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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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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종덕
 
카페 게시글
┃자 . 유 . 게 . 시 . 판┃ 스크랩 명성 황후와 씨없는 수박.
찰튼우 추천 0 조회 77 10.08.28 09:3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명성황후와  씨없는 수박.

 

이제 여름도 막 바지에 들어 선 것 같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삼복 더위 보다도 더 뜨거운 햇살에 숨을 쉴 수 조차 힘든 지경이였었는데,처서가 지나고 국지성 폭우가 ?아 붓더니 이제는 제법 선들한 기분이 아침 저녁으로 든다.

 

여름 철에는 뭐니뭐니하여도  수박이 가장 인기를 끄는 과일이리라.

그것도 씨 없는 수박 일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요즘 처럼 씨 없는 수박은 많지가 않고 비싼 돈을 주어야만 사 먹었던 것으로 기억이 든다.

 

그러나 요즘은 ,온통 씨 없는 수박이 아니면 팔리지가 않을 뿐더러 아예 씨있는 수박은 구경 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 씨 없는 수박을 개량한 사람은 우장춘 박사란다.

우 장춘 박사는 대한 제국 황비이신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들과 합세하여 우리의 황궁 ㅡ그것도 명성황후의 궁에서 무자비 하게 난자 되시여 화장되시는 끔찍한 ?인극을 저지른 그 일본 낭인배들과 합세하여 행동 하였던 바로 우 범선 이란자가 그 아버지라니.......

 

그  우범선은 별기군 훈련대 제2 대대장으로 참여하여 그 큼직한 을미사변(1895년)의 공신인 장본인 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정국이 뒤 바뀌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일본 여자  사카이 나카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 났던것이다.

 

우 범선은 친일파로써 일본땅에서 피신하여 생활을 하던중 1901년 홍능 능 참봉을 하다가 파직된 고영근에게 암살을 당하여 죽으니 일본땅으로 피신 온지 3년만의 죽음이였다.

 

이때 부터 우 장춘은 어머니와 동생과 어려운 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돌봐주는 사람없고, 조선인이라는 멸시속에서 6세되던해에는 가난에 쪼들려서 고아원 신세를지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 일본인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조선의 후예로써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주입시켜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 노력을 하였단다.

 

 

그 결과 우 장춘은 동경 제국대 농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육종학에 전념하여 일본 내에서 알아주는 육종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당신의 아버지가 조국의 황비를 암살하는데 일조를 한것을 자신이 조국에 보람된 일을 하여 갚고져 마음을 먹고 조국대한 민국에 귀국하여 몸바칠것을 각오하여

1950년 3월8일 일본의  유수한 유혹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신으로 귀국 선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가 52세였다.

그는 귀국하여 강원도 대관령에서 척박한 강원도 땅에서 잘 자랄수 있는 감자를 개량하였고

배추 무우를 전라도 완도에서 개량하여 전국에 보급하였고,

제주도에서는 제주 토질에 적합한 오늘날의  제주 감귤을 재배 할 수 있도록 개량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논에서 잘 자라고 수확도 많이 나는 벼를 개량하여 그 수확을 보지도 못 한채로 한 많은 인생 살이를 마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제일 먼저 씨 없는 수박을 개량하였던 것은 제외 하고도 수많은 육종학적인 업적을 쌓고 애석하게도 61세의 일생을 마감 하였던 것이다.

 

그가 죽으면서도 한 손에는 개량 벼이삭을 쥐고, 한손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 한문화포장을 꼭 움켜 쥔채로 일생을 마치니 그의 마지막 눈가에는 한 많은  생의 질긴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육종학에 전념하느라 가족들도 돌보지 못 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어머니가 죽었어도 그를 일본으로 보내서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을 하지 않 았다는것을 생각 하면 그도 설음에 북 받쳐서 며칠씩 식음을 전폐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그를 따르던 후학들이 사회장으로 지금의 농촌 진흥청(수원)구내의 여기산에 안장 하였다.

 

요즘 언론에서는 금년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100주년이 되는 해로써 여러 가지 행사들을 한다고 한다.

 

어느 스님은 일본의 천황궁에 있는 명성황후 국장 도감의궤를 환수하고져 요로에 강력히 활동하여 환수하는 운동으로 곧 그 의궤를 환수하게 된다고 전해 진다.

 

또한 그 스님은 일본 후쿠오카의 신사에 있는 ㅡ명성황후를 죽인 칼이 보관 된것을 보면서"  이 칼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ㅡ생각하니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 칼집에는 ㅡ늙은 여우를 한 칼에 베었다ㅡ 라는 글귀를가적혀 있었다고 하니 .....

 

금년이 바로 일본 놈들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경술년 국치일(8월29일)이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우리의 황궁 한 복판의 자신의 궁에서 일본 낭인배들과 자국의 군인들의 호응하에 황비로써의 존엄함도 팽개 쳐 지면서 처참하게 살육 당하셨던 우리의 국모의 치욕을 다시금 회상하려니 이가 갈린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인간들이......

 

비는 주룩 주룩 이 밤을 서글프게 내린다.

 아마도 100년전의 한이 서린 황비마마의 눈물이 비가 되여 내리는 것 같기도하다.

 

폭풍과 폭우기 이 강토를  며칠 째 흙탕물로 할키고 때리고 , 부수고 인명을 해친다.

 

바로 100여년 전의 그 한 많던 침략의 마수를 뿌러트리지 못 했음에 울분이 되여 토해 내는 한 숨이요 분한 기염일 것이리라.

 

 

  2010년 8월 27일 늦은 저녁에

 

  香巖    申   元  浩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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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8.28 14:33

    첫댓글 가슴아픈 과거입니다. 갈갈이 찢겨진 빼앗긴 들의 아픔과 희망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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