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에는 많은 산내암자를 거느린 교구본사로서의 위상을 지닌 동화사,
조선시대까지 대표적 왕실의 원찰이었다는 파계사등 산재한 수많은 사찰들이
각기 나름의 개성을 지니며 불자들과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북지장사는 팔공산의 여러 고찰로 향하는 쭉쭉 뻗은 도로가 아니라,
아직도 승용차 1대가 겨우 다닐만한 굽이굽이 거친 길의 끝에 자리하고 있어 ,,,,.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교통편 덕분에 한때 폐사지였던 북지장사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아울러 오롯한 사격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북지장사는 동화사보다 8년 먼저인 신라 소지왕 7년(485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한
천년고찰이 빛 바랜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맞는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며, 684년(신문왕 4) 양개(良价)가 창건한
달성군 가창면의 남지장사와 대비되는 절이다.
1040년(고려 정종 6)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 따르면,
이 절의 밭이 200결이나 되었다고 하므로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때는 동화사를 말사로 거느렸다고도 한다.
- 북지장사 달마대사 - 북지장사 산령각
지장사라고도 불렀다고 하나 이후의 연혁은 별로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1192년(명종 22)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였다고 하며,
대웅전의 기와 중에 1623년(인조 1)과 1665년(현종 6) 만든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 몇 차례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 2동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북지장사대웅전이라는 명칭으로 1984년 11월 26일 보물 제805호로 지정되었다.
절 이름과 법당 안에 지장보살좌상을 모신 점에서 본래는 지장전이나 극락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23년 중창할 때 지었다.
북지장사의 창건설화
북지장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2가지의 설이 있다. 신라 소지왕 7년(493)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는 설과 보조국사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1191년(명종 21)에 창건했다는 설이다.
동화사를 창건했다는 극달화상에 대해서는 현재 전해오는 자료가 전무한 실정이어서 행장을 알 수 없으나
극달화상의 북지장사 창건설화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구 동촌(東村)에 거주하던 효행이 극진하고 유덕부요(有德富饒)한 류정선 처사가 풍수대가에 의하여
현재의 대웅전(지장전)자리를 묘지로 선정해 놓고 부친이 돌아가시자 미리 정해 놓은 무덤자리를 파헤치니
그 가운데 흡사 사람 모양의 돌덩이가 하나 출현했다. 이같은 광경을 모두가 이상스럽게 여기고 있는 순간,
상주 류정선이 비몽사몽을 얻었는데 흰 소복의 스님 모습의 미인이 한 분 나타나서 "나는 지장보살이다.
이 자리는 묘지가 아니다. 이곳에는 절을 지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참된 대효자가 되어라." 하고는 즉시 사라지셨다.
이러한 영기로운 계시를 받고 지척거리인 인봉에서 걸식생활로 고행 수도하는 극달화상의 간곡한 설법 지시로
매장을 단념하고 화장을 치룬 후 출가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사찰을 세우고 인형의 돌덩이는 지장보살로 조각하여 모시고는 절 이름을 지장사라 지었다.
한때 여러 부속 암자를 거느리기도 했던 북지장사는 안타깝게도 19세기 초 동화사의 부속암자로 편입될 만큼
사세가 기울기도 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중창불사의 노력과 함께 불법 홍포의 의지가
지금의 북지장사를 존재케 했으며 옛 대웅전 자리에 대웅전 불사를 시작해 삼국유사에 기록됐던‘
공산 지장사’의 명성을 이어갈 계획을 앞당길 예정이다.
무릇 ‘지장(地藏)’이란 땅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보물과 같은 모체와 같아서 어떠한 탁한 것이라도
한번 이 땅의 품 속을 거치면 새로이 청정한 생명을 잉태하는 법이므로 지장보살과 인연이
지중한 북지장사 역시 이제 새로운 기운과 복덕이 넘쳐 흐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북지장사 삼층석탑 (북지장사의 대웅전 동쪾에 있는 석탑)
1979년에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동탑과 서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가 각 3.8m이다.
동쪽과 서쪽의 쌍탑(雙塔) 배치인 이 석탑은 신라시대 일반형으로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렸는데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이 비슷하다.
지복석은 2개의 판석을 붙여서 깔았고 기단(基壇)의 면석(面石)에는 하층에 탱주(撑柱) 2개와
상층에는 우주(隅柱) 2개씩을 조각하였다.
또 갑석(甲石)에는 부연과 2단의 굄을 조각하였다.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모두 한 개씩의 돌인데,
탑신 면석에는 우주 2개를 조각하고 옥개에는 4단 받침과 1단의 굄을 조각하였다.
이 두 탑은 원래 2층 옥개까지만 남아 있고 3층 옥신과 옥개는 땅속에 묻혔거나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81년 5월에 보수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북지장사는 찾아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리하고 있다.
특히 비탈진 길로 오르는 계곡이 팔공산에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수를 자랑하고 있으며
한여름에는 입소문에 의해 이 곳을 찾아 쉬어 가는 관광객이 더러 있을 정도다.
또한 산령각 주변의 대숲과 수령300년의 감나무,수중생물이 살고 있는 작은 연못 역시 좋은 휴식처이다
-북지장사 요사채
▲북지장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소나무 군락이 아름답다.
선본재
선본재에 있는 안내 표식
노적봉과 관봉(갓바위) 사이 선본재에서 호젓한 산길을 내려와 북지장사골로 들어선다~
울창한 숲사이 계곡에 물이..
북지장사계곡사진
입구 조각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