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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주님 이시다. [고전12;3]
농과대학을 나와 비밀하우스 재배를 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비닐하우스에 갖가지 농작물을 경작할 때 정기적으로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켜 산소를 공급해 주어야 농작물이 살지, 계속해서 비닐하우스 문을 닫아두면 다 시들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비닐하우스같이 답답해서 사람들이 마약을 하고, 답답해서 술을 마시고, 답답해서 도박하고, 답답해서 별짓을 다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 자살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산소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오는 사람은 시원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은혜를 받는 사람은 모든 여건을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면서 은혜를 받고, 특별히 설교 시간에 힘이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한다고 썼다. [고후4;5]
예수님은 주님 이시다. [고전12;3]라는 고백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요, 기독교의 유일하고 중심적인 참된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 얻는가?
행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참된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말한다.
*어떤 일이든 그리스도가 절대적 중심이 되야 한다.
자기 자신의 모든 영역과 권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생활방식과 가치 체계, 언어, 태도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굴복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수 없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늘 주재권을 중심에 두셨다.
예수님은 주권적 주인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선포하시기을 주저 하신적이 없다. 그러기에 에수님이 전한 참복음은 그의 주재권과 분리 될수 없다.
현대 복음주의운동의 천박함과 영적빈곤과 복음주의의 쇠퇴의 주 원인 은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제거하면 반드시 신앙의 핵심이 훼손된다.
오늘날 유행하는 복음은 죄인들에게 거짓소망을 제공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삼을 계속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부르며,
주님이신 그분께 순종하겠다는 헌신은 나중으로 미루라고 부추긴다.
이 메시지는 육체의 죄가운데 거역을 일삼고 거룩의 길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거짓된 약속을 한다.
신앙을 신실함과 분리함으로써 지적 동의만 있어도 전심으로 진리에 순종하는것과 동일한 효력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 하신것과 동일한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늘 자신의 주재권을 중심으로 두셨다.
둘로스“라는 단어의 뜻 -영어, “Lord" 주 헬“ 퀴리오스”로 번역한다.
“절대적 권세를 지닌 통치자”를 뜻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퀴리오스”라고 하셨다. “
즉 퀴리오스 -“주권적 주”,“ 테스포테스 -절대적 주”가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퀴리오스 -“주권적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유다서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테스포테스 -절대적 주]곧 우리 주[퀴리오스 -“주권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예수님이 입술로는 그를 존경한다 하면서도 삶으로는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이 개념 에서 말씀하고 책망 하신다.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6;16절]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
고전7;22-23]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둘로스는 가장 낮은 노예, 문자 그대로 한 주인의 소유로서, 주인이 합법적으로 임금을 주지 않소 일을 시킬수 있는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 주요 헬라어이다.
성경은 이런 범주 에서 반복하고 강조한다.
고전6;19-20절]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은 우리 주인이 값주고 사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값으로 하나님께 팔린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다.
이것은 주 되신 하나님께 예수님께 절대적 순종을 말하는 것 이다.
그럼 왜? 성경은 그런 협오스러운 종의 개념을 사용했을까?
어떤 흑인 목사는 “ 노예란 극히 협오스러운것인데 내가 어떻게 회중들에게 예수님의 노예라고 전할수 있겠는가?
노예란 ? 부정적인 이미지, 심한수난을 본능적으로 떠올린다.
당시 로마에서는 노예제는 그 사회의 확고한 제도였다.
부당한 대우, 끔찍한 학대, 악명이 높았다.
이런 협오스러운 종, [둘로스]가되기 원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초대 교회때 많은 사람이 노예 였다.
당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노예라는 묘사하신 것은 대중들의 필요에 호응받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주이시고 그리스도인은 노예라는 개념은 현재 복음주의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오늘날 유행하는 복음은 죄인들에게 거짓 소망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다고 약속한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하면서도 헌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유행하는 복음의 “상황화”는 이제 세상이 교회의 방식을 결정한다.
버지니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는 지난 30년간 복음주의 기독교가 극적으로 변질하였다.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동성연를 허용하고, 성인용 영화를 관람하고, 혼전 성관계를 하는 등 여러가지 세상의 활동이나 비도덕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훨씬 관대해졌다고 말했다.
이런것들이 복음을 쇠퇴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교회가 지나치게 세상의 풍속을 좇아가며 상황화되어 가는 것은 세상에 의해서 스스로 망하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16억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분명 수백만명이 비극적으로 속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확신은 저주받은 거짓확신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아도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이 거듭나지 않은 마음의 비참한 상태를 유지 시킨다.
간음과 음행, 동성애에, 도적질, 사기등 온갖 일탈을 노골적으로 일삼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여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성경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자 들과의 “ 인격적인 관계”을 규정 하신 것입니다. [요12;26,15;20]
그리고 몇몇 서신서 에서는 저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고백한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노예라는 진리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야고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유다서의 저자 유다도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도 유다서 1장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까? 성령을 받으니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는 “형님, 형님.”하면서 따라다녔는데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고 영안이 밝아지니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구세주 메시야이십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고보 자기는 초라한 피조물,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사람이고,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시요, 우주의 주인이시요,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육신의 혈연 관계를 초월하여 영적인 관계로 들어가서 자기를 예수님의 노예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가 자기를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라고 해도 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형제 야보고’라고 한 것보다 ‘예수님의 종 야고보’라고 한 것이 얼마나 더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종이라고 말했다고 야고보가 낮아집니까? 아닙니다. 더 높아지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혈연 관계, 인간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영적인 관계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노예의 특성은 ]
주 [퀴리오스] 나 주인 [테스포테스]이 있는곳에 반드시 노예[둘로스]가 있다. 노예는 좋든 싫든 주인의 소유자의 의지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주 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마6;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직역 ] 한 사람이 두주인을 섬길수 없다.
노예의 근복적인 특징]
우리는 선택 받았고[엡1;4-5],
값으로 사신바 되었으며[고전6;20.7;23]
우리는 주인의 소유이며[롬14;7-9절].
주인의 통제 아래있고[행5;29] ,
삶의 모든면 에서 주인을 전적으로 의존한다[고후9;8-11]
궁극적 으로은 우리는 하나님께 해명해야하고[]롬14;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심판을 받아[고후5;10] 징계[히12;5-11]나 상을 받는다 .
이것이 노예의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주인에 대한 노예의 순종은 무조건적이고 망설임 없다.
주인에게 설명이나 요구할 권리가 없다.
이해가 되든 안되든 순종해야 한다.
야곱이 라반의 공격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그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했던 그 40명은 무장했던 것도 아닌데 바울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라반과 같이 온 사람들은 무장해서 야곱을 치러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무사하게 되고 평화조약을 맺고, 서로 입 맞추고, 축복한 후에 헤어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후유! 고비를 넘겼구나.’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버지 집, 고향으로 가려니 라반의 위험보다 더 엄청난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의 위험입니다.
에서는 싸움꾼이요 사냥꾼입니다. 그가 칼을 뽑으면 야곱이 당할 수가 없습니다. 라반은 싸울 수 있는 상대이지만 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면 에서를 만나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피해 고향으로 가지 않으면 에서를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말씀의 길을 택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나가면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가야 됩니다.
따라 합시다.“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주일을 지키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십일조를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죽으리라.’ 할렐루야!
그렇게 나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한 번 죽을 목숨이니 말씀을 따라 살다 죽으면 좋을 줄 믿습니다.
야곱이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가는 길에서 엄청난 광경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눈을 열어 주시니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빽빽하게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도에 따르는 대가에서 단순화 하거나, 얼버무리거나 가볍게 완화 하거나 부드럽게 포장하지 않으셨다.
이는 예수님의 권위에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 성도에게 예수님의 마음은?
요15장14-15절]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친구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머래이 해리스는 “ 자신의 노예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자신의 친구로 삼으신 것이다.
(요 12:25-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통치자들은 누구나 자기 신하 가운데 친구가 있어서 개인의 일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부하 였다.
자신의 주인과의 관계가 친구여도 그들의 관계에서 내재되어 있는 권위는 없애버리지 않는다. [ 왕- 강감찬, 거란과 그의 신하 ]
예수님은 그들의 주“ 퀴리오스”이지만 그들도 여전히 “종”둘로스 이다. 예수님은 그분께 순종하는 제자에게 친구라 불렀지만, 여전히 순종을 특징하는 노예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행하지도 않으면 그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 이다.
열두제자. 중에 주와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위에 진정으로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을 “친구”.로만 보이려 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탄도] 예수님을 그와 “인격적인 관계을 ” 맺었지만 주로 받들지 않았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예수님의 참된 친구는 오직 그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 이었다.
[요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제자들에게 (요 15:12-1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요,,
기도 [친밀감..] 있는냐? 대화 좀 합시다[기도]....
괜히,, 오해만,죄, 낙심,,,할 것 다해요,,,
민수기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4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참된 믿음은“무조건 순종을 요구 하십니다.”
또 무조건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따르지 말라고 만류 하십니다.
코이라는 비단잉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어항에서 기르면 4cm, 5cm 정도로 자랍니다.
그러나 연못에 풀어 놓으면 45cm까지 자라고, 큰 강에 풀어 놓으면 90cm, 1m까지도 자랍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큰 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에 순종하면 우리가 낮아져도 높아지고, 안 되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의 주재권 은 참된 복음의 시작입니다.
빌2;10-12절]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