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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북문화관광해설사 원문보기 글쓴이: 김삿갓
佛 影 寺
* 글 金 成 俊
*蔚珍文化院 蔚珍鄕土史 硏究會 硏究委員
◀ 불영사 略史
불영사는 울진군에서 가장 큰 사찰로 주위경관이 빼어나고 산세가 수려하여 연중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 큰 절은 아니지만 아늑한 심산 유곡에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산사 특유의 분위기가 세속에 찌들은 찡그림을 잊게 한다.
뛰어난 불교유적과 설화가 많아 명찰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세속에의 오염을 싫어하여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다
그러나 이 곳은 화엄사상을 토대로 불국정토를 이루려했던 의상대사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사찰이요, 의상대사와 함께 신라시대 불교계의 두 거두로 불리 웠던 원효대사 까지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불영사는 신라시대 고찰로서 신라 진덕여왕 5년인 서기 65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재11교구 불국사 관할 사찰로 1968년부터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지정받아 현재 70여명의 여승들이 수행하고 있다.
의상대사는 신라때 고승으로 화엄사상을 깨달아 크게 일으킨 분으로 당시 원효대사와 함께 불교계에서 거두로 활약하신 분이다
의상은 (625~702) 중국으로 갈 때도 원효대사와 함께 갔고 중국에서 정탐자로 오인받아 고생하다 돌아온 것도 원효와 함께하였다.
한때에는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함께 불영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전한다. 원효대사는 빈부나 노소나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민중과같이 생활하고 교화하는 대중교화에 앞장섰지만 의상대사는 화엄경의 깊고 오묘함을 연구하고 교육하는데 힘쓴 분이다.
불영사 대부분의 건축물은 여러번의 화재와 변란으로 소실되어 중건 중수를 거듭해 왔는데 1397년 대 화재와 1592년 임진란을 겪어면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720년 화재로 환생전이 소실되는 등 세 차례나 큰 화재로 많은 환난을 겪었다.
불영사 사적기에 보면 성원법사께서 하신 말씀중 “1592년 왜구의 병화로 사찰 건물은 다 타버리고 오직 영산전만 우뚝이 홀로 남았는데 살아남은 승려들이 이 덕분으로 몸을 보존할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해는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한 나머지 한자의 베와 한말의 곡식도 시주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말씀을 미루어보아 이 사찰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을 견뎌왔는지 알 수 있다.
그후 1680년 후반에 조선숙종 임금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폐비되었다가 결백이 입증되어 환궁하면서 불영사 주위 10리안의 재산을 불사했는데 그 후부터 불영사가 재정적으로 부흥된 것으로 추정하며 그 후에도 경내에 사과나무를 재배하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사육하여 어려운 재정을 충당하는 등 어렵게 운영해 오다가 1970년 이후부터 시주납자들이 늘고 관광지화 되면서 사찰이 크게 안정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1991년에 부임한 주지 일운 스님은 많은 건물을 신,개축을 하였는데 설법당, 황화실, 청운당, 천축선원, 무위당, 청풍당, 반야당, 법영루등 가장 많은 불사를 이루어 불영사가 대찰로 거듭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절에는 아홉 마리의 용을 쫒아내고 절을 지었다는 의상대사의 창건설화와 아울러 조선 숙종때 궁희의 음모로 폐비되었다가 결백이 입증되어 다시 환궁한 “인현왕후”의 전설, 그리고 울진현령으로 부임하던 도중 전염병으로 죽었다 살아난 “백극제”의 환생설화등 수많은 불사은공의 역사가 가득하여 전국의 운수납자(순회하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물론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위 치
울진군 서면 하원리에 위치하며 영주에서 울진방면으로 36번 국도를 타면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되고 울진에서는 영주 방면으로 약 20분정도의 거리에 위치한다
울진에서 불영사 계곡의 절경을 따라 약 10분쯤 올라가면 “불영휴게소”가 있고 계속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원리”라는 자그마한 시골동네가 있는데 동네를 막 지나 언덕배기에 올라서면 “불영사”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 불영사 입간판
두꺼운 송판으로 양각한 검붉은 색택의 “佛影寺“ 입간판(사진-3)은 기와 지붕을 이었는데 어느듯 고태가 풍기고 사찰 분위기를 자아낸다.
입간판은 1981년도에 「울진군」에서 제작한 것으로 “佛影寺”란 글씨는 울진읍내에서 “백선 서예학원”을 경영하는 “윤현수”원장이 썼고 서각은 당시 울진 읍내리에서 “서라벌 예술사”를 경영하던 필자가 서각을 하였다.
이 간판에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초 “佛影寺”란 글을 쓸때 “影”자의 “京”자속에 한 획을 더넣어 “口” 자를 “曰”자로 쓰고 서각도 그렇게 했는데 관광객들이 지나다니면서 글자가 틀렸다고 훼손하여 아직도 한 획을 도려낸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다.
◀ 一柱門
매표소 앞에는 “天竺山 佛影寺”란 현판이 달린 “일주문”(사진-4)이 있다.
일주문은 1992년에 건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주문의 의미는 기둥이 한 줄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 하는데 신성한 사찰에 들어가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의미가 있으며 한편으론 세속과 색계의 (色界 : 불교 三界의 하나)의 경계의 의미도 담겨져 있다.
◀ 靑玉壁
한참을 내려가면 개울이 있고 2004년도에 만든 예쁜 모양의 “불영교”를 건너게되는데 다리 위에서 위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귀암괴석의 암벽이 병풍처름 둘러쳐져 있고 개울 바닥에 깔린 반석사이로 맑은 옥류가 소리내어 흐른다.
교량 아래쪽은 주먹만한 조약돌로 덮힌 백사장이 펼쳐져서 가족들과 소풍을 즐기기에 아주좋은 곳이나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출입을 막고있다.
◀ 丹霞洞天
불영교를 건너 잡목숲으로 우거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길옆 좌측 의 거대한 자연석에 “丹霞洞天”이란 암각문자가 나온다.
불영사 사적기에 의상대사가 경주에서 올라오다 단하동천에 이르니 서역의 천축산과 흡사하여 천축산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 彌勒尊佛
길 오른쪽으로 검게 빛바랜 커다란 바위에(4m×2.2m) “미륵존불(勒彌尊佛 사진-7)이란 깊이 새긴 암각문자가 보인다.
◀ 굴참나무 고사목
암각화를 둘러보며 조금 올라가니 고사되어 쓰러진 큰 고목나무위에 인간의 얄팍한 염원을 기원하며 하나 하나 쌓은 돌탑이 나타난다.(사진-8)
이 썩어 뒹구는 거대한 고목은 둘레가 6.2M 나되고 높이가 35M이며 나이가 1,300년이나 된 나무로서 이 절을 세운 기념으로 의상대가 심은 “굴참나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20여년 전만하여도 이 나무는 살아있어서 울진군에서 천연 기념물 제 157호로 지정하였는데 (1964.2.11지정) 고사하여 해제하였다는 기록이 설명되어있다.
◀ 부도(浮屠)
고목나무에서 아래쪽 샛길을 따라 40여 미터 지점에 부도탑이 있다.(사진-9)
잡목숲 속에 가려져 쉽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담한 위치에 부도 한 기와 3기의 비석이 세워져있고 자그마한 비문도 1기가있다
浮屠는 문화재 자료 제 162호로 지정된 “養性堂禪師”의 부도로 鐘의 형태를 하고있어“石鐘形”이라 안내되어있다.
“양성당선사”는 본래 울진군 원남면 금매리에서 1425년에 출생하여 11세때 출가, 1516년에 입적하신 지방출신 스님으로 조선조 연산군 6년 (서기1500년)에 불영사를 중창하신 스님이다
諱는 “혜능(惠能)” 字는 “중열(中悅)“이라고 안내판에 기록되어있다
그 옆의 꽤 우람하게 보이는 비석은 “越明年戊午2월十八일 立碑”라는 기록과함께 “양성당선사” 부도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된 비석이다
바로 옆에 사각모양의 비석은 “佛影池復元施主功德碑”로 사찰 경내에 있는 못(池)의 복원에 시주한 불자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동쪽 맨 끝에 위치한 자그마한 장방형 사각 석판에는 불영사에 공덕이 많은 시주자 29명의 명단이 기록되어있고 불기 2531년 8월15일 불영사 주지 “한지문”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나무아미타불
부도를 돌아보고 뒤돌아 나와 작은 고개를 넘어서니 고개마루 좌측편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팽나무 고목 두그 루가 몸체가 썩어 텅빈 속내를 드러낸채 고찰의 분위기를 풍기며 서있고 오른쪽으로 길 위를 쳐다보니 바위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새긴 글자가 보인다.(사진-10)
(*아미타부처는 부처님의 명호의 하나로 무량수. 무량광을 보장해주는 부처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주재하면서 일념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을 빈부귀천도 없고 근심, 걱정도 없는 아름답고 편안한 세계로 맞이해가는 부처라고 한다)
◀ 사적비
사찰 경내로 들어서니 입구 우측에 가첨석을 쓴 그리 크지 않은 비석이 하나있는데 이 비석이 불영사 창건과 중건은 물론 사찰에 얽힌 전설까지 상세히 기록한 “불영사 사적비”(사진-11)이다
이비는 계유(癸酉, 1933년)에 “蓬萊山人 漢岩重遠”이 지은 불영사의 역사를 기록한 碑로서 그 내용을 문단별로 요약해서 정리하고자한다.
1) 立碑 배경
“나는 병환으로 오대산 상원사에서 요양을 오래하였는데 불영사 주지 박기종이 찾아와 불영사는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그 이름과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건물의 중수와 훼손의 반복으로 역사를 고증할 근거가 사라져 가고 있으므로 옛 역사를 기록하지 않으면 훗날 애매하게 되어 전할길이 없으니 비를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자한다 . 따라서 옛 기록을 참고하여 서언을 만든다”
2) 창건설화
“불영사는 신라 진덕왕 5년 (서기651년) 에 의상조사가 경주에서 해변을 따라 올라 오다 북쪽을 보고 감탄하기를 서역 천축의 형상을 바다건너에 옮겨놓은 것과 같구나하고 또한 개울 위를 보니 다섯 부처의 형상이 있으니 기이하다 하고 내려와 금탑봉에 이르니 그 아래 독룡이 사는 못이 있는지라 조사가 용에게 설법하여 사찰을 세울 땅을 베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않으므로 신력으로 주문을 외우자 용이 산을 뚫고 암석을 깨뜨리며 사라지니 조사가 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는데 천축산 불영사라 편액 하였다“
3) 재건
“이조 태조5년 (1396년)화재를입어 6년(1397년)에 ”소운법사“가 재건하였다
4) 이씨 남편 환생설화
“태조5년 (1396년)에 ”백극제“가 울진현령으로 제수받고 부임하는 도중 돌림병으로 죽자 부인 이씨가 불영사에서 간절히 축원하니 죽었던 남편이 환생하였다.
5) 화재
선조 11년(1578년)에 성원법사가 영산전 및 서전을 세우고 남암(南庵)을 동전부근에 창건하였고 임진년(1592년)에 왜구의 침범으로 절이 모두 불타서 서전과 영산전만 남은 것을 성원법사가 다시 법당과 동서의 선당을 세웠다
6) 인현왕후 설화
“숙종대왕의 계비가 폐출하여 자결하려하자 꿈에 한 고승이 나타나 고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으며 내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염려 말라 하였는데 과연 이틑날 환궁하라는 칙을 받은 까닭에 불영사에 사방으로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지를 하여 불은에 사례하였다''
7) 화재
숙종46년(1720년) 화재가 있었고 원년(1725년)에 “천옥”법사가 중창하였다
8) 수선
조선시대 소운, 성원, 양성, 천옥등 여러 법사가 이어가며 수선하였다
9) 사찰 재산매입과정
1899년에 밭 80여마지기를 1,891냥에 사들이고 이듬해인 경자년에(1900년) 밭 120여 마지기를 2,021냥에 사들이고 임인년(1902년) 계묘년(1903년) 에 밭 82마지기를 350냥에 사들였다''는 등 사찰재산 매입내역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10) 불상 및 법기 구입
임인 (1902) 년에 법당 및 요사 중수, 불상과 관음상2위 개금, 후불탱 및 신중탱, 칠성탱 달마탱, 녹성소상을 새로 만들고 무오년(1918)에 범종루 중수시 대승경전 조사어록을 인쇄하였고 지장, 관음, 법기 및 14보살상을 개금하였다
11) 재산관리 철저
“만약 사욕에 사로잡혀 선실을 혁파하고 공용재산을 축내는 자는 죄업이 매우중하고 천당과 지옥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으니 후인들은 잘 지켜야할 것이다'' 로 사찰재산을 잘 관리해 줄 것을 당부하며 마감하였다.
◀ 연못
碑문 앞에는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못이 있다.
서쪽 산 위에있는 불상을 닮은 바위(사진-12)가 못에 비치므로 불영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과연 연못에는 산위의 불상이 잘 비치고 있다
이 연못이 사적기에 나오는 독룡 아홉 마리가 살다 쫒겨나간 연못이다.
◀ 법영루
연못 뒤쪽에는 2001년도에 시작하여 2002년도 봄에 완공한 신축건물인 “법영루”가 있는데 새롭게 단청을 해서 산뜻하게 보인다.
이곳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등 佛殿四物을 배치하였다.
본래 불영사에는 大鐘이 있었는데 1568년에 부임하신 성원법사가 철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불영사기) 1573년 (선조6)에 주조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인들이 공출해가서 일본 녹아도 사람인 상전조웅(우에다 데루오)이 속죄의 뜻으로 높이 161센치 직경118센치 무게500관인 이 종을 만들어 기증했다고 한다.(사진-13)
鍾의 주조는 서울 말죽거리로 불리는 강남구 양재동 189번지에있는 “범종사”공장에서 만들었고, 1977. 9. 21 울진군의 각 기관 단체장 및 사찰관계인을 모시고 봉안식을 하였으며 2002년에 완공한 법영루를 건축하기 전에는 종무소 앞에 4각의 별도의 종각이 있어 보관하였다.(1988향토사연구 제1집/울진군향토사연구화刊)
◀ 삼층석탑
대웅보전 앞에는 3층석탑(사진-16)이 대웅전 정면에 위치하는데 이 석탑은 1979년, 1, 25 일 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21미터의 화강석탑으로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의상대사가 불영사를 창건할 당시 축조한 탑으로 추정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기단의 모양과 옥개석 받침 기단부의 돋을새김 한 우주와 탱주, 탑신부 낙수면의 곡선등을 종합해보면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어 신라때 탑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되어있으나 혹자는 탑의 형식을 고려시대 초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탑은 본래 황화실 옆에 있던 것을 1977년에 현 위치로 이축하였다고 설명되어있는데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석탑연구가들이 매우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탑의 상륜부 우주는 석질과 색깔이 탑신과 다른데 본래 탑이 또 하나 있었던가 두 개의 탑을 모아서 하나로 완성 시킨게 아닌가 의문이 간다
불영사 사적기에 보면 “의상조사가 불영사 창건당시 청련전 3칸을 짓고 무영탑 1좌를 세우고 천축산 불영사란 현판을 달았다“(한림학사 柳伯儒 洪武3년 庚戌8월(1370))는 기록과 1639~1641년경 탑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977년 범종을 봉안할 당시 대웅전 앞으로 이축하였다”라는 기록과 이 탑의 본래 명칭은 무영탑 (無影塔)이라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 대웅보전
塔 뒷편에 대웅전(사진-17)이 있는데 이 대웅전 건물자체가 1994년 5월 보물 제1201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기단에는 건물을 받치고 있는 2기의 돌 거북이 특이 하며 돌 거북은 두부만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대웅전 건물은 1592년에 소실되어 1602년에 중건하였다가 다시172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725년에 중창하고 그후 3차례나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며 정면 3칸 측면 삼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공포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화려하며 금단청계열에 속하는 내부단청과 천정의 청판을 처리한 기법이 매우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웅보전이란 편액은 몽천서원(*울진군 원남면 몽천리 소재)에 배향된 皇林 윤사진(尹思進)선생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있는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고 (항마촉지인: 석가모니만의 특정한 수인으로 석가모니가 보리수아래 금강좌에 앉아 있을 때 제6천의 마왕 “파순”이 와서 위협하였는데 이때 위협에 굴하지 않고 地神에게 그의 지위를 증명해 주기를 원하며 취하던 모습) 본존불 좌측에 문수보살과 우측에 보현보살이 연화를 들고 협시하고 있었다.
이 청동 삼존불은 새로운 불상으로 교체함으로 충북의 어떤 사찰로 보냈다고 한다.
새로 봉인된 삼존불은 칠보로 채색한 3존 금목불상으로 불영사 경내에서 자란 600년된 은행나무가 태풍에 중간이 부러진 것을 4년여에 걸쳐 새로운 기법으로 제작하여 2002년 7월 7일 (양력) 점안식을 하였다.
이 불상에는 각각 순금 30돈으로 개금 하였다하며 국내에서 불상제작 최고 권위자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한다.
경내 마당에는 태풍으로 부러진 은행나무(사진-20)에 곁가지가 자라나고 있으며 그 옆에 보호수 지정 표찰이 세워져있다.
본래 이절에 있던 불상은 석불로 인도 불상기법과 닮아 어깨죽지가 올라가고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듯하여 미관상 매우 흉하여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흉하면 사찰이 부흥되지 않는다하여 오래전에 다른 곳으로 보내고 청동불로 다시 만든 것인데 그때부터 이 사찰이 크게 부흥되었다고 하며 2002년에 새로 제작 봉안한 것이다.
◀ 법고
본존불 뒤 공간에는 낡아서 쓰지 않고 보관중인 법고(사진-22)가 있는데 높이가 108㎝×폭 85㎝의 원통형 법고이다.
쇠가죽에 때가 찌들어 본래 흰색의 가죽이 누렇다 못해 검어 죽죽하게 변했고 몸통나무가 검게 찌들고 틈새가 벌어져 있는 모습이 고태가 완연하며 1568년 성원법사가 만들었다는 법고로 보인다.
본존불 오른쪽 앞에는 삼보패(사진-23) 1점이 있다
이 목조 삼보패는 조선시대 유행한 것으로 불상대신 봉안하였는데 (*三寶:불교의 가장 보물이란 말로 부처님(佛).가르침(法).스님(僧)을 일컬음) 불영사 대웅전에 있는 이 목조패는 2단 좌대위에 연화 연엽, 극락조등의 문양을 입체적으로 양각하고 (42×23㎝)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패의 중앙에 장방형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종이에 “우순풍조국태민안”이란 글씨가 있다.
전국 사찰에 분포되어있으나 그 수가 적어 희소가치가 높은 문화유물이며 대웅전에 봉안된 외에 파손이 되어 진열하지 못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사찰 관련 기록을 보면 “1677년(숙종3년) 삼전패(三殿牌)를 마련하고 승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삼보패가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한다.
대웅전 외벽에는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부처님의 수행과정의 벽화가 없고 석가래 바로 밑에 삼각형 벽 공간에 두분의 고승을 그린 벽화(사진-24)가있다. 그 벽화에 그려진 한분은 육계 가있는데 청색의 장삼을 입었고 한분은 밤색의 가사를 수 했는데 대웅전 건물을 돌아가면서 번갈아 그려져 있다.
대웅전내에는 본존불 뒤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와 좌측벽면에 동진보살을 주불로 한 호계대신과 복덕대신을 그린 신중탱화가 봉안되어있다
◀ 영산회상도
영산회상도(사진-25)는 대웅전 본존불 뒤에 있는 후불탱화로서 조선 영조9년 (1733년)에 굉원, 순일비구 등 여섯 분의 스님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 8월에 보물 제1272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이 탱화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쪽에 10대 보살과 여러 협시불을 그린 것으로 가로 4.2미터 세로 3.89 미터크기에 麻本에 채색되어있다
본 불화는 구도자체가 안정감이 있고 채색이 화려하며 밝고 은은한 분위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당시의 불교예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산신각
대웅전 뒷산 약간 높은 위치에 산신각(사진-26)이 있다,
산신각은 원래 불교와는 관계없는 토착신으로 민간신앙의 숭배대상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이라 한다.
대게 대웅전 뒤에 위치 하는게 보통이며 우리나라 사찰에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으로 주로 조선중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 칸일 경우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이름을 붙이지만 3칸일 경우 3위를 함께 모시고 “삼성각”이라하는데 불영사 산신각은 정면1칸 측면 1칸의 정방형 전각에 호랑이를 무릎에 앉힌 산신탱화를 정면에 모시고 있다.
비단에 채색한 이 탱화는 1880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의상대
산신각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30미터쯤 올라가니 가로6m×세로2.5m나 되는 꽤나 큰 암석들이 산등성이에 삐쭉 삐쭉 솟아있는데 뒤편 암벽에는 가로 63 ㎝×세로22㎝ 정도의 4각의 장방형 홈을 파고 “義湘臺”라고 깊게 음각한 바위가 있고 그 앞에 7~8평 정도의 평평한 터(사진-27)가 조성 되어있는데 그 터에는 0,6㎝×0,7㎝ 정도 크기의 4각 모양인 주춧돌과 처마돌이 일직선으로 남아있고 동쪽 측면에는 온돌의 흔적으로 보이는 구들장 받침돌(사진-28)이 그대로 박혀있어 이 곳이 불영사 사적기 나오는 “義湘殿”의 원터임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 바위 위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니 山太極 水太極형국의 산과 하천이 마치 용트림을 하는 듯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적기에 보면 성원법사께서 1603 ~ 1609년 사이에 법당과 禪宅을 중창하였는데 그때 “奇相公은 재산을 헌납하여 휘감아 도는”回龍之頂“에 “義湘殿”을 세우고 門위에 “大施主 議政府領奇公”이라 편액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또 `내가 이곳에 자주 왔는데 이절의 스님들과 水石의 韻題로 시를 짓기를 즐겨하여 절의 14경 詩를 남겨 훗날 조용한때 도움이 되고자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의상전의 본터가 이 곳임을 입증한다.
또한 절경을 노래한 14경중 “의상전”을 노래한 시를 보면 “의상전 앞에 지닌 수석이 기이 하구나”하고 “불도의 업적이 현판에 나타났구나''로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의상전'' 원터임을 더욱 확실히 입증한다.
여러번의 전란과 화재로 중건중수를 거듭한 불영사로서는 본래의 의상전이 화재로 소실 되었거나 혹은 산등성이에 있어 오랜세월 세찬 풍우에 견디지 못하여 파손되었을 때 당시 “의상전”전각에 모시던 위패들을 인현왕후 원당과 합쳐서 함께 모시면서 전각의 명칭을 “의상전”으로 변경한 것으로 추정된다.
◀ 불영사 14경
의상전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서남북으로 산봉우리들이 제각기 멋을 자랑하는데 옛 선인들이 이런 경치를 보고 불영사 14경을 노래한게 아닐까?
1630년 “林萬休” 선생이 이곳 절경을 노래한 불영사 14비경 시를 소개한다.
1) 부용성 /괴이한 새는 바위가에서 울고 달은 부용성에 비추었더라. 고요한 골짝기에 계수나무 향기 가득차고 신선이 옥피리 불더라.
2) 금탑봉 /신선은 백옥루를 지었고 부처는 황금탑을 쌓았더라. 이곳은 마귀를 항복받던 자리인데 사치로운 귀신이 떠남지 오래더라
3) 청라봉/ 비온뒤 맑은 태양은 솟아오르고 허공엔 한점 티끌도 없는데 푸른 골뱅이는 보전을 품어안았고 보살은 선대에 의지했더라
4) 삼각봉 / 여섯새우가 삼산(三山)을 엿는데 옛 천축산을 여기에 옮겨왔다. 묻 신선들이 춤을 추니 머리카락이 삼각봉에 흩어졌더라
5) 해운봉 /기이한 봉우리가 벽해를 향해 업드렸고 옥녀가 새로이 단장을 하고 때맞아 강절한 아침 햇살을 보더라
6) 향로봉 / 보배꽃이 흩어졌다가 멈추고 향기로운 벌레가 허공에 하얗다 경동은 명월을 사랑하고 봉상에서 신선의 노래에 화답하더라
7) 종암봉 / 밤은 이미 깊었는데 서리나리고 가을 바람 선득선득 문틈으로 스며든다. 절방에 밤이 맑아 잠못이루고 새벽종 속된생각 씻어 주더라
8) 원효굴 / 시냇가 구릉에 가을 기운 일고 스님은 없고 옛굴만 차가웁고 지금은 빈돌만 남아있는데 이제는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구나
9) 의상전 / 가장 뛰어난 신승의 전각에는 앞에 지닌 수석이 기이하구나. 상공은 불도를 좋아했으니 업적이 현판에 기록되었구나.
10) 오룡대 / 높고 높은 오룡의 돌이 물위에 두각을 내밀었구나. 영묘한 동물이 영구히 꿈틀거리니 번갯불 우뢰소리가 계곡에 울리누나
11) 좌망대 /앉아서 맑은 냇물을 가까이 즐기니 해가 서산에 넘어감을 알지 못하더라. 발을 씻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소리없이 자지곡을 노래 하더라
12) 단하동 / 흰무지개는 산 냇물을 마시고 가는 비는 금모래를 적시더라. 동천에 구름하늘이 가득차니 산봉엔 붉은 노을 밝게 지더라
13) 용혈 / 용이 누워 비늘과 딱지를 감추고 있는데 푸른 시내 동혈은 둥글더라. 다못 구름과 비 인연을 잃었다고 어찌 잠만 자고 있을 것인가.
14) 학소 / 학은 붉은 하늘로 날아가고 보금자리 빈지 오래 되었더라. 돌문에 계수나무가 찬데 이끼 낀 돌벽에 가을 그늘 내렸더라.
◀ 명부전
다시 돌아내려와 종무소 앞을 지나 서쪽으로 돌아가니 맞배지붕 홑집형인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은 1681년에 태성법사(泰性法師)가 창건하고 1801년 석까래를 보수하였다.
명부란 저승계의 유명계를 말하는데 명부전에 들어서니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하여 왼쪽에 도명존자, 오른쪽에 무독귀왕을 봉안하였고 좌우로 대왕들을 안치하였는데 좌측으로
제1대왕 진광대왕: 도산지옥 관장
제3대왕 송재대왕: 한빙지옥 관장
제5대왕 염라대왕: 발설지옥 관장
제7대왕 태산대왕: 죄풍지옥 관장
제9대왕 도시대왕: 철상지옥 관장을 안치하였고,
우측으로는
제2대왕 초광대왕: 화탕지옥 관장
제4대왕 오관대왕: 검수지옥 관장
제6대왕 변성대왕: 독사지옥 관장
제8대왕 평등대왕: 거해지옥 관장
제10대왕 전륜대왕: 흑암지옥을 관장하는 대왕등 시왕(十王)들을 봉안하였다
입구 양쪽에는 눈방울이 우락부락한 금강역사 2위가 배치되어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한손을 치켜든 모습이 금방이라도 후려칠 자세를 하고 있다.
이 금강역사는 조선중기의 목조작품이며 키가 115㎝나 된다. 이 시왕(十王)들은 1690년 태성법사가 조성한 것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우리인간이 죽어서 심판을 받는 곳이라 한다.
◀ 의상전
명부전을 나와 옆의 자그마한 맞배지붕의 전각을 만나는데 이건물이 “의상전”이다
“이 건물은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불영사에서 수행하신 스님들 가운데 불사공덕이 큰 스님들을 모신 곳 입니다“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2001년 10월 24일 이 건물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 건물은 “의상전”이아니라 “인현왕후원당”이며 1867년(고종4년)에 건축하였다는 내용이다.
상량문은 2중 한지에 싸여 의상전 중도리 바닥 사각홈에서 발견되었다.
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같다
『인현왕후 원당 상량문』
“주지 신하 승려 유찰 삼가 봉 한다”라는 제하에
聖后(인현왕후)의 은덕을 입음을 오랜 세월동안 그리워하였는데 이에 좋은날을 택일하여 원당을 건축하고 성덕의 무강함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 한다“는 내용이다.
불영사 사적기에 인현왕후와의 기록이 있는데 의상전 상량문이 발견됨으로 서 사적기의 내용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시적기 내용중 인현왕후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조선 숙종때 계비인 인현황후는 궁희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비가 되었는데 그 삶이 처량하고 고생스러워 어느날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다 .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는 불영사에서 왔노라하면서 이틀만 참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현몽하였는데 과연 다음날 궁희의 음모가 발각되어 인현왕후께서 다시 환궁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불영사를 찾게 되었고 불영사의 노스님들을 조사한바 과거에 주지스님으로 수행하시던 양성당 법사와 같아 이에 감사하여 사찰을 중심으로 10리 안의 모든 산을 불사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인현왕후; 조선 숙종임금의 계비로 여흥민씨 유중의 딸이며 1661년에 태어나 1681년에 계비가 되었고 희빈 장씨의 갖은 모략으로 1689년 폐비가 되어 庶人의 신분으로 갖은 고생을 하다가 희빈장씨의 처소 서쪽에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신당이 발각되고 남인들의 賜死 주청이 숙종임금의 진노를 사게 되어 서인들이 등용되고 인현왕후는 복위되어 환궁하게 되었다, 이것을 갑술환국이라 하는데 이때가 1694년으로 왕후의 나이 28세였으며 이후 7년간 사시다가 후사가 없이 1701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인현왕후는 입맛이 없어 게장을 먹으면서 입맛을 돋우웠는데 장희빈이 이것을 알고 게장에다 꿀을 타서 독살하였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이 사건의 발각이었다)
◀ 응진전
의상전 옆 남쪽으로 “응진전”이 있다
이 건물은 당초에는 영산전으로 불리웠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홑처마 건물로서 1578년(선조11년)에 건립하여 1629년(인조7년) 1665년(현종6년) 1716년(숙종42년) 에 보수하였고 1984년에 해체하여 보수하였는데 불영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축 양식은 전체적으로 조선중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귀공포 양식이나 천정 형태 등을 감안하면 맞배지붕 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하여 1981년도에 보물 73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건물의 구조로 보아 당초에는 팔작지붕이었는데 중수하면서 맞배지붕으로 변형된 것이 아닌가하는 견해이다.
기둥에 오금을 많이 준 점이나 주상에 2출목의 공포를 얹은 형식, 공포의 양식중 쇠서(牛舌)의 처짐등은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건물과 같은 형태로 평가되고 있다는것이다.
단청은 훼손 상태가 매우 심하여 외부 단청은 식별하기 어렵고 내부단청은 그래도 원형의 형태가 약간 남아있는데 조선 중기의 단청모양을 하고 있다
전각 내에는 한단 높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모셔놓고 좌측에 자씨 미륵불과 우측에 제1 화가라 보살을 협시불로 봉안하였다
좌우로 흙으로 빚은 16위의 나한상을 배열하였는데
좌측에 제일 빈두로 바라타사존자
제삼 가락가바리타사 존자
제오 낙구라 존자
제칠 가리자 존자
제구 수박가 존자
제십일 나호라 존자
제십삼 인계라 존자
제십오 아시다 존자 등 8위를 배열하고
우측에 제이 가락 가벌차 존자
제사 소빈타존자
제육 발타라 존자
제팔 벌사라 불타라 존자
제십 반탁가 존자
제십이 나가서나 존자
제십사 벌나바사 존자
제십육 주다반탁가 존자 등 8위를 배열하였는데 이 16나한상은 1902년에 개금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 칠성각
칠성각은 1925년에 설운대사가 창건하였고 1948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이곳은 우리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맡고 있다는 북두칠성님을 모셨다.
내부에는 정면 벽면에 탱화를 봉안하였고 본 사찰의 서고(書庫)로 사용하며 경전을 비롯하여 각종서적이 보관되어있다
◀ 靈泉 (신령한 샘)
칠성각을 지나 남쪽으로 산밑을 따라가노라니 조약돌로 치장한 작은 우물 2기와 산속에서 자연 용출되는 우물2개소가 먼지가 뽀얗게 덮힌 체 가는 바람에 잔잔히 흐르고 있다.
“불영사는 임진왜란(1592년 4월)이 일어난 다음해 7월에 왜장 “가등청정“의 부대가 쳐들어와서 영산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뼈아픈 과거가 있었는데 임진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불영사남쪽 뜰 앞 소나무에 큰 학 두 마리가 슬피 울다 날아가고 샘물이 붉은 황톳물로 변하여 3일간 먹지 못한 일이 있었다”라는 내력이 있다.
◀ 극락전
극락전은 1739년 창건한 건물이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단청이 매우 화려하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이곳의 불상들은 1992년도에 개금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불상들은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본존불로하여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관음보살”과 지혜의 상징인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안치하였다.
◀ 이외의 전각
위에 열거한 불전이외 名刹로서 갖추어야할 전각이 많다 사찰의 행정을 관장하는 “종무소”가 있는 “설선당” 을 비롯하여 스님들이 기거하는 “ 청운당”과 “무위당”이 있고 “설법당“” 응향각“ ”황화실“ ” 천축선원“등의 선방이 있다.
이외에도 1998년에 건축한 후원과 선방을 겸한 2층 건물의 ”청풍당“과 1992년에 신축한 요사체 ”반야당“이 있다.
이 건물들은 신축을 하거나 중건, 중수할 때에 필히 당초에 건축되었던 장소를 이탈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중수함을 원칙으로 하였다는 사찰 관계자의 말씀이 매우 감명깊다.
공양을 짓는 청풍당 건물의 1층은 목조와 돌기둥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매우 견고하고 우람한 건축물로 장식 하나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어 있다.
◀ 해우소
불영사에는 예부터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화장실”이다
불영사에는 화장실이 2개소 있는데 일반인들의 화장실과 비구니 전용 화장실이 그것이다. 비구니 전용 화장실은 스님들의 공양을 짓는 “청풍당” 옆으로 돌아가면 “해우소”라는 향나무 간판이 있는데 위치는 예부터 있던 곳이나 건물은 중수하여 옛 모습과는 매우 다른 깔끔한 건물이다.
본래부터 있던 화장실은 매우 깊어 볼일을 다 보고 나올라치면 처음 배설한 변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깊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화장실의 문이 없다는 것인데 화장실(정랑) 칸막이만 서너칸이 막혀져있었고 정작 사람이 앉는 칸막이의 출입문은 없어서 안에서 볼일을 보는 모습을 밖에서 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수리를 거듭하면서 정랑내부의 칸막이는 예전과 같으나 입구의 출입문은 만들어져있어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하였다.
칸막이마다 출입문이 없이 개방되어 있는 모습이 일반적인 건물의 화장실 구조와 달라 매우 흥미롭다.
◀ 남암 (南庵)
1578년(宣祖11년) 性元法師께서 불영사 남쪽 5리 가량되는 산중턱에 “남암”을 건립하였고 중건 중수하였다는 기록과 “남암” 관련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영산전 상량문”l의 기록에 의하면 ”남암“은 1592년 임진란때 소실되었는데 절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오랫동안 중건을 하지 못하다가 현종7년인 1666년 병오에 조견대사(祖堅大師) 와 탁윤대사(卓倫大師)가 힘을 합하여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그 규모는 방 두칸 부엌 한칸에 퇴주(退柱)를 단 모옥(茅屋:띠집)을 완성했다한다 (일부에는1687(숙종13년)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는지 낡아 저절로 허물어 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적비의 기록에 의하면 불영사는 3번의 큰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는데 첫 번째가 1397년 (태조6년)이며 두 번째가 1592년 임진란으로 영산전만 남기고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세 번째가 1720년 (숙종46년)에 대웅전 및 좌우 선당, 환생전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되어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범종각 (대웅전앞 맞은편 산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음) 과 사찰음식을 직접 제조할 수 있는 방앗간등 위에 열거되지 아니한 건물들이 이때에 많이 소실되어 재건되지 못 한 것으로 판단되며 “남암”도 이때에 소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는 대웅전에서 정 남향으로 삐죽히 솟은 산의 3부 능선에 “남암”의 터가 있는데 사찰 마당에서 약 15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당시의 주춧돌이 십여개가 남아있고 그 넓이가 대략 20평 정도로 기와장들이 많이 흩어져있다.
“남암”터 옆에는 2 미터가 넘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는 우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샘이 있어 지금도 샘이 마르지 않고 있으며 뒤쪽에도 샘이 하나있다.
앞쪽으로는 경사가 급하여 석축을 쌓았는데 아직도 높이 2M×길이 4M정도의 석축이 남아있다.
“남암”터의 바로 우측아래에는 약 2~3평 정도의 터를 닦고 넓이 1.5M× 폭1M 정도의 석축을 쌓았던 흔적이 있는데 당시의 화장실 터가 아닌가싶다.
화장실 터 밑으로도 1.5M정도 높이의 석축을 쌓아 무너짐을 방지하였으며 조용하고 앞이 확 트여 전망이 좋다.
구전에 의하면 고시지망생들이 이 암자에서 공부했고 지금도 출세한 그분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길을 안내한 “정병인(44세)”가 귀띔해 준다.
◀ 불귀사 (佛歸寺)
“불영사”를 한때에는 “불귀사”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불귀사“로 부르게 된 연유는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당나라 西山에 들었다가 영주의 ”浮石寺“와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 창건)) 봉화의 ”覺華寺“를 창건하고 (覺華寺는 676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15년간 두루 천하를 다니다가 불영사에 돌아오니 한 노인이 기뻐하며 우리의 ”부처님“이 돌아왔다 하여 이때부터 ”불귀사“라 하였다. 라고 “佛歸寺 古蹟小志” 에 기록되어있다.
▣ 주위 볼거리
◀ 불영사 계곡
명승 6호로 지정되어있는 불영사 계곡은 36번 국도로 따라 15km의 계속으로 이루여 있으며 게곡 주위로 기암괴석과 원시림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가을엔 잡목들의 단풍과 겨울철의 흰눈 덮힌 계곡이 볼만하며 계곡좌우로 창옥벽, 부처바위, 광대코바위, 마고암, 벼락바위, 학선대, 상서암, 조계등, 탄금대, 명경대, 미륵암등 기암괴석이 꼬리를 물고 있고 그 사이로 옥류가 사시 사철 흐른다.
이 계곡에는 각종 희귀식물 560 여종과 조류 11종 어류 42종 포유류 17종 나비 30종 및 94종의 거미등이 살고 있어 자연 생태계 연구에 귀중한 지역으로 평가 받고있다.
◀ 황장봉계 표계석
불영사 계곡에서 가까운 거리에있는 소광리 계곡에는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설치한 “황장봉계표계석”이 있다.
이 표계석은 문화재 자료 30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왕실에서 곽,관으로 사용할 양질의 목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 숙종6년(1680년) 때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된 제도이며 경북지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표계석으로 자녀 교육상 매우 유익한 볼거리이다.
*“황장목”이라함은 “금강송” “적송”이라고도 말하는 우량 소나무로서 조선시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이곳의 황장목을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 통고산 자연휴양림
이외에도 서쪽인 영주방면으로 30여분 거리에 “통고산 휴양림”이 있어 각종 단체의 야외 세미나는 물론 삼림욕, 리크레이션, 가족단위의 소풍 등으로 적지이며 숙박시설도 잘 갖추고 있고 해발 1,067m의 통고산 등산로는 경사가 완만하고 위험한 구간이 없어 어린이나 초보자도 무리없이 등반할 수 있다.(끝) 2004.7
〈참고문헌〉
1. 문헌
『新增東國與地勝覽』
『大東地誌』
『蔚珍의 文化財』 (안동대학교 1999)
『蔚珍舊郡誌』
『蔚珍郡誌』
『鄕土史硏究 第1輯』 (1988 蔚珍郡鄕土史硏究會 刊)
2. 사료
「天竺山 佛影記」 1370 한림학사 柳伯儒 書
「還生記」 1408 李文命 書
「佛影寺記 」1611 黃中允 書
「佛影寺 古蹟小志」 1630 林萬休 書
3. 교재 및 보고서
『울진의 불교문화와 불영사』 (2000. 李康根교수강연교재)
『불영사 응진전 수리보고서』(문화재관리국.1984)
『불영사“인현왕후 원당 상량문”고찰』(심현용2002)
불영사 중흥에 공덕이 큰 스님들
■ 의상(義湘, 625~702) - 재직연도 : 신라진덕여왕5년(651년)
불영사 창건
666년~675년 불영사에 원효스님과 함께 머물렀다 함.
661년 당나라에가서 지엄문하에서 수학 후 671년 귀국함
■ 소운(小雲)법사 - 재직연도 : ~1397
환생전 중건 (1396년 화재로 소실)
■ 양성(養性, 1425~1516)법사(字:혜능) - 재직연도 : ~1516년 입적
울진원남금매1리(南中悅) 출신, 11세에 출가
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자결을 결심했을시 꿈에 현몽하여 왕후가 환궁함
그일로 숙종임금이 불영사중심10리안의 산과 전답을 시주함
1500년 선당중건
※ 양성당 선사 부도탑 건립 (문화재 자료 제 162호)
■ 성원(性元, 1539~)법사 - 재직연도 : 1568~1611
관서지방 龍灣 출신, 19세에 출가
1578남암건립 영산전 중창
서전창건.
1603~1609 법당 건립
■ 정휘(正輝)대사 - 재직연도 : 인조7년(1629년)
대웅전중수
영산회금상 3위, 대비금상 1위, 하단탱 1폭, 미타탱 1폭, 달마탱 1폭,
사자병풍 1폭, 영산회탱 1폭
※ 性元법사의 제자
■ 탁윤(卓倫)대사 - 재직연도 : 康熙5년丙午(1666)
남암중창
※ 1592임진란 이후 대부분의 사옥을 중창하였으나 남암을 중창하지
못하다가 조견대사와 힘을 합하여 남암중창함
■ 조견(祖堅)대사 - 재직연도 : ~1666
남암중창
※ 위 탁윤대사와 힘을 합함
■ 태성(泰性, ?)법사 - 재직연도 : ~1680
鄕人, 속성 :南씨
1680년(숙종6년)선당개축
1681년 명부전 창건
■ 진성(眞性)법사 - 재직연도 : 숙종27년(1701년)
범종루와 관음전 수리
■ 천옥(天玉)법사 - 재직연도 : ~1725
1720년(숙종46년)화재로 소실된 대웅전, 황화실, 설선당 재건
■ 벽훈(碧訓)스님 - 재직연도 : 도광23년(헌종9년 - 1843년)
16존상 개분
관음불 1위. 의상증불성취
■ 혜능법사 - 재직연도 : ~1876
원통전 중수
청련암을 관음전 앞으로 이전
요사체 건립
※ 원통전 중수기에 의하면 절집을 크게 지었다고 기록됨, 석헌 주지와
함께 원통전을 중수하고 청련암을 이전한 것으로 기록됨
■ 석헌(石軒)주지 - 재직연도 : ~1876
원통전 중수
청련암을 관음전 앞으로 이전
요사체 건립
※ 혜능법사와 함께 원통전을 중수하고 청련암을 이전한 것으로 기록됨
■ 설운(雪耘)대사 - 재직연도 : 고종36년((1899~1925?)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영산전, 조사전, 음향각, 황화실, 설선당,
범종루, 칠성각, 산신각, 무영탑 중수
1925 년 칠성각 새로 신축
■ 일휴(一休)대사 - 재직연도 : 1968~현재
1977년 범종 주조봉안
동서선당,범종루 수리
무영탑이전
비구니수행도량 지정
※ 1968년 본사 주지로 부임 이래 없어진 범종을 새로 주조 봉안하였음
불영사가 명찰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주지스님으로 2회 연임함
■ 일운(一耘)대사 - 재직연도 : 1991~현재
1992년 일주문, 요사체, 주지실, 화장실, 불서각 건립
극락전 불상 개금
1994년 대웅전 보수 와 단청
1995년 청운당, 무위당 신축
1996년 천축선원 신축
1997년 칠성각, 설선당 보수
1998년 청풍당 신축, 응진전, 설법당, 반야당, 황화실 보수
2001년 법영루 신축
2002. 7 대웅전 칠보 3존 금목불상 봉안
2002. 7 인현왕후원당 복원
※ 1994년 대웅전 보물지정(보물1201호)
※ 1991년 본사 주지로 부임이래 많은 불전을 신축,중창하고 불영사를
대찰의 면모로 일신하였으며 현재 본사 주지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