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아가 2:3-4)
아 2:3-4=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가(雅歌)서를 통하여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과 우리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관념적이고 희미하였는데 점차적으로 맛보아지고 실제화 되어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고 삶으로 느껴지게 하옵소서. 아가(雅歌)서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앞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맛보고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은 하나 되는 겁니다.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는 겁니다.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한데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몸은 마음에 없어도 강제적으로라도 하나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마음은 강제적으로 할 수가 없어요. 이는 마음은 힘으로 제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력으로는 불가능해요.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안 되어요. 그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은 어떻게 하는가요? 방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 마음도 내 뜻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마음은 내가 어쩌지 못해요. 인간의 마음은 누군가가 다스리고 있어요. 스가랴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을 펴시고 땅에 터를 세우시고 사람의 안에 심령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겠다고 하니 막아서면서 죽지 않게 막아 주겠다고 다짐을 하자! 얘야! 마귀가 지금 널 밀 까불듯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각오를 세워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누가 있어요. 누군가 하면 마귀에요. 마귀가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조석지변으로 밀 까불듯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럽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간섭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성도의 마음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인간의 마음 속엔 마귀가 장악했어요. 그런데 성도의 마음에 성령이 오셨어요. 성도 안에는 두 집 살림이 시작된 겁니다.
다른 말로 성도의 마음엔 두 법이 있는 겁니다. 두 주인이지요. 마귀와 성령이 서로 다투는 겁니다. 성령이 이기면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귀가 이기면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어떨 땐 천사 같다가도! 어떨 땐 마귀로 돌변합니다. 누가 나 인가요? 둘 다에요. 우린 괴물이에요.
우리 생각엔 성령이 마귀를 박살내고 우리를 장악하면 되잖아요! 그럽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난다 함은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린 죄인입니다. 죄인이면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임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을 주셨어요. 용서받았어요.
성령이 이 예수님의 피로서 받은 용서가 우리 몸에서 늘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몸은 죄를 이기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지는 모습으로 드러나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넘친다고 해요. 다른 말로 예수님 덕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한단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고백을 하는 겁니다. 야! 괴롭다!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니 이거 쪽 팔려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알려 주시길 야! 이놈아 그래야 네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는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잘난 척 하는 인간을 만들고자 온 것이 아니고 네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하심으로 사는지 알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안에 계신 성도는 늘 예수님 덕으로 산다는 감사가 나와요. 주여 고맙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피 공로로 용서받고 삽니다! 라고 감사해요.
그렇다고 성령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방치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를 짓지 않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러나 강제로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항상 두 법이 충돌하는 겁니다. 한 쪽에선 하나님 말씀대로 살으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선 육신대로 살라고 해요. 이걸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을 지켜요. 그런데 24시간 은혜를 받지 못해요. 우리 욕신이 그래요.
우리 생각엔 몸뚱이가 하나님의 은혜 받은 일에 우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대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지 몸뚱아리를 그렇게 호락 호락 우리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아요. 육신은 편한 걸 좋아해요. 몸이 좋아하는게 있어요 죄 짓는 겁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 이상 재미 있는게 없어요. 그러나 몸은 자동적으로 죄 짓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능력이 없어서 죄를 못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 몸에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이 태클을 걸어요. 태클을 걸면 안 해요. 물론 그 순간뿐이에요. 그 순간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 때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이웃 사랑도 하고! 말씀도 지키고! 교회를 충성도 해요.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에요.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어야 해요. 물론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 누구라도 사랑하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행한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합니까? 그건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을 어떻게 하게 하는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고 난후 제일먼저 알려 준 것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것이었어요. 왜?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영생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영생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어요. 하나님 일부러 영생하지 않은 자를 만든 겁니다. 뭐가 할 일이 있어서에요. 그건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아들을 통해서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세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를 했어요. 그리곤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하시곤 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하였을까요?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의 증거를 빌리면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라고 하잖아요. 신부란 신랑과 동격(同格)이란 말입니다. 같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영생하는 분이에요. 그렇다면 그에 신부도 당연히 영생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동격이 되지요. 동격인데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동격이 되어야 해요. 이게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이에요. 언약을 위해서 아담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일러 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 지음 받은 아담은 영생하는 자가 아니란 말이 되지요. 이미 영생하는 자로 창조가 되었을 것 같으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할 필요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말은 넌 아직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넌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여야 한다고 알려 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한 단계 거듭남이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지요.
누가 거듭나게 해 주나요? 생명과이지요. 생명과가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거듭나게 해 주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아담을 영생하게 하는 것은 생명과에 있어요. 생명과를 먹어야 영생한다고 하였으니 생명과 속에 영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에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 스스로도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했어요. 이를 거듭난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아담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영생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유유상종(類類相從)이 되지요.
그럼 에덴동산에 생명과는 자연히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흔히들 구약은 모형(模型)이고 신약은 실체(實體)라고 합니다. 무엇을 위한 모형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모형이에요. 생명과는 모형이고 예수님은 실체에요.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창조하신 후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하여 알려 주신 후에 하와를 창조했어요. 하와는 늦게 창조가 되었어요.
아까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했지요. 에덴동산에서 성도는 아담이에요. 그럼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 혼자 있을 때 아담은 예수님의 신부 입장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으라고 했어요. 생명과를 먹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라고 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에요.
예수님이 신랑이고 아담은 신부에요. 이해되는가요.
이 그림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들 세계에 그려 놓았어요.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신랑과 신부를 표상 적으로 그려놓았어요. 어떻게 그려 놓았는가 하면 아담을 신랑인 예수님 위치에 두고 하와를 신부 입장에 둔 겁니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원래 신랑과 신부는 한 몸이었다는 겁니다. 한 몸이 잠시 분리 되었다가 합치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지요.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만물이 예수님 안에서 섰다고 하지요. 섰다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만물을 아담(인간)으로 보세요. 그럼 아담은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지요.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온전해 진다고 하지요.
그럼 아담도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말이지요. 아니! 아담을 예수님이 창조했으니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잖아요. 맞잖아요. 잘 이해하세요.
이를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해요.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요.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아가(雅歌)서식으로 말하면 사랑이에요.
그럼 예수님과 성도를 신랑과 신부라는 이 원리를 아담과 하와라는 모형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도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고 했지요. 그럼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이니까 아담의 몸에서 성도의 모형이 나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럼 아담의 몸에서 누가 나왔습니까? 하와가 나왔지요. 여자가 나왔잖아요.
그럼 하와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성도의 모형이 되겠지요. 하와는 성도의 표상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전부 여성명사로 쓰고 있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아담 속에서 여자가 나왔지요. 그럼 여자가 온전해 지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담 속으로 들어가야 온전해지겠지요.
이건 아담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담 속에서 여자가 나왔잖아요. 그럼 여자가 아담 속으로 들어가야 원래 상태가 되지요. 이걸 하나라고 하고 통일이라고 해요. 이런 상태를 사랑이라고 해요.
자 보세요.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나왔지요. 그리고 만물이 예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지요. 이를 하나라고 하고 통일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아가(雅歌)서에선 사랑이라고 해요.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요. 부부관계를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사랑으로 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랑으로 둘로 갈라졌던 몸이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랑을 함으로서 한 몸으로 원 위치가 되는 겁니다. 하와가 원래 있었던 아담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골로새서에선 그 안에서 선다고 했어요. 선다는 말을 다른 말로 온전해 진다고 합니다. 이해되세요. 어렵지요.
다시 말합니다. 사랑은 두 몸이 한 몸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랑함으로서 한 몸으로 온전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는 사랑함으로서 창조 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해요.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주세요. 하나로 완전(完全)해지게 해 주세요. 이해되시나요.
전 엄청 흥분이 되는데! 무덤덤합니까? 좀 느끼세요.
구원이란?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 하는 곳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국은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이에요. 만물이 주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만물이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창세전 언약이에요. 그러니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은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것이므로 영원한 안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을 안식한다고 해요.
안식을 잔다고 하지요. 부부간에 사랑하는 것도 잔다고 해요. 여보! 우리 자자! 그 말은 여보! 우리 사랑하자! 그 말이에요. 자고 싶으면 자기 혼자 자면 되지! 뭣 하러 여보! 우리 자자! 그럽니까!
그러니 안식이나! 사랑이나! 자는 거나! 다 같은 동의어에요. 다 알면서 모른 척 합니까? 참 어렵다! 어려워!
이걸 오늘 술람미와 솔로몬의 사랑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람미가 사과를 먹는다고 합니다. 건포도를 먹고 사과를 먹고 해요.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하나 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랑이 나오고 노골적으로 왼손으로 팔베개 하고 오른손으로 안는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본문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에요.
아 2: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술람미는 솔로몬을 수풀가운데 사과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그늘에서 기쁨을 얻고 그 실과로 먹고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당신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했지요. 이를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했지요. 군계일학이란? 빼어나고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비교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자 술람미도 솔로몬을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라고 하고 있어요. 울창한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수풀과 사과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해서 말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수풀도 사람이고 사과나무도 사람이겠지요. 솔로몬을 사과나무라고 했으니 솔로몬 이외에 다른 사람은 수풀이란 말입니다. 솔로몬 이외에 다른 사람이란 왕궁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솔로몬 궁에는 왕후만 일천 명이 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거기에 수종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왕궁엔 수많은 남자들이 수풀처럼 많이 있어요.
왕궁에 있는 수많은 남자들은 수풀이에요. 울창한 수풀처럼 많아요, 그런데 그 많은 수풀 가운데 솔로몬은 사과나무에요.
사과나무란? 먹고 배부름을 주는 생명나무에요.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생명나무에서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힌다고 하지요. 그러니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와 같은 겁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생명을 주어요. 사랑을 주어요. 행복을 주어요.
다른 말로 솔로몬만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생명을 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수풀이란? 실과를 맺지 않는 나무에요. 실과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말하면 솔로몬은 예수님을 상징하니 예수님은 사과나무인 겁니다. 그럼 예수님에게만 생명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아요.
예수님만 참 신(神)이에요. 예수님에게만 생명이 있어요. 다른 신(神)에겐 생명이 없어요. 다른 신(神)은 다 가짜에요.
다른 신(神)들은 수풀과 같이 울창하지만 생명이 없어요.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란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구원을 주는 참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이에 제자들이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도 하도! 어떤 사람들은 선생이라고도 합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생들은 다 죽은 자에요. 세상에 그 어떤 도인(道人)이나 지혜(知慧)자나 철학자(哲學者)라도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이들은 모두가 아담 아래서 나왔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석가모니도 아담 안에서 나왔고! 마호메트도 아담 안에서 나왔고! 공자도 아담 안에서 나왔고! 문선명이나! 이만희나! 정명석이나! 유재열이도 다 아담 안에서 나왔어요. 모두가 과실을 맺을 수 없는 수풀이에요. 그 어떤 신학자들도 수풀이에요. 사과나무가 아니에요.
그러니 이들을 믿어선 영생을 얻지 못해요. 죽은 자들에게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생명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어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어요.
요 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생명은 가짜란 말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꾼들이 있어도 그들은 수풀과 같아요. 생명이 없어요. 모두가 죽음이에요.
이 세상은 죽었어요. 당연히 세상에 속한 자들도 죽었어요.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모두가 죽은 자들만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어요. 죽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로 오셨어요.
나무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과실을 맺는 유실수(有實樹)가 있고 눈으로만 보는 관상수(觀相樹)가 있어요. 그런데 과실을 맺는 나무들은 하나 같이 볼품이 없어요. 못났어요.
그러나 관상수는 전부 멋있어요. 쭉쭉 뻗어서 보기가 좋아요. 그런데 거기엔 먹을 것이 없어요. 보기는 좋아도 배부르게 하지를 못해요. 세상에 영웅호걸들은 멋있게 보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어요. 그들을 믿어서 구원을 받지 못해요. 세상에 영웅호걸들은 다 수풀이에요. 전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관상수에요.
사람의 몸은 눈으로 보아서 배가 부르지 않아요. 콩 한 알이라도 입으로 먹어야 배가 불러요. 그러니 볼품이 없어도 양식이 되는 실과를 내어야지 쭉쭉 뻗어서 보기엔 좋아도 양식이 안 되면 소용이 없어요. 사람에겐 입에 넣고 먹는 실과기 필요하지 눈으로 요기하는 멋이 중요하지 않아요.
이걸 가정주부에게 비유해 봅시다. 엄마는 자식들 입에 좋은 반찬 하나 더 먹이려면 손톱에 매니큐어 바를 시간이 없어요. 남편은 매니큐어가 발라진 아내의 손보다 거칠고 투박한 손을 예뻐해요. 젓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 주어요. 고맙다고 해요. 사랑해요.
매니큐어 바른 손은 보기엔 좋아도 그 손으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지 못해요.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지 못한단 말입니다. 철없는 놈들은 엄마 손에 매니큐어가 발라지면 좋아하지만! 철이든 놈은 엄마의 투박한 손을 보면서 우리를 키운다고 고생한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려요.
과거 6.25 전쟁당시 인민군들이 공무원들을 손을 만져보고 찾아냈다고 하잖아요. 농사짓는 사람들 손은 굳은살이 박혀서 투박해요. 그러나 공무원들은 펜만 굴리다 보니 손이 고와요. 공무원들은 지식층이라서 부르조아 사상이 물들었다고 보고 숙청했어요.
솔로몬의 눈에도 밥만 먹으면 손 가꾼다고 매니큐어나 바르고 소일하는 왕궁의 왕후들 손보다 포도원에서 일을 한다고 거칠어진 술람미의 손이 아름다워요. 술람미의 투박한 손으론 양식이 생산 되지만 왕후들이 매끈한 손에선 투기가 나와서 사람을 할퀴어요.
복음 전하는 목사들은 엄마처럼 멋을 내지 않아요. 그러나 세속적인 목사들은 겉만 뻔지르르해요. 세상 것으로 나 이런 목사라고 자랑해요.
여러분 세상 경력 내세우는 목사를 경계하세요. 학벌 자랑하고! 교단 자랑하고! 무슨 무슨 단체 회장이니 라는 식으로 나 이런 목사요 라고 하는 자들 말이에요. 이런 것을 목사의 자랑으로 내어놓는 자들은 백% 거짓 목사들이에요. 복음을 아는 목사는 이런 것 자랑하지 않아요. 이런 것들은 배설물과 같아요.
며칠 전에 어떤 목사가 댓글을 달았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요. 저에게 따지듯이 하는 말이 우리 블로그에서 은혜를 받는 어떤 성도님이 그 목사님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 성도님이 그 목사님 블로그에 가서 글을 보았던 모양이에요. 글을 보니 율법아래 있으면서 자기는 참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성도님이 아니다 당신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주고받으면서 논쟁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이 자기 블로그에 제 글을 많이 퍼다 날라져 있으니 그 목사는 그 성도님이 제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 겁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그러는 겁니다. 정 목사 당신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겠지요! 라고 따지는 겁니다. 어이없지요. 이게 복음 전하는 목사가 할 말이 아니지요. 복음을 모르니 이런 말을 남의 집에 와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도대체 이 양반이 어떤 분인가 그 분 블로그에 가서 보았어요. 자기 프로필에다가 난 중진급 목사(목자)다 라고 해 놓았어요. 바울이 버렸던 배설물을 자랑처럼 써 놓았어요.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왜? 나같이 복음 전하는 목사는 알아주지 않느냐 라는 투로 푸념을 해 놓았어요. 이것 하나만 보아도 복음을 아는 목사가 아니란 것이 드러나고 있어요. 그래서 속으로 욕 들어 먹어도 싸다고 했어요.
중진급 목사는 어떤 건가요? 좀 알려주세요. 제가 아둔해서 못 알아먹어서 그래요?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이런 것을 자기 프로필에다 적어 놓을 순 없어요. 스스로 기독교계의 중진급 목자라고 해요. 자기가 목자래요. 이 하나만 보아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요.
복음을 모르니 저에게 목사를 비판하라고 가르쳤느냐고 따지지요. 참 어리석은 목사에요. 어리석으니 자기 수치도 모른 채 날뛰고 있는 겁니다.
아스팔트에선 생명이 자라지 못해요. 생명은 거름더미에서 자라요. 자기 자랑이나 하는 목사 입에서 생명의 복음이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은 생명을 화려한 곳에서 자라게 하시지 않았어요. 곧고 쭉쭉 뻗은 나무에게 과실을 맺히게 하지 않았어요.
배부르게 못할 것들은 화려함은 있지만 생명이 없어요. 하지만 배부르게 할 것들은 볼품은 없어도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 생명의 양식이에요.
자 이걸 말씀으로 풀어 봅시다. 생명나무 과실이란? 말씀을 의미하잖아요. 왜냐하면!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 있고 입을 즐겁게 해주는 밥처럼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엔 수많은 선생들이 있었어요. 종교지도자들이 선생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모두가 유창하게 말을 했어요. 논리적이고 듣기 좋아요.
듣기 좋도록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다 사용하여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어요. 사람들이 가능성을 부추기고 듣기 좋은 말을 해요. 그러나 그들의 말은 죽은 말이에요. 그들의 말 속엔 생명이 없어요. 들을 땐 좋아도 돌아서면 겨와 같이 푹 꺼져 날아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인정머리가 없고 수술하는 칼처럼 날카롭고 아파요. 인간의 비위를 거슬러요. 아주 자존심을 뭉개 버려요.
예수님 말씀은 한마디로 정나미가 뚝 떨어져요.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말씀하시는데 누가 듣기 좋아라 하겠어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없어요.
바울이 그랬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죄를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하니 듣기 싫은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공로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아요. 오로지 어린양의 공로로서만 세워지는 나라에요. 인간의 공로는 도리어 저주의 대상이에요. 그러니 예수 믿어서 좋은 교회를 만들고 좋은 가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절 흔히 공격하는 사람들의 레퍼토리가 그래요. 당신은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 당신은 왜? 한국교회를 그렇게 비판하느냐! 당신은 왜? 성도의 행함을 무시하느냐! 공격하는 이유가 한마디로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 목사 당신처럼 가르치면 누가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을 내고 헌금을 하고 하겠느냐 에요. 그래 가지고 교회가 운영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이 교회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거예요. 보이는 교회를 교회로 붙잡겠다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거든요.
마귀는 항상 화려한 신! 화려한 교회! 화려한 예수를 원해요.
마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으로 유혹을 해요. 마귀의 종들은 인간들이 흠모할 만한 것들로 치장을 했어요. 예수님의 초림 당시 마귀의 종들은 너무너무 화려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요. 예수님은 외모로는 촌사람이에요. 매력이 없어요. 마치 포도나무나 사과나무처럼 볼품이 없어요. 나사렛 촌놈이에요.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어요.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나요.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유쾌하게 해 주세요. 듣기엔 거북스러워도 먹으면 힘이 생겨요. 누워있는 소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산 낙지 같이 먹으면 꿈틀거리는 말씀이에요.
그런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수풀이고 예수님은 사과나무인 겁니다. 술람미가 사과나무 그늘에서 쉼을 얻었듯이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의 그늘에서 쉼을 얻었어요. 예수님께서 율법이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주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선생이라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너희의 선생은 오직 하늘에 있다고 했어요.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선생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선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사과나무가 되고 자칭 선생이라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전부가 수풀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진짜이고 나머진 모두가 가짜란 말입니다.
술람미가 사과나무라고 한 것은 솔로몬만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남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그늘에 앉아서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쉼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입만 열면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 닦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넌 그저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내 품에서 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지요.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쉬게 해 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으로부터 쉬게 해 준다는 말인가요? 율법이지요. 율법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했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으로부터 쉼을 얻어요. 결코 정죄당하지 않아요. 예수 안은 율법으로부터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에요. 율법이 얼씬 거리지 못해요.
술람미는 오빠들이 자신을 포도원으로 보내서 일을 시켰다고 했지요.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했어요. 이는 곧 율법을 말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모든 수고로부터 쉼을 준 예수님이라고 말한다면 술람미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운 오빠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강제 노역을 시켰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으로 강제노역을 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해방시켰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멍에인 십자가를 메고 쉼을 얻으라고 한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기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주는 은혜는 꿀처럼 달아요. 얼음골 꿀 사과처럼 달아요. 맛있어요. 시원해요.
한번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요. 다른 것을 못 먹어요. 그래서 그 맛을 또 찾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피의 복음을 들은 성도는 율법 설교를 못 들어요. 드라큘라들처럼 예수님의 피를 찾아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주는 은혜를 알기 때문에 다시 천한 초등학문과 같은 율법신앙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도 이 달콤한 맛 때문이에요. 솔로몬이 주는 안식 때문이에요. 본문에선 달콤한 실과란 솔로몬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술람미는 그 사랑이라는 실과가 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자유를 말합니다. 솔로몬이 자신을 잔치 집으로 인도하고 자기에게 기(旗)를 꼽았다고 합니다.
아 2: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旗)로구나”
자!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입니다. 잘 들으세요.
잔치집이란? 큰 연회를 말해요. 원문엔 포도주의 집이란 뜻인데 이는 국빈을 모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는 그런 자리를 말해요.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모든 문무(文武) 대신들을 모으고 만찬을 하잖아요. 그러니 공개된 연회로서 가장 큰 잔치가 열리는 곳을 말해요.
마치 대통령 만찬 자리와 같아요.
그런데 솔로몬이 수많은 귀빈들이 있는 잔치 자리에서 술람미에게 솔로몬의 기(旗)로 덮었어요. 쉽게 말해서 왕의 망토로 덮어 주었단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솔로몬의 코트를 술람미에게 입혀준 겁니다. 만인(萬人) 앞에서 코트를 입혀주었다는 것은 이 사람은 내 사람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즉 사랑을 표현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내 여자입니다! 라고 표(表)를 해 주었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흥분되지 않나요. 생각해 보세요. 글을 읽으면서 머리에는 그림을 그려보세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요. 솔로몬 대통령의 만찬 자리에요. 온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만 초청을 받은 곳이에요.
이제 만찬 시작 시간이 다 되었어요. 비서가 솔로몬 대통령이 입장 하십니다! 라고 알립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起立)을 합니다. 그리곤 대통령이 들어오는 문을 행하여 일제히 모든 시선이 쏠립니다.
그런데 솔로몬 대통령이 술람미에게 자기 코트를 입힌 채 손을 잡고 들어옵니다. 마치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문이 열리자 대통령과 그 영부인이 손을 흔들고 나오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이 짠~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 있는 이 여인이 내 여자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스럽게 감싸 안습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입니까!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나요. 어휴! 떨려! 짜릿해! 휴~
만찬장엔 일천 명의 왕후들도 있어요., 수많은 왕족들도 있어요. 모두가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가들이에요. 술람미를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핍박을 했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술람미의 손을 잡고 자기 망토를 감싼 채 손을 흔들면서 들어오고 있어요. 술람미도 모인 군중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이건 마치 시편기자의 말대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 봐라! 너희들이 핍박하던 그 여자다!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다! 앞으로 손대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치 않겠다고 공표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신나지 않나요. 나만 신나는가! 이상하네! 신나지요. 그럼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신나는 일이에요. 그 어떤 놈도 손대지 못해요. 예수님이 그러셨다구요. 넌~ 내꺼!
우리들 꼬라지가 이래도 천사들도 흠모하는 어린 양의 신부에요. 그러니 좀 당당하세요. 징징거리지 말고! 세상 것 없다고 기죽지 마세요.
구원의 감동을 자식으로만 갖고 있지 말고 가슴 속으로 좀 느끼세요. 토해내세요.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세요. 송대관이하고 태진아가 그러잖아요. 인사돌 먹고 갈비를 씹고! 뜯고! 맛 보고! 즐기라고 하잖아요.
좀 말씀을 씹으세요. 맛 보세요. 즐기세요.
믿음은 관념이 아니에요. 예수는 역사 속에서 지나간 위인이 아니에요.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성경은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도 우리 현실 속에서 사도행전은 써지고 있어요. 초대교회 성도들과 동행했던 것처럼 동행하고 계세요.
지금 이글을 올리려고 블로그를 오픈하이 어떤 분이 댓글을 달아 놓으셨어요. 너무 충격이고 감동적이라서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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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ko (2010.03.23 19:00)
오늘은 제가 혼자 꼬라지가 많이 났었어요. 30여 년 동안 교회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으니 꼬라지가 날 수 밖에요. 목사님은 이렇게 살아라! 저것은 하지마라! 예수님은 금고 속에 가두어놓으셨는지 통 말씀 안하시고.... 그러니 율법에 얽매여 꼼짝 달싹 하지 못하고 징징거릴 수밖에요. 이거는 아니다 싶어 서적도 읽어보고 인터넷 설교도 들어보고... 성경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환장할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정 목사님을 만나게 해 주셨어요.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를 읽고 나서 아하! 이거구나!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났습니다. 숙제가 풀렸어요!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이 눈에 보여요 귀에 들려요. 이제 성경이 읽혀져요. 이제 하나님이 저에게 직접 말씀하셔요 이제 예수님과 사랑에 빠졌어요! 밤늦께 까지 데이트해요. 헤어지기 싫어요. 새벽 일찍 또 만나요. 지하철 출근길에도 꼭 같이 손잡고 출근해요. 일하다가도 시간만 나면 같이 있어요. 아니 24시간 내내 제 곁에 있어요. 전에는 주일날 오전 11시에만 살짝 만날려고 해도 만나주지 않았거든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주시니 이런 맛에 목회 하시는 것 아닌가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목사님 땡 잡으신 겁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건져 내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단이면 어떻고 삼단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로만 제대로 가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예수님이 믿어주시잖아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따블로 감사드려요. 말로만 해가지고는 않 될 것 같은데 시간되면 식사라도 대접해야 될 텐대요.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나의 영혼의 아버지시여! 정 목사님 그대가 날 낳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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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산 예수를 만났어요. 땡 잡았어요.
죽은 예수를 믿지 말고 산 예수를 믿으세요.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성지순례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세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 곁에 게신데 왜? 비싼 돈 들여서 성지 순례합니까?
지금 예수님이 솔로몬이 술람미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여기 내 여자입니다! 라고 공표를 하셨듯이 우리를 공표하셨어요. 예수님이 마귀 앞에서 여기 정낙원이 넌 내 꺼! 라고 공표했다고요. 그래서 전 그 공표를 믿고 당당하게 사는 겁니다. 제가 큰 소리 치는 것도 이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넌 내 꺼! 라고 깃발을 꼽아 주셨는데 내가 왜? 기(氣)가 죽습니까! 교인들 없어도 낙심치 않고 큰 소리치고 사는 것도 다 든든한 예수님의 빽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나를 점령하고 넌 내 꺼! 라고 깃발을 콱 꼽아 두셨거든요. 이 깃발 보이지 않으세요. 십자가라는 이 깃발 말이에요.
그림을 좀 그려 보세요. 소 닭 보듯이 그러지 말고! 감정을 좀 느껴보세요.
아가(雅歌)서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느끼는 거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랑을 표현하잖아요. 야 사과처럼 맛있다고 하잖아요.
좀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좀 해 보세요. 돈 달라고 안 해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사랑은 표현하는 거예요.
자 이걸 신약 식으로 풀이 합니다. 신약의 깃발은 성령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자 기(氣)가 죽었어요. 전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죽은게 아니고 살아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곤 승천하시면서 내가 아버지께 도착하면 성령을 보내준다고 합니다.
예수를 죽인 놈들은 기고만장 합니다. 이제 예수는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주 생경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혀 같이 생긴 불덩이가 제자들이 있는 머리위에 덮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뭔가에 붙잡힌 것처럼 이상한 말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쇼킹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강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성령 강림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어났어요.
자 봅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리곤 사흘 만에 부활을 했어요. 이 사건으로 온 유대인들은 혼란이 휩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년에 삼차씩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어요. 이건 하나님이 법으로 정해 놓았어요. 봄 절기인 유월절에 모이고! 여름 절기인 오순절에 모이고!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모였어요.
이 세 절기 때문 예루살렘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천하각국에서부터 유대인의 남자들은 다 모였어요. 이런 모습은 지금은 이슬람교에서 라마단이라고 하여서 성지순례를 하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죽였어요. 그리곤 50일이 지났어요.
오순절이란? 유월절을 지난 50일째 되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이라고도 해요.
암튼 이 때는 천하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남자들은 다 예루살렘 성에 모입니다. 사람이란 모이면 이슈거리들이 있잖아요. 당시 이슈거리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어요.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하면 제제를 가했어요.
그런 상황에 오순절이 이르러 사람들이 모인 겁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지난 유월절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합니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이름하여 성령 강림사건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불의 혀 같은 것이 임하더니 각 사람마다 이상한 방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방언으로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이 병은 나사렛 예수가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다고 증거힙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라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하도록 엄중조치를 해놓았는데 갑자가 성령의 강림으로 온 나라가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도들은 갖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종교지도자들은 혼비백산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가 살아서 제자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어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임을 만천하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망토를 입혀주어서 이 여자는 내 여자라고 공포를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너희는 내 것이다! 라고 공포를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깃발을 꼽아 준 겁니다. 온갖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일거에 높여준 겁니다. 완전히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풀어주고 계신 겁니다.
기(旗)를 꼽았다는 말은 표시한다는 말입니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마다 기(旗)가 있었어요. 그 깃발을 중심으로 이동하고 모이고 하였어요. 성막을 중심으로 사면(四面)으로 각 지파별로 진을 형성하는데 그 때 깃발을 세워서 자기 지파를 모으곤 했어요. 그러므로 기(旗)는 자기 소유의 표식(表式)인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표식을 했다는 것은 당신은 내 여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넌 내꺼야! 내 소유야! 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자기 소유로 삼으신 것과 같아요.
신 7:6절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시 135:4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사 43: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보세요.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서 넌 내 것이라고 했다고 하잖아요. 특별한 소유로 삼았다고 합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잖아요.
솔로몬이 만인이 지켜보는 잔치 집에서 술람미를 자기 소유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 중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특별한 소유를 삼으신 것과 같아요. 이걸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指名)하여 부르신 겁니다. 넌 내꺼! 라고 지명했어요.
그래서 술람미가 솔로몬이 자신을 잔치 집에서 자기에게 깃발을 꼽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겁니다. 나! 솔로몬 왕의 여자야! 나!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어! 그런 말이에요.
남자가 여자에게 깃발을 꼽는 일은 이스라엘 풍습 속에도 있어요. 당시 풍습엔 남자가 신부가 될 사람을 정하면 그 집에 신랑의 깃발을 꼽아 놓았다고 합니다.
30년도 지났는데 제가 과거 사우디아라비아에 근무 할 때 본 기억이 있어요. 도시에선 이런 모습이 없는데 시골에선 그 당시엔 아직까지 이런 모습이 남아 있다라고요. 어떤 집에 흰 깃발이 펄럭이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집엔 붉은 깃발이 있어요. 꼭 우리나라 점집에 대나무에 흰 천을 걸어 놓은 것과 같아요.
이상해서 물으니 흰 깃발은 과년한 딸이 있다는 증표라고 합니다. 즉 우리 집에 혼기가 찬 딸이 있으니 사 가라는 말입니다. 물건 팔듯이 판다는 뜻이래요.
남자는 흰 깃발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 여자를 보고 흥정을 하고 혼인이 성사가 되면 빙폐물을 주고 그 깃발을 내리고 신랑이 준비한 붉은 깃발을 꼽는다고 합니다. 빙폐물을 주면 약혼(約婚)한 겁니다.
신랑의 깃발이 꼽히면 그 때부터 이 여인은 남자에게 팔린 몸으로서 임자 있는 여자로서 행실을 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고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고 음행을 하거나 하면 돌에 맞아 죽어요. 동네 청년들도 찍쩝거리지 못해요. 그러다간 돌에 맞아 죽어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약혼(約婚)과 동시에 사실혼(事實婚)으로 간주가 되었어요. 약혼 할 때 혼인 성사의 증표로 빙폐물을 주어요. 그러니 약혼을 하면 그 증표로 깃발이 꼽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여러분! 이 여자는 임자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손대지 마세요! 라고 했어요.
알다시피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브라함의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에요. 이들은 코란이라는 경전(經典)을 사용하는데 그 코란의 내용이 율법이이요. 지금도 율법대로 시행하면서 살아요. 그러니 이들의 풍습 속에도 이스라엘의 풍습이 그대로 배어져 있어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깃발을 꼽았어요. 수많은 중신들과 왕후들 앞에서 이 여자는 내 것이다! 라고 공포를 한 겁니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니 누구든지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내리고 있는 거예요.
마치 전쟁터에 고지 하나를 점령하면 자기 부대의 깃발을 꼽아서 소유를 표시하듯이 표시한 겁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깃발이 꼽음으로서 솔로몬의 보호 아래 둔 겁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旗)를 주셨다고 했어요.
시 60: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旗)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이게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旗)를 꼽아주세요. 그 깃발이 바로 성령이에요. 성령을 보증이라고 하지요. 이는 빙폐(聘幣)물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부 감으로 성도를 샀어요. 핏값을 주고 샀어요. 그리곤 이 사람은 값을 주고 샀으니 손대지 말라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마귀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손 못대요.
값으로 샀다는 것은 자기 소유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소유(所有)라는 뜻으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성령을 보증으로 받으면 이 때부터 사실혼(事實婚) 상태로 돌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주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깃발을 꼽는다고 한 겁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들이 이 깃발이 꼽혀 있는 성도는 모두 구원하세요.
마귀는 성령을 받은 성도를 알아보아요. 사도행전을 보면 스게아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려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려고 하다가 혼쭐이 나지요. 귀신이 그러잖아요. 야! 이놈들아! 나는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희들은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개 뼉따구들이냐! 라고 흠씬 두들겨 패지요.
하나님의 깃발이 꼽힌 성도는 마귀도 손을 못 대어요. 다만 하나님이 허락 하에 손을 대요. 욥을 보세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손을 대되 생명을 손대지 말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인 안 죽는다고! 성도는 마음대로 죽지 않아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해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늘은 더 진도 나가기가 싫네요. 흥이 깨질까봐서! 이 단락으로 마쳐야겠어요.
이러다가 아가(雅歌)서를 일 년이나 하게 생겼네요. 진도 좀 빨리 나갈까 생각했는데 깃발에서 그만 걸리고 마네요.
자 정리합시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자랑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수풀가운데 사과나무라고 하면서 모든 남자들 중에서 최고라고 합니다. 남자 중에 남자라고 합니다.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수풀이고 예수님은 사과나무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자 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사과처럼 너무도 달콤합니다. 힘이 생겨요. 예수님의 피에 복음은 사과처럼 달콤해요. 먹으면 살아나요.
술람미가 그 사과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솔로몬이 술람미를 자기 잔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것도 그냥 초대하는 것이 아니고 황후로서 초대합니다. 왕의 옷을 입혀서 말이에요.
만장(滿場)한 신료들 앞에 소개 합니다. 내가 영(令)을 전하겠소! 여러분! 여기 이 술람미는 내 여자입니다! 내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제 입술을 통하여서 여러분들을 세상에 공표(公表)하라고 합니다. 여기 십자가 피를 바른 이 성도들은 예수님의 신부라고! 예수의 여자들이라고! 천사들이 환호성을 보냅니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이승기가 부른 노랫말이 생각나네요. 누난 내 여자니까! 누난 내 여자니까! 너 라고 부를래! 누난 내 여자니까~아! 이승기가 누난 내 꺼! 래요.
예수님이 그럽니다! 너는 내 꺼! 정낙원이는 내 꺼!
여러분의 이름 위에 예수님의 깃발이 휘날리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 같이 천하디 천한 죄인을 너는 내 것이라고 깃발을 꼽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변할 수 없는 찜 당함을 그 어떤 것으로도 변개할 수가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당당하게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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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첫댓글 2018년 한 해도 변함없이 설교 메시지를 올려주시고 기독네티즌의 마각을 드러내며 동역해주신(ㅋㅋㅋ)제이원님, 감사합니다.
2019년에도 신실하신 주님께서 제이원님과 플레비언의 동역을 붙들어주셔서 생명이 충만한 열매가 풍성하기를 믿고 소망합니다. 건강하시고 범사에 윤택함으로 넘치게 채워주심 있을줄 믿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늘 감사드립니다 비록 공간이 우리를 제한하지만 예수안에서 한성령 안에서 늘 함께 함을 믿습니다 한해도 마무리 잘 하시고 주시는 새해에도 동무님의 인생길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길 믿고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