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무청, 자원 병역이행자 체험수기집 발간 - 입영의무가 없는 영주권·질병치유 병사 이야기 -
병무청(청장 기찬수)은 8월 31일 국외이주 또는 질병 사유로 현역병 입영의무가 없음에도 자원하여 현역복무를 한 젊은이들의 군 체험 수기집 ‘대한사람 대한으로’를 발간했습니다.
이번 체험수기집은 지난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에 걸쳐 영주권 및 질병치유 병사 등 ‘자원 병역이행자 군 체험수기’ 공모에 응모한 총 116편 중에서 우수작 28편을 모아 발간했습니다.
영주권병사 부문에서 ‘내 마음속 살아있는 대한민국’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오○○ 일병(22세)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영주권을 취득해 사실상 입영의무가 없으나 자원하여 입영한 사람입니다.
오 일병은 “외국 생활에서 경험할 수 없는 조국에서의 군 복무를 통해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청춘의 보람됨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하면서 병역을 소극적인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생의 소중한 기회로 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질병치유 병사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지○○ 상병(22세)은 “대인기피증과 고도비만을 치유하고 자진 입영하여 군 복무를 하면서 가족과의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되찾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병무청 관계자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영주권·질병치유 병사들의 군 체험담이 병역이행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소중한 지침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질병치유 및 학력변동 현역입영자 현황
(17년 6월 30일 현재)
구 분
‘17년
‘16년
‘15년
‘14년
‘13년
질병치유
221
256
189
230
259
학력변동
17
30
5
9
5
□ 외국 영주권자 등 국외이주자 자원입영 신청 현황
계
‘17년
7월
‘16년
‘15년
‘14년
’13년
’12년
’11년
’10년
’09년
’08년
’07년
’06년
’05년
’04년
3,902
525
646
604
456
326
280
221
191
160
150
127
82
96
38
(국외이주 분야 / 최우수상 / 일병 오○○)
내 마음속 살아있는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든지 병역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청소년기, 아니면 유소년기부터 어떻게든 군대에 오는 것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구상해 봤다는 걸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내가 그런 마음가짐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왜 나는 주변 친구들처럼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부모님께 어리석은 원망을 했었다. 정작 우연치 않게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니 나는 입대를 택했다. 후회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입대한 날부터 매일매일 후회하고 있다고 대답을 한다. 작전병 업무와 매 근무가 고된 작전상황 근무를 한 달에 열 번씩 하다 보니 잠시 바람 쐬러 나갈 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울뻔도 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었다면 기분이 좋은 적도 있었다.
○ 부대 내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갈망하였지만 그 중 가장 원하고 그리워한 것은 바로 ‘창작의 기쁨’ 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영상 제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입대 전까지도 TV영화학을 전공하고 인디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나의 꿈을 쫓고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으며 원래 입대를 한다면 정훈병이 되고 싶었다. 허나 대학 선배들의 권유와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어학병에 도전을 하게 되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는 영상도, 영어도 작업할 기회가 흔치 않은 작전병이 되었다. 처음에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업무 인수를 받고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제한들이 나의 꿈을 더욱 키워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새벽, 한두 줄로 시작한 글들이 소설로, 기사로, 또 영화 시나리오로 커나가고 있었다. 창작에 대한 갈증은 첫 휴가를 나갔을 때도 작업실에 앉아서 밤새 녹음을 하게 만들었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내가 왜 군대에 오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못 내린 것 같다. 다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또 그 기간 동안 어떤 것을 얻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이제 대충은 실마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으며 나는 나아가려 한다. 입대한 날부터 전역하는 그날까지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해답을 바라고 있지도, 기대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떠내려가듯이 나아가다 언젠가는 내가 나라에 희생하고 있는 이 청춘이 보람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키고 있는 이 나라에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치유·학력변동 분야 / 최우수상 / 상병 지○○)
씩씩이 ○ 육군 준위로 군 복무를 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복무 중 큰 사고로 전역을 하셨고, 국군수도병원에서 1년 정도 투병 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는 바람에 성적이 떨어진 우리 남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예상 못 했던 사고로 예정보다 빠르게 전역을 했던 탓에 아버지는 우리에게 기대를 거는 마음이 커졌고 조금 더 엄격하게 하며, 우리가 힘들어하면 다그치기에 바쁘셨다. 사춘기였던 나는 점점 더 삐뚤어졌고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풀어 살은 점점 더 찌기 시작해 결과적으로 체중이 계속 불어나 120kg의 고도비만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 나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군인이셔서 입대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하지만 입영 후 신체검사를 했는데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을 때는 3급이었지만 입대 전 살이 너무 쪄 BMI 지수가 너무 높아 현역 부적합 판정이 나왔다. 훈련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는 참 지루하고 나가면 할 것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 쫓겨나니 나 자신이 너무 창피했고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찾아왔다. 그때 아버지가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얘기해주며 “씩씩아 네가 뭘 하든 응원 하겠다”라는 말을 하셨다. 그 당시 나는 BMI 지수가 38이었고 현역 등급인 3급은 20kg 가량 감량해야 했다. 그런 고민을 아버지와 상의를 했고, 아버지와 등산을 한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결국 체중감량에 성공해 병무청에서 당당하게 현역 등급을 받아 2016년 5월 2일 논산훈련소로 두 번째 입대를 했다.
○ 입대 한 지 13개월이 지났지만 자원입대를 한 것에 후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원입대했다는 사실에 전우들이 놀라며 대단하다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낸 선배 전우들이 했던 일들을 하는 것뿐이니까. 지금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게 휴전국가에서 지내고 있는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체중감량을 해서 자원입대한 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대는 대인기피증에 우울증 환자였던 고도비만 청년의 우울했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혼자 이루어낸 결과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밖에서 군대에 거부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에 달렸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고. 목표를 이루는 순간이 얼마나 찬란한지 아는 사람으로서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힘든 이 말을 꼭 기억하라고 전하고 싶다.
(국외이주 분야 / 우수상 / 조○○ (영주권병사 어머니))
고양이 병사에게
< 영주권 병사를 둔 어머니의 편지> ○ 엄마와 네가 한국을 떠나온 지가 7년이 넘어가는구나. 우리 가족은 4년째 이산가족으로 떨어져 살다가 엄마의 명예퇴직과 동시에 아빠와 형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지. 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빠 엄마는 한 가지 숙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이곳 문화에 잘 적응하는 것도 좋으나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관을 확립하는 시간이 너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1학년 봄방학을 맞이해서 네가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아빠 엄마는 한국 군 입대를 권유하기에 이르렀고 아빠는 그때 말씀하셨지. 한국 군대를 가야할 이유 중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 외에 수만 가지 이유가 있다고...
○ 이 순간 엄마는 많은 분들을 생각하게 되는구나. 작년 이맘때쯤 너를 군대에 보내기 위해 애쓰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 당시 미국에서 직접 통역병 접수를 하기 위해 워싱턴 한국영사관을 찾아갔을 때 도움을 주시던 영사관 직원, 시간차로 인해 새벽녘에 한국 병무청에 국제전화를 하여야 했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던 병무청 직원, 그리고 군사령관과 장병들과의 대화 시간에 네가 일어나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해 자세히 답변해 주시며 너를 단상으로 불러내어 칭찬해주셨다던 군사령관님, 너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선임병들, 그 외에 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분들, 그리고 휴가를 나와도 부모집이 바다건너 미국에 있어 국내에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너를 재워 주시고 잘 챙겨주시는 친척분들, 이 분들 모두가 너에게 시시때때로 물과 거름과 따뜻한 햇볕을 주신 덕분에 엄마가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 너의 인생 20년 이제 막 청춘으로 진입한 너에게 2년여의 군 생활은 분명 먼 훗날 ‘조국사랑’, ‘청춘예찬’ 이라는 단어들로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근사한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만드는데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전하고 싶고, 특히 고양이 병사 원민식 일병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힘들고 지칠 때 한걸음에 달려가 주지 못해 미안하고 한결같이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너에게 감사하다. 너는 나의 영원한 소울메이트이자 자부심이라는 걸 기억해라.
(국외이주 분야 / 우수상 / 상병 안○○)
그리웠던 대한민국에서 후회 없는 ‘한’ 결정 ○ 과테말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을 결정하는 시기가 되었을 때, 나는 한국, 미국, 과테말라 중 어느 곳으로 가야하는지 아주 신중히 고민했다. 그때 아버지는 과테말라에서 대학을 다니던지, 한국에 가서 한국문화와 한국말을 배워오라고 하셨고 그 후 나는 과테말라에서 9년 정도의 긴 시간을 보낸 후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나는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남자 동기들의 군 입대 모습을 보고 어차피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 딱 한번 가는 군대 나라고 못 갈 듯싶으냐. 나도 충분히 이겨내고 당당하게 전역해서 어깨 올라간 재외국민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입대를 하게 되었다. ○ 일병일 때 열심히 배우고 준비했던, 대망의 TOP노드(여러 통신 소대가 출전해 1시간 이내에 필요한 모든 통신망을 개통하는 것)가 개최 되었다. 우리 중대에선 내가 속해있던 소대가 출전하게 되었다. 한 달 전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훈련하였지만 너무 큰 대회라 떨리고 걱정되었다. 대회 날 작계지역에 도착해 바로 망 개통을 시작하였고 다른 선임들은 전부 망 개통에 성공한 후 나 혼자만 남았을 때 긴장감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을 때 마지막으로 전원을 켰고 바로 종료 휘슬이 울렸다.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선임들 얼굴 보기가 미안해 고개 숙이며 정렬해 있었고 선임들이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며 숨죽이며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평가관이 1시간 이내에 모든 통신망들이 개통되었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소대는 신나서 소리 지르고 뛰어다녔다. 나는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취감이란 걸 느껴봤다. 정말 이 대회는 내게 있어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기억이고 경험이었다. ○ 나는 군대에서 단체생활을 통해 인내와 배려를 배웠으며 훈련을 통해 전우애와 성취감을 느꼈다. 나는 대학졸업 후 내가 살던 과테말라로 돌아가 군대를 안 갈 수도 있었지만 내 선택으로 입대를 하였고 입대 후 얻는 것이 더 많아 군 생활에 후회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누가 나에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입대여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고민 없이 입대를 선택할 것이다. 누군가 군 입대를 선택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나는 당당히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한번 사는 인생 군인 신분으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지키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며 전역 후 새 출발하는 것은 정말 나쁘지 않다.”
(질병치유 분야 / 우수상 / 일병 이○○)
그곳에 있던 자 그곳을 잊지 못하고, 그곳에 없던 자 그곳을 알지 못한다.
○ 복싱선수의 꿈을 안고 선수의 길을 걷던 중, 고등학교 입학 전 6개월 휴식 기간의 나태한 생활로 몸무게가 70kg에서 93kg이 되었고 그 상태로 고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둔탁하고 무거워진 몸 상태를 실감 하여 체중감량에 도전 했지만 이미 복싱에 대한 감을 다 잃은 후 였고, 이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수생활을 그만 두면서 20살이 될 무렵엔 몸무게가 103kg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역을 다녀온 친형과 인생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체중감량을 시작했고 4개월간의 운동과 식단조절로 체중감량에 성공하여 현역 입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어느덧 입대한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저에겐 꿈이 생겼습니다. 굴삭기 운용병으로서 여러 가지 작업들을 배우다 보니 이 분야가 적성에 잘 맞는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아직 서툴지만 열심히 배워 전역 후에는 대한민국 1등 굴삭기 운전기능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한층 성숙해진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저랑 잘 맞는 사람만 존재하진 않아서 처음에는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보통 사회에서 성격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안 만나면 되지만 군대 특성상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고 지내보기도 하고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다가가기도 해보고 갈등이 생겼을 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도 하게 되니 인내심도 길러지고 이기적 이였던 성향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 많이 개선됨을 느꼈습니다. 군대에 와서 이렇게 발전한 제 자신을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은 마음가짐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 않고 즐기면서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많이 발전을 했고 군대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닌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사회생활을 하기 이전의 최고의 발판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고등학교시절, 복싱선수의 꿈을 포기한 뒤 끝없이 진로에 대해 방황을 하던 제가 입대를 통해 여러 방면에서 성장하고 꿈이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물론 힘든 적도 있었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나니까 한층 더 성숙해진 제 자신을 느꼈고, 앞으로 제 자신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아직 군대에 오지 않으신 분들 중엔 군대가 의미도 없고 시간 낭비일거라 생각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군대에 가서 좋은 추억을 쌓는다면 그곳을 잊지 못할 것이고 군대가 두려워 입대를 피하는 사람은 그곳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군대란 시련이 아닌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병무청, 자원 병역이행자 체험수기집 발간 - 입영의무가 없는 영주권·질병치유 병사 이야기 -
병무청(청장 기찬수)은 8월 31일 국외이주 또는 질병 사유로 현역병 입영의무가 없음에도 자원하여 현역복무를 한 젊은이들의 군 체험 수기집 ‘대한사람 대한으로’를 발간했습니다.
이번 체험수기집은 지난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에 걸쳐 영주권 및 질병치유 병사 등 ‘자원 병역이행자 군 체험수기’ 공모에 응모한 총 116편 중에서 우수작 28편을 모아 발간했습니다.
영주권병사 부문에서 ‘내 마음속 살아있는 대한민국’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오○○ 일병(22세)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영주권을 취득해 사실상 입영의무가 없으나 자원하여 입영한 사람입니다.
오 일병은 “외국 생활에서 경험할 수 없는 조국에서의 군 복무를 통해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청춘의 보람됨을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하면서 병역을 소극적인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생의 소중한 기회로 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질병치유 병사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지○○ 상병(22세)은 “대인기피증과 고도비만을 치유하고 자진 입영하여 군 복무를 하면서 가족과의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되찾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병무청 관계자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영주권·질병치유 병사들의 군 체험담이 병역이행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소중한 지침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질병치유 및 학력변동 현역입영자 현황
(17년 6월 30일 현재)
구 분
‘17년
‘16년
‘15년
‘14년
‘13년
질병치유
221
256
189
230
259
학력변동
17
30
5
9
5
□ 외국 영주권자 등 국외이주자 자원입영 신청 현황
계
‘17년
7월
‘16년
‘15년
‘14년
’13년
’12년
’11년
’10년
’09년
’08년
’07년
’06년
’05년
’04년
3,902
525
646
604
456
326
280
221
191
160
150
127
82
96
38
(국외이주 분야 / 최우수상 / 일병 오○○)
내 마음속 살아있는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든지 병역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청소년기, 아니면 유소년기부터 어떻게든 군대에 오는 것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구상해 봤다는 걸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내가 그런 마음가짐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왜 나는 주변 친구들처럼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부모님께 어리석은 원망을 했었다. 정작 우연치 않게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니 나는 입대를 택했다. 후회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입대한 날부터 매일매일 후회하고 있다고 대답을 한다. 작전병 업무와 매 근무가 고된 작전상황 근무를 한 달에 열 번씩 하다 보니 잠시 바람 쐬러 나갈 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울뻔도 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었다면 기분이 좋은 적도 있었다.
○ 부대 내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갈망하였지만 그 중 가장 원하고 그리워한 것은 바로 ‘창작의 기쁨’ 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영상 제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입대 전까지도 TV영화학을 전공하고 인디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나의 꿈을 쫓고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으며 원래 입대를 한다면 정훈병이 되고 싶었다. 허나 대학 선배들의 권유와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어학병에 도전을 하게 되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는 영상도, 영어도 작업할 기회가 흔치 않은 작전병이 되었다. 처음에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업무 인수를 받고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제한들이 나의 꿈을 더욱 키워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새벽, 한두 줄로 시작한 글들이 소설로, 기사로, 또 영화 시나리오로 커나가고 있었다. 창작에 대한 갈증은 첫 휴가를 나갔을 때도 작업실에 앉아서 밤새 녹음을 하게 만들었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내가 왜 군대에 오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못 내린 것 같다. 다만,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또 그 기간 동안 어떤 것을 얻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이제 대충은 실마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으며 나는 나아가려 한다. 입대한 날부터 전역하는 그날까지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해답을 바라고 있지도, 기대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떠내려가듯이 나아가다 언젠가는 내가 나라에 희생하고 있는 이 청춘이 보람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키고 있는 이 나라에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치유·학력변동 분야 / 최우수상 / 상병 지○○)
씩씩이 ○ 육군 준위로 군 복무를 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복무 중 큰 사고로 전역을 하셨고, 국군수도병원에서 1년 정도 투병 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는 바람에 성적이 떨어진 우리 남매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예상 못 했던 사고로 예정보다 빠르게 전역을 했던 탓에 아버지는 우리에게 기대를 거는 마음이 커졌고 조금 더 엄격하게 하며, 우리가 힘들어하면 다그치기에 바쁘셨다. 사춘기였던 나는 점점 더 삐뚤어졌고 스트레스를 먹을 것으로 풀어 살은 점점 더 찌기 시작해 결과적으로 체중이 계속 불어나 120kg의 고도비만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 나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군인이셔서 입대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하지만 입영 후 신체검사를 했는데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을 때는 3급이었지만 입대 전 살이 너무 쪄 BMI 지수가 너무 높아 현역 부적합 판정이 나왔다. 훈련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는 참 지루하고 나가면 할 것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 쫓겨나니 나 자신이 너무 창피했고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찾아왔다. 그때 아버지가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얘기해주며 “씩씩아 네가 뭘 하든 응원 하겠다”라는 말을 하셨다. 그 당시 나는 BMI 지수가 38이었고 현역 등급인 3급은 20kg 가량 감량해야 했다. 그런 고민을 아버지와 상의를 했고, 아버지와 등산을 한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결국 체중감량에 성공해 병무청에서 당당하게 현역 등급을 받아 2016년 5월 2일 논산훈련소로 두 번째 입대를 했다.
○ 입대 한 지 13개월이 지났지만 자원입대를 한 것에 후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원입대했다는 사실에 전우들이 놀라며 대단하다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낸 선배 전우들이 했던 일들을 하는 것뿐이니까. 지금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게 휴전국가에서 지내고 있는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기에, 체중감량을 해서 자원입대한 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대는 대인기피증에 우울증 환자였던 고도비만 청년의 우울했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혼자 이루어낸 결과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밖에서 군대에 거부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에 달렸으며 자신감을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고. 목표를 이루는 순간이 얼마나 찬란한지 아는 사람으로서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힘든 이 말을 꼭 기억하라고 전하고 싶다.
(국외이주 분야 / 우수상 / 조○○ (영주권병사 어머니))
고양이 병사에게
< 영주권 병사를 둔 어머니의 편지> ○ 엄마와 네가 한국을 떠나온 지가 7년이 넘어가는구나. 우리 가족은 4년째 이산가족으로 떨어져 살다가 엄마의 명예퇴직과 동시에 아빠와 형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지. 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빠 엄마는 한 가지 숙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이곳 문화에 잘 적응하는 것도 좋으나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관을 확립하는 시간이 너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1학년 봄방학을 맞이해서 네가 집에 머물게 되었을 때 아빠 엄마는 한국 군 입대를 권유하기에 이르렀고 아빠는 그때 말씀하셨지. 한국 군대를 가야할 이유 중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 외에 수만 가지 이유가 있다고...
○ 이 순간 엄마는 많은 분들을 생각하게 되는구나. 작년 이맘때쯤 너를 군대에 보내기 위해 애쓰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 당시 미국에서 직접 통역병 접수를 하기 위해 워싱턴 한국영사관을 찾아갔을 때 도움을 주시던 영사관 직원, 시간차로 인해 새벽녘에 한국 병무청에 국제전화를 하여야 했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던 병무청 직원, 그리고 군사령관과 장병들과의 대화 시간에 네가 일어나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해 자세히 답변해 주시며 너를 단상으로 불러내어 칭찬해주셨다던 군사령관님, 너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선임병들, 그 외에 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분들, 그리고 휴가를 나와도 부모집이 바다건너 미국에 있어 국내에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너를 재워 주시고 잘 챙겨주시는 친척분들, 이 분들 모두가 너에게 시시때때로 물과 거름과 따뜻한 햇볕을 주신 덕분에 엄마가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게 되지 않았을까.
○ 너의 인생 20년 이제 막 청춘으로 진입한 너에게 2년여의 군 생활은 분명 먼 훗날 ‘조국사랑’, ‘청춘예찬’ 이라는 단어들로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근사한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만드는데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전하고 싶고, 특히 고양이 병사 원민식 일병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힘들고 지칠 때 한걸음에 달려가 주지 못해 미안하고 한결같이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너에게 감사하다. 너는 나의 영원한 소울메이트이자 자부심이라는 걸 기억해라.
(국외이주 분야 / 우수상 / 상병 안○○)
그리웠던 대한민국에서 후회 없는 ‘한’ 결정 ○ 과테말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을 결정하는 시기가 되었을 때, 나는 한국, 미국, 과테말라 중 어느 곳으로 가야하는지 아주 신중히 고민했다. 그때 아버지는 과테말라에서 대학을 다니던지, 한국에 가서 한국문화와 한국말을 배워오라고 하셨고 그 후 나는 과테말라에서 9년 정도의 긴 시간을 보낸 후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나는 한국의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남자 동기들의 군 입대 모습을 보고 어차피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 딱 한번 가는 군대 나라고 못 갈 듯싶으냐. 나도 충분히 이겨내고 당당하게 전역해서 어깨 올라간 재외국민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입대를 하게 되었다. ○ 일병일 때 열심히 배우고 준비했던, 대망의 TOP노드(여러 통신 소대가 출전해 1시간 이내에 필요한 모든 통신망을 개통하는 것)가 개최 되었다. 우리 중대에선 내가 속해있던 소대가 출전하게 되었다. 한 달 전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훈련하였지만 너무 큰 대회라 떨리고 걱정되었다. 대회 날 작계지역에 도착해 바로 망 개통을 시작하였고 다른 선임들은 전부 망 개통에 성공한 후 나 혼자만 남았을 때 긴장감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을 때 마지막으로 전원을 켰고 바로 종료 휘슬이 울렸다.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선임들 얼굴 보기가 미안해 고개 숙이며 정렬해 있었고 선임들이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며 숨죽이며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평가관이 1시간 이내에 모든 통신망들이 개통되었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소대는 신나서 소리 지르고 뛰어다녔다. 나는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취감이란 걸 느껴봤다. 정말 이 대회는 내게 있어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기억이고 경험이었다. ○ 나는 군대에서 단체생활을 통해 인내와 배려를 배웠으며 훈련을 통해 전우애와 성취감을 느꼈다. 나는 대학졸업 후 내가 살던 과테말라로 돌아가 군대를 안 갈 수도 있었지만 내 선택으로 입대를 하였고 입대 후 얻는 것이 더 많아 군 생활에 후회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만약 누가 나에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입대여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고민 없이 입대를 선택할 것이다. 누군가 군 입대를 선택하는 상황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나는 당당히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한번 사는 인생 군인 신분으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지키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며 전역 후 새 출발하는 것은 정말 나쁘지 않다.”
(질병치유 분야 / 우수상 / 일병 이○○)
그곳에 있던 자 그곳을 잊지 못하고, 그곳에 없던 자 그곳을 알지 못한다.
○ 복싱선수의 꿈을 안고 선수의 길을 걷던 중, 고등학교 입학 전 6개월 휴식 기간의 나태한 생활로 몸무게가 70kg에서 93kg이 되었고 그 상태로 고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둔탁하고 무거워진 몸 상태를 실감 하여 체중감량에 도전 했지만 이미 복싱에 대한 감을 다 잃은 후 였고, 이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수생활을 그만 두면서 20살이 될 무렵엔 몸무게가 103kg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역을 다녀온 친형과 인생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서 체중감량을 시작했고 4개월간의 운동과 식단조절로 체중감량에 성공하여 현역 입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어느덧 입대한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저에겐 꿈이 생겼습니다. 굴삭기 운용병으로서 여러 가지 작업들을 배우다 보니 이 분야가 적성에 잘 맞는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아직 서툴지만 열심히 배워 전역 후에는 대한민국 1등 굴삭기 운전기능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한층 성숙해진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저랑 잘 맞는 사람만 존재하진 않아서 처음에는 힘든 부분도 있었습니다. 보통 사회에서 성격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안 만나면 되지만 군대 특성상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고 지내보기도 하고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다가가기도 해보고 갈등이 생겼을 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도 하게 되니 인내심도 길러지고 이기적 이였던 성향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 많이 개선됨을 느꼈습니다. 군대에 와서 이렇게 발전한 제 자신을 돌아보니 이 모든 것은 마음가짐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 힘들다고 투정 부리지 않고 즐기면서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많이 발전을 했고 군대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닌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사회생활을 하기 이전의 최고의 발판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고등학교시절, 복싱선수의 꿈을 포기한 뒤 끝없이 진로에 대해 방황을 하던 제가 입대를 통해 여러 방면에서 성장하고 꿈이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물론 힘든 적도 있었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나니까 한층 더 성숙해진 제 자신을 느꼈고, 앞으로 제 자신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아직 군대에 오지 않으신 분들 중엔 군대가 의미도 없고 시간 낭비일거라 생각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군대에 가서 좋은 추억을 쌓는다면 그곳을 잊지 못할 것이고 군대가 두려워 입대를 피하는 사람은 그곳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군대란 시련이 아닌 ‘인생의 전환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