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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외치는 자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침략 대상은 조선과 만주, 지나(중국)였고, 하나 같이 고대(古代)의 사례를 들었다는 점이다. ‘고대의 사례’란 고서기와 일본사기 등의 내용. ‘진구 황후가 신라를 쳐서 신하로 삼으니 백제와 고구려까지 스스로 찾아와 조공을 바치며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는 이른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을 근거로 내세웠다.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와 관계가 끊긴 왜(倭)의 백제계와 고구려계가 신라에 대한 증오심에서 날조, 조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한정벌설’은 일본의 위기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 단골 메뉴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즈음에 나온 삼한정벌설에는 더욱 고약한 내용이 붙었다. 삼한을 정벌한 진무황후가 활의 시위로 바위에 ‘고려의 왕은 일본의 개’라는 문구를 새겼는데 고려인들이 이를 지우려 할수록 글자가 더욱 선명해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평양성 근처에도 이 돌을 직접 목격했다는 왜군 장수도 나왔다. 물론 일본이 공식적으로 조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지 않은 적도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 에도 막부를 연 뒤부터는 조선존중 분위기와 연간 세수의 10분의 1을 투입해 조선통신사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근린 관계가 200여년간 지속됐다.
그러나 일본은 개항과 위기를 시대를 맞자 또 다시 ’고대로부터 일본의 속국인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을 들고 나왔다. 일본은 집요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요시다 쇼인이 1854년 ’조선의 왕을 봉하고 조공을 받던 고대 전성기를 이어가야 한다‘(幽囚錄)고 주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당시 일본 유력정치가들의 스승이던 쇼인이 주창한 정한론은 파당과 관계없이 퍼져나갔다.
중국이 태평천국의 난(1850~1864)에 허덕이던 1861년 에도 막부에서는 ’웅번(雄藩·존왕양이와 막부 토벌을 주도했던 죠수와 사쓰마 같은 큰 지방 세력)이 조선과 청을 치면 좋겠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이기면 다행, 지면 강력한 지방세력 억제라는 계산이 깔렸었지만 조선을 치자는 데는 정파가 따로 없었다.
외국인과 해외에 나간 일본인들도 정한론을 거들었다. 1866년 중국 광저우에 거주하던 한 일본 유생이 ‘5년 마다 한번씩 일본에 조공을 바치던 일본의 속국 조선을 도모할 것’이라는 의견 기사를 외국 신문에 실었다. 청은 이를 조선에 알렸다.(조선은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일본의 침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일본에 조공을 바친 것으로 청이 오해할지도 모른다며 조바심을 냈단다.) 요코하마에서 발행하는 영국계 신문들도 조선의 대화 거부와 정한론, ‘조선은 옛적부터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기획 기사를 빈도 높게 내보냈다. 일본이 조선을 치면 영국의 기회도 많아질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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