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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말씀: 고전1:18-21
제목: 십자가의 전달자
영적 부흥에 대해 지난주에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부흥의 기초는 반드시 십자가가 근거가 되어야 하며, 부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흥에는 인간의 방법과 원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며 그 부활 생명이 확장될 때 비로소 부흥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전한 사건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갈 때 그분의 사역이 다양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복음을 전할 때 능력, 감동, 깨달음, 치유, 회복, 감사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기관을 통해 성령께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온 결과입니다. 성령 침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우리가 민감한 영적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요4:24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즉 영적인 체험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영과 진리’는 두 단어를 합치지 않고 독립된 언어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등위접속사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in spirit of truth’가 아닌 ‘in spirit and in truth’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워진 영으로만 그분과 교제할 수 있고 그분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모르고 그 은혜로 영이 변화되지 않은 자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하나님께 열납되지도 않습니다. 예배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예배이고, 그 예배의 공간이 바로 영적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운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위해 교회는 중보기도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는 기도제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문제로 인해 영이 침체된 무거운 짐을 진 상태로 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예배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 있다는 것보다 무거운 짐에 억눌려 있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적인 부분을 다스리시고 만지시는 은혜를 위해 기도로 준비하며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는 마음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예배에 일찍 오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일찍 와서 기도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준비된 마음을 가짐으로써 성령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해결될 수도 있고, 깨달을 수도 있으며, 그분을 만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성령을 의지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예배를 갈망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자도 정결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짐을 가볍게 지는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젖어들기만 하면 성령께서 놀라운 생명력으로 역사하시는 영적 법칙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이 영적 법칙대로 순종하면 예배를 방해하는 악한 세력들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수에 흠뻑 젖어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제약으로 예배가 끝나도 성령의 운행하심이 나에게 계속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자리에 앉아 말씀을 되새기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성령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십자가 복음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선포’입니다. 십자가 복음 전도를 끊임없이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복음 전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의 ‘도’를 신학자들은 ‘말씀’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요1:1의 ‘말씀’과 동일한 헬라어 ‘로고스’를 어원으로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셨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향해 ‘내가 하나님의 로고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내면의 생각과 사상이 밖으로 표출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내적 사상, 즉 말씀이 육신을 입어 외적으로 표현된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외적인 형태로 나타나신 말씀(그리스도)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지 그 속생각과 뜻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상징이고, ‘십자가의 도’는 전체적인 하나님의 생각과 사상을 외적으로 표현해 놓은 말씀입니다.
왜 십자가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도를 통해 그분의 구원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 십자가의 도의 회복을 선포해야 합니다. 왕이 전령을 보내 어명을 전하듯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러한 예는 바울서신에서도 여러 번 나타납니다. 살전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여기서의 ‘전하다’라는 단어는 ‘왕의 사자들이 어명을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또 바울은 딛1:3에서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라고 말하고 있고, 갈1:16에서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면서 전도자의 단호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선포하기 위해서는 ‘사자(使者)’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딤전2:6-7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라고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자신의 신분이 ‘사자’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포해야 합니까?
첫째,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전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둘째, ‘십자가의 도’의 진리의 양면, 즉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딤후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여기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야를,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메시야를 전해야 합니다. 갈보리와 부활,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둘 다 온전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일어난 육체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파자의 직책은 무엇입니까?
고전9:16-17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 직책에 대해 설명한 것인데, 매우 심각한 어조로 적혀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맡은 직분의 중책과 바울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복음 전파의 중요성과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 ‘선교사적 사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의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바울의 말은 곧 복음 전파를 ‘선교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 일을 통한 즐거움과 보람 때문이 아니라 그 사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졌고 그가 부득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열정적인 헌신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성령께 사로잡혀 있었고 날마다 주의 계시에 민감했습니다. 즉 그가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파송될 때 일반적으로 이런 각오와 사명에 붙들려 가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향한 복음 전파의 자세와 마음 또한 이런 선교사적 사명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라고 각오했습니다. 이것이 곧 ‘전도’와 ‘선교’를 대하는 자세와 사명감의 차이라고 봅니다. 선교사로 파송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입니다. 이웃을 향한 전도자로서의 우리의 자세 또한 이와 같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자신을 종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종이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듯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으로서의 임무와 직책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 선포에 임했습니다. 맡은 임무가 너무 중대하기에 사도로서의 자신의 권리조차 행사할 겨를도 없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 말씀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도’가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 전파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며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 때 나의 생각과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헌신하는 자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복음 전파의 어명을 공포하신 위대하신 왕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파자’에게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고전9: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즉 명령해 놓고 그냥 보내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파를 게을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책임지시는 은혜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일을 감당함으로써 더욱 놀라운 은혜와 충만하게 채우심을 볼 수 있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큰 힘과 능력을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까?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유창한 언어로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단순하게 선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헛되다’의 헬라어 ‘케노데’는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이렇게 되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아닌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인 철학 따위를 전했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한 인간의 지혜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로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받아들이겠지’라고 생각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복음에 내가 무언가를 자꾸 덧붙이면서 장황하게 설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는 단순히 선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의 이 말을 새겨야 합니다. 3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이것은 바울의 실언입니까?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면서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불안할 정도로 떨리는 열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종이 가져야 할 의식적인 순종과 겸손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육체적인 허약이 아닙니다. 비록 그가 이따금 자신의 육체적인 허약을 언급하지만,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이는 육체가 아닌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이 약하고 두려웠던 것은 그가 고린도에 이르기 직전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가 주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아덴은 지식과 철학이 풍성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철학적, 지식적으로 전하다가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강하고 담대한 대사도(大使徒)인 동시에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겸비한 인격자였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 외에 인간적인 논리나 영향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하는 일에만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첫째, 듣는 사람의 몫이며,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끝은 복음 전파입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에는 어떻게 능력이 나타나며, 왜 우리에게 이 사명을 주셨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