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8
7월5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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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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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Gd062abgk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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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동업자 예수님>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그런데다 더욱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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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oAkw1W3n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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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이나 사마리아 땅에는 가지 말고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길잃은 이들에게 보내십니다. 이는 아직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예수님께서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는 훌륭하다’ 중 ‘오줌지옥견’에서 강형욱 훈련사는 역대급 분노를 폭발하였습니다. 두 명의 젊은 남자가 개 네 마리를 키우는데 아무래도 개가 문제가 아니라 보호자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 네 마리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나 오줌을 쌉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싸웁니다. 주인은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안 되고 아무리 말려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강 훈련사는 한눈에 개가 아니라 주인이 문제임을 알아봅니다. 치우지 않은 오줌과 똥이 구석구석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강 훈련사는 말합니다. “개가 소변을 봐서 내가 이런 집에 산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개들 때문에 집이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보호자님이 집을 지켜주지 않아서예요.”
강 훈련사는 이런 환경 자체라면 자기자신이 불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호자들은 어쩌면 반려견들을 통해 자신들이 집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강 훈련사는 왜 불안할까요? 개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불안한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개를 키우면 안 된다고 말해줍니다. 먼저 청소를 도와줄 테니 일주일만 그 상태를 유지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갔는데 좋아진 줄 알았더니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사람은 그리 빨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책 시간을 짜고 강 훈련사의 지시대로 열심히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능력을 아셨기에 이방 민족과 사마리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집안 식구들은 다 냉담하고 함께 가정 기도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성당에서 봉사하는 게 정당한 일일까요? 먼저 집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어느 정도 집이 안정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봉사를 해도 나와 성당에 이득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구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가 이렇게 몸살을 앓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세상도 힘들어지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도 피해를 봅니다. 대학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습니다. 내 몸을 닦고 집을 제어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평정한다는 뜻입니다. 말뜻보다는 말의 순서가 더 중요합니다. 먼저 나를 죄 안 짓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하고 가정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나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러면 세상도 평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복음화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당신이 먼저 거룩해지려고 하셨다고 하십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가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 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습니다. 간디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아이는 대답합니다.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 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 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자녀는 그렇게 살게 하겠다는 게 말이 될까요? 내가 사는 능력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먼저 나부터 신앙의 삶을 다잡읍시다. 그리고 가족도 성가정으로 만듭시다. 그다음에 성당에서 봉사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복음화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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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단신께서 모든 질병과 병을 치유해 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부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절)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고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결국은 유대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 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어떤 사람이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운다 하여도, 이제는 세상이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파멸하고 만다. 그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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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르심과 응답>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마르코복음을 보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3,13) 요한복음에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5,16) 이 표현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로 ‘사도단’을 구성하신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이 있고, ‘인간의 응답’은 나중입니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주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먼저 하십니다.
열두 사도는 주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셨는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아마도 믿음, 사랑, 열성, 충성심 등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앞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들의 직업이나 경력 등만 보고서 그들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나자렛이라는 시골의 가난한 목수’로만 생각하는 것과 같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더러운 영들’(마귀들)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은,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권한과 힘으로 많은 마귀를 쫓아냈습니다.(마르 6,13) 그런데 그랬던 사도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마르 9,18)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마태 17,20), 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신 일은, 아주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위임’하신 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아니면 자기의 권한이라고 착각해서 교만해지면, 권한 자체의 힘을 잃게 됩니다.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마귀들과 악의 세력들에 맞서 싸워서 그것들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기셨고,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임무를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임무는 교회 전체의 임무입니다. 교회는 마귀들과 악의 세력들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것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과 상관없이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여기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말은 뽑으셨다는 말이기도 한데, 뽑지 않고 버린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과 구원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특별히 선택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응답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신앙과 구원으로 부르신다고 해서 그 부르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별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일을 각 개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나’를 부르시는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부르심’의 목적도 ‘나의 구원’이고, ‘응답’의 목적도 ‘나의 구원’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사도 직무 수행의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그들 자신들의 구원입니다.>
신앙인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에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과 희생과 사랑 실천도 포함됩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아서 봉사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나는 직책 같은 것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와 상관없이 그냥 혼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이 왜 잘못이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스스로 혼자 고립되어 있는 상태로는 사랑 실천을 할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일은 ‘공동체’를 통해서, 즉 ‘사랑’을 통해서 구원에 도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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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교구 사제모임 때입니다. 20명의 사제들이 제대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들의 소임지와 이름을 소개하였습니다. 신자분들에게 유독 박수를 많이 받았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남미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을 소개할 때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사목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은 한국에서의 사목을 포기하고 먼 남미에서의 사목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한 신부님도 신자분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8년 동안 그곳에서 사목했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듯이 신자들과 함께 지금의 새 성전을 신축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곳에서 2달 동안 미사를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는 분들이 있었기에 마음이 편했습니다. 20명의 사제들은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승리한 다윗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승리를 축하하는 마음보다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사울의 마음에는 질투와 시기가 들어왔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해서 죽였던 것처럼 사울도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마음을 열고 다윗을 받아들였다면, 백성들과 함께 다윗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축복 속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지금 있는 본당신부님은 모든 행사를 차질 없이 준비해 주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신자들과 회포를 풀고, 주일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겨울과 봄이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겨울은 봄에게 새로운 자리를 내어주고, 봄은 가는 겨울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전임과 후임도 그렇게 아름다운 만남을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르신 12명의 제자들의 이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모든 사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 또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쫓아내야 할 마귀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입니다. 불의와 맞서지 않고 타협하려는 비겁함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숨으려고 하는 열등감입니다. 우리가 고쳐주어야 하는 병자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자본과 성공이라는 ‘늪’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으로 실천할 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마귀를 쫓아낸 자리에, 병자를 고쳐준 자리에 정의를 뿌리는 것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고, 하느님나라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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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삶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뜻이며,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쫓겨나고 병자와 허약한 이가 치유받는 것은 성경에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승리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열두 제자의 이름이 “사도”라는 호칭으로 소개됩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미 익숙한 이름들이기도 하지만 그 명단에 자신 또는 친밀한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봉사자를 선발하여 명단을 발표하여도 교우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그 명단에 올릴 마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찌 신자들뿐이겠습니까? 사제품을 받으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고 바쳤던 기도가 점차 “쟤가 있지 않습니까? 쟤를 보내십시오.”라는 기도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계속 이루십니다. 그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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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
마태오 10,1-7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부르심>
사랑하는 벗이여
나에게
가까이 오시게나
그리하여
또 하나의 내가
되시게나
사랑하는 벗이여
나에게서
멀리 떠나시게나
그리하여
온 누리에 나를
심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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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약속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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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너 사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제 위의 형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집 옆에 다리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근처를 가면 꼭 다리 밑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나의 진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였지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나’라는 말을 계속 믿게 되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형, 누나들과 저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힘도 약하고, 운동도 못하고,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투성이인 저와 달리 형, 누나들은 모든 것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어려서 못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느 날, 어머니 친구분이 집에 놀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는 제 위의 형과 쌍둥이냐고 묻습니다.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부정적인 이유만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 긍정적인 생각을 전혀 떠오르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다면 계속해서 찾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파견 명령을 받아들여서 전교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만 긍정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대시하는 지방에 가지 말고 우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고 하시지요. 사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민족과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곳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반대편에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굳게 믿은 제자들이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라고 하시지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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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빛이신 주님>
-참 빛을 찾는, 반사하는 사람들-
다시 인용하여 나누고 싶은 지난 강론중 내용입니다. ‘하늘에 사랑의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라는 시와 어제 강론 말미의 내용입니다.
“하늘에 사랑의 별울 다는구나.
사다리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배나무 가지 열매마다 봉지를 쌀 때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무수한 사랑의 하얀 별들
낮에도 환히 떠오른 사랑의 하얀 별들
하늘에 별을 다는 어머니들이다.
몸은 고단해도
얼굴은, 눈은, 마음은 별처럼 빛나는
배봉지를 싸는 어머니들이다.”
하늘에 별을 다는, 배봉지를 싸는 어머니들은 참빛이신 발광체發光體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빛이신 사람들입니다. 참빛이신 주님이요, 참빛을 찾는, 반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제 깨달음을 피력한 강론중 마지막 말마디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향한 부단不斷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비움과 겸손의 복된 순교적 삶이 유일한 처방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빛이신 주님께 궁극의 답이 있습니다. 어제 우리는 참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기쁘게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했습니다. 저는 또 감히 한국 성직자들은 한국은 물론 “남북을 포함한 한반도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로 칭하며 부단히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한국순교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마음입니다. 참으로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우리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어제는 참 뜻깊은 좋은 축복받은 날이었습니다. 새삼 이렇게 수도회의 어른을 찾아뵐 수 있음도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28년 동안 한결같이 '팔공산의 곰'이란 애칭을 들으며 은둔의 삶을 살고 계신 현재 85세 마르틴 아빠스님을 방문한 것입니다. 우리 한 형제는 정정하여 '아기곰'이라 했습니다.
흡사 “빛의 순례” 하루 여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역시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마르틴 아빠스였습니다. 욕심을 비우니 편하고 자유롭다는, 무욕의 자유, 무욕의 지혜라는 결론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구구절절 많은 깨우침을 주는 참빛을 반사하는 삶의 지혜들이었지만 한 예만 소개합니다.
“우물이나 수도원 돈은 나누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썪는다. 부지런히 퍼내야 맑은 생수의 샘솟는 우물이듯 수도원의 돈도 그렇다. 나는 아빠스 재임시절 한해가 끝나는 무렵이면 재무에게 내년 6개월치 수도원 생활비만 남기고 남는 것은 무조건 아프리카 가난한 수도원에 주도록 했다. 그래도 언제나 부족하지 않고 차고 넘쳤다.”
저 역시 똑같은 이유로 내적으로 썩지 않기 위해, 매일 샘물을 퍼내듯 매일 강론을 씁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믿으며 강론을 씁니다. 이 또한 참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일이며 순전히 100% 주님의 은총이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어제 우리는 마음을 다해 아빠스님에게 사랑의 선물로 용돈과 더불어 배즙을 넉넉히 드리니 참 마음도 뿌듯했습니다. 노인들에게 ‘하느님’은 물론 현실적으로 ‘돈’과 ‘잡술 것’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어제는 빛의 순례였던 하루처럼 기쁨 가득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참빛이신 주님이요, 예외없이 참빛이신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얼마전 저는 홍명희가 쓴 “임꺽정” 소설 10권을 독파했습니다.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꼽는 분이었고, 정말 천재의 저력이 발휘된 홍명희의 임꺽정 대하소설이었습니다.
“빛이 없구나!”
책을 본 제 독후감 일성이었습니다. 문득 독일의 시성詩聖, 괴테의 “어둡다, 어둡다, 나에게 빛을 달라.”라는 임종어가 떠오릅니다. 인류의 참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없는 곳에서는 어둠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보복의 악순환의 역사임을 500년 조선시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래 된 18-19세기 조선땅에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나올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갈구渴求하던 참빛이신 주님을 발견했을 때, 만났을 때 들불처럼 번진 순교대열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빛을 찾는 사람들의 영적 본능은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참빛인 주님을 가리는 가짜 빛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종교 역시 세상에 동화同化되고 속화俗化되어 참빛을 반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 호세아 예언자 그대로 칠흑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환한 빛입니다. 발광체 하느님을 반사하는 찬연한 빛입니다. 그대로 오늘날 종교에 대한 비판같습니다. 참빛이신 주님을 떠날 때 허례허식은, 타락과 부패는 필연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참빛 앞에서 여지없이 폭로되는 죄악의 타락상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어둔 현실을, 우리의 어둔 내면을 환히 밝히면서 심기일전心機一轉, 분발의 노력을 다해 새롭게 시작할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우리 모두 참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 멋진 참빛이신 주님이요 그 반사체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바로 여기 오늘 지금이 참빛을 찾을 때이며 참빛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영원한 참빛이신 예수님의 등장을 봅니다.
참빛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빛을 반사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어, 세상에 당신 빛으로 파견되기 전,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으니, 주님의 참빛을 반사할 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정말 참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임을 깨달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물리적 거리의 ‘가까이’라기 보다는 내적 친밀함의 ‘가까이’입니다. 날로 참빛이신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적으로 주님과 멀어질수록 어둠속에 악순환의 죄의 유혹에 떨어질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바로 열두 제자중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가리옷이 그 적절한 반면교사가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빛’으로, 또 ‘당신의 하늘 나라’로 살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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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하느님의 나라!>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나라이며,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첫 말씀이기도 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오늘 복음(마태10,1-7)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파견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사도'로 뽑아 세상에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열두 사도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더러운 영들을 쫒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셨던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 10,2-4)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열두 사도들이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와 거리가 먼 저 세상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지금 여기'(hic et nunc)를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제자들이 이어서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삶으로 선포하는 사도들', 그래서 주변에 길 잃은 양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또 하나의 사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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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정제천 요한 신부님]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한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신다.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데 협력자를 필요로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도우심도 청하지 않는가?
자율성은 오늘날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 그러나 만능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철저히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제자 공동체의 구성도 묵상해 보자. 다혈질인 베드로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 열혈당원과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다.
이 사람들이 한데 모인 근거는 오직 예수님 때문이었다. 가톨릭 문화의 특징인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는 예수님에게서 유래한다.
‘중요한 일에서는 일치를, 나머지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가족과 본당, 수도 공동체는 어떠한가? 생각이 다른 가족, 역사와 문화가 다른 사람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에서는 가족이, 본당이나 수도회의 형제자매가 나와 다르고, 내 뜻과 달리 행동할 때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공동체 중심에 계셔야 할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이 집의 가장이고 주인이시다.’
그러면 우리 공동체의 다양성이 보편성의 표지가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신다.
이는 폐쇄적인 국수주의가 아니라 활동의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많은 경우 배척과 박해를 겪었다. 그래서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라.”(마태 10,14)는 권고도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로마 11,11)
이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하신다.
복음은 애초부터 온 세상을 향한 것이지만,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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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형제들의 잘못으로 이집트까지 끌려와 갖은 고초를 겪다 재상까지 된 요셉, 바로 그 요셉 덕분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형제들의 잘못이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준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면서 당신 계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셉의 형들은 서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형제들을 보고 요셉은 눈물을 흘립니다. 거기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것은 요셉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 할 것임을 알려 주신 바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 참조) 이렇게 보니 인간의 일은 언제나 하느님 손바닥 위에 있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죄악에서 돌아와 다시금 당신의 일을 해 나가기를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이따금 인간이 죄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이 되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기도 합니다.(에제키엘 예언서 36장 1절-38절 참조)
우리는 하느님께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 개입하시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요셉처럼 세상 속에서 형제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에 따라 제자들은 이스라엘 집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길 잃은 양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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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신화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내려주신 마지막 처방이십니다. 우리는 이 처방으로 죽음을 택할 수 있고, 영생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는 반면 전혀 그를 믿지 않고 핍박하는 부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일에는 ‘중간쯤’, ‘적당히’ 또는 ‘그저 그렇게’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구세주이시고 구속자이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강한 힘을 믿고 의탁하는 쪽에 서지 않는다면 그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박해하는 쪽에 설 수밖에 없는, 단호하고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전해 듣고 예수를 향해 “몰려 들며” 앞 다투어 예수님을 만지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모한다할지라도 그 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하느님을 귀찮게 하고 피곤하게 할 뿐입니다.
내 욕심을 위한 도구로 그분을 사용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빵을 받고 말씀을 듣고 탄복하며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걸려 넘어진 사람도 많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오심은 큰 축복이기도 하지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버리고 따라 나서는” 단호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필요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은 바로 “나를 따라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홀로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는 우리들을 불러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 두 사도를 이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구원사업을 이어가도록 명령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위해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과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는 일은 하늘의 천사에게 맡겨지지 않고 바로 ‘나’,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의 임무는 이렇게 막중합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이 세계를 정복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내려져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아니라 나 하나의 완전함이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하느님은 믿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이렇게 넓고 큰 안목을 지니는 일입니다. 좁고 근시안적인 내 시야를 넓혀서 하느님의 왕국에 든든한 반석이 되는 것이 우리의 할 바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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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안에서부터>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가 사도로 부르심 받은 것에 이어 파견을 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열두 사도는 많은 제자 중에 사도로 뽑힌 제자들이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한다는 뜻이며 어느 한 지파도 빠지지 않는 온전한 하느님 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민족들에게 가지 말라는 말도, 다른 민족을 배제하시는 그런 뜻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라는 뜻이며 그러기 위해 길 잃은 양들을 우선 모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느님 공동체를 온전히 이루라는 것도 그들이 공동체로 다른 민족들에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제가 이 복음을 읽을 때마나 부끄러운 것은 선교를 한다고 해외를 돌아다니고 해외에 나갈 수 없으니 가까운 곳부터 선교를 한다고 <여기선교협동조합>을 세우고 요란을 떨지만 오늘 주님 말씀처럼 밖으로 나가기 전에 집에서부터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실패이고 포기입니다. 사실 밖에 나가 복음 전하는 것보다 안에서 선교하는 것이 더 힘들고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사는 것을 안에서는 포기하고 밖을 선택합니다.
이 실패와 포기가 뼈아픈 오늘이고, 그래서 다시 집에서부터 복음을 살기로, 안에서부터 형제애를 살기로 겸심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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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CDvlaQO1B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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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하늘 나라의
생생한
복음이다.
곡식을 돌보는
농부의 지극한
보살핌은
곡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며
정성이다.
관계안에서만
볼 수 있고
관계안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함께하시는
사랑의 주님이다.
사랑의
지극함은
부르심과
응답으로
드러난다.
흩어진 백성을
사랑으로
모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참모습과
참 뜻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사랑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새로운 탄생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탄생이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사랑의 변화이다.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오늘의 사랑이다.
우리자신이
새로워지는
기쁨이다.
더 이상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참된 우리란
길 잃은 양들을
도와주는
사랑이며
봉사이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인격의 길을
다시 찾게한다.
사랑의 삶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진실된
사명이다.
진실된 사명은
뜨거운 삶의
현장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는
인격의 승화이다.
인격의 고귀함을
되찾아주는
일이야말로
제자들의
책무이며
신성한 사명이다.
그러기위해선
먼저
제자들이
기뻐야 한다.
그 기쁨을
생활로
나누는 것이다.
생활의 복음은
생활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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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복음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 사람을
만나는 삶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복음선포는
나눔과 배려로
다가가야합니다.
그래서 선교는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따뜻한 존중입니다.
삶의 현장으로
가야합니다.
생활의 실천이
빠져버린
복음선포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삶 자체를
보살피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입니다.
현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픔과 힘겨움의
현장안으로
들어가셔서
이 땅에 살고있는
이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소외와 갈등을
어루만지는 복음이
참된 복음입니다.
그 복음에
참여하고
동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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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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