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그리며
며칠 동안 흐렸는데
오늘 저녁은 맑게 개었다.
오후에
바람이 꽤 불더니 하늘에
흩어져 있던 구름들을 모두 청소했나 보다.
일곱시가 넘었는데도
만덕호 근처에는 아직 햇살이 몇 군데 묻어 있다.
오늘이 하지다.
하지는 해가 일 년 중
가장 오랜 시간 머물러 있는 날이다.
어쩌면 오늘이
일 년중 딱 절반인지도 모른다.
저 북태평양 어디쯤
'북회귀선' 을 돌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날인 것이다.
나는
늘 태양도 더 이상 가지 못하는 그곳
---- '회귀선'에 가보고 싶었다.
극지방에 가까워질수록
나타난다는 오로라도 보고 싶고
밤에도 훤하다는 '백야'도 보고 싶다.
언젠가는
남테평양에 보석처럼 떠 있는
타히티. 피지. 사모아. 파푸아뉴기니에 가보고 싶다.
그리고
태평양은 아니지만
인도양에 있는 몰디브에서
온 바다을 펄펄 끓게 하는 그런 노을도 보고 싶다.
태양이
남회귀선을 돌던, 북회귀선을 꺽어 나오든
고갯길을 넘어 내리막길을 탔다는 거다.
어찌 보면 노을이 지는 것도
태양이 하루의 반환점,
회귀선을 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노을과 회귀선은 내게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지난날 한때,
부산에서 목포를 잇는 2번 국도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 질 무렵부터
어둑해질 때까지 '노을이' 와 함께, 노을을 보며
[티켓 투 트로픽스 TICKET TO THE TROPICS] 란
노래를 들으며 일주일을 달린 적이 있다.
----'열대 섬으로 가는 티켓'
이라는 제목도 그럴싸했는데
노을과 그 노래의 느낌이 그때 너무 잘 맞아떨어졌었다.
오늘 문득 태양이 정점인 날이고 보니
그 노래가 무척이나 듣고 싶고
장엄하게 지는 노을도 사무치게 그립다.
나는 노을을 참 좋아한다.
노을 같은 삶은 여운을 남기는 삶이다.
나의 애마 코란도 이름도 노을이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시리즈도 노을 몇 번으로 나가며
웬만한 의미 있는 것에는 노을이 빠지지 않는다.
철이 들면서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아마 [어린 왕자] 를 읽은 후
전염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워낙 작아서
고개만 서쪽으로 돌리면 언제든지 노을을 볼 수 있다.
외로울 때면 노을을 바라보던 어린 왕자는
어느 날 사무치는 외로움에
하루에 마흔세 번이나 노을을 바라본다
그 대목을 읽으며 어린 마음에도
그리 가슴이 아프고 감동적이었나 보다.
친구라곤 장미 한 송이밖에 없는
그 별에서 어린 왕자가 느낀 그 외로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후 어린 왕자는
길을 나서게 되는데 지금 내 식으로 생각하면
선재 동자가 법을 구하러 만행을 나선 것쯤 되겠다.
노을과 만행!
참 어울리는 짝이다.
내 삶은
이 두가지를 빼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다.
그만큼
노을을 찾아 온 산하를 돌아다녀
이젠 어느 곳에 가면
어떤 노을이 좋은가도 대충 알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나
운이 좋은 날은 멋지게 떨어지는 일몰과
그 후 찬란하게 번져나가는 노을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지역적인 조건으로 보면
호남이나 서해안 쪽이 유리하다.
그쪽은 높은 산도 별로 없고 평야가 많으며 ,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일몰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 바라보는 서해안 쪽 노을은
미황사 위쪽으로 올라가서
달마산 정상에서 보는 것이 일품이다.
땅끝마을에서 지는 것도 괜찮고,
익산이나 왕궁면 쪽의 평야에서
엄청나게 커져서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해도 볼만하다.
사 년 전인가.
불국사 선방에서 겨울안거를 난 적이 있는데
사실 정진도 정진이었지만,
불국선원은 방향이 정서향이라
겨울 노울을 잘 볼 수 있는 드문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겨울 한 철,
참 시리도록 푸른 겨울 하늘에 번져가는
독특하고 섬세한 맑은 겨울 노을을 실컷 감상했다.
저녁공양 후 마당 끝에 서서
넋이 나간 듯 매일 노을을 보고 있는
나를 다들 곁눈질까지 해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절에서 볼 수 있는 멋진 노을이 참 많기도 하지만 ,
기억에 남는 곳은 봉화에 있는 축서사에서
소백산 준령으로 지는 일몰과 노을이 참 좋았고,
영주 부석사, 청주 관음사도 괜찮은 곳이다.
또 불교 성지인
미얀마 지역에서의 노을을 잊을 수 없다.
고도 (古都)의 폐허로 변한
탑의 숲으로 피어오르는 아침노을을 보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혼자 나와 탑돌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탑인지 꽤 높은 탑이었는데
그 위에 올라가서 본 저녁놀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장엄하게 지평선으로,
아니 니르바나로 쏟아져 내리는 ,
그리고 온 하늘을 자주색 노을로 뒤덮은 그날을 어찌 잊으랴.
노을도 계절에 따라 조금씩 그 느낌이 다르다.
봄 하늘에 물든 노을은
마치 새색시 볼에 물드는 홍조같이 엷으면서도 섹시하다.
그러나 뿌연 하늘과 온 산하를 불태우는
꽃빛으로 인해 부끄러윰 잘 타는 노을은 보기가 쉽지 않다.
이즈음에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64번, 1악장을 들으면 잘 맞아떨어진다.
여름 하늘 노을은 뜨겁다.
낮 동안 해가 부지런히 대지를 데우고 난 뒤 끝이라
노을마저도 덩달아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따라 한다
운이 좋으면 정말 장엄하게 떨어지는
해와 노을을 볼 수 있는 때가 여름 저녁이다.
노래로 들을라치면 역시
---- [ 티켓 투 더 트로픽스] 나
----[스패니시 하트 SPANISH HEART] 가 제격이다.
해 지고 노을이 물드는 바닷가에서,
정열적으로 연주하는 이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그 노을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갈 듯하다.
가을 노을은 왠지 쓸쓸하다.
추수가 끝난 빈 들녁 위에 스러지듯이
피어오르는 노을은
우리네 삶을 관조하게 하는 마력을 뿜어낸다.
겸허하게 사는 법을,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깨우치는 듯하다.
가을 노을에 맞는 노래는 역시 이동원이 부른 [이별 노래]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그림이 연상되는 가사다.
시인 정호승 님이 시를 써서 더 좋다.
내가 좋아하는 노을은
겨울 하늘에 피어난 노을이다.
겨울 하늘은 무엇보다도 티 없이 맑아서 좋다.
그 시리도록 푸른 하늘가로 번져 나오는 노을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금방 눈물이 괼 정도다.
내 영혼을 맑혀주는 여러 가지 인연들이 있지만,
그 첫 번째가
겨울 하늘에 아름답게 피어나 저녁노을이다.
겨울 노을에 잘 어울리는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가 낳은 차이콥스키의 [ 백조의 호수] 중 ( 정경) 일 것이다.
그 잔잔하게 흐르다 처절하도록 장엄하게 성향이 비슷하다.
아마 내 평생 이루기는 힘들겠지만,
어린 왕자처럼 외로움이 사무치는 날,
노을이 피어오르는 시간에
지구를 하루에 딱 한 바퀴 도는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하루 종일,
아니 비행기 기름만 넉넉하다면
며칠이고 겨울 하늘에 핀 노을을 보며 날고 싶다.
그리고 시퍼런 티베트 하늘에 흐르는 노을은
어떤 깃발들을 날리고 있는지도 빨리 가서 보고 싶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노을만큼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지난날, 노을이나 석양이 들어가는
노래만 모아서 열심히 듣고 다닌 적도 있다.
그 노래들 가사를 보면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노을을 잘도 표현한 듯 싶었다.
노을이 머물다 간 자리에 남아 있는 그 찬란한 빛에 취하여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고 이별 노래로 가슴을 적시기도 한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서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태우며 품어내는
그 빛 앞에서 세상 어느 것이 더 아름답다 하겠는가
세상 무엇이 고통스럽다 하겠는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따뜻이 보듬을 수 있는 저 노을
아, 노을이여.
찬란한 슬픔이여!
이곳에서는 노을을 볼 수가 없다.
밖에 나갈 수도 없는 데다가
무문관 방향도 동남향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같이 맑은 날은
강진만 건너 천관산 위로 번지는 노을 끝자락쯤은 볼 수 있다
이젠 노을을 직접 보지 않아도 저녁 하늘 상태만 보면
----'아,오늘 노을은 제법 볼만하겠구나' 아니면
---- '오늘은 운 좋아야
구름 사이로 몇 자락 보겠다.' 하며 짐작하기도 한다.
해제하면 제일 먼저 노을이가 들려주는
[ 티켓 투 더 트로픽스]를 들으며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노을을 보고 싶다
그리하여 내 지친 수행 여정에서 '적멸' 의 위안을 받고 싶다.
6.21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