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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무엘상 24 : 13)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변화를 ‘거듭난다,’라고 표현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때로는 육체만으로 살다가 영적인 삶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때로 도적질만 하다가 무슨 영적인 기적을 경험하고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경우를 봅니다. 상상도 예측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의식과 사고의 변화를 겪어도 대단한 사건이라고 여깁니다. 자신이 여태 주장하고 목숨처럼 쥐고 있던 사상이나 신념을 확 바꾸는 경우입니다.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겠습니까? 가령 오랜 세월 믿고 살던 종교를 바꾸는 일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일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도 주변의 변화와 많은 사람들의 충언이나 권면을 듣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보고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고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스스로의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다면 변화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또한 현실에 대한 감각이나 상황 인식이 부족하면 어려워지겠지요.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나라를 짊어지고 있기에 그만큼 책임이 무겁고 기대가 커지게 됩니다. 비례해서 실망과 낙심이 커지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 세워준 사람들의 기대를 유념해줘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에 우려가 깊습니다. 제발! 하는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4월도 하순에 접어드네요. 봄으로 익어가는 좋은 때입니다. 우리네 희망에 먹구름이 쳐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4월 20일 김종우 목사 드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어법인가? 저절로 질문이 나옵니다. ‘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이란 무엇입니까? 나쁜 것? 악(惡)이 정의되지 않는다면 그 반대를 생각하여 정의해봅니다. 악이란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착하지 않다, 옳지 않다 등. 생각을 넓히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세상에 나쁜 영향을 주거나,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일 등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 속에서 그런 일들이 없었는가, 생각해봅니다.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돌아봅니다.
조용한 마을에 기업체가 들어옵니다. ‘글램핑’을 조성하려 한답니다. 처음 들어보는 용어입니다. 설명 - 글래머러스(glamorous)와 캠핑(camping)의 합성어랍니다. 한 마디로 ‘멋있고 매력이 넘치는 캠핑’이란 뜻이겠지요. 소위 그런 관광지 또는 휴양지를 개발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주민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지요. 대규모 사업을 벌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특히 도시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말입니다. 휴식? 말이 휴식이지, 사실은 자기들끼리 즐길 수 있는 공간 아니겠습니까? 방해 받지 않고 맘 놓고 떠들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 말입니다.
도시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산도 있고 물도 있는 조용한 곳,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면 좋을 것입니다. 바로 그에 합당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숙제입니다. 그래서 주민회의를 소집합니다. 마을 대표와 관심 가진 주민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업체에서 두 사람이 참석합니다. 먼저 무슨 사업을 하려는지 설명해줍니다. 다음 주민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결코 동의해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삶의 터전에 해를 입게 됩니다. 당연히 자연을 훼손하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그 자연 훼손이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생존에 가장 필수요소는 바로 물입니다. 일단 먹을 수 있는 물이 있어야 머물 수 있고 오래 살 수가 있습니다. 잘 알듯이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바로 강을 중심으로 생겨났습니다. 모든 생물이 그렇고 사람 역시 물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이 동네에도 시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물론 바로 그 점이 글램핑을 만들고자 하는 이 사업에 합당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몰려들면 자칫 물이 오염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결코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용하려 하니까요. 파고 자르고 깎고 무너뜨립니다. 그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동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이 자기 입장을 설명합니다. 물이 좋아서 도시를 떠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주민을 대표해서 의견을 내놓기에 합당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으로 들어온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사업도 접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업에 선뜻 동의해주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캠핑장을 건설함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정화조 설치에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주민들의 동의를 얻기 어렵습니다. 업체에서는 정화조 설치 위치가 주민들이 우려하는 곳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큽니다. 또한 캠핑장 관리인 상주 문제도 들어있습니다. 모든 것이 비용 문제와 결부됩니다.
업체 관계자들은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갑니다. 보고를 들은 경영주는 일단 설명회가 성공했다고 자찬합니다. 분명 실패했는데 성공이라니? 역시 사업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악한(?)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설명회를 이끌었던 관계자들은 차라리 그 업체를 떠날 생각을 합니다. 한 마디로 이런 회사에서 어떻게 일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돈과 연관되니 주민들의 입장이나 자연훼손 같은 것에는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수익성이 문제이고 어떻게든 성사시키는 것이 숙제일 뿐입니다. 자기 사업의 성공만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일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정되고 접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야 다른 사람 쓰면 됩니다.
아주 느립니다.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느림을 배경음악이 기막히게 잘 따라가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야기는 ‘타쿠미’와 그 딸 ‘하나’를 통하여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업체 설명을 하려는 관계자들 두 명이 나옵니다. 딸 하나가 하교 길에 혼자 숲으로 들어갔다가 사슴과 조우합니다. 그런데 새끼와 어미를 함께 본 것입니다. 위험을 느낀 업체 관계자가 하나를 구하려 달려들려 합니다. 그런데 타쿠미가 막아섭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다시 처음 장면처럼 느리게 숲의 나무들이 화면을 한참 지나갑니다. 사실 악이란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Evil Does Not Exist)를 보았습니다. 일본 영화입니다.
갈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
금세기 초에 있던 일입니다. 캄보디아 정글에서 실종된 지 18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기사로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다시 정글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27살이라고 하니 9살 때 잃은 것입니다. 그러면 웬 만큼 말도 할 줄 알 것 같은데 그 사이 다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의문이지요. 아무튼 옛날 ‘타잔’이나 ‘정글북’ 같은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사건을 현실 속에서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과 밀접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 태어나느냐, 어디서 자라느냐 그리고 어디서 사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맹모삼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하여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주변 환경이 아이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택가 주변이나 학교 주변에 유흥업소가 들어서는 것을 우리 모두 극구 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어디 사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때의 이야기를 보고자 합니다. 이삭이 머물고 있던 곳에 흉년이 심해서 도저히 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할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창 26 :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라고 시작합니다. 이삭은 자라면서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지나온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의 흉년, 참 힘들었겠지요. 당시 아브라함은 식구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중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아내를 잃을 뻔하였으나 하나님의 간섭해주심으로 위기를 벗어나 큰 거부가 되어 떠나온 사건입니다. 비옥한 땅, 잘 사는 나라, 당시로서는 그 근방 어느 곳보다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다시 흉년이 들었습니다. 언뜻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애굽, 비옥한 땅, 어쩌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하나님은 이미 이삭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막으십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애굽에는 무엇이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이 많습니다. 그곳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내려가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나온 이후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애굽에 돌아가거나 애굽을 의지하는 것을 극구 말리셨습니다. 단 한번 하나님이 요셉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그곳에서 번성케 하셨습니다. 잠시 그 땅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후 애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만국에 그 위엄을 알리셨습니다. 그 출애굽 사건 후로는 결코 애굽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망했을 때 일부 열성분자들이 바벨론을 반역하고 도망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려합니까? 애굽으로 가려합니다. 다른 데 갈 곳이 없습니다. 그 때조차도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렘 42 : 15 - 17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1. 흉년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축복의 땅인데 거기에 왜 흉년이 드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복 준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가,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복 주시는데 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인가? 이상합니까? 우리가 우리 자식들을 키우면 마냥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강인하고 튼튼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물론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뿐만 아니라 나약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강인하고 건장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능히 이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마귀를 능히 대적할 만한 담대한 믿음을 갖기를 바라십니다.
자식이 언제까지 부모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그렇게 키우면 아이는 결국 인생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끼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가 된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그렇게 만드십니다. 옛날 논산 훈련소에는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훈련의 땀 한 방울은 전쟁 때 피 한 방울’이라는 말입니다. 모진 훈련을 받으며 불평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그 훈련을 견디어낸 자가 무시무시한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죄와 악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고 살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를 아끼시기에 메마른 광야도 걷게 하십니다.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이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훈련시키십니다. 나아가 이 세상을 하나님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어가도록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때문에 훈련시키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기 전에 10년 세월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닐 때에 그 친구 요나단에게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삼상 20 :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얼마나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인지 짐작케 하는 말입니다. 수많은 위기를 지나며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질병으로, 사고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 속에서 갈등합니다. 왜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지 가슴을 치며 답답해 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지만 흉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도, 하다못해 감옥에서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창 39 :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20 - 21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의 밤이 있기에 광명한 새아침이 있는 줄 믿습니다.
애벌레가 나방이로 되어가는 과정을 보십시오. 고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안타깝다고 그 고치를 우리가 깨뜨려주면 그 애벌레는 나방이가 돼보지도 못하고 생명을 잃습니다. 그 벌레가 나방이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기 위해서는 긴 시간 발버둥치는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날개를 활짝 펴기 위하여 역경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세상에서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당신의 세상을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자리에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 :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2.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말씀하십니다. 창 26 : 2 - 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아멘!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고 약속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비록 이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어 견디기 어려워도 믿고 버티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어도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다 그럴 수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달라지는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고 견디어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복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장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애굽은 물질이 풍요로운 곳입니다. 교회보다 세상에서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신앙생활보다 세상 따라 노는 것이 훨씬 다양하고 흥미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왜요? 민 11 :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그렇습니다. 그 때는 노예생활을 했을지라도 먹을 것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에서는 매일 만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즐거운 것들이 많은데 여기에는 말씀밖에 없습니다. 불평 나올 수 있지요. 그러나 얼마나 무지한 생각인지요. 골 2 :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다만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잘 아는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요 1 : 1, 14)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만나면 됩니다. 이 말씀이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보화를 캐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멜렉과 아내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이 자기네 땅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피난 갑니다. 그곳에서 며느리까지 얻고 잘 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그 후 두 아들도 자손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결국 여자 셋만 남습니다. 나오미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남편도 두 아들도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이방 여인들, 며느리만 둘입니다. 자기 땅도 아니고 이방 땅에 남아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아멘! “이 땅에 유하면” 이 말씀을 따라 가기가 쉽지 않겠지요. 결국 나오미는 그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복을 회복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쉽게 떠나면 안 됩니다. 좀 따분하고 때로는 힘들어도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 말씀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믿음 안에 거하면 하나님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반드시 우리로 승리하게 하십니다.
3. 이제 결과를 봅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애굽에 내려가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지요. 창 26 : 3 - 4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그곳에 머물며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요. 다 자기 아비한테 들은 대로 써먹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들통 나고 맙니다. 9절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사실 우리 자신 신앙 지키며 산다는 것이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주일 날 가게 문 닫아가지고 제대로 운영이 되는 거야? 장사하는 성도라면 한번 이상은 고민해본 사항입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주일 장사가 평일보다 두 배 이상이랍니다. 그런데 그 날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그 땅에 유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창 26 : 12 - 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마침내 어떻게 되었다고요? 거부가 되었답니다. 그 흉년의 땅에서 하나님은 이삭을 거부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고 끝까지 하나님 말씀 안에, 믿음 안에 거하면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백배의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피한다고 하나님의 복 주신 땅을 떠나면 복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눈앞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약속하신 땅을 지키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힘들어도 말씀을 지키며 믿음 안에 거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복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이삭을 볼 때에 무어라 합니까? 28 - 29절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첫째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합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여호와가 우리 눈에 나타나셨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나타난 현상을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수확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야말로 하나님이 돕지 아니하고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 흉년의 땅에, 그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이런 대풍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가장 매출이 큰 주일에 문을 닫고 어떻게 그리도 장사가 잘 될 수 있지요?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이삭을 찾아와서 계약하자고 합니다. 서로 해하지 말자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이삭이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저들로 하여금 이삭이 두려운 존재가 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고백합니다. 뭐라고요?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당신을 보니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네요. 당신을 보니 정말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이웃들에게 바로 이러한 칭송을 듣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전도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 더 놀라운 복을 약속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우리에게 가장 큰 약점이 무엇입니까?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 아닙니까? 죽으면 끝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것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 죽음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생명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가는 길,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 때 이룰 일을 약속하셨습니다. 계 21 :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소망하는 일 아닙니까? 슬픈 일도 아픈 일도 없습니다.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그 앞에 길이 보입니다. 2 - 3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한 마디로 하늘의 천국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됩니다. 어디로요? 그야 이 땅으로 내려오겠지요.
이제 질문합니다. 그럼에도 하늘로 가기를 바라십니까? 하늘의 천국이 어서 내려오면 훨씬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전히 가기를 바라십니까? 오도록 그 길을 찾으면 안 됩니까? 늘 기도하면서도 모르십니까? 마 6 :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기도하면서도 믿지 않으십니까? 믿지도 않으면서 뭐하려고 신앙하며 교회를 다닙니까? 무엇을 믿고 무엇을 소망하는지 알기는 하십니까? 똑바로 알고 신앙하기 바랍니다. 천국이 내려옵니다. 가려고 하지 말고 내려오는 천국에 입성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어디 있습니까? 그야 성경에 있지요. 하나님의 탄식을 들으며 배우고 알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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