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언약의 역사
In the beginning 에서 발췌 시내산에서 율법이 내려진 이유 아담과 하와는 창조함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저들은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 교훈이 저희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바치는 구속의 계획을 수립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동물의 희생제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이 범하여지지 않았더라면, 인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구세주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율법은 계속되는 세대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한 위대한 구속의 계획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범죄로 인하여 세상은 매우 극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홍수로서 다시 정결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홍수 후, 율법은 노아의 가족들에 의해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다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할례 의식을 주셨는데, 이것은 할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헌신한다는 서약의 표시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 역시 그 서약을 지키지 못한 결과, 결국에는 애굽에 종살이 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많이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이교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 그분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든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 당신의 율법(십계명)을 친히 두개의 돌판에 새겨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가르치셔야만 하셨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받았고, 노아가 보존하였던 하나님의 율법이 계속해서 잘 지켜졌더라면, 할례 의식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할례로써 표를 삼은 언약을 잘 지켰더라면, 그들은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고 돌비에 새겨서 백성들에게 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모세에게 부가적인 내용이 담긴 의문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개의 율법 아담 때부터 시작된 동물의 희생제도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크게 곡해되었다. 주변의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미신, 우상 숭배, 방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희생제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한 완전한 지시를 주시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한다. 또 하나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인데, 이것은 성소의 두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 이다. 이것은 총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 있는 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6계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동물의 희생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의문의 율법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제사 제도의 목적과 그 완전한 의미가 실현될 때까지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희생제도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골로새서2:14).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편 119:89),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17~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로마서 7:12). 구세주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시켰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류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의 요구와 그 권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비록 의문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희생제도 속에 담겨진 귀중한 의미는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별을 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성소 기별이다(살아남는 이들 11,12호에서 자세히 연재했음). 두 개의 언약 성경에 두 가지의 율법이 나와 있는 것처럼, 언약에도 두가지가 있다. 제일 첫번째 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맺어졌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 하나님께서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에게 하셨던 이 말씀은 사람과 맺으신 최초의 은혜의 약속이었는데, 동시에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예언이기도 하다.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박히시는 고통 가운데 돌아가심으로써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의 귀에 들려질 때, 그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소망의 약속으로 들렸겠는가? 그 언약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용서를 진심으로 감사했으며, 동시에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라는 충성을 맹세하였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를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계 13:8,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이 언약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다시 반복되었다(창세기 22:18).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셔서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고 말씀하신 다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선언하셨다(창세기 17:1, 7). 그러므로 옛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맺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약은 후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반복되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애굽기 19:3~6. 모세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백성들이 일제히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하였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조건으로써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을 제시하셨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명령이었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맺어진 상호간의 약속(언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계명이 어떻게 약속이 될 수 있는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계명이 어떻게 언약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되는 하나님의 도덕률이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이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라고 공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와, “너희가 그것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서로 교환되었던 것을 말한다. 즉, 언약이란 상호 간에 맺어지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옛 언약의 문제점 아담의 범죄 후 에덴동산에서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이미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데, 왜 시내산에서 또 다시 언약을 세울 필요가 있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도 대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으로써, 백성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당신의 능력과 자비를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셨다.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 군사들의 추격으로부터 도망할 길이 없어 보이는 홍해로 인도하여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애굽의 우상 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사는데 익숙하여졌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죄악적인 욕구를 이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해줄 구세주의 필요성을 깨달아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부족을 스스로 느끼게 되기를 고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그들의 순종을 전제로 하여 큰 축복의 약속과 함께 당신의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구세주의 도움 없이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는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에 대하여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라고 선뜻 응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결심과 힘으로 거룩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의 언약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자세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시내산의 장엄한 위엄 속에서 율법이 선포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몇 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금으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는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깨어졌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양을 잡아 죽이는 제사에서 예표된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들을 죄의 속박과 권세에서 구원해줄 구세주를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그들은 옛 언약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그들이 계속해서 언약의 조건을 이행하는 일에 실패하였던 사실을 보게 된다.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 이라고 부르는 이유 옛 언약의 요구 사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라” 였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레위기 18:5. 그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 위에 세워졌는데, 그것은 죄의 용서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그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1:33~34. 새 언약 하에서는 두개의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이 성령에 의해서 마음의 판에 기록된다.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 하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움을 세우려고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며,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게 되고, 성령으로 새로워진 마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새 언약하에서의 신앙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율법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충성의 삶을 살므로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세우는 모본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진실된 그리스도인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3~4.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8~9.
변치 않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표현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목적과 의미는 항상 동일하다. 에덴 동산에서 최초에 주신 언약의 목적과 의미는 모든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제사제도의 희생양으로써 표상되었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이셨다. 시내산의 장엄함 속에서 율법을 공포하실 때 그곳에 계셨던 분이 유대의 조그만 산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제시한 사랑의 대원칙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4.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기 19:18. 구약시대과 신약시대를 통하여 일관성 있게 말씀하셨고, 일관성 있게 언약하셨던 분은 동일한 분이시다. 율법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야고보서 1:17).
13
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