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시골에선 호박과 박을 많이 심었다. 박은 주로 넝쿨을 초가지붕으로 올려서
박이 열리면 지붕에 자리잡게 하여 키워서 서리가 내릴 때쯤 땄다. 당시에는 플라스틱이
나오지 않았던 때라 바가지를 모두 박을 심어서 만들었다. 박이 잘 익으면 삶아서 내부를
긁어내고 말리면 바가지가 되었다.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물어다 준 박씨로 대박을 터뜨린
흥부전 이야기도 박에서 나왔다.
호박은 아무데나 구덕을 파고 거름을 듬뿍 주고난 다음 호박씨를 심으면 2~3일 지나면 싹이
올라왔다. 싹이 처음 올라 올 때는 새나 닭이 뜯어 먹지 못하도록 나뭇가지 등으로 덮어놓아야
한다. 호박은 보릿고갯때 구황식물로도 역할을 단단히 했다. 호박죽도 끓여 먹고 호박밥도 해
먹었다. 잎은 삶아서 쌈을 싸 먹고 애동호박은 나물로 반찬으로 쓰고 누렇게 익으면 죽도 끓여
먹고 약재를 넣어 약으로도 썼다.
우리 식솔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나갈 때 터밭에 호박과 가지를 심어보려고 호박씨와 가지씨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나갔는데 영국에 가서 땅에다 심었으나 싹이 트지 않았다. X-ray를 통과해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호박씨를 심어 싹이 텄다면 IMF시절을 넘기는데도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물가가 비싼 데다가 원화환율까지 절반이하로 떨어졌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마전에 우리 아파트 101동 화단에 누군가 호박을 심어 싹이 올라오더니 제법 넝쿨이 뻗어 나갔다.
햇볕이 잘 들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더니 덩굴손이 앞으로 내뻗더니 뭐 든지 잡히는 대로 넝쿨이
타고 올랐다. 그러더니 잎 사이에서 초롱처럼 생긴 호박꽃이 피었다. 호박도 꽃이 피어야 벌 나비가
날아들어 수분을 해 주어야만 떨어지지 않고 큰다.
오늘 걷기 운동을 하면서 101동 앞을 지나가다 보니 무성하던 호박넝쿨이 확 걷어치워져 있었다.
아마도 관리실에서 보고 농사짓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몇년 전에도 우리 아파트
동 앞 화단에도 누군가 빈 터에 들깨를 심었다가 뽑히고 말았다. 아파트 화단은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
므로 농사를 지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래도 가까운 1층에서 화단의 꽃을 뽑아버리고 채소를
심으려 하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싶으면 농촌으로 가든지 별장을 사서 개인적으로 채소를 심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