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수의 불안과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드디어 남자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지수를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
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만드는 공포였다. 남자의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그녀의 눈
속에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허나 그것이 오히려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남
자들의 진짜 무기는 바로 힘이 아니던가. 특히 욕정에 사로잡힌 사내들의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덜컥 겁이 나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지가 떨린다는 표현을 그녀는 지금에서야 이해했다. 아무리 공포 영화를 많이 봐도 놀라
지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어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차라리 집에서 들어오라고 했을 때 들어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이러다 엄
마, 아빠 얼굴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간 남자들의 청혼을 무참히
거절해서 하늘이 노해 벌하는 건가?
정말 그런 이유라면 너무도 억울했다. 결혼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
리고 결과적으로는 남자들에게 더 나은 여자를 만날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모두 남자들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비켜준 것이었다.
만약 정말로 하늘이 그 이유로 자신을 벌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
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끔찍한 벌이란 말인가.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했던가.
그 말처럼 지수는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이 큰 후회로 다가왔다.
겁에 질려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 가, 가까이 오지마! 아악!"
순식간이었다.
남자의 강인한 팔이 지수의 몸을 욕조에서 가볍게 들어올리곤 자신의 어깨에 둘러맸다. 아
주 옛날에 성행했던 아녀자를 보쌈해 가는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것만 같았다.
고함치며 거칠게 반항하는 지수의 동작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남자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
겨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지수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고 몸은 축 처져 거의 혼절 직전이었다.
남자가 지수의 몸을 침대위로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그녀의 몸이 침대 스프링에 의해 몇 번
퉁겨 올랐다.
남자는 언제 들고 왔는지 모를 타월을 그녀의 머리 위로 던졌다.
"닦아."
남자가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저음이었고 또한 매력적인 음성이었다. 단 한마디였지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순간에 이렇게 낯붉히며 부딪치지만 않았다면 어쩌
면 그녀는 남자에게 정신을 팔았을 지도 몰랐으리라.
남자의 목소리에 매료됐던 지수는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수는 황급히 타월로 몸을 감쌌다.
허나 천의 양은 그녀의 몸을 모두 가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순간 남자에게 화가 났다.
벽에 걸린 큰 타월을 놔두고 왜 하필 이렇게 작은 타월을 들고 와서 날 곤욕스럽게 만드는
것인지...... 정말 제대로 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지수는 그렇게 남자를 안주 삼아 씹다가 문득 남자 앞에 발가벗겨진 자신의 상황을 느끼곤
얼굴을 붉혔다.
'이 상황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김지수, 정말 맛이 갔군!'
자꾸만 타월을 만지작거리며 조금이라도 더 몸을 가리려는 지수의 행동에 남자는 못마땅하다
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팔 청춘도 아니면서 그런다고 누가 봐주기라도 한대? 얼른 물기나 닦고 옷 입어."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기분 좋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
고 침대 위로 뛰어올라 매번 그러했던 것처럼 곧바로 단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
주 행복한 꿈을 꾸면서.
저 남자는 그런 달콤한 상상을 단 한 순간에 깨놓고도 뭘 잘했다고 저렇게 싸가지 없는 말
을 내뱉는 것일까. 저런 대책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누가 선물한 것일까. 분명 혼자 거지처
럼 주워먹었을 게 틀림없었다.
"다...당신이 그렇게 보고 있는데 어떻게 옷을 입어요!"
생각과는 다르게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왔다. 거친 입담을 쏟아내고 악을 바락바락 쓰고 덤벼
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무서움에 바들바들 떠는 꼴이라니.
지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목숨 앞에 그 누가 비
굴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 바로 그거다!
지수는 그 생각으로 자신을 위안 삼으며 죄 없는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그런 지수에 반해 남자의 목소리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얕은 짜증이 섞여있었다.
"볼 것도 없으면서 비싼 척은."
"뭐요!"
남자는 귀를 후비는 동작을 취하면서 마지못해 뒤돌아 섰다. 옷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약간은 빠르면서도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남자의 신경을 자극해 자꾸
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를 알리 없는 지수는 남자의 모습을 주시하며 옷장으로 다가가 허겁지겁 옷을 입기 시작했
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옷을 입으려니 옷이 자꾸만 몸에 달라붙어 여간 고역이 아
니었다. 거기다 남자의 존재에 긴장한 탓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겨우 옷을 껴입고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뒤돌아서있는 남자의 딱 벌어진 어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봐요."
지수의 부름에 남자가 돌아섰다.
그때서야 지수는 긴장해서 보지 못했던 남자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순간 헉!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놀란 지수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닫았다.
그는 누가 봐도 딱 남자답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모습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선이 굵은 얼굴
의 소유자였다. 쌍꺼풀은 없었고 적당한 크기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눈매는 상황마다 바뀔
태세였지만 지금은 다소 매서워 보였다. 그리고 높고 시원하게 뻗은 콧날은 보는 이로 하여
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고 꾹 다문 입술은 그의 고집스러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거
기다 이따금씩 씰룩여지는 입꼬리는 그의 성적 매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너무 하얗지도 그렇다고 까맣지도 않은 적당한 구릿빛의 피부와 매만지지 않은 듯한 까만 머
리칼을 자랑했다. 거기다 도저히 강간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깔끔하고 멋스럽게 차
려입은 옷차림도 눈에 띄었다.
약간 물이 빠진 청바지 위에 목선이 가슴까지 파인 붉은색의 얇은 니트를 윗 단추가 몇 개
풀러진 하얀 셔츠 위에 바쳐 입고 검정 가죽 재킷을 걸쳤다. 거기다 깔끔한 넥타이를 느슨하
게 매 마무리했다.
그녀를 들쳐 맸을 때 묻은 물기가 그의 한쪽 어깨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 흠을 제거한
다면 그는 외형만큼은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
아니, 그 흠마저도 완벽한 조화였다.
지수가 남자를 알게 모르게 세심히 뜯어보는 동안 남자 또한 아무런 말없이 지수를 응시하
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느꼈듯 화장기 없는 작고 하얀 맨 얼굴에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
었다. 모든 것이 오밀조밀 모여 얼굴 형체를 만들었다. 모든 것을 투과해 버릴 듯한 맑은 눈
망물과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 곳에 자리잡은 작고 선홍빛을 띄는 입술이 유난히 돋보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목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새하얀 쇄골이 너무도 예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의 젖은 머리
칼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쇄골을 지나 어깨를 적시고 한 줄기 물기가 되어 가슴 굴곡
을 타고 안으로 스미듯 흘러들었다. 조금씩 가슴 부위가 물기에 젖어갔다.
그 모습은 또다시 남자의 신경을 자극해 흥분을 느끼게 했다.
꾸미지 않았음에도 꽤나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남자의 낯뜨거운 시선을 느낀 지수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남자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당신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요! 주거 무단침입으로 고소하기 전에 당장 나가요!"
꽤나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이런 녀석들은 함부로 하지 못하게 미리 선수를 쳐야한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도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 작전은 보기 좋게 먹혀들지 않았다. 남
자의 매서운 눈매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 섬뜩함이 느껴졌다.
'정신차려! 호랑이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그래, 난 살 수 있어!'
지수는 그 짧은 순간에 겁을 상실한 말은 상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태도를 바꿨다.
"저기, 이봐요. 음...... 그러니까 말이죠, 내 집은 가져갈 물건도 없고 값비싼 것도 없어
요. 못 믿겠다면 한번 쭉 둘러봐요. 고작해야 침대나 세탁기 티비 그리고 장롱이랑 화장대뿐
이에요. 그런 건 부피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들고 도망가지도 못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
고 이런 화구들은 팔아도 돈도 안나와요. 그 흔한 보석도 없어요. 내가 워낙 싸구려 체질이
라 진짜 금 같은 것도 안 키우거든요. 들어봐서 알죠, 도금. 그러니까 내가 눈 딱 감고 경찰
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까 그만 이쯤에서 나가주면 참 고맙겠어요. 아니, 두고두고 고맙게 생
각할게요"
비굴하게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입가에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띄었다. 그리곤 한 마
디를 뱉어냈다.
"싫은데."
그 한마디에 지수는 어이를 상실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남자의 웃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다.
지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세차게 비볐다.
"틀림없이 내 눈이 이상해진 거야. 저런 오만 방자한 인간이 멋있게 보이다니!"
혼자 중얼거리듯 작게 읊조리는 지수를 향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눈에는 가장 비싼게 보이는데 정작 자신의 눈에는 안보이나 보지?"
"무슨..."
남자가 걸음을 옮겨 지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놀란 지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남자는 지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댔다. 코와 코가 맞닿아있었고 입술도 거의 닿
기 직전이었다. 서로의 숨결이 바로 전해졌다.
지수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바로 자기 자신이야."
남자의 속삭임에 지수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위험했다. 머릿속에서 빨간 등이 켜져 그녀
에게 위험을 알려왔다.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빼내려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재
빨리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가 더욱 몸을 밀착시키고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입술을 지수의 귓가로 옮겼다.
"이렇게 첫날밤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저, 저기..."
"쉿."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내려앉자 지수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그녀의 굳어진 몸을 느
낀 남자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곤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던 손을 풀었다. 두 발자국 뒤로 물러
나 장난기 어린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뜻을 이해한 지수는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자신을 농락했다는 사
실에 치가 떨려왔다. 따귀를 때릴 심산으로 막 손을 들려던 순간이었다.
다시 쏟아낸 남자의 말에 바로 행동을 멈췄다.
"오늘 들어온다고 미리 말했잖아. 그거 하나 기억 못하나?"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지수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자의 대답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룸메이트 구한다는 광고보고 연락했더니 당장이라도 들어오라고 했잖아."
"룸메이트?"
분명 지수는 그런 광고를 낸 적이 결코 없었다. 혼자가 좋은 지수였기에 누군가와 함께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껏 그 많던 청혼도 마다했다.
그런데 룸메이트라니! 분명 무슨 착오가 있는 거야.
"이봐요, 난..."
"최태현."
"뭐라고요?"
"난 이봐요가 아니라 최태현이라고."
태현은 지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다시 일러주었다.
"아, 그래요. 최태현씨.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난 룸메이트 구한다는 광고를 낸 적이 없어
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요. 게다가 난 여자예요. 방도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룸메이트를 구하겠어요, 것도 남자로?"
"그럼 내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라도 했다는 거야? 내가 미친 인간으로 보여?"
태현이 정색하며 물어왔다.
또다시 변한 남자의 태도에 지수는 강간범이라는 세 글자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황급히 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쪽이 집을 잘못 찾은 거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진정
해요."
태현의 한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당신이 전화 받은 한서경 아니야?"
"아닌데요."
"그럼 한서경이 누구야?"
되려 한서경에 대해 물어오는 태현을 지수는 황당한 눈빛으로 마주했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한서경이 누군데요?"
"당신."
"난 한서경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대체 한서경이 누구야!"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자신이 분명 남의 집에 잘못 들어왔음에도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인가.
지수는 남자를 노려보다 갑자기 놀란 듯 말을 뱉었다.
"잠깐! 당신 방금 전에 한서경이라고 했어요?"
"당신이 아니라 최태현."
"아, 아무튼요!"
"그래. 한서경이라고 했어. 그게 왜?"
지수는 일어나는 현기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뒤, 침대에 털썩 내려앉았
다.
한서경.
처음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하니 너무도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래, 그것은 분명 자신의 엄마 이름이었다.
그럼 이 모든 황당무계한 일이 한서경 여사가 꾸민 일이란 말인가?
오, 맙소사!
'아니야. 혹시 동명이인일 지도 몰라. 그래. 분명 그럴 거야. 그렇다고 생각하자. 설마 자신
의 딸을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떠넘기기야 하겠어?'
남자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자기 이름이 이제야 기억난 건가? 괜찮아. 이해할 수 있어. 그래도 치매로 발전하지 않게
미리 조심은 하라고."
태현의 장난 섞인 말에도 지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봐, 괜찮아?"
태현이 지수의 건강상태를 걱정해 물어왔다. 그러나 지수는 눈을 한 차례 깜박이곤 동문서답
했다.
"당신 좀 모자라요?"
"뭐?"
이번에는 태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지수를 쳐다봤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빌지 않는 거죠? 이건 정말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라
고요. 어떻게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것도 모자라 사람을 놀래키고 함부로 대해요! 당장 사
과해요!"
그에 지지 않고 태현이 반박했다.
"몇 번이나 벨을 눌렀어! 그런데도 열어주지 않은 건 당신이야. 나도 할만큼은 다 했다고!
그냥 밖에서 죽치고 있어야 됐나? 이 엄동설한에!"
"그렇다고 이렇게 무단 침입을 해요? 차라리 다른 데 가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자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어."
그의 대답은 조금의 주저 없이 너무도 간결했다.
"왜요?"
"그야, 이제 내 집이 생겼으니까 다른 곳에 갈 이유가 없잖아. 아깝게 돈 쓰기 싫어."
"안됐네요. 다시 돈을 쓰게 생겼으니. 이제 당신이 잘못 들어온 걸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줘
요."
지수가 손가락으로 현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현은 그런 지수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심의 눈으로 물었다.
"정말 한서경이라는 사람 몰라? 혹시 당신이 한서경인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지수는 심장이 뜨끔함을 느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뒤돌아 자신의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안쪽에 잘 보이도록 꽂아두었던 주민등록증을 척하
니 태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똑똑히 잘 봐요. 난 당신이 말하는 한서경이라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경찰 부르
기 전에 빨리 내 집에서 나가요!"
"78? 그럼 28살?"
난데없이 자신의 나이를 따져 묻는 태현 때문에 지수는 짐짓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지금껏 나이에 대해 민감해져 본 적 없는 그녀였지만 왠지 태현의 말을 듣곤 자신의 나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내 나이가 여자로써 많이 늙었나? 하긴, 젊은 건 아니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초면에 어떻
게 저렇게 빈정대듯 말할 수가 있어! 예의에 '예'자도 모르는 못된 인간 같으니라고!
"그..그래서 어쩌라고!"
"그렇다고."
뻔뻔하게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태현이 얄미웠다.
"그러는 당신은 몇 살인데 자꾸 반말질이야? 기분 나쁘게!"
"애석하게도 김지수 당신보다 한 살 많아."
"그걸 어떻게 믿어!"
"민증 보여줘?"
태현은 척하니 지수의 눈앞에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꺼내놓았다. 분명 그의 말대로 태현은 지
수보다 일년 먼저 태어났다고 씌어있었다.
지수는 한껏 이마를 찌푸렸다.
"왜, 몸으로도 보여줘야 하나?"
지수는 태현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 앞에 자신이 더 망가져야 할지 몰랐으므로.
"아무튼 빨리 나가요!"
"어, 어, 야!"
지수는 무방비 상태로 서있는 태현의 팔을 끌어다 문 밖으로 떠밀어 내보냈다. 그리곤 쾅!
소리가 나도록 현관문을 닫아걸었다. 밖에서 소리치는 태현을 외면한 채,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지수니?"
"그럼요, 한서경 여사님."
"어머, 여사는 무슨."
지수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방금 전에 너무도 황당한 일을 당했거든요? 제 입으로 묻기 전에 이실직고 실토하세
요."
"그게 무슨 말이니?"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저 아예 독신으로 살 거예요!"
그 말이 먹혔는지 지수의 모친은 태현에 대해 털어놨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딸이 혼자 나가 산다는데 부모로서 걱정되잖니. 그래서 너희 아버지
친구 분의 도움을 좀 구했단다. 그분 아들 사진을 봤는데 훤칠하니 얼굴도 잘생겼더구나. 그
래서 은근슬쩍 널 좀 돌봐달라고 얘길 했더니 시원시원하게 승낙을 하는 게 아니겠니? 어쩜
그렇게 마음에 쏙 들게 행동을 하는지. 역시 남자는 그렇게 듬직하고 시원시원해야 돼."
모친의 말은 지수를 기가 막히게 했다.
"그게 말이 돼요? 어떻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들일 생각을 하세요?"
"그러니까 같이 살기 싫으면 남자 데리고 와서 빨리 결혼을 해. 아니면 당장 집으로 들어와
서 미뤄뒀던 선을 모두 다 보든가."
지수는 억울하다는 듯 윽박질렀다.
"엄마!"
"엄마 귀 멀쩡해, 얘. 아무튼 태현군을 거기서 지내게 할거니까 내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정 싫으면 네가 둘 중 하나로 마음을 바꿔. 혹시 마음이 바뀌거든 언제든 다시 전화하
렴. 그것도 싫으면 둘이 잘해 보든가. 그래, 둘이 잘되면 더 바랄게 없겠다."
"둘이 잘해보라뇨! 제가 그 인간한테 어떤 험한 꼴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세요?"
"왜 이렇게 귀가 시끄러워. 요즘은 때도 아닌데 모기가 날아다닌단 말이야. 세상이 미쳐가
는 거지."
지수의 모친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수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
하느라 두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진짜 내 핏줄은 따로 있을 거야. 얼른 친 부모님을 찾아야겠어."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기 젖은 옷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다 문득 태현이 자신에게 한 무례한 행동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알몸으로 있는 자신을 욕조에서 데리고 나온 것은 용서할 수 없었
다. 외간 여자를, 그것도 발가벗은 채 욕조에 누워있는 여자를 아무 거리낌없이 대하는 모습
은 카사노바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니면 알몸의 여자를 봐도 흥분이 되지
않는 다른 성을 가졌거나.
태현의 몸과 자신의 몸이 닿았던 그때 상황이 떠오르자 다시금 지수의 얼굴이 불게 달아올랐
다. 불에 데인 듯 몸이 뜨거워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태현의 벗은 모습까지 상상됐다.
다부진 체격으로 봐서 탄탄한 몸매를 소유하고 있겠지?
만약 그 남자와 일을 치렀다면...... 황홀했을까? 혹 기절하지는 않았을까?
"왜 하필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거야! 김지수, 너 이렇게 발광할 만큼 많이 굶주렸니?"
지수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이불을 끌어다 이내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거야!"
========
으~~~~춥습니다..추워요....ㅠㅠ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이네요...
겨울을 좋아하는데도 이렇게 추울땐 그렇게 싫어하던 여름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그러고 보면 사람이라는게 참 간사한거 같아요..ㅎㅎ
갑자기 귤껍질 차가 마시고 싶네요.. 지방분해에도 좋다고 하더군요..케케-.
살때문에 걱정하시는 분들, 저처럼 귤껍질 차를 드셔보세요..ㅎㅎ
오늘 하루도 힘차게 보내시구요..
행복하세요!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사랑이 시작될 때 2
순진한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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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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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에 '덫'이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님의 글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 소설도 왠지 기대가 되네요. 처음으로 남겨보는 꼬릿말이에요. 건필하세요!
vitamin님 반갑숩니다!! 전에 썼던 덫을 읽으셨군요...부끄부끄...ㅎㅎ 반응이 별로 없어서 그러려니...하고 있었는데 님의 댓글이 제게 활력을 주네요^^ 님의 첫번째 꼬리말 항상 기억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여우님 글 재미있는데요! 반응이 별로 없다뇽! ㅎㅎ 기운내시구요. 앞으로도 건필하시어요
로니엘님 재밌다고 말씀해주셔서 넘 이뿌심~!ㅎㅎㅎ 격려 감사하구요... 건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