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우수영
2021. 2. 금계
우수영 골목길 담장 벽화
2021년 2월 20일 낮 12시, 나는 고 선생이 모는 그랜저를 타고 박 변호사와 함께 목포에서 우수영으로 출발했다. 절기상 늦겨울이지만 우수영에는 이미 봄의 기운이 가득 일렁이고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울돌목 가장자리에서 뜰채로 숭어를 건져 올리는 묘기를 보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벽화는 소용돌이를 피해 가장자리로 돌아가는 숭어 떼를 형상화한 것 같다.
화원반도의 어느 해변도로. 벌써 채소밭에 봄볕이 흠뻑 무르녹았다.
오늘은 기온이 20도 가까이 올라갔다. 바람 쐬기 너무나 좋은 날이다.
목포 신명여상에서 해직된 20명을 6년여의 집요한 소송 끝에 전원 복직시킨 것은 순전히 박 변호사의 공이다.
사립학교에서 대량 해직된 교사들을 모두 복직시킨 판례는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의젓하고 당당한 도깨비바늘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아마 어렸을 적에 산야를 돌아다니다가 집에까지 옷에 도깨비바늘을 붙여 가지고 가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박 변호사는 요즘 대배심에 관한 책자를 번역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사법권의 상당 부분을 검사로부터 배심원들한테 국민한테 이양시키는 것이 박 변호사의 소망이자 우리들의 소망이다. 우리나라에 대배심 제도가 정착한다면 민주주의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리라.
해남군 문내면 지중해 마을. 남향으로 바다가 펼쳐진 이런 별장식 마을에 살아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임하도 가는 길
임하도 선착장.
우수영중학교 근무할 때 가끔 임하도에 놀러 다니곤 했다. 가서 라면만 끓여 먹어도 바다에서 훌륭한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좀 더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섬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까지 구경할 수 있다. 술집이 없지만 숭어 철이면 숭어 회도 맛볼 수 있다. 물살이 세고 물이 맑아서 숭어하면 나는 우수영 숭어를 첫째로 꼽는다.
임하도 바닷가 작은 정원. 밀물 때면 여기도 섬이 된다.
임하도에서 우수영 가는 길목의 염전. 염전 가득 고인 물에 봄볕이 무수히 반짝거린다.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
보물 503호
명량대첩비 비각
대첩비 비각 옆에 복원된 동헌
우수영 초등학교
법정 스님은 우수영초등학교를 졸업하셨다. 2014년에 우수영초등학교는 주위의 다른 학교들과 통합되어 다른 곳에 새로 지어 이사 갔다. 폐교가 된 학교에는 정문 옆에 법정 스님의 사진만이 쓸쓸하고 고즈넉하게 학교를 지키고 계신다.
해남군청에서는 애당초 법정 스님의 생가터를 복원할 계획이었지만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생가터에다 마을 도서관을 짓기로 하여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우수영 항
우수영 정재 카페. 고 선생은 떡국, 나는 팥칼국수를 먹었다. 박 변호사는 그냥 차만 마셨다. 정재 = 부엌
정재 카페 전시실에 걸린 그림들. 우수영 장날 풍경.
우수영 시장 풍경
정재 카페 애기 봄의 오후가 한숨 자고 싶을 만큼 포근하더라!
옛날 다방을 전시실 삼아 걸린 그림들 - [남생아 놀아라]
[강강술래]
1997-1999 내가 근무했던 우수영중학교, 나 떠난 후 학교를 새로 지어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던가. (끝)
첫댓글 선생님...
선생님을 해남 읍에서 전교조 모임 회식 자리에서 뵙고 '40대'를 여쭈었다가
또 한 10년 쯤 지난 날에 "그리하면 50대는 어떠했습니까"를 되물었던 바
이제금 60대는 되묻지 않겠습니다.
철이 좀 들었을까요..
그 우수영 시절은 새 출발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복직 노화중학교에서 혼자 만지작거렸던 들꽃 무릎을
우수영 바다를 배경으로 한없이 꺾었던,
제 약초꾼의 첫봄이자 시 공부의 첫길이기도 했죠.
그 흥의 중심에 선생님과의 허들? 버블? 드라이브 소풍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저보다 한참 아래서부터 저보다 한참 위까지 달통하셔서
格 없고 禮 있고, 適 없고 我 있는, 統 없고 通 있고, 俗 없고 道 있는 풍류가셨죠.
'소 걸음을 걷는 선생님' 은 또 어떠셨고요...
세상에 단 한 사람, 동 시대 참 스승, 아름다운 평 교사,
돌아가신 고영의선생님을 둘러싼
추억은 간밤의 헤었던 별처럼 반짝거립니다.
선생님께서 각본하시고 고선생님께서 연출하신 보름 간의 EBS 촬영,
내쳐 찾아간 고선생님의 바닷가 외딴집과 그 월광단, 달빛 고요한 아틀리에서 흐르는
착하고 애달픈 바이올린 선율!
그리고 이어 분위기메이커 선생님의 화답 찬스.
주안상 딱돔머리에 앉아 불러주신 선생님의 허리 굵은 목청, '목포의 눈물' 말이죠.
그해 오월 스승의 날, 35분 짜리 마이크와 영상으로 온세상 울려퍼졌죠.
문내면 장날이면 숭어를 사와 교무실이 파닥거리고
고선생님 과학실 한 켠, 셋이서 찡겨앉았던 딱 도시락만한 네모 점심!
모든 것이 꿈 같았던, 아니 꿈이 확실한 애틋하고 그리운 날들!!
선생님과 함께했던 우수영은 제게 그토록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수영을 찾지 않겠습니다. 제 발자국이 옛 그림을 지워버릴지도 몰라요.
학교가 홀라당 뒤바뀌었으니 거기 어디에 무언 흔적을 찾겠습니까.
그리운 옛 그녀처럼 꼭꼭 가슴에 감춰둘 밖에요.
그리움은 모두 산너머에 있다더니
이생에 한번이라도 그 시절로 그 추억으로 건너갈 수 있다면......!
금계
김 선생의 우수영 추억 재미나게 읽었어요. 가슴이 먹먹해서 어떻게 답장을 할지 몰라 세월이 조금 흘렀나 보네요. 돌이켜보면 그 때가 나의, 우리들의 황금기였던가 봐요. 날마다가 벅차오르는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던 시절, 진도대교 아래 식당에서 귀하게 짬을 내어 참소라를 깨물며 고담준론을 나누던 시절,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떠받들고, 운우지정보다 더한 열락에 미소짓던 시절, 도서실에 김 선생이 캐다준 야생화를 화분에 심어놓고 날마다 물끄러미 그 자태와 향기를 감상하던 시절, 학생들은 유난히 고 선생님을 따르고 김 선생을 졸졸 따라다녔지요.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그리움에 목이 메어 그만 화석으로 굳어버리고 만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거늘 벌써 우수영 시절이 스무 해가 더 멀어졌군요. 나는 가끔 지금도 우수영에 들리곤 하는데 그 때마다 노래가 생각나더군요.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그래도 나는 어쩌면 그리움의 파편이라도 주울지 몰라 그 동네를 기웃거리는가 봅니다. 돌아오는 길은 늘 허전해서 휘청거리곤 한답니다.
해직을 감안한 불꽃시절엔 절망도 뜨거웠고,
해직을 감수한 날들은 또 복직의 열망으로 뜨거웠죠.
義는 투쟁과 희생의 연료를 먹고 사는 불꽃이었나 봅니다. 마침내
그 아침에 意의 빛이 완성되고 우리는 한 낮의 운동장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 자락 어둔 내 그림자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하단 말씀만 입가에 맴돕니다.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텅 빈 우수영, 그 허전한 그리움의 파편이 아프군요.
추억이 아름다운 건 결단코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겠구요.
언제고 사그라드는 그 어디 우수영 바닷가 금빛 석양을
선생님과 나란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그날까지 늘 건강 아끼시고
기억의 파편도 죄 접어 마음 갈피에 끼워두시기 바랍니다.
'휘청거리는 봄' 편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