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 운동, 그리고 1920년 대
3.1 만세운동은 식민 통치자인 일본에게도, 만세사건을 일으킨 조선인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지방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서 전국이 만세사건 속을 흘러들어갔다. 일본 통치자는 잔혹하게 진압했다, 많은 사망자, 부상자 그리고 투옥자를 만들어 냈다. 이 사건은 일본 통치자 못지 않게 조선 민족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역사의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조선 민족은 민중참여를 통해서 일치된 민족적 자각이 표출된 사실을 확인했고, 일본 통치자는 지금까지의 강압적인 통치 방법에 반성하도록 하였다. 역사적 변환이 나타나야 할 시기를 가르켜준 사건이었다. 일제 총독부의 독점 제도와 헌병-경찰 정치를 폐지하고, 조선인도 관리로 채용하는 정책으로 완화하였다. 조선인에게 공론을 담당하는 분야에(매스컴 분야) 어느 정도 자유를 주었다. 이로서 동시대의 사상적 동향에 민감한 지식인들이 학문과 예술의 사상을, 비록 일본을 통해서였지만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였다.(실제로 행동하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잡지들이 많이 창간되었다.
문예지로는 창조와 백조,, 종함사상지로는 개벽, 조선지방 이라는 잡지를 출간하였다. 유미주의, 자연주의, 표현주의, 자유주의, 아나키즘, 페미니즘, 민중주의, 사회주의 사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사진—잡지를 찍은 사진, 사진-잡지 항목에서)
그 중에도 지식인들 사이에는 사회주의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때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의식을 가진 자본가, 부르주아지 계층, 우익 지식인들(주로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의 정책이 허용하는 한꼐점 안에서 일제의 문화정책에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정치-문화적 지도자로서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이들은 광복 후에 친일-매국노로 몰렸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 권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조선인의 자치를 추구한다는 목표 아래 조선인이ㅡ 경제적-문화적 아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그 운동의 중요한 부분은 조선인 자본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인은 조선인이 만든 상품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민족성 개조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민족성 개조란 인격수양과 풍속개량, 민간이 대학을 세우는 등의 민족 교육기관 설립 등등 이었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자들은 특히 조선인의 도덕적 개조에 역점을 두었다.(이광수의 민족 개조론) 이와같은 조선학 진흥은 조선일보, 동아일보,종합지 동광, 조선지광 등의 민족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언론매체가 촉진하였다. 1930년 대에 들어서자 문헌실증주의 방법을 동원한 경성제국대힉 출신 학자들이 연구에 앞장 섰다. 1933년에는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조선연구의 열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조선 연구의 열기는 학문 뿐아니라 예술에서도 후끈 달아올랐다.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조선의 가치를 발견하여 선양하려는 작업에 몰두 하였다.
1930년대가 되면 사회양상이 많이 달라진다. 일본 식민 정치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면서, 식민주의 자본주의 정책에 휩쓰린다. ‘미두사건’이 대표적이다.
1920년 대의 미술은 서양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늘어나면서 근대미술이 생성되는 시기이다. 앞에서 많이 다루었다. 서양화 미술가를 조금 더 살펴 보면서 1920년대의 근대미술의 생성 시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