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합니다.
1장1-9절은 인사와 문안이고 10절 부터 고린도전서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보이는 일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파행위 곧 하나님은 안 보이고
인간들이 설쳐대는 모습이 바로 교회의 최대의 부조리 중에 하나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적어도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 세 사람이 지나갔습니다(12절)
짧은 기간 동안에 세 사람의 목회자가 바뀐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보다 주의 일꾼에 대한 팬덤이 생겨 분파가 일어난 겁니다.
지금도 여러 교회의 문제 중에 이와 같은 원인으로 시끄러운 교회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문제는 거의 인간의 정 때문에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말하는 목회의 성공요소는
인간관계가 원만한 목회가 있는데 곧 행정적인 목회를 말합니다.
그 다음엔 인간관계는 소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만 대변하므로 영적인 권위로
하는 목회가 있습니다. 강력한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력을 말합니다.
처음 어린 신자가 교회에 들어 올 때는 거의 인간관계로 들어옵니다.
그 다음 신앙의 발전에 따라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사람의 정이 변하고 나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는 현상을 많이 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과 인간이 말씀을 사모해서 나아가다가 그곳에서 만난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의 교제인데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강력히 권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떠나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하나가 되라는 요구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가치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됩니다. 어쩜 한국교회는
기복신앙보다 오히려 끈적끈적한 인간관계 때문에 교회 안에서 더 큰 문제가
야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연, 학연, 교단, 동창 등이 뒤엉켜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말세에 나타나는 바벨론과 같은 교회의 유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자기들의 교리를 따르지 않으면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 교단들도 있습니다.
사랑이나 인정은 없습니다. 아니 인사도 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된 형제들은 가시적인 교회라는
울타리에 관계없이 말씀 안에서 서로 교통을 합니다. 그게 바로 참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냉정하고 엄격한 가운데 진리 안에서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 속에서 영원한 형제와 동지가 되어가야 하는 겁니다. 인정도 변하고
인생은 떠나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변하지 않고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영원한 존재가 된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쌓여져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모든 것이
아침 안개와 같을 것입니다. 결국 다툼과 분쟁 속에서 교회는 흩어지고 맙니다.
고린도전서의 부정적인 문제점만 추적하지 말고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그 문제를 없애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현실의 문제보다 더 크면 그 문제는 사라지고 맙니다.
예컨대 국내의 뉴스도 더 큰 것이 터지면 작은 것은 묻히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며칠 전에 어느 정치인이 테러를 당하고 나니 작은 사건들이 묻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찾아 다투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묻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책이 상책이 됩니다.
고전1장의 요절은 18절과 24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책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망이 해결이 됩니다. 근데 지금의 오직 예수, 예수의 피, 십자가 등의
복음의 내용으로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긴 소속이 결정되지 않아
여전히 사망의 종이 되어 있으므로 연약과 질병으로 스러져 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망이 달고 다니는 주머니는 음부인데 그 음부 안에서는 이김이 없어 찬양도
감사도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행태가 그 음부 안에서 나타납니다.
인간에게 사망문제만 해결하면 그 외에는 다 조무래기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으면 평강과 기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가정문제도 그리스도가 해결하십니다. 그리스도로 영광스러운 가치를 소유하면
건강도 경제도 잡다한 사건들이 다 감사함으로 무탈하게 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내주 역사하심은 문제해결의 진공청소기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않으므로 문제가 문제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Power와 Sense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지적은 그들이 말은 많아도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안 계시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을 향해서도 ‘너희 입술은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마15:8)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그 안에 안 계시고 그리스도도 계시지 않는 겁니다.
바로 마지막 때의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며 곧 현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후13:5절은 바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해 도대체 너희가 그리스도를 모신 믿음이 있는가 묻는 겁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에도 그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힐문이죠.
지금 이 시대의 교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그 믿음이 있는지 항상 시험해 보고 확증하라고 권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제가 사람을 보고 당신 지금 죽으면 불 못이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면 생명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고 세례를 통해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본다 또는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린다 하고는 사망 아래에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뭅니다(요3:36)
그래서 어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으로 영의 생각을 하므로
생기가 발랄한 명랑하고 상쾌한 모습이나 어떤 믿음은 얼굴이 항상 사색입니다.
목회자도 밑지는 장사를 하는 사람 같고 교인도 늘 손해 보는 울상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한들
엔진이 꺼진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과 같은 믿음인데 그게 과연 잘 될까요?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전하려면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를
터득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내게 살아 역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체험하고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확신하고 전파해야 합니다(고전1:18)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