皆以終制從事。 魏氏春秋曰:明帝將送葬,曹真、陳羣、王朗等以暑熱固諫,乃止。孫盛曰:夫窀穸之事,孝子之極痛也,人倫之道,於斯莫重。故天子七月而葬,同軌畢至。夫以義感之情,猶盡臨隧之哀,況乎天性發中,敦禮者重之哉!魏氏之德,仍世不基矣。昔華元厚葬,君子以為棄君於惡,羣等之諫,棄孰甚焉!鄄城侯植為誄曰:「惟黃初七年五月七日,大行皇帝崩,嗚呼哀哉!于時天震地駭,崩山隕霜,陽精薄景,五緯錯行,百姓呼嗟,萬國悲悼,若喪考妣,恩過墓唐,擗踊郊野,仰想穹蒼,僉曰何辜,早世殞喪,嗚呼哀哉!悲夫大行,忽焉光滅,永棄萬國,雲往雨絕。承問荒忽,惛懵哽咽,袖鋒抽刃,歎自僵斃,追慕三良,甘心同穴。感惟南風,惟以鬱滯,終於偕沒,指景自誓。考諸先記,尋之哲言,生若浮寄,惟德可論,朝聞夕逝,孔志所存。皇雖一沒,天祿永延,何以述德?表之素旃。何以詠功?宣之管絃。乃作誄曰:皓皓太素,兩儀始分,中和產物,肈有人倫,爰曁三皇,寔秉道真,降逮五帝,繼以懿純,三代製作,踵武立勳。季嗣不維,網漏于秦,崩樂滅學,儒坑禮焚,二世而殲,漢氏乃因,弗求古訓,嬴政是遵,王綱帝典,闃爾無聞。末光幽昧,道究運遷,乾坤迴歷,簡聖授賢,乃眷大行,屬以黎元。龍飛啟祚,合契上玄,五行定紀,改號革年,明明赫赫,受命于天。仁風偃物,德以禮宣;祥惟聖質,嶷在幼妍。庻幾六典,學不過庭,潛心無罔,亢志青冥。才秀藻朗,如玉之瑩,聽察無嚮,瞻覩未形。其剛如金,其貞如瓊,如氷之絜,如砥之平。爵公無私,戮違無輕,心鏡萬機,攬照下情。思良股肱,嘉昔伊呂,搜揚側陋,舉湯代禹;拔才巖穴,取士蓬戶,唯德是縈,弗拘禰祖。宅土之表,道義是圖,弗營厥險,六合是虞。齊契共遵,下以純民,恢折規矩,克紹前人。科條品制,襃貶以因。乘殷之輅,行夏之辰。金根黃屋,翠葆龍鱗,紼冕崇麗,衡紞惟新,尊肅禮容,矚之若神。方牧妙舉,欽於恤民,虎將荷節,鎮彼四鄰;朱旗所勦,九壤被震,疇克不若?孰敢不臣?縣旌海表,萬里無塵。虜備凶徹,鳥殪江岷,權若涸魚,乾腊矯鱗,肅慎納貢,越裳效珍,條支絕域,侍子內賔。德儕先皇,功侔太古。上靈降瑞,黃初叔祜:河龍洛龜,淩波游下;平鈞應繩,神鸞翔舞;數莢階除,系風扇暑;皓獸素禽,飛走郊野;神鍾寶鼎,形自舊土;雲英甘露,瀸塗被宇;靈芝冒沼,朱華陰渚。回回凱風,祁祁甘雨,稼穡豐登,我稷我黍。家佩惠君,戶蒙慈父。圖致太和,洽德全義。將登介山,先皇作儷。鐫石紀勳,兼錄衆瑞,方隆封禪,歸功天地,賔禮百靈,勳命視規,望祭四嶽,燎封奉柴,肅于南郊,宗祀上帝。三牲旣供,夏禘秋甞,元侯佐祭,獻璧奉璋。鸞輿幽藹,龍旂太常,爰迄太廟,鍾鼓鍠鍠,頌德詠功,八佾鏘鏘。皇祖旣饗,烈考來享,神具醉止,降茲福祥。天地震蕩,大行康之;三辰暗昧,大行光之;皇紘絕維,大行綱之;神器莫統,大行當之;禮樂廢弛,大行張之;仁義陸沈,大行揚之;潛龍隱鳳,大行翔之;疏狄遐康,大行匡之。在位七載,元功仍舉,將永太和,絕迹三五,宜作物師,長為神主,壽終金石,等筭東父,如何奄忽,摧身后土,俾我棾棾,靡瞻靡顧。嗟嗟皇穹,胡寧忍務?嗚呼哀哉!明監吉凶,體遠存亡,深垂典制,申之嗣皇。聖上虔奉,是順是將,乃剏玄宇,基為首陽,擬迹穀林,追堯慕唐,合山同陵,不樹不疆,塗車芻靈,珠玉靡藏。百神警侍,來賔幽堂,耕禽田獸,望魂之翔。於是,俟大隧之致功兮,練元辰之淑禎,潛華體於梓宮兮,馮正殿以居靈。顧望嗣之號咷兮,存臨者之悲聲,悼晏駕之旣修兮,感容車之速征。浮飛魂於輕霄兮,就黃墟以滅形,背三光之昭晰兮,歸玄宅之冥冥。嗟一往之不反兮,痛閟闥之長扃。咨遠臣之眇眇兮,成凶諱以怛驚,心孤絕而靡告兮,紛流涕而交頸。思恩榮以橫奔兮,閡闕塞之嶢崢,顧衰絰以輕舉兮,迫關防之我嬰。欲高飛而遙憩兮,憚天網之遠經,遙投骨於山足兮,報恩養於下庭。慨拊心而自悼兮,懼施重而命輕,嗟微驅之是效兮,甘九死而忘生,幾司命之役籍兮,先黃髮而隕零,天蓋高而察卑兮,兾神明之我聽。獨鬱伊而莫愬兮,追顧景而憐形,奏斯文以寫思兮,結翰墨以敷誠。嗚呼哀哉!」
6월 9일
수양릉(首陽陵)에 묻혔다. 빈(殯 : 매장하기 전에 관에 넣어 안치하는 것)으로부터 매장하기까지 모두 그가 생전에 안배한 규정에 따라 집행했다. [43]
[43] 위씨춘추(魏氏春秋曰) - 명제(明帝)가 장의(葬儀)의 출발을 전송하려고 할 때, 조진(曹眞), 진군(陳群), 왕랑(王郞) 등이 더위를 이유로 나가지 말 것을 강력히 간언했으나 명제는 듣지 않았다.
손성(孫盛) -
初,帝好文學,以著述為務,自所勒成垂百篇。又使諸儒撰集經傳,隨類相從,凡千餘篇,號曰皇覽。 魏書曰:帝初在東宮,疫癘大起,時人彫傷,帝深感歎,與素所敬者大理王朗書曰:「生有七尺之形,死為一棺之土,唯立德揚名,可以不朽,其次莫如著篇籍。疫癘數起,士人彫落,余獨何人,能全其壽?」故論撰所著典論、詩賦,蓋百餘篇,集諸儒於肅城門內,講論大義,侃侃無倦。常嘉漢文帝之為君,寬仁玄默,務欲以德化民,有賢聖之風。時文學諸儒,或以為孝文雖賢,其於聦明,通達國體,不如賈誼。帝由是著太宗論曰:「昔有苗不賔,重華舞以干戚,尉他稱帝,孝文撫以恩德,吳王不朝,錫之几杖以撫其意,而天下賴安;乃弘三章之教,愷悌之化,欲使曩時累息之民,得闊步高談,無危懼之心。若賈誼之才敏,籌畫國政,特賢臣之器,管、晏之姿,豈若孝文大人之量哉?」三年之中,以孫權不服,復班太宗論於天下,明示不願征伐也。他日又從容言曰:「顧我亦有所不取於漢文帝者三:殺薄昭;幸鄧通;慎夫人衣不曳地,集上書囊為帳帷。以為漢文儉而無法,舅后之家,但當養育以恩而不當假借以權,旣觸罪法,又不得不害矣。」其欲秉持中道,以為帝王儀表者如此。 胡沖吳歷曰:帝以素書所著典論及詩賦餉孫權,又以紙寫一通與張昭。
처음의 문제는 문학을 애호하여 저술을 의무로 삼았으며, 그 자신이 지은 작품이 거의 1백 편에 달했다. 모든 유학자들에게 경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분류법에 따라 배열하였는데, 모두 1천여 편이며, 황람(皇覽)이라는 책이름을 붙였다. [44]
[44] 위서(魏書)
評曰:文帝天資文藻,下筆成章,博聞彊識,才藝兼該; 典論帝自敘曰:初平之元,董卓殺主鴆后,盪覆王室。是時四海旣困中平之政,兼惡卓之凶逆,家家思亂,人人自危。山東牧守咸以春秋之義,「衞人討州吁于濮」,言人人皆得討賊。於是大興義兵,名豪大俠,富室彊族,飄揚雲會,萬里相赴;兖、豫之師戰於滎陽,河內之甲軍於孟津。卓遂遷大駕,西都長安。而山東大者連郡國,中者嬰城邑,小者聚阡陌,以還相吞滅。會黃巾盛於海、岱,山寇暴於并、兾,乘勝轉攻,席卷而南,鄉邑望煙而奔,城郭覩塵而潰,百姓死亡,暴骨如莽。余時年五歲,上以世方擾亂,教余學射,六歲而知射,又教余騎馬,八歲而能騎射矣。以時之多故,每征,余常從。建安初,上南征荊州,至宛,張繡降。旬日而反,亡兄孝廉子脩、從兄安民遇害。時余年十歲,乘馬得脫。夫文武之道,各隨時而用,生於中平之季,長於戎旅之間,是以少好弓馬,于今不衰;逐禽輒十里,馳射常百步,日多體健,心每不猒。建安十年,始定兾州,濊、貊貢良弓,燕、代獻名馬。時歲之暮春,句芒司節,和風扇物,弓燥手柔,草淺獸肥,與族兄子丹獵於鄴西,終日手獲麞鹿九,雉兔三十。後軍南征次內蠡,尚書令荀彧奉使犒軍,見余談論之末,彧言:「聞君善左右射,此實難能。」余言:「執事未覩夫項發口縱,俯馬蹄而仰月支也。」彧喜笑曰:「乃爾!」余曰:「埒有常徑,的有常所,雖每發輒中,非至妙也。若馳平原,赴豐草,要狡獸,截輕禽,使弓不虛彎,所中必洞,斯則妙矣。」時軍祭酒張京在坐,顧彧拊手曰「善」。余又學擊劔,閱師多矣,四方之法各異,唯京師為善。桓、靈之閒,有虎賁王越善斯術,稱於京師。河南史阿言昔與越遊,具得其法,余從阿學之精熟。甞與平虜將軍劉勳、奮威將軍鄧展等共飲,宿聞展善有手臂,曉五兵,又稱其能空手入白刃。余與論劔良久,謂言將軍法非也,余顧甞好之,又得善術,因求與余對。時酒酣耳熱,方食芋蔗,便以為杖,下殿數交,三中其臂,左右大笑。展意不平,求更為之。余言吾法急屬,難相中面,故齊臂耳。展言願復一交,余知其欲突以取交中也,因偽深進,展果尋前,余却脚鄛,正截其顙,坐中驚視。余還坐,笑曰:「昔陽慶使淳于意去其故方,更授以祕術,今余亦願鄧將軍捐棄故伎,更受要道也。」一坐盡歡。夫事不可自謂己長,余少曉持複,自謂無對;俗名雙戟為坐鐵室,鑲楯為蔽木戶;後從陳國袁敏學,以單攻複,每為若神,對家不知所出,先曰若逢敏於狹路,直決耳!余於他戲弄之事少所喜,唯彈棊略盡其巧,少為之賦。昔京師先工有馬合鄉侯、東方安世、張公子,常恨不得與彼數子者對。上雅好詩書文籍,雖在軍旅,手不釋卷,每每定省從容,常言人少好學則思專,長則善忘,長大而能勤學者,唯吾與袁伯業耳。余是以少誦詩、論,及長而備歷五經、四部,史、漢、諸子百家之言,靡不畢覽。博物志曰:帝善彈棊,能用手巾角。時有一書生,又能低頭以所冠著葛巾角撇棊。 若加之曠大之度,勵以公平之誠,邁志存道,克廣德心,則古之賢主,何遠之有哉!
※ 평하여 말한다.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었으니,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 [45]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면, 옛날의 군왕이 어찌 그로부터 멀리 있었겠는가!
[45] 전론제자서(典論帝自敘曰)
전론의 자서 : 초평 원년, 동탁(董卓)이 임금을 죽이고 황후를 짐독으로 죽여, 왕실을 뒤흔들고 엎었다. 이때 사해가 이미 중평년의 정치로 인해 어지러웠는데, 동탁의 흉역을 더하니, 집집마다 난을 슬퍼하였고, 사람들은 각각 스스로 불안해했다. 산동의 목수들은 모두 춘추의 의로운 일인「위인들이 주우를 복에서 토벌했다. 」를 근거로, 사람들에게 말해 모두 역적을 토벌하기로 했다. 이에 의병이 크게 흥하여, 이름난 호걸과 대협, 부유한 집안과 강한 무리들이, 바람에 날리는 구름같이 모여, 만리에서 서로 다다라, 연주(兖州), 예주(豫州)의 군은 형양(滎陽)에서 싸우고, 하내의 군은 맹진(孟津)에 진을 쳤다.
동탁이 마침내 대가를 옮겨, 서쪽으로 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다. 그러나 산동의 거물들은 군국을 접수하고, 중간 급은 성읍을 더하며, 소인들은 농경지를 거둬들이니, 도리어 서로를 삼키고 멸하였다. 때마침 황건적이 바다와 태산에서 성하고, 산적들은 병주(并州), 기주(兾州)에서 난리를 피워, 승세를 타며 여러 곳을 공격해, 세력을 떨치며 남진하니, 향읍에선 연기를 바라보며 달아났고, 성곽에선 먼지가 이는 것을 보며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죽어, 시체가 풀숲처럼 널브러졌다.
나는 당시 5살로, 태조께서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질 거라 여기셨기에, 내가 궁술을 배우도록 가르치셔, 6살 때 궁술을 알게 됐고, 또한 내가 말을 타게 가르치셔, 8살 때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게 됐다. 당시에 변고가 많아서, 늘 정벌에 나섰는데, 나도 항상 종군했다. 건안초, 태조께서 형주를 남정하며, 완에 이르니, 장수(張繡)가 항복했다. 열흘이 지나 반란을 일으켜, 형이자 효렴인 자수(조앙 曹昻), 사촌형 조안민(曹安民)이 살해당했다. 당시 나는 10세였는데, 말을 타고 벗어날 수 있었다. 대저 문무의 도를, 각각 적절히 씀으로써, 중평의 말년에 태어나, 군에서 자라날 수 있었으니, 이는 어릴 때부터 궁마를 좋아했기 때문인데, 지금도 쇠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날짐승이 늘 10리를 가도, 쫓아가 쏘는 건 항상 백보면 됐고, 나날이 몸이 건강해지며, 마음도 늘 싫증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건안 10년 (205), 기주를 평정하기 시작하니, 예(濊), 맥(貊)이 양궁(良弓)을 바쳤고, 연(燕), 대(代)에서도 명마(名馬)를 올렸다. 당시 늦봄이었는데, 구망이 절기를 맡아, 건들바람이 세차서, 활이 마르고 손도 연약했지만, 풀이 연하고 짐승이 살쪄, 사촌형 자단(조진 曹眞)과 업의 서쪽에서 사냥하니, 종일해서 손수 잡은 게 노루 9마리, 꿩과 토끼가 30마리였다. 후에 군이 남정하며 려(蠡)안에서 머무르는데, 상서령 순욱(荀彧)이 사신으로 군을 위로하며, 내가 담론이 끝나가는 때 보더니, 순욱이 말하길
「듣기론 군께서 좌우로 활을 쏘는 것이 훌륭하시다던데, 이는 실로 능히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
내가 말하길 「집사께선 아직 장정이 목덜미로 쏘고 입으로 쏘거나, 말굽쪽으로 구부렸다가 머리를 들어 지탱하는 것을 보지 못하신듯합니다.」
순욱이 즐거워 웃으며 말하길 「뜻밖이군요! 」
내가 말하길 「담은 일정한 길이 있고, 과녁은 일정한 자리에 있으니, 비록 늘 쉽게 쏴서 가운데를 맞춰도, 지극히 묘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평원에서 달리다, 무성한 초원에 다다라, 맹수를 노리고, 빠른 새를 저지하며, 활을 써 헛되지 않은 곳으로 당겨, 가운데를 반드시 꿰뚫는다면, 이것이 바로 묘한 것입니다.」
당시 군제주 장경이 자리에 있으며, 순욱을 돌아보며 손을 치고 말하길 「훌륭하십니다.」
내가 또한 검술을 배워, 겪은 스승이 많았는데, 사방의 검법이 각각 달랐으나, 오직 경사의 것만은 훌륭했다. 환제, 영제의 때에, 호분 왕월이 있었는데 검술이 뛰어나, 경사에서 칭송받았다. 하남의 사아가 과거 왕월과 놀며, 더불어 그 검법을 익혔는데, 나는 사아를 따라 이를 배웠기에 능숙하게 됐다. 이전에 평로장군 유훈, 분위장군 등전 등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사전에 듣기론 등전은 힘이 대단해, 다섯 가지의 무기에 통달했고, 또한 그는 빈손으로 칼이 난무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고 칭송됐었다. 나는 더불어 오랫동안 검술을 논하며, 장군의 검법은 별로라고 평했고, 내가 생각건대 이전부터 검을 좋아했고, 또한 뛰어난 검술을 익혔기에, 나와 겨루자고 하였다. 당시 거나하게 취해 귀가 뜨거워, 바야흐로 토란과 사탕수수를 먹었는데, 바로 지팡이로 삼아, 전아래에서 수합을 겨루니, 3합에 그의 팔을 맞추어, 좌우에서 크게 웃었다. 등전이 못마땅해, 다시 겨루기를 원했다. 내가 나의 검법은 재빠르고, 서로 얼굴을 맞추는 건 꺼렸기에, 팔을 맞췄을 뿐이라고 했다. 등전이 다시 한번 더 겨루자고 청하여, 나는 그가 갑자기 달려들 거라는 걸 알았기에, 거짓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등전은 과연 갑자기 전진해와, 나는 반대로 다리를 돌렸다가, 바로 그의 이마를 치니, 좌중은 모두 놀라며 바라봤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웃으며 말하길
「과거 양경이 순우의에게 그의 옛 방식을 버리고, 다시 비술을 수여했으니, 지금 나 또한 등장군이 옛 검술을 버리고, 요긴한 검술을 다시 받아들이길 원하오. 」
좌중은 모두 기뻐하였다. 대저 스스로 자신이 낫다고 이를 수 없으나, 나는 어려서부터 2개 쥐는 것을 깨달아, 스스로 대적할 자가 없다고 이르렀으니, 속인들이 이름 붙이길 쌍극(雙戟)은 철실(鐵室)을 지키는 것이고, 양순(鑲楯)은 목호(木戶)를 가리는 거라 했고, 후에 진국(陳國)의 원민(袁敏)을 따라 배우며, 하나로 2개를 공격하면, 매번 귀신과 같아, 대적하는 이는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지 못하게 됐기에, 미리 말하길 만약 원민을 협로에서 만나면, 바로 승부를 가리는 것 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유희로도 즐거워했지만, 오직 바둑알을 튀기는 데 있어선 솜씨가 극치에 달했고, 어릴 때부터 부도 지었다. 과거 경사의 뛰어난 이들로 마합향후(馬合鄉侯), 동방안세(東方安世), 장송자(張公子)가 있었으나, 항상 그들과 대적할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 태조께서 본디 시, 서, 문적을 좋아하셔, 비록 군에 있어도, 수불석권하시며, 번번이 바로잡고 살피며 따르고 받아들이셔, 항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길 어릴 때는 학문을 좋아하는데 전념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커서는 잘 잊어버리는데, 커서도 학문에 부지런한 이라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과 원백업(袁伯業: 원유)뿐이라고 하셨다. 내가 이로써 어려서부터 시경, 논어를 외우고, 더불어 자라서는 오경, 사부를 두루 갖추고, 사기, 한서, 제자백가의 말씀을 보며, 두루 보지 않음이 없게 했다.
[출처] 조비(曹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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