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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베띠의 교훈(렘13:1-11)-2024.10.20
베띠는 제사장들이 착용하던 허리띠입니다. 출애굽기28장39절과 40절을 보면,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속옷을 짜고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들지니라/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그래서 베띠는 이스라엘의 영화와 특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이지요. 그래서 선지자로 하여금 희한한 퍼포먼스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왜냐면 단순한 메시지로만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그들이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예레미야로 하여금 베띠를 사서 허리에 차고 물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베띠를 구입해서 허리에 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 강으로 가서 바위틈에 감추라는 것입니다.
유브라데 강은 당시 예레미야가 거하는 땅으로 추정되는 아나돗으로부터 대략 40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 지역입니다. 바벨론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하지요. 선지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유브라데 강으로 가서 감추어 놓았던 띠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상당히 소모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번에도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감추었던 베띠를 찾아보니 썩어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친히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9-11). 이것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을 이처럼 썩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악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므로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더 이상 쓸데없이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교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유대인의 대표적인 교만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롬2:17-20). 그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 빠져 살았던 것이지요.
겸손은 위를 쳐다보지만, 교만은 밑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밑으로 여기고 눈을 내리깔고 흘기면서 쳐다보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살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대체하고, 하나님의 생각에 자기 생각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리를 대체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산 것이지요.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16:18).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교만을 지켜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교만을 꺾으셔야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교만은 스스로는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교만이 잠간 꺼진 것처럼 보이다가도 금방 교만의 가시가 자라나거든요. 왜냐면 교만의 실체가 영이기 때문이에요. 교만의 영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만의 영이 꺾이지 않는 한 절대 인간은 교만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의 영은 겸손의 영이 부어지면 꺾입니다. 겸손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이지요.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겸손의 영이 부어진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교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겸손해지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 겸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교만은 무엇일까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만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실 때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이 교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교만의 옷을 벗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겸손해도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교만이요, 아무리 교만해도 예수를 영접하면 겸손한 것입니다. 영적 흐름이 그렇다는 거예요. 겸손이나 교만은 모두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안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면 자기들이 매달아 죽였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갈6:14).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동적으로 교만의 옷을 벗고 교만의 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겸손할 때입니다. 그 길밖에는 교만의 영에서 해방되는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때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 것이지요.
(1) 베띠 민족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열방의 허리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열방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그리고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지요. 물론 그들은 원래 어두운 데 거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셔서 그들을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벧전2:9).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이방과 열방의 허리로 삼으신 거예요. 그들의 중심부로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잘나고 거룩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그렇게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베띠를 허리에 차고 살아야 할 민족이었습니다. 허리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리는 사람의 중심부입니다. 허리가 가장 중요한 신체부위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신체적인 구조상 허리가 중요하듯이, 이스라엘도 세계사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민족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역적인 것보다는 영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이 이스라엘이요, 무시당할 수 없는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구촌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한 씨앗 같은 존재요,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때문에 넘어졌다가도 일어나고, 깨어졌다가도 회복되어져야 할 민족인 것이지요. 자다가도 깨어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그 중요한 위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에 도취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적인 계획을 알 턱이 없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들은 수없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러졌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손가락 같은 존재이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한 구속사적인 계획을 중단하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제삼자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지켜볼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한 빚진 자요, 중보기도자인 셈입니다.
사람은 허리가 든든해야 건강합니다. 허리가 무너지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허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누워만 있어야 합니다. 사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넘어진 상태로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계속 그래왔습니다. 그들이 한번도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바로 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허리에 하나님의 베띠가 매어져 있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2) 썩은 띠로 전락한 유다
띠는 사람의 허리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중추신경이 있는 허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허리가 무너지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남자의 힘은 허리에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허리가 인간의 중심이라면 우리 인간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은 균형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권능으로 살게 됩니다. 그 기능이 무너지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적 나라로 삼으신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띠를 유브라데 강에 감추라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베띠는 건조한 곳에 있어야 하거든요. 습한 것은 상극이에요. 습한 곳에 있으면 금방 썩어버립니다. 그런데 베띠를 유브라데 강에 감추어 놓으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치에 있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베띠를 허리에 매고 살아야 할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야 할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죄악을 상징하는 유브라데라는 물가에 방치된 것처럼 살아왔던 것이지요. 썩은 베띠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함으로 베띠 민족의 자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동원하셔서 시각적인 퍼포먼스를 감행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자기들의 실상을 보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때문에 베띠 퍼포먼스는 이스라엘의 타락한 실상을 폭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런 퍼포먼스를 보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결박되어 가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성경에는 다양한 종류의 띠가 나옵니다. 가장 먼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유월절 식사를 제정하실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2:11). 거기서 말하는 띠는 베로 짜서 만든 허리띠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에봇 위에 매는 띠도 베띠입니다(출28:8). 용도도 다양합니다. 기쁨의 띠도 있고(시30:11), 권능의 띠도 있습니다(시65:6). 공의와 진리의 띠도 있고(사11:5), 슬픔의 띠도 있습니다(사22:12).
이처럼 띠는 묶는 기능도 있지만 기쁨이나 공의와 진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약에는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종의 자세를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있는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는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하시고(엡6:14), 골로새서는 사랑으로 온전하게 하는 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골3:14).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계1:13).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띠는 사람의 사역이나 권능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한복음21장18절입니다. 베드로가 젊어서는 자기 스스로 띠를 띠고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다닐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시각적인 퍼포먼스로 유대백성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를 고발하시고 경고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연기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지자에게 연기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나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연기를 요구받았던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수준 높은 연기를 요구하셨지요. 에스겔 선지자는 한편으로 드러누워서 1년을 지내게 했습니다(겔4장). 거기다가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고, 그것으로 떡을 굽게도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게 했습니다(사20:1-6). 호세아 선지자는 바람난 아내를 통해서 고도의 연기실력을 뽐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퍼포먼스를 ‘행동적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융화와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심지어 남북으로 쪼개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쪼개진 이스라엘 가운데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관심은 남 유다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마나 남 유대가 하나님의 소망이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허리띠를 차고 살기를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베띠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살기를 원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유다마저 하나님을 실망시킨 것입니다.
형제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답습하며 따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매로 호칭하며 이스라엘은 배역한 자매요, 유다는 패역한 자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렘3:11). 배역과 패역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죄악이라도 어떤 죄가 더 중한지를 말입니다. 알면서 짓는 죄와 모르면서 짓는 죄의 무게가 다른 법이지요. 남 유다는 자기들의 허리에 찬 베띠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특별한 미션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말로는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퍼포먼스를 실행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3) 베띠를 찾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반드시 허리에 띠를 매어야 했습니다. 다만 아무 띠나 매면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띠를 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띠는 베띠입니다. 베띠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로 만든 띠입니다. 띠를 매어야 할 대상은 구원받은 성도요,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띠를 매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사장적 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민족에게 없는 특별한 띠를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베로 만든 띠입니다.
그들은 그 베띠를 차고 살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적 나라로 살아야 했다는 말이지요. 그 띠를 차고 살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이름이 존귀함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채워준 띠를 스스로 벗어버린 것이지요. 때로는 거추장스럽다고 벗어버리고, 때로는 모양새가 없다고 벗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동경하는 띠를 만들어 매고 다녔던 것이지요. 때로는 자기들이 만들어 매고 다닌 띠가 사람들 보기에 화려하고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띠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을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 띠의 가치를 몰랐던 거예요. 물론 그들이 자기들의 띠를 완전히 벗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 허리에 차고 다니던 베띠위에 다른 띠를 포개고 다닌 셈이지요. 자기들이 선망하는 띠로 단장을 하고 다닌 거예요. 그러므로 그들의 베띠는 더 이상 그들의 허리를 지탱해 줄 수 없는 썩어버린 띠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눅눅하고 축축하여 곰팡이가 나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차고 다닌 띠는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 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띠였기 때문이지요. 띠는 마치 지금 우리 믿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이 언약하신 베로 만든 띠를 매지 않고 세상이 좋아하는 띠로 단장하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한마디로 내 인생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띠로 동여매고 다니는 것은 아니냐는 말입니다. 간신히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베띠를 매고는 다니지만 썩어서 더 이상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닌가요?
당시 유대 백성들이 띠고 있는 베띠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띠였습니다. 썩은 띠에 불과했다는 말이지요. 잊지 마십시오. 띠는 부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아니하며, 더 이상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허리에 띠가 있으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띠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마치 살았다하는 믿음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것 같았던 것이지요. 문제는 그곳에 선지자가 있었지만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아픔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띠를 매고 있지 않습니다. 베띠를 차고 있지 않다는 말이지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하나님의 베띠를 매고 다니지 않습니다. 다들 자기들의 좋아하는 띠를 만들어 차고 다닙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띠를 매고 다닙니다. 자기들을 상징하는 띠를 만들어 차고 다닙니다. 혹은 세상이 좋아하는 띠를 구입해서 매고 다닙니다. 띠는 힘과 능력을 상징 하는 바 그것을 힘의 근원으로 삼고 다닌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시대가 달라져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띠를 만들어 차고 다니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시대의 현상을 직시하고 부응하는 것은 바람직할지라도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가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의 물결에 힘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입니다. 이리저리 떠내려가는 부초와 같습니다. 원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베띠를 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제사장적 역할을 선도해야 할 목회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의식이 세상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영성이 세상을 압도할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허리를 점검해 보십시다. 혹시 지금 내 허리에 띠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베띠를 차고 있기는 하지만 썩은 베띠는 아닌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세상의 띠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돈으로 만든 띠를 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금으로 만든 띠를 차고 뿌듯하게 다닐는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띠를 차고 자랑하고 다닐는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 허리에 매어 있는 띠는 어떤 띠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베띠로 무장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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