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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닌 것 같아요 … 연습 안 하면 실수하거든요”
정경화가 극찬한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 *글 유주현 객원기자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대관령국제음악제, 의상협찬 드레스샵 estoo 중앙Sunday |제357호| 2014년 1월 12일
지난해 6월 대관령 국제음악제 기자간담회. 아직 젖살이 통통한 소녀가 갑자기 등장하더니 현란한 바이올린 독주로 참석자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연주 동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정경화 예술감독이 직접 초청한 이수빈(14·한국예술영재교육원)양이었다. ‘바이올린 여제’를 놀라게 한 문제의 영상은 2012년 베이징에서 열린 예후디 메뉴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2위에 오를 때의 모습이다. 노련한 성인 연주자에게 빙의라도 된 듯 스스로 빚어내는 선율에 푹 빠진 소녀의 영상은 대회 직후 유튜브에 오르자마자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동영상을 들으시려면 상단 중앙의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Soo-Been Lee in the Juniors - Finals of the Menuhin Competition Beijing 2012 Wieniawski -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 15
소녀는 이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회 오이스트라흐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주니어 부문 우승과 세계청소년음악콩쿠르 유럽협회(EMCY)상, 체임버 오케스트라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실력을 과시했다. 13일 열리는 대원음악상 수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사라 장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바이올린 신동’인 셈이다.
소녀에게 2014년은 중요한 해다. 지난 연말 말레이시아 쇼팽 페스티벌 초청에 이어 올해에는 모스크바 오이스트라흐 순회 공연, 폴란드 쇼팽 뮤직페스티벌 및 스페인 마드리갈 뮤직페스티벌 등 초청 협연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오스트리아 빈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도 초청 절차를 밟고 있다. 인천에서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가 세계를 무대로 어떤 활약을 펼쳐갈지 퍽 흥미로운 시점이다.` “모든 연주가 떨려요. 안 떨리면 사람도 아니게요. 10분 전부터 떨려 오는데, 심호흡하고 무대 올라 인사할 때 기도하면 좀 나아요. 그런 순간이 지나고 연주가 시작되면 다 잊어버려요. 끝나고 나면 아무 기억도 안 날 정도로요.”
6일 오후 성북동의 한 스튜디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카리스마로 세계를 놀라게 한 당찬 소녀는 간데없었다. 소녀의 관심은 오직 강아지였다. 스튜디오에 있던 강아지를 물고 빠는 소녀의 입술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뽀뽀하다 생겼다는 작은 상처까지 있었다. 연주 때 보여주는 풍부한 표정에 조숙한 ‘애어른’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아직 놀기 좋아하고 엄마에게 투정부리는 ‘어린애’였다.
강아지와 놀고 싶다며 몸을 비비 꼬다 ‘여제’ 정경화의 극찬을 들었을 때의 감상을 묻자 표정이 살짝 상기됐다. “진~짜 좋았어요. 저희 선생님은 칭찬을 잘 안 해 주시거든요. 선생님께 들은 최고의 칭찬이 ‘응, 괜찮네’ 정도?”
소녀의 ‘선생님’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내 ‘한국 바이올린계 대모’라 불리는 김남윤(65)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다. 2007년 초등학교 입학 직전 한예종 예비학교(현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오디션에서 처음 만난 이후 7년 동안 줄곧 김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 “잘하는 애들 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인데도 굉장히 야무지고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는 게 김 교수가 말하는 수빈이의 첫인상이다.
김 교수를 만나기 전에는 연주가 그저 ‘놀이’였다. 인천의 목회자 가정에서 3녀1남의 막내로 태어나 배 속에서부터 늘 음악이 흐르는 교회에서 자란 덕에 음악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언니·오빠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 좋아 엄마를 졸라 여섯 살 때 동네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주 1회 15분 수업이 고작이었지만, 혼자 무섭게 진도를 앞서갔다. “언니 오빠들 하는 걸 보면서 너무 부러웠었거든요. 악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어렵다는 생각은 못 해봤어요. 연습한다는 생각 없이 그냥 갖고 놀았던 것 같아요.”
▲수빈이는 ‘바이올린계 대모’ 김남윤 교수에게 7년째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젠 친할머니처럼 편하단다.
스승 김남윤 “내가 꼬마랑 많이 싸웠다 … 이젠 커서 느물느물”
놀라운 재능에 주변에선 서울로 가서 제대로 가르치라 권유했지만 목회자 가정에서 음악 교육비를 감당할 엄두를 못 내 부모님은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학비가 싸면서 최고의 교육시스템을 갖춘 한예종 예비학교를 알게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더라. 우린 정보가 없어서 무턱대고 시험을 봤는데 김 교수님이 너무 예쁘게 봐주셨다. 오히려 정보가 있었다면 용기를 못 냈을 텐데, 하늘이 준 기회였던 것 같다”는 게 어머니의 말이다.
입학 이듬해 곧바로 음악춘추 콩쿠르 1위와 서울바로크합주단 전국음악콩쿠르 전체 대상을 받자 김 교수는 연습을 강하게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엄하기로 유명한 김 교수가 ‘최고가 되라’며 부담을 주니 어린 나이에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에 가서 울었어요. 2학년 때 엄청 혼난 적이 있는데요, 너무 무서워서 어딜 봐야 할지 몰라서 선생님 눈을 쳐다봤더니 어디서 건방지게 눈을 똑바로 뜨냐고 하세요. 그래서 눈을 내리깔았더니 또 어디서 선생을 외면하느냐고 하시고…. 그래서 결국 막 두리번거렸던 것 같아요(웃음). 이젠 혼내셔도 절 위한 거란 걸 아니까 무섭지 않고, 친할머니 같이 좋아요.”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어린 애들은 잘할수록 선생님이 잡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바이올린이란 게 어려서부터 엄격한 트레이닝을 받지 않으면 힘들다. 수빈이 경우 막내라 집에서 워낙 예뻐하셔서 내가 무섭게 하는 수밖에 없다. 우습지만 내가 꼬마랑 많이 싸웠다. 그런데 이제 중학생이 되니 키도 크고 살도 쪄서 애가 느물느물해졌다. 야단을 쳐도 헤벌레 웃어넘기고 가끔 엉긴다. 어떨 때는 내가 약이 오를 정도다.”
이젠 선생님의 지도라고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음악을 이해할 때도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곡의 흐름에 따라 슬프거나 화난 감정을 떠올리면 몰입이 잘 된단다. “옛날에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무조건 했어요. 그런데 메뉴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과 1대1로 조언을 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너는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어요. 그때 이후로 제 스타일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김 교수를 못 만났다면 평범하게 자랐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하지만, 가족들의 이해와 희생도 무시할 수 없다. 목회자 가정의 빠듯한 살림 탓에 피아노를 전공하려던 언니는 결국 포기해야 했다. 돈 때문에 아이들 재능 썩히는 게 안타까워 남편에게 목회를 그만두라 종용하며 가정이 흔들리던 시기도 있었지만 남편이 굳건히 중심을 잡아줬다. 수빈이를 따라다니느라 바쁜 엄마를 위해 청소·빨래 등 집안일까지 도맡으며 묵묵히 감당하는 아빠를 수빈이도 가장 사랑한다고.
“연습이 잘 안 될 땐 아빠랑 둘이 손잡고 강아지랑 바람 쐬러 나가요. 그러고 오면 다시 잘 돼요. 선생님은 하루 10시간씩 연습하라시지만 전 그렇게 하면 집중을 못 해요. 하지만 하기 싫은 것도 아빠가 하라면 해요. 왜냐면 아빠가 엄마 몰래 제가 사고 싶은 걸 사준다고 하시거든요(웃음).”
▲지난해 6월 대관령 국제음악제 기자간담회 특별연주 모습. 수빈이의 연주에 감탄한 예술감독 정경화가 직접 초청해 화제가 됐다.
세계 굴지 영국 IMG의 러브콜 거절 … “좀 더 성숙한 뒤 고려”
13일에는 제 8회 대원음악상 시상식에서 장려상을 받는다. 국내 클래식 음악 발전에 공헌한 인물을 포상하기 위해 2006년 제정된 대원음악상의 역대 최연소 수상자다. 대원문화재단은 “어린 나이에도 다수의 국제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이양이 더욱 발전해서 우리 클래식계의 또 하나의 자랑이 되라는 격려와 희망을 담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김일곤 이사장도 “5년 전 수빈양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이미 잠재력을 확인했다. 감히 한국 바이올린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이라 생각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수빈이는 이번 수상이 감사하지만 콩쿠르에서 상을 받는 것과는 달리 많이 부담스럽단다. 주변에서 ‘미래의 정경화’니, ‘천재’ ‘신동’이라 보는 시선도 앞으로 실망시키게 될까 봐 걱정이라고. “천재는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연습을 많이 하면 잘하고 부족하면 실수하거든요.”
김남윤 교수도 ‘신동’이란 말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지금 반짝하는 것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재주가 있는 학생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걸핏하면 천재·신동이라 하는데 그런 말은 함부로 안 썼으면 좋겠다. 왜냐면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재주가 더 있고 흡수능력이 빠르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다.”
수빈이는 지난해 두 가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하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홈스쿨링을 택한 것. 이미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마당에 예술 중학교 경쟁에 뛰어들 수 없고, 일반 중학교는 음악에 집중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워낙 붙임성 있는 성격이라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어 속상하지만 좋아하는 발레학원에서 친구 같은 선생님을 만나고, 영재교육원 실내악 수업에서 언니·오빠들과 호흡을 맞추며 즐겁게 지낸단다.
보다 힘든 결정은 굴지의 매니지먼트사인 영국 IMG의 러브콜을 거절한 것. 메뉴인 콩쿠르 동영상에 감탄한 IMG 측에서 여러 차례 제의를 해왔지만 김 교수와 상의 끝에 내린 결론이다. “섣불리 프로로 내보내고 싶진 않다. 좀 더 성숙한 뒤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해 몇 년만 더 지켜봐 달라 했다. 자아가 분명하게 생겨야 하고, 프로에게 요구되는 걸 다 소화하려면 체력도 인격도 더 준비돼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입장이다.
수빈이도 처음엔 무척 가고 싶었지만 마음을 정리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사라 장과 이작 펄만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아빠가 선생님 의견 따라야 한다고 하시고, 가족과 헤어지는 것도 힘들어 아직은 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유명해지는 것도 좋지만 7년이나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 없다는 수빈이는 앞으로 따뜻하고 감동이 있는 음악을 하는 게 꿈이란다. “이츠하크 펄먼을 가장 좋아해요. 몸에 장애가 있는데도 전혀 불편함 없이 딛고 일어선 모습이 감동을 주잖아요. 바딤 레핀도 좋아해요. 연주가 재미있고 강하고 여러 가지 색깔이 있어서 볼 때마다 재밌고 즐거워요. 저도 그들처럼 감동을 주면서 재밌고 즐거운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Soo-Been Lee - 2nd Prize Junior - Beijing 2012
▲지난해 5월 인천시향 초청협연 중에서
“예술영재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무관심” 김대진 한국예술영재교육원장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은 국가적 차원의 예술영재 육성을 위해 설립된 예술분야 최초의 정부지원 영재교육 기관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운영하던 ‘한예종 예비학교’가 2008년 교육비 전액 무료 국립기관으로 전환됐다. 예비학교 시절부터 손열음·김선욱 등 세계적인 인재를 배출해온 곳이다.
음악·무용·전통예술 3개 분야에 매년 2월 학교장 추천 및 예술성 기초검사, 실기능력평가, 면접 등을 거쳐 초·중·고생 160여 명을 선발한다. 훈련된 테크닉보다 영재로서의 가능성을 본다. 전체 인원을 매년 오디션을 거쳐 새로 뽑는다. 기존 학생 합격률은 80% 정도. 재원생은 중 3부터 영재입학 제도를 통해 고교과정 수료 없이 바로 한예종에 입학하기도 한다. 올해는 재원생 4명이 합격했다.
◀2011년 9월 수원시향과의 협연을 위해 한국예술영재교육원 김대진 교수와 함께.
지도는 한예종 교수들이 직접 한다. 매년 3월부터 12월까지 방과 후와 주말을 이용해 연간 120시간 이상 교육한다. 음악 전공의 경우 전공별 개인렛슨과 실내악, 오케스트라 등의 실기 수업과 시창청음, 리듬수업 등의 이론과정 외에 최근에는 창의성과 인성 교육 프로그램도 강화했다. 타 장르 예술과의 만남, 외부 유명인사를 초청해 1대1 지도를 받는 마스터클래스, 찾아가는 문화행사를 통한 봉사활동 등 다양한 커리큘럼을 통해 전인교육을 추구하고 있다.
영재교육원장을 맡고 있는 김대진(기악과) 교수는 “새 시대를 위한 교육의 목표는 융합”이라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기 분야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예술을 함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커리큘럼을 개발 중이다. 좋은 선생님들에게 개인 레슨을 받는다는 점도 장점이지만, 눈에 안 보이는 교육환경도 중요하다. 재능 있는 아이들과 유능한 선생님이 함께 시공간을 공유하고, 무대가 크건 작건 현장에서의 소통이 쌓여 아이들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외부행사 참가는 적극 권장하지만 무단 결석은 한 번만 해도 제적처리가 될 정도로 시스템은 엄격하게 운영된다. 재능이 뛰어날수록 무질서하거나 나태해질 수 있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다.
시스템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진로 고민이 많은 학생을 위해 상담수업도 편성했다. 지도교수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담아두지 말고 해소하라는 차원이다.
김 교수는 “예술영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무관심”이라고 당부했다. “영재는 자기가 영재인지 몰라야 정상입니다. 그래야 무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영재에게 주는 사회적 관심들이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술이란 어떤 나이에 무엇을 하냐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얼마나 깊이 표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영재도 중요하지만 영재가 구십이 돼서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예술 영재들이 진정한 음악가로 커 나가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결과론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게 놔두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 15 비에니아프스키 /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
1850년 빠리 음악원을 졸업하면서부터 비에니아프스키는 유럽의 주요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이 연주 여행중에 자신이 연주할 목적으로 협주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1854년 빠리 연주를 위하여 작곡한 "원작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s on an Orig. Theme)"은 당시 빠리에서 활동하던 체코 출신의 피아니스트 Dreyschock에게 헌정되었다. Dreyschock를 배려하였음인지 곡 가득히 보헤미안적 분위기가 묻어난다.
Henryk Wieniawski, 1835 ~1880 비에니아프스키는 폴란드에서 대작곡가 쇼팽 다음으로 유명한 음악가이다. 그는 5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이 허용되어 마사르에게서 사사받았으며, 11세 때 바이올린 연주의 1등을 받은 신동이었다. 그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1860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 바이올니스트가 되었으며, 25세 때인 1860년에는 러시아의 궁정 전속 독주가로 초빙되어 12년 동안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활동하였는데, 1862 ~ 67년 페테르스부르크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의 대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과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으며, 1874년부터 77년까지는 비외탕의 후임으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타카토기법 등의 연주법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몇 안되는 바이올린 명수였던 그는 모주꾼인데다가 룰렛등의 도박광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병을 앓게되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45세라는 한창 나이에 객지인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비에니아프스키는 당시 바이올린 최고 명수의 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현을 눌러 2중음을 만들거나, 피치카토를 위한 왼손의 특수기교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그가 남긴 상당수의 바이올린곡은 이런 효과를 비롯하여 그의 독자적인 기교가 많이 도입되어 있어, 그의 작품을 연주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밝고 화려한 기교를 구사하는 파가니니의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슬라브적인 우수가 깃든 중후한 울림소리로 마음속에 깊이 스며드는 정감을 노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제2악장 로망스인데, 이 부분은 단독으로도 자주 연주 될 만큼 인기가 높다.
그는 전아하고 섬세한 연주를 하여 기교적인 프랑스-벨기에파의 바이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 가요성, 정서, 기교 등의 기반은 폴란드적으로 폴란드를 대표하는 연주가이다. 작품은 기교적이고 폴란드 민요의 아름다움을 살린 것이 많다. 1935년부터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1회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가 개최되었고(1위: 지네트 느뵈, 2위: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1952년 제2회(1위: 이고르 오이스트라흐-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아들) 이후는 5년마다 포즈나니에서 열리고 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두 개의 협주곡과 <화려한 폴로네이즈>, <모스크바의 추억>, <스케르초-타란텔라>, <전설>, <파우스트 환상곡>등인데 바이올린의 특성을 화려하게 살린 이들 작품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