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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노래
정 찬
1
폴란드 남부 술레지엔 지방에 카토비체라는 도시가 있다. 철도의 간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중공업 도시인 카토비체는 1980년 자유노조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부의 거점이 되었다. 여기에 헨리크구레츠키라는 현대음악 작곡가가 살고 있다.
그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는 지난 91년 미국의 일렉트라 논서치의 레이블로 발매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총판매량이 놀랍게도 100만 장에 이른다. 5,000장만 팔려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클래식 시장에서 이 판매량만으로도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하는 데 충분했다.
「슬픔의 노래」 속에는 소프라노가 부르는 세 곡의 노래가 있다. 15세기경부터 폴란드의 수도원에서 전해져오는 성십자가 탄식이라는 기도문과, 2차 대전 중 게슈타포* 수용소에 갇힌 18세 소녀가 벽에 새긴 애절한 기도문, 그리고 잔혹한 적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을 빼앗긴 어머니의 애통해하는 폴란드 민요가 그것이다.
나의 아들, 내 몸에서 난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나에게 나누어 다오
언제나 내 마음속에 너를 품고 있었던
진심으로 너를 보살펐던 어미에게
너의 목소리라도 듣게 해 기쁘게 해다오
비록 네가 멀리 떠나갔지만
엄마 울지 마세요
고결하신 성처녀 마리아여
저를 도와주소서
위의 것은 성십자가 탄식 기도문이며 아래 것은 게슈타포 수용소에 갇힌 소녀의 기도문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애절한 노래인 폴란드 민요는 다음과 같은 시를 담고 있다.
어디로 갔는가,
내 사랑하는 아들은?
폭동이 일어났을 때
내 아들은 잔인한 적에게 살해당했겠지
오, 너 나쁜 사람아
가장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나에게 말해다오, 왜 내 아들을 죽였는지를
이제 다시는 아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니
내가 울고 울어
내 늙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강을 만들어도
그들은 내 아들을 살리지 못하리라
내 아들은 차디찬 무덤 속에 누워 있건만
아무리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도 그곳을 찾을 수 없구나
가여운 그 아이는
따뜻한 침대가 아닌
어느 거친 땅에 누워 있겠지
나는 아이를 찾을 수 없으니
아름답게 우는 신의 새여
그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오
신의 작은 꽃이여
내 아이가 행복히 잠들 수 있도록
활짝 꽃을 피워주오
2
바르샤바 공항은 작고 깔끔했다. 중간 경유지인 모스크바 공항의 을씨년스러움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비행기 시각 때문에 모스크바 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기다려야 했는데, 밝고 화려한 면세점이 있음에도 주위가 왠지 어둡고 쓸쓸해 보였다. 여독 탓인지도 몰랐고, 객지의 낯섦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리저리 서성거리다 트랜스퍼*로 들어갔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 여행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한쪽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남자가 시선 속으로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을까.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얼굴에 드리운 음울함은 갈 곳이 없는 자의 표정이었다. 그의 음울한 얼굴은 바르샤바행 비행기 안에서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폴란드 입국 심사관은 얼굴과 여권 사진을 대조한 후 곧바로 통과시켰다. 공항 로비로 나오니 동양인 남자 두 사람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한 사람은 중키에 안경을 썼고, 또 한 사람은 긴 머리에 키가 컸다.
“한국에서 오신……”
안경 쓴 남자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김성균 씨군요. 반갑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내 손을 잡았다.
“이쪽은 통역을 맡은 박운형입니다. 연극을 하고 있죠. 제 폴란드어 실력이 인터뷰 통역하기에는 너무 짧아서…… 이 친구 폴란드어 실력 대단합니다.”
“아, 그래요.”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운형과 악수했다.
“피곤하실 텐데 나가시죠.”
김성균은 내 가방 하나를 들며 앞장섰다. 바깥 날씨는 쌀쌀했다.
“유월이 다 되어가는데 날씨가 왜 이렇게 추워요?”
얇은 와이셔츠만 입은 나는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올핸 날씨가 유난스럽네요. 시간도 늦었고 하니 불편하시더라도 오늘은 이 친구 집에 가서 주무시죠. 제 집은 가족이 있어서…….”
“폐가 안 되겠어요?”
나는 박운형을 보며 물었다.
“폐는 무슨…….”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었다.
박운형의 아파트는 좁고 남루했으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공항에서 사 온 포도주병을 꺼내 들고 그들과 마주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댄 김성균의 표정은 어두웠다. 가만히 생각하니 공항에서도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인터뷰는 할 수 있겠죠.”
나는 포도주병 코르크 마개를 따면서 슬쩍 물었다.
“글쎄 그게…….”
가슴이 철렁했다.
“구레츠키가 6월 2일 영국으로 갈 예정이랍니다. 지금 그 준비 때문에 바빠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나 만날 수 있다고…….”
“그때가 언젠데요?”
“월 10일에 돌아온다고 하니…….”
그러면서 김성균은 시선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를 만나려면 2주일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출장 일정상 불가능했다.
지난 5월 초, 내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에서 공산권의 유명 음악원 취재를 기획 했다. 동유럽이 개방되기까지 국내 음악도에게 문이 닫혀 있었던 공산권의 전통 있는 음악원을 소개해보자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재벌 기업을 스폰서*로 잡아 회사 돈은 한 푼도 안 들이는 해외 출장이었다. 첫 취재 대상으로 폴란드의 쇼팽 음악원이 결정되었다. 부장은 나에게 출장을 지시하면서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폴란드 가는 김에 구레츠키나 인터뷰 하지.”
나는 부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로 일약 스타가 된 그에게 전 세계 매스컴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인터뷰 기사가 빈약한 것은 그가 매스컴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장은 아주 가벼운 취재거리를 지시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겻을 지시할 때 그런 투로 말하는 부장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등에 묵직한 짐을 얹은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에 간다고 해서 구레츠키가 인터뷰에 응한다는 보장은 없으나 노력이라도 해보아야 했다. 여러 채널을 통해 알아본 결과 도움이 될 인물로 떠오른 이가 쇼팽 음악원에서 작곡 공부를 하는 김성균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 젊은 작곡가로서, 구레츠키와 사적인 교분이 있었다. 그와의 첫 통화에서 힘써보겠다는 말을 얻어냈고, 이틀 후 5월 말쯤에 오면 인터뷰가 가능하겠다는 고무적 인 소식을 받았다. 그런데 박운형의 아파트에서 그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영국 방문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처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김성균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나로서는 그를 원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한 쪽은 나였고, 갑작스럽게 삐뚤어진 스케줄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운이 나쁜 탓이었다. 그럼에도 원망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문사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집단이 아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에 문제가 있더라도 유능한 기자가 된다. 과정이 아무리 돋보여도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기자에게 운이 나쁜 것도 일종의 무능이다.
“구레츠키는 지금 집에 있습니까?”
그가 살고 있는 카토비체는 바르샤바에서 기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다.
“글쎄요…….”
김성균은 어깨를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전화를 해도 잘 안 받아요.”
“가족은 받을 것 아닙니까?”,
“받긴 하지만 대답을 잘 안 합니다. 구레츠키의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 조심하는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아침 집으로 전화해 그가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무조건 쳐들어갑시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면 할 수 없지요. 사진 찍는 분 내일 같이 가는 데 지장 없죠?”
단 한 장의 사진이라도 살아 있는 사진을 써야 한다. 기사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진이 죽어 있으면 빛이 바랜다.
“갈 수 있을 거예요.”
“확실한가요? 혹시 안 된다면 어떡하죠?”
“그 친구 바쁘긴 하지만 하루쯤은 시간을 내줄 수 있을 겁니다.”
“뭘 하는 사람인데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지고 있었다.
“민영수라고 하는데 영화 공부하고 있어요.”
“여기서요?”
폴란드에서 영화를 공부한다니 조금 이상했다. 미국이나 프랑스면 모를까.
“로즈 연극영화학교 학생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아시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는 영화를 만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블루」 라는 영화도 만들었어요.”
“아, 그 영화!”
나는 특별히 마음이 끌리지 않으면 좀처럼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 그런 나를 극장까지 끌어들인 것은 199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여우주연상, 최우수촬영상을 받았다는 「블루」의 광고 문구였다. 감독이 폴란드인이라는 것도 흥미를 돋우는 데 한몫을 했다. 그때까지 폴란드는 고사하고 동유럽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영화 평론가들은 그를 동유럽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소개했다. 여느 영화와 다른 것은 연작이라는 점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를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블루」를 시작으로 「화이트」 「레드」를 기획 했다고 한다.
고요한 시골길. 행복한 한 가정이 피크닉에 나선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나고, 여주인공 줄리는 홀로 병실에서 깨어난다. 작곡가인 남편과 다섯 살 된 딸의 죽음이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 줄리는 자살을 꿈꾼다. 빛과 음악은 이 운명의 스펙트럼을 끊임없이 변주해 보여준다. 밤의 짙은 푸름. 안개 낀 새벽의 어스름한 푸름. 그 푸름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키에슬로프스키가 로즈 연극영화학교 출신이에요. 동유럽 영화중흥의 산실이죠.”
“그렇군요. 아, 참 박운형 씨도 연극을 한다고 했죠. 민영수 씨와 같은 학교에 다니시나요?”
“아닙니다. 이 친군 극단 소속 배우예요.”
“그래요?”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박운형을 보았다.
“폴란드에서 유일한 한국인 배우니까 신경 쓰셔야 될걸요.”
김성균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폴란드 연극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높지요. 혹시 그로토프스키를 아세요?”
“서구 연극의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연극 개념을 만들어낸 폴란드의 혁신적 예술가라는 사전적 지식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주창한 이론이 뭐더라……”
“가난한 연극을 말씀하시는가요?”
“맞아요. 가난한 연극. 근데 그것이 무슨 이론입니까? 연극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궁핍한 연극이라고도 번역하지요, 단순하기는 하지만 부유한 연극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의상, 무대 장치, 분장, 조명, 음향 효과 등 현란함을 뽐내는 것이 부유한 연극이라면 가난한 연극은 그러한 장식적 요소를 일체 배제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배우와 관객의 진정한 교류를 방해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연극 미학이 기존의 서구 연극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아, 서구뿐만이 아니군요. 이 친구를 폴란드로 오게 한 이가 그로토.프스키니까요.”
김성균은 가만히 듣고만 있는 박운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국에서 그로토프스키 연극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나 봐요. 그 풍요한 나라에서 동유럽의 궁핍 한 나라로 왔으니 말입니다.”
“미국에서요?”
“뉴욕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이곳으로 왔지요. 벌써 사 년이 되었군요.”
“폴란드 경제는 어떻습니까?”
“시장경제로 바뀌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졌지요. 외제 상품이 물밀듯 들어오고, 가게에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요.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엉망입니다. 실업자는 늘어나는데 물가가 뛰니 생활수준이 악화될 수밖에요.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은 떼돈을 벌고…….”
“부의 편재*가 새로운 갈등 요인이 되겠군요.”
“못살았더라도 평등했던 옛 시절에 대한 동경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틈을 비집고 구공산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연극하기는 어떻습니 까?”
나는 박운형을 보고 물었다. 개방화 이전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예술 단체들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국민에게 거의 부담이 안 될 정도로 극장 입장료를 저렴하게 책정했다. 사회주의 국민들이 예술의 향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예술 정책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장경제로 전환되면서 정부의 지원이 중단되었고,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먹고사는 일에 바빠 극장을 잊었다.
“힘들긴 합니다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자립 의지가 강해졌고, 정부의 간섭이 사라져 외국의 연극 단체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도 있고…….”
박운형은 더 말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차 끊어지기 전에 집에 가봐야겠습니다. 구레츠키에게는 이 친구가 전화할 겁니다.”
김성균은 잔에 남은 포도주를 들이켠 후 일어섰다.
바르샤바역은 몹시 붐볐다. 매표구 앞에 늘어선 줄을 보니 표를 사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일요일이라 그래요.”
“아, 오늘이 일요일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전화 통화 한 결과 구레츠키가 집에 있다는 것을 그의 부인을 통해 확인했다. 다만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연주회 참석으로 오늘은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일단 카토비체루 가는 게 낫겠다고 나는 판단했다. 사진을 맡은 민영수는 개인 일정으로 저녁에 오기로 김성균과 약속했다.
박운형은 시계를 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김성 균과 만나기로한 시간이 약간 지나 있었다.
“박 형은 어떻게 해서 연극을 하게 되었나요?”
“우연이죠 뭐.”
기대한 것에 비해 대답이 너무 싱거웠다.
“무대에 많이 서셨어요?”
“뭐, 별로…… 아, 저기 오네요.”
회색 잠바 차림의 김성균이 싱글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시 삼십팔 분에 출발한 기차는 네 시 이십삼 분 카토비체에 도착했다. 공업 도시라 그런지 건물들은 대체로 어두운 회색빛이었다. 바르샤바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오래된 건물인 데다 벽에 색을 칠하지 않으니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에는 짧은 해에다 음산한 날씨로 더욱 어둡게 보인다고 했다.
민영수를 위해 찾기가 가장 쉽다는 카토비체 호텔을 숙소로 정한 우리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구레츠키 집으로 전화했다. 그의 아들이 전화를 받았다. 박운형은 능숙한 폴란드어로 구레츠키를 만나기 위해 멀리 한국에서 온 기자가 카토비체에 지금 도착했으며, 내일 시간을 꼭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영수에게도 전화를 통해 호텔 이름과 위치를 알렸다.
민영수가 나타난 것은 밤 열한 시경이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그는 김성균, 박운형과 반갑게 악수했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우리는 호델 지하 바로 내려갔다.
“자, 내일의 행운을 위해 건배합시다.”
김성균은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폴란드 맥주 맛이 왜 이렇게 쓰죠?”
한국의 맥주에 비해 쓴 맛이 너무 강했다.
“저도 처음에는 영 이상했는데 자꾸 마시니 익숙해집디다. 가만히 음미해보면 누릉지 맛이 나요. 약간 탄 누룽지지만.”
민영수가 김성균의 말에 동의했다.
“여기서 아우슈비츠 가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죠?”
나는 옆에 있는 박운형에게 물었다.
“네?”
박운형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의 눈이 크게 열려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내가 당황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아우슈비츠를 보실려구요?”
김성균이 대화 속으로 끼어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우슈비츠는 보고 가야죠.”
“하긴 그렇군요. 여기서 자동차로 삼, 사십 여 분의 거리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김성균과 민영수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박운형은 시선을 내린 채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아우슈비츠에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제 말은 꼭 같이 가자는 게 아니라……”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저희들이 당연히 안내해드려야죠.”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박운형이 입을 열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식 발음입니다. 폴란드어루 오슈비 엥침이라고 하지요. 오슈비 엥침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어색 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듯 목소리가 쾌활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아주 좋은 땅, 축복받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요?”
“마을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건 신에게 그런 마을을 만들어달라는 염원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름이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깊은 상징이니까요.”
“깊은 상징…….”
민영수의 중얼거림이 귀에 닿았다.
“지금 영화를 생각하고 있구먼.”
김성균이 민영수의 어깨를 탁 쳤다.
“이 친구, 영화에 대한 열정 정말 대단합니다. 무엇이든 영화와 결부하니까요. 이 친구에게 깊은 상징은 영화입니다. 내 말이 틀렸나?”
민영수는 말없이 웃었다.
“말과 사물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고대인에게 이름은 사물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름이 생명과 연결되어 있었던 거지요. 지금도 일부 에스키모인들은 늙으면 이름을 다시 짓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계약을 하기 위함이지요. 누구와 계약합니까? 신입니다. 기도를 통해 신과 새로운 계약을 하지요. 효슈비엥침이라는 이름 속에는 인간의 간절한 기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지옥의 땅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축복받은 땅에서 일백오십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왝 그렇게 악착스럽게 죽였을까요? 독일인이 잔인해서? 아니면 신에게 기도를 잘못한 것일까요?”
박운형의 물음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경, 박운형은 구레츠키 집으로 전화했다. 시간을 잘 맞추었는지 구레츠키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폴란드어를 들을 수 없는 나는 박운형의 표정만 살폈다. 잠시 후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김성균의 얼굴도 환해지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박운형은 구레츠키가 한 시간 안에 인터뷰를 마친다는 조건으로 오전 열한 시 반경 카토비체 호텔에 나오기로 했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사태까지 예상했던지라 무척 기뻤다. 나의 기뻐하는 표정에 김성균은 아무리 매스컴을 싫어한다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정성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싱글거렸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터뷰 시간을 넉넉하게 쓸 수 없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인터뷰 장소가 그의 집이 아니라는 점은 더욱 그랬다.
집은 주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작업실까지 엿볼 수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구레츠키는 그것을 피했다. 박운형이 집으로 가겠다고 두 번이나 말했음에도 호텔을 고집 했다.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구레츠키의 마음이 훤히 보였다.
구레츠키를 영접하기 위해 나는 김성균과 함께 호텔 입구에 서 있었다. 시곗바늘이 약속 시간인 열한 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왜 안 오지.”
나는 중얼거리며 햇빛 가득한 거리를 눈을 찡그리며 보았다. 건너 편 주차장에서 호텔 쪽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감색 양복에 노타이 차림의 노신사였는데,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어깨가 기우뚱거리면서 상체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가만히 보니 무용수처럼 한 쪽 발끝을 세워 걷고 있었다.
“구레츠키예요.”
김성균이 낮게 말했다.
“걸음걸이가 왜 저렇죠?”
“관절 부분에 고질병이 있다고 들었어요. 가끔 심한 통증이 엄습한다던데, 그럴 때면 사람이 이상하게 변한대요. 집에 찾아온 손님한테 나는 이렇게 아픈데 너는 왜 멀쩡하냐고 고함을 지르는가 하면,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나는 아파 죽겠는데 네 목소리는 왜 유쾌하냐고 소리를 질러대나 봐요.”
“음, 무척 괴팍하군요.”
김성균은 구레츠키와 반갑게 악수한 후 나를 소개했다. 그는 나와 악수하면서 폴란드어로 말했는데, 왜 나 같은 사람을 만나러 이곳까지 왔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라고 김성균은 속삭였다. 인터뷰 장소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나와 박운형은 구레츠키 양옆에 앉았고, 김성균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는 소프라노가 부르는 세 개의 노래 속에 주제가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모두 폴란드의 슬픈 역사와 연관된다. 이 곡의 창작 배경을 말해달라.
나의 첫 번째 질문을 박운형은 폴란드어로 옮겼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며 탁자를 내려다보던 구레츠키는 느리게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폴란드의 슬픈 역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폴란드는 주기적으로 침략당하고, 억압받고, 학대받았다. 1772년 독일이 폴란드 서쪽 지역을 점령한 후, 1793년 러시아가 동부를, 오스트리아가 남부를 점령했으며, 1795년에는 국가 전체가 점령당˙했다. 낭만주의가 절정을 이루었던 1830년경, 유럽 전여을 흽쓴 집단 혁명운동의 열기에 자극받아 폴란드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폴란드어가 금지되었고, 문화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혁명주의자들의 생애는 추방과 처형, 망명으로 점철되었다. 종교와 혁명이 융합했으며, 고뇌가 사상이 되었다. 메시아주의*에 사로잡혀 성스러운 폴란드, 부활이라는 말들이 일상용어가 되었다. 이 모든 곳에 비통과 기아, 고문과 죽음이 있었다.”
그는 흰머리를 쓸어 올리며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2차 대전이라는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곳이 폴란드다. 나치의 전력은 폴란드 군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바르샤바가 폐허가 될 때까지 포격과 공습을 멈추지 않았다. 수만 명이 공습으로 죽었고, 집단 살해와 처형이 횡행했다. 이 처참한 역사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과거를 상기하는 것들이 지금도 도처에 산재해 있다. 혹시 폴란드의 뛰어난 연극 연출가 예르세이 그로토프스키를 아는가?”
뜻밖에도 그는 박운형을 폴란드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라는 그로토프스키에 대해 물었다. 안다고 하기에는 지식이 얇고, 모른다고 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나의 표정을 살피던 박운형은 구레츠키에게 무어라고 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기자가 그로토프스키를 잘 알고 있다니 무척 반갑다. 그의 뛰어난 작품 「아크로폴리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무대를 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언제나 슬픔의 강이 흐른다. 그 강의 심연에 아우슈비츠가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강의 심연을 드러내는 예술의 고통스러운 몸짓이다.”
그의 눈가에 바늘 같은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창작이란 자유에 대한 사랑의 행위다. 그리고 사랑이란 신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인간은 언제나 사랑의 결핍에 시달렸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로토프스키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통해 신성을 추구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곳에 흩어져 있는 게슈타포 수용소를 보며 자랐다. 수용소에 갇힌 어린 소녀가 벽에 새긴 글을 보라. 우는 어머니를 달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자신들을 버리지 말라고 기도하고 있다. 성십자가의 탄식과 폴란드의 민요 속에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통절한 슬픔
이 서려 있다. 이들의 눈물이 바로 슬픔의 강이다. 「슬픔의 노래」는 슬픔의 강이 흐르는 소리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며, 새로운 슬픔들이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 과거의 슬픔보다 현재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나의 질문에 그는 빙긋 웃었다.
“흐르는 강을 자를 수 있다면 당신의 말이 옳다. 하지만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은 강이 아니다. 과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흘러들어 간다.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을 보라.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을 인종의 문제라 생각하는가? 천만에. 그것은 욕망의 비곗덩어리로 숨 쉬고 있는 인간의 문제다. 과거의 슬픔은 곧 현재와 미래의 슬픔이다. 다만 그 슬픔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슬픔의 강변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가란……”
지나가던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형벌이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한다. 축복과 형벌은 빛과 어둠의 관계다. 예술가는 축복보다 형벌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 형벌을 견뎌야 한다. 견디지 못하는 자는 단언하건대 예술가가 아니다.”
구레츠키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떴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른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볼 수 있는 자다. 그의 눈은 강의 흐름을 본다. 예술가는 들을 수 있는 자다. 그의 귀는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예술가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보이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하는 자다.”
그 뒤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그는 성실하게 답변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한 시간 반이 넘어서자 그는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끝맺음을 해야 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나의 물음에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때 나는 아방가르드*의 진창 속에 빠져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 혼돈 속에서 살마왔고, 혼돈의 공포에 눈이 멀어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빛은 슬픔의 강 너머에 있다. 이제 내가 당신들한테 질문하고 싶다.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너는가?”
택시를 대절한 우리는 세 시 이십 분 카토비체를 출발, 아우슈비츠를 향했다.
“구레츠키 그 영감 운형이와 텔레파시가 통하는 모양이야.”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히 김성균을 보았다.
“박운형이 친구가 미국에서 본 것이 그로토프스키의 「아크로폴리스」였어요. 그 연극에 홀딱 빠져…….”
박운형의 침울한 표정 때문인지 김성균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구레츠키와의 인터뷰 때도 박운형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묻기가 좀 무엇했다.
카토비체를 출발할 때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아우슈비츠에 도착할 무렵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여기 올 때마다 날씨가 안 좋았는데 오늘 또 그러네.”
민영수의 중얼거림에 김성균은 차창 밖 하늘을 쳐다보았다.
“귀신이 있어 그런가.”
“귀신은 무슨…….”
차는 철도 건널목에 멈추었다. 기차가 지나갈 모양이었다. 길 연변에 있는 무덤 하나가 눈에 띄었다. 화색 돌로 만든 십자가 모양의 무덤이었는데, 작고 앙상한 예수상 밑에 붉은 꽃이 있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지은 것은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친위대 대장 카를 프리치가 첫 번째 수감자들 앞에서 한 연설은 의미심장하지요. 유태인은 2주일 이상 살 권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성직자는 1개월, 그 나머지는 3개월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독일의 소련 침공 후 포로들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짐에 따라 수용소 시설이 확대되었어요. 그 후 소련군 포로들이 계속 죽어가는 반면 대규모 포로 유입이 없자 나치는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소로 아우슈비츠를 선택한 것입니다.”
택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것은 세 시 오십 분경이었다. 수용소 앞 빈터에 관광버스들이 여러 대 서 있었다. 김성균은 택시기사에게 다섯 시경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난 여기 있을게.”
박운형이 김성균을 보며 말했다. 불편한 데가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러 번 들어가 본 곳이라 내키지 않을 따름이에요.”
“사실 저도 그래요. 키에슬로프스키와 다녀오세요.”
김성균은 민영수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운형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에요.”
민영수가 적 벽돌색 건물의 서비스 센터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왜요?”
“아우슈비츠를 무척 싫어해요. 폴란드 방문자들 거의 대부분은 이곳에 오고 싶어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운형이는 핑계를 만들어 피해왔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집요하게 피해왔지요. 그런데 오늘은 바로 코 앞에까지 왔으니 대단한 일 이죠.”
“여기 오는 걸 왜 싫어하죠?”
“아우슈비츠를 한두 번 와본 이는 다시 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풍경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박운형 씨가 폴란드에 온 것은 그로토프스키 연극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저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 친구 폴란드 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남들이 한 시간 연습하면 그 친군 아마 열 시간 했을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무대에 설 수 있었지요. 아, 저 사진 보세요. 제가 처음 저 사진을 봤을 때 가슴이 철렁 했지요.”
그가 가리킨 것은 어두운 굴속 같은 곳에서 시체들이 뒹굴고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끔찍하군요.”
“위쪽의 하얀 빛이 어떻게 보입니까?”
“작고 희미한 걸로 보아 촛불의 빛 같군요.”
“저 작은 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하지요.”
“민 형은 무슨 상상을 하셨습니까?”
“기도하는 이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희미한 불 아래서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눈물에 짖은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덤불 속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작은 공이 오버랩됩니다.* 소녀가 잃어버린 공이지요.”
“영화감독다운 상상이군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섯 시 이십 분, 아우슈비츠를 출발한 차는 크라쿠프를 향했다.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겨 오기 전 오랫동안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는 2차 대전 중에도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였다.
“크라쿠프는 폴란드 왕국이 가장 번영했던 야기에우워 왕조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보헤미아의 프라하, 오스트리아의 빈과 함께 중앙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지요. 크라쿠프로 들어간다는 것은 옛 폴란드 왕조의 전통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 보셨어요? 미국의 탁월한 상업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말이에요.”
운전석 옆에 앉은 김성균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봤습니다. 재미있던데요.”
“그 영화의 촬영지가 크라쿠프예요.”
“아, 그렇군요. 쉰들러가 크라쿠프 유대인 거주 지역 에서…….”
“지금 크라쿠프에서는 쉰들러 투어라는 관광이 성업 중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게토⁕를 비롯, 촬영 현장을 답사하는 관광인데, 미국인과 독일인들에게 특히 인기라고 해요. 영화의 위력, 대단하죠.”
“할리우드 자본의 위력이지.”
민영수의 퉁명스러운 말에 김성균은 미소를 지었다.
“저 친구, 할리우드 영화라면 진저리를 쳐요. 한마디로 천박한 상업주의라는 거죠. 하지만 세계는 바야흐로 천박한 상업주의가 날개를 치고 있지요. 싫든 좋든 그 날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요.”
크라쿠프의 고색창연한 모습은 폴란드의 어두운 회색 건물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깊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고딕 양식의 성마리아 교회, 코페르니쿠스가 다녔다는 야기에우워 대학, 비스와 강변 언덕에 위치한 바벨 성 이 특히 아름다웠다. 저녁은 도시의 중심지이자 관광 코스로 빼놓을 수 없다는 중앙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했다. 음식은 입에 맞았고, 붉은 포도주가 달착지근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기차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바르샤바행 막차 시간은 여덟 시 십오 분이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일어나 크라쿠프역을 향했다. 나는 터벅터벅 걷고 있는 박운형을 힐끗 보았다. 크라쿠프에서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면서부터 시작된 침묵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기차는 여덟 시 십오 분 정각에 출발했다. 창밖은 깜깜했고, 모두들 말이 없었다. 가장 쾌활한 김성균마저 입을 다물었다. 역무원이 표를 검사하고 나간 지 얼마 안 돼 나는 포도주병을 땄다. 목이 마른데다 무거운 침묵이 부담스러 웠다.
“아우슈비츠 어땠어요?”
김성균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글쎄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어둠 속에 무엇이 떠오르고 있었다. 종이학이었다.
수용소 11블록이 죽음의 동(棟)이라 불리는 것은 나치가 한꺼번에 2,000명을 독살시킨 곳이기 때문이었다. 치클론 B*라는 가스가 분사되면 사람들은 철창과 벽을 쥐어뜯다가 피가 나도록 가슴을 헤집으며 죽어간다. 가스실 옆에는 시체 소각장이 있다. 하지만 그냥 소각하지 않는다. 살갗은 전등갓으로, 몸의 기름은 비누 재료로, 뼈를 빻은 가루는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시체 소각실은 어둡고 습했다.
“여기 에서만 7만 명이 화장되었대요.”
민영수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몸 안으로 냄새가 파고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냄새를 나는 죽음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죽음의 공간에서 죽음의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검은 벽이 등에 닿았다. 차갑고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몸이 떨렸다. 그때 내 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따뜻한 색깔이었다. 지하의 공간에는 색이 없었다. 어둠을 밝히는 빛마저 음산하고 차가웠다. 환각이라고 생각한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따뜻한 색깔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것은 종이학이었다. 검은 쇠판으로 된 시체 소각로 위에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종이학들이 날개를 펴고 사뿐히 앉아 있었다.
“이것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관광객들이 갖다 놓은 거예요. 명복을 기원하는 마음의 표현이겠지요.”
그 종이학이 달리는 열차 창밖의 어둠 속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왜 그들은 유대인을 그렇게 악착스럽게 죽였을까요? 그렇게 하면 한 종족이 멸종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까요?”
나는 어둠에서 눈을 때며 물었다.
“역사의 어느 페이지를 보더라도 대학살의 피와 마주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그 참혹한 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학살은 그전의 학살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광포와 격정이 아니라 과학에 의해 이루어진 치밀하고 냉정한 학살이었지요. 아우슈비츠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새로운 물음을 요구한다고 학자들이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물음 앞에서 가해자가 독일인이고 피해자가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구분을 담는다면 표피적 의미밖에 도출할 수 없다고 봐요.”
민영수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나치의 학살을 신성의 침범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신성의 침범?”
나는 민영수의 말을 되뇌었다.
“신성이란 신의 영역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할 때 피가 강물처럼 흘렀지요.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권력입니다. 고대의 왕은 신의 자손으로 생각했고, 신의 자손은 인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그들의 신 아누*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강한 신이 약한 신을 삼키는 것이 권력의 법칙입니다. 전쟁이란 권력의 아귀다툼이지요. 문제는 권력의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허기가 지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왕권신수설*에 빠진 권력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 유대인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기대면 창조의 끈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하느님입니다. 히틀러는 그 창조의 끈을 스스로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 논리대로라면 지금은 신성을 침범하는 자가 없겠군. 그런 개념의 권력자는 거의 사라졌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다? 지금 20세기 대명천지에 누가 신처럼 전지전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나?”
“자본이지.”
“자본이라……”
“자본의 속성이 뭔지 아나?”
“글쎄…….”
“운동이야.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 그 운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증식이지. 증식이야말로 권력의 욕망이며 존재법칙이야. 권력은 신민을 삼킴으로써 커지고, 자본은 이윤을 삼킴으로써 커져. 물리의 기본 법칙처럼 운동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증식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 흔히 오늘날 셰계가 가까워졌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자본의 운동 속도가 빨라졌다는 뜻이야. 그런데 잘 알다시피 인간이 자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간을 움직이고 있지. 이 자본의 운동 속에는 아우슈비츠처럼 치밀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어. 인간의 온갖 지식들이 자본의 운동을 위해 바쳐지고 있으니 말이야.”
“뭐가 그렇게 복잡해.”
김성균이 빈 잔을 민영수에게 건네며 투덜거렸다.
“지루해?”
“나는 자네의 장광설에 습관이 되어 괜찮지만 유 기자님이 지루하실 것 같아…….”
“전 재미있는데요. 정말입니다. 다음 말이 궁금하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허 참, 아무튼 그 말씀 믿고 계속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온갖 지식이 자본의 운동을 위해 바쳐지고 있다고 하셨죠.”
“아, 그렇지요.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 영역이 없습니다. 증식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집어삼킵니다. 인간의 몸이든 꿈이든 영혼이든 가리는 법이 없습니다. 아귀처럼 닥치는 대로 삼키지요.”
“그렇게 증식을 거듭한 자본이 마침내 신의 영역까지 침범했단 말이군.”
“내 생각은 그래. 인간이란 존재는 생명계의 순환에서 한 고리일 뿐이야. 이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을 창조한 밑바탕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끊어짐이 없는 섬세한 고리 속에서만 생명 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간은 이 순환의 고리를 흔들기 시작했어. 하지만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파괴할 수 없지. 왜냐하면 그것은 신의 영역이니까.”
“자네의 말을 들으면 자본과 인간이 분리된 느낌이 드는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자본은 인간의 정신을 생으로 삼킬 수 없어. 그것을 물질로 변화시킨 후 삼키지.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이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물질화되고 있는 거지.”
“인간의 정신이 하염없이 자본의 배 속으로 들어가는 꼴이구먼. 자네가 할리우드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이제 확실히 알겠군.”
“결국 자본이라는 괴물은 생명계의 순환 고리를 파괴함으로써 신성을 삼키는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해. 아우슈비츠는 신성의 찬탈을 짧은 시간과 한정된 공간 속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자본은 전 세계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신성의 살 속으로 칼을 집어넣고 있지.”
“자네 말에 따르면 인간이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군.”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겠지.”
“신이 인간을 구원한다?”
“아직도 신성은 우리 주위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신성한 숲이라 부르지. 우리들이 그 숲을 갈망하는 한 숲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어. 물질화되지 않은 꿈과 영혼은 신성한 숲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불어넣고, 신성한 숲은 다시 우리들에게 맑은 산소를 공급한다면, 누가 아나? 신성한 숲이 자본의 아귀적 욕망을 이겨낼는지.”
“앞으로 자네가 만드는 영화 속에 맑은 산소를 담뿍 넣게나. 그런데 저 친군 자네의 명강의를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김성균은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박운형을 가리켰다.
“질문 하나 안 하면서 술은 혼자 다 마셔.”
그랬다.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사이 박운형은 묵묵히 술만 들이켰다.
예정 시간보다 늦은 열한 시 반경 기차는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했다. 그동안 마신 술이 포도주 네 병과 독일산 브랜디 두 병으로, 모두들 얼근히 취해 있었다. 플랫폼을 거쳐 역사(驛舍)를 나왔다. 걸음걸이가 쓸쓸해 보였다. 얼굴에도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아우슈비츠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서일까. 나는 둘 다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가는 걸 싫어했다. 나 때문에 할 수 없이 따라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같은 말을 하는 친구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을 터였다.
“한잔 더 하고 갑시다.”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했다.
“피곤하실 텐데…….”
“술이 어중간히 취하면 잠이 잘 안 와요.”
김성균은 밝은 표정으로 민영수와 박운형을 보았다. 민영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운형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일행 중 사분의 삼이 찬성하니까 주막으로 갑시다.”
“주막이라니? 여기가 충청도로 보이는 모양이지.”
민영수의 말에 김성균은 씨익 웃으며 앞장서 걸었다.
김성균이 안내한 술집은 무척 작았다. 실내장식은 투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순했고, 천장이 낮아 다락방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서인지 손님이 몇 안 되었다. 그가 주막으로 가자고 했을 때 그저 재미있는 표현이거니 했는데, 술집을 보니 꽤 적절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택시를 타고 바르샤바 시내를 벗어나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단골인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늙수그레한 주인 남자는 두 팔로 김성균을 껴안으며 빠른 폴란드 말을 쏟아냈다.
“이 술집 이름 뭔지 아십니까?”
김성균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글쎄, 간판은 보았지만 영어가 아니라서……”
“집시입니다.”
“집시라·…‥ 이름이 좋군요. 낭만적이기도 하고.”
“이 집 주인이 집시입니다.”
“집시도 술집을 하나 보죠.”
“달빛과 신화 속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는 집시의 유랑은 옛날 말입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정착해서 살고 있지요. 제가 굳이 이 술집으로 온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술값이 쌉니다. 둘째, 집시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셋째, 이것이 제일 중요한 건데,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올 나이트 집이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정이 넘으면 주인은 퇴근합니다. 열쇠를 저에게 맡긴 후.”
“술값 계산은 어떻게 합니까?”
“제 신용으로 하지요.”
그러면서 김성균은 벙긋 웃었다. 우리는 섞어 마시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도주를 주문했다. 주인 남자는 우리들에게 일일이 술을 한 잔씩 따랐다. 김성균은 나를 특히 길게 소개했는데, 그는 놀란 얼굴로 내 손을 꽉 잡았다. 그가 돌아가자 나는 김성균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했느냐고 물었다.
“주인의 집시 노래를 듣기 위해 먼 한국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김성균은 미소를 흘리며 이제 주인의 서비스가 기가 막힐 것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 희생자 중 집시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요?”
“국가 개념을 강조하는 나라일수록 집시를 싫어합니다. 민족이니 국경이니 하는 개념을 초월한 집단이니까요. 집시는 역사가 없고 나라가 없는 유일한 종족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공동체였지요. 집시들끼리 확인되는 유일한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종족이라는 말 속에서 으뜸 되는 개념은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집 시 공동체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재합니다. 씨를 뿌리는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부재하는 집단. 얼마나 자유롭게 느껴집니까? 하지만 규격화된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규격의 파괴가 두렵기 때문이죠.”
“나치가 싫어할 수밖에 없었군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녀가 계산을 치르고 나갔다. 이제 술집은 우리 뿐이었다.
“집시들은 노래할 때 혼신을 다하지요. 영혼 전체로 노래를 합니다. 입 안 가득 피 냄새가 날 정도로.”
박운형이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술 탓인지 말이 조금 느릿해지고 어눌했다. 나는 그가 지나치게 마신다고 생각했으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이상할 정도로 술을 탐하고 있었다.
“입 안에 피 냄새나는 것을 느껴보았습니까?”
“난 노래 부를 줄 몰라요. 음치다 보니 피 냄새 대신 침 마르는 느낌은 들죠.”
“유 기자님의 노래는 소설 아닙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나는 당황했다. 내가 그에게 소설 쓴다는 얘기를 했던가? 그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낯선 상대에게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었다. 오히려 숨기는 편이었다. 그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거북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에게는 소설가라 하면 특별한 사람인 양 다른 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경우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박운형은 부담을 넘어서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아, 제가 이 친구한테 유 기자님이 소설가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유 기자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분한테 들었지요. 특별히 신경을 쓰라는 말과 함께요.”
김성균이 조심스럽게 대화 속으로 들어왔다.
“허허, 특별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과장되게 웃었다.
“저기를 좀 보세요. 주인의 서비스가 시작되었답니다.”
바이올린을 든 주인 남자가 원형 무대 위로 오르고 있었다. 그는 잠시 현을 고른 후 정중히 인사했다. 우리들은 박수를 쳤고, 그는 활을 들었다. 가냘프고 섬세한 바이올린 소리가 바람에 떠는 꽃잎처럼 일어섰다. 감미롭고 애수에 찬 선율이었다. 취기와 이국의 서정 때문일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다. 주인 남자는 무대에서 내려와 김성균에 게 귓속말을 했다.
“같이 어울리고 싶지만 지금 집으로 들어가야 한대요. 열쇠를 맡길테니 마음껏 마시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작별의 악수를 했다. 집시의 손은 따뜻했다. 그가 나간 후 우리들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음악이 남긴 여운 때문인지 분위기가 어두웠다.
“영화 만드는 일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나는 민영수에게 잔을 권하며 말을 걸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언어와 비슷한 구조니까요.”
“그런가요?”
“문장이 연결되어 소설이 이루어지듯 수많은 숏들이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영화입니다. 문법적 배열을 통해야만 비로소 존재하는 의사소통의 한 형식이지요. 영화를 이해하고 해독하는 능력이 언어 해독 능력과 흡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와 언어의 유사성은 근본적입니다. 하지만 언어에 비해 영화의 역사는 엄청나게 짧습니다.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이니까요.”
“역사가 짧은 만큼 발전의 가능성은 더 크겠군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영화만이 갖는 특성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예술에 있어서 사조(思潮)란 세계의 변화와 인간의 욕구에 대응하는 정신의 어떤 형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시간입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꽃이 지는 것 역시 시간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영화사를 보면 시간의 유장한 흐름이 없습니다. 발달된 기술이 사조의 변화를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온갖 첨단적 기법이 정신을 앞질러 가는 형국이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기법들이 상업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천박한 자본의 생리가 영화의 정신을 압도하고 있지요.”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를 싫어하시는군요.”
나의 말에 민영수는 멋쩍게 웃었다.
“제 말을 보편적 견해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영화에 대한 저의 개인적 생각일 뿐이니까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세 시가 넘어 있었다. 포도주병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몇 병인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눈앞의 사물들이 아득해 보였다. 박운형이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화장실 가는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원형 무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힘겹게 무대로 올라선 그는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여러분, 가난한 연극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사회자 같은 그의 말투가 생소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폴란드 실험 연극의 선구자 예지 그로토프스키가 창조한 말입니다. 부유한 연극과 대립되는 이 말 속에는 예사롭지 않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성서』에서 가난, 궁핍이란 모든 외형적인 것의 버림을 뜻한다고 그로토프스키는 말했습니다.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벗겨내는 것, 살을 깎아 뼈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가난한 연극이 갖고 있는 보석입니다. 그가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고통의 발견입니다. 그것을 발견함으로써 관객과 살아 있는 교류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는 배우가 되어 여러분과 살아 있는 교류를 가지 고자 합니다.”
“저 녀석은 술만 취하면 엉뚱한 짓을 한단 말이야.”
김성균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그로토프스키는 말했습니다. 그대가 인간임을 보여주면 나는 그대에게 신을 보여주리라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지금 나는 배우입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말은 현실 그 자체입니다. 배우의 몸속에 만물이 숨어 있으며, 말은 만물을 끄집어내는 도구이자 만물 자체입니다. 배우의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며,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합니다. 시간을 뛰어넘으며 세계의 고통을 번역합니다. 환상을 현실로 만들며, 현실을 환상으로 조각합니다.”
박운형의 말투가 변하고 있었다. 마치 파도를 타듯 율동을 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것은 미묘한 울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대는 오월의 봄날입니다.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고, 대지는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오월의 봄날. 나는 무의식중에 그 말을 되뇌었다. 김성균과 민영수는 꼼짝도 않고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봄날 속에서 얼룩무늬 군복의 군인들을 가득 실은 차가 질주하고 있습니다. 전남대 정문, 금남로,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 아세아극장 앞에서 차가 멈추었습니다.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을 쓴 군인들은 차에서 내려 사 열 횡대로 섭니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그들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저 녀석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김성균은 민영수와 무대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눈의 붉은빛은 점차 깊고 짙어집니다. 그것은 징후입니다. 운명의 잔혹한 징후. 그 징후가 그들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납니다. 머리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무엇인가 몸을 가로지르며 질주합니다. 내장은 뒤집어지고, 피들은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으르렁거립니다. 눈은 불타오르는 듯하다가 흐릿해지고, 붉은 혀가 거무죽죽하게 되면서 고무처럼 늘어나고, 부글부글 끓는 정신은 아우성을 치며 바깥을 향한 탈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귀를 통해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박운형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살에 닿는 느낌이었다.
“무대는 아비규환입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소리, 두개골이 깨어지고 뼈가 바수어지는 소리. 대지는 입을 벌려 피를 받고, 빛은 잔혹의 중심에서 춤을 춥니다. 빛의 춤 속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두 손은 피에 젖어 있습니다. 무대는 일순간 정적에 잠기고,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습니다. 그는 낭자한 피 내음에 흠칫 놀랍니다. 가슴에 박힌 대겸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보았던 청년의 얼굴이 오버랩됩니다.”
숨을 깊이 들이켠 그는 휘어진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나는 이 백성이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날이 와서 대낮에 해가 꺼지고 백주에 땅이 컴컴해지거든 모두 내가 한 일인지 알아라. 순례절에도 통곡 소리 터지고, 모든 노래가 울음으로 바뀌리라.”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비통하고 격정적인 목소리 대신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무대를 휘감았다. 목소리가 너무 달라 무대 위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너희를 굶주리게 하였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너희의 이삭을 쭉정이로 만들었다. 너희의 동산과 포도원을 쑥밭으로 만들고, 무화과와 감람나무는 메뚜기가 먹어치우게 하였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이집트에서 한 것처럼 너희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보내고, 너희 아름다운 청년들을 칼로 죽였으며, 너희 말들이 약탈당하게 하고, 너희 진지는 썩어가는 시체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린 것처럼 너희 성들을 무너뜨려 너희를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게 했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목소리로는 인간을 질타하는 신의 역할을, 몸으로는 그 질타에 몸을 떠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친구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김성균의 걱정스러운 말에 민영수는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좀 더 지켜보자는 의사 표시였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 다마스커스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다마스커스를 벌하고야 말리라. 나 야훼가 선고한다. 가자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가자를 벌하고야 말리라. 나 야훼가 선고한다. 띠로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띠로를 벌하고야 말리라.”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손을 안으로 모으며 몸을 웅크렸다. 등이 활처럼 굽어지면서 등근 공의 모습이 되었는데, 오른쪽 팔이 천천히 올라와 허공에 비스듬히 섰다. 그와 동시에 무릎 속에 파묻힌 머리가 들렸다. 부릅뜬 두 눈과 벌어진 입술, 구겨지듯 뒤틀린 얼굴이 너무나 처참해 기괴해 보일 지경이었다. 저것이 연기라면 탁월한 연기였다.
“그만해!”
김성균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무대로 달려갔다.
“남들은 잘도 잊는데 너는 왜 잊지 못해! 이제 그만 잊어. 잊지 못하면 숨기고 있던지. 네 잘난 고통, 구경해주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김성균은 박운형의 멱살을 흔들며 외쳤다. 박운형의 몸은 속이 텅 빈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얼굴도 가면처럼 무표정했다. 김성균은 맥없이 손을 놓았고, 박운형은 두 번이나 넘어진 끝에 간신히 일어섰다. 서 있는 것이 힘드는지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휘청거리며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몇 발자국도 못 가 푹 쓰러졌다.
말없이 술을 들이켜던 김성균은 소파에서 자고 있는 박운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입을 꽉 다문 채 자고 있었다. 건너편 소파에는 민영수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유 기자님은 광주사태 때 어디 계셨습니까?”
“서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식은 광주에 있었나 봐요. 계엄군으로. 사람 몇을 죽인 것 같은데, 잘 안 잊혀지나 봅니다.”
“그렇겠지요.”
“언젠가 사노크에서 저 자식이 나오는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노크?”
“폴란드 국경도시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거예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사노크에는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나자 유대인 대부분이 학살되었습니다. 스탈린과 독일군의 부추김으로 폴란드인들도 많이 학살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 짓이었죠. 전쟁이 끝나자 거꾸로 우크라이나인들이 학살되었습니다. 폴란드인들이 복수를 한 것이죠.”
“비극의 땅이군요.”
“그곳에서 연극 페스티벌이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운형이가 소속된 극단도 참가해 도시 구경도 할 겸 해서 따라갔습니다. 4월이었는데,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그때 운형이가 출연한 연극 제목이 뭐였더라……”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이 잘 안 나는군요. 아무튼 내용이 좀 어려운 연극이었습니다. 게다가 배우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이해가 더 힘들었지요. 제가 폴란드 말에 익숙지 않은 데다 연극 대사라는 것이 듣기가 아주 고약해서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놓치는 말이 많았어요. 운형이는 진찰이라는 명목으로 수술대에 올라가 제복 입은 이들에게 고문 받다가 끝내 죽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가 고통을 받는 이유는 세계의 구원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의 고통을 통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작품의 주제였거든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구원이 그만큼 깊어진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니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산한 목소리와 고통을 견디는 숨소리, 울음과 비명뿐이었습니다. 술 더 하시겠어요?”
나는 대답 대신 빈 잔을 들었다.
“유 기자님 주량도 대단하시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벌써 곯아떨어졌습니다.”
정말이었다. 술이라는 것이 묘해서 간혹 한없이 들어갈 때가 있었다.
“연극 상연 시간은 사십오 분에서 오십 분가량이었습니다. 가톨릭 미사 시간이라고 하더군요. 연극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연극은 처음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전 운형이 만나러 무대 뒤편으로 갔지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극단 사람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몇 사람이 반나체 상태인 운형이 몸을 마사지하고 있었어요. 낯익은 배우가 나를 보더니 운형이가 깨어나지 않는다면서 걱정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두세 번 들은 후에야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어요. 연극은 운형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않으니 동료들이 모여들 수밖에요. 운형이의 몸이 뻣뻣이 굳어 있어 정말 죽은 게 아닌가, 생각했대요. 달려온 의사는 히스테리성 마비 혁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히스테리성 마비 현상이라면 노이로제*의 일종인 데……”
“정신이 간절히 원하면 육체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병이죠. 제 추측으론 운형이가 연극 속에서 타인에 의한 죽음을 갈망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인 자신의 행위에 대한 구원의 죽음이지요. 술이 다 떨어졌군요. 더 갖고 올까요?”
“이제 그만하죠. 졸리기 시작하는군요.”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세상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3
박운형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빨리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 아침 나눈 한참 망설인 끝에 그에게 전화했다. 내일이면 폴란드를 떠나야 했다. 그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었다. 박운형은 나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광주 이야길 듣고 싶으세요?”
두 번째 술병이 빌 무렵 박운형은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쓰시게요?”
“소설은 무슨…….”
나는 어물쩍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소설 이야기만 나오면 부끄러워하시는군요. 무엇 때문이죠?”
“……”
“광주 얘기 소설로 쓰신 적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 않던가요?”
대단히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부끄럽다는 게 어떤 의미죠?”
“광주를 소설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탁자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진실이란 형태가 없습니다. 이런 진실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예술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지요. 소설에서 도구란 진실의 형태에 닿기 위한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주를 소설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것은 광주가 곧 진실의 형태에 닿기 위한 다리가 되었다는 뜻이죠. 이 속에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부끄러움은 광주라는 다리를 진실의 형태가 아닌 다른 곳에 세워놓았을 때 비로소 제기되는 문제지요.”
“진실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갈수록 난감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어떤 기준이 아닐까요. 거짓이 끼여 있지 않은 정신이라고 할까……”
자신 없는 말투였다. 솔직히 나는 그의 질문에 답변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었고,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진실이라고 외쳤다. 진실이란 미로였다.
박운형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그늘은 술집 집시에서 그가 드러낸 고통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광주의 기억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시는 것 같더군요. 박 형도 역사의 희생자지요.”
박운형은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난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노크의 무대에서 박 형이 히스테리성 마비 증세를 일으킨 것은 죄의식의 결과가 아닌가요?”
나의 말에 그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정말 웃기시는군요. 작가 선생들이 너도나도 깃발처림 내걸고 있는 그놈의 진실이라는 것이 내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아십니까? 박제 같아요. 바짝 마른 박제 말이에요. 제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작가 선생들이 광주를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죽은 자들이 흘린 피의 의미, 그들의 눈물, 살아남은 자의 고뇌, 그리고 가해자의 잔인과 악몽과 죄의식 등등.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지요. 가해자 역시 희생자였다고. 왜? 권력에 눈먼 이들에게 이용되었으니까. 진실이 그렇게 단순한가요? 진실이 그렇게 일목요연하다면 세상은 참으로 명료하게 보이겠지요.”
갑자기 거칠어진 박운형의 어투가 곤혹스러웠다.
“저에 대해 이렇게 상상하시지 않았나요? 광주에서의 진압이 군인의 임무 수행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반역사적 살인이었다. 갈라진 배 속에서 튀어나온 창자, 두개골이 으깨진 시체, 손을 적시는 붉은 피. 그 살인의 기억, 그 피비린내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살인자는 죄의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희생자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꿈꾼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죽임을 당한 자, 총을 들고 시체를 내려보는 자가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 차갑게 누워있는 자를 꿈꿈으로써 죄의식의 수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사노크 무대에서 죽임을 당하는 자의 역할을 맡자 희생자로 변신하고픈 간절한 염원이 그를 죽음의 일시적 상태인 히스테리성 마비로 몰아넣었다. 어떻습니까?”
나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소설 역시 그렇게 쓰시겠지요. 물론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눈에는 진실로 보이지 않습니다. 저에게 광주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80년 5월, 저는 군인으로서 광주로 들어갔고, 적과의 대치라는 극한 상황과 맞부딪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마술을 부렸지요. 가해자는 악이었고, 피해자는 선이었습니다. 지독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저는 세상을 허깨비처럼 떠돌았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갔지요. 몇 년간 뉴욕의 연극 학교에 다녔습니다. 허름한 창고 극장의 무대에 처음 선 후 여기저기 출연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대에서도 허깨비였습니다. 몸속의 에너지를 모을 수가 없으니 허깨비가 될 수밖에요. 그러던 어느 날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격정을 잊지 못합니다.”
회상이 그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무대의 벽은 검은색이었습니다. 무대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플랫폼이 있었고, 그 위에 머리가 없는 인형, 수레, 쇠 부스러기 더미가 보였습니다. 극장 안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침묵이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 배우들이 무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움푹 들어간 눈동자, 얼어붙은 웃음, 앙상한 볼. 그들의 얼굴은 죽음의 가면이었습니다. 그 죽음의 가면들이 수직의 전선에 쇠 부스러기를 매달고 망치질을 하더 군요. 아크로폴리스를 짓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아크로폴리스는 시체 소각실이었습니다. 그것을 짓는 동안 슬라브인의 구슬픈 노래, 라틴어 성가, 히브리인의 통곡의 노래가 흘러나왔지요.”
그의 목소리는 음울했다.
“저는 무대로 뛰어들고픈 충동을 느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우슈비츠의 야만, 아우슈비츠의 잔혹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광주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의 소산이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유 기자님의 상상이지요.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머지않아 깨달았습니다.”
텅 빈 술병을 본 웨이터가 술을 더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은 세계를 모방하는 예술이 아닙니다. 세계를 뒤흔들고, 세계를 꿰뚫고, 세계를 초월함으로써 생명의 원천을 깨우는 것이 연극입니다. 배우에게 무대가 가공의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혼의 황금 불빛이 타오르는, 움직이고 헐떡이고 격동하는 세계입니다. 배우는 이런 세계를 견뎌야 합니다. 견디지 못하면 세계는 입을 벌려 그를 삼킵니다. 배우에게 가장 끔찍스런 일이지요. 무대에서 견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오이디푸스1가 저주받은 운명을 탄식하며 스스로 두 눈을 찌를 때 배우는 눈이 찔리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이 아픔의 견딤이 무대에서의 견딤입니다. 아픔이 생생하면 생생할수록 세계는 그를 더 깊숙이 받아들입니다. 아픔이 얼굴의 거죽에만 머물 때 그는 더 이상 오이디푸스가 아닙니다. 오이디푸스가 아닌 그가 세계에 의해 거부당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뉴욕의 무대에서 저는 끊임없이 거부당했습니다. 무대를 견디는 힘이 없었던 거지요. 무대는 저를 향해 입을 벌렸고, 저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을 본 것은 그때였습니다. 저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연극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저의 내부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생명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이 저의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어떤 생명을 깨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폴란드로 온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떤 생명의 기척이 저를 그로토프스키의 연극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조금 더 들으시면 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스산한 가을날이었습니다. 저는 무대 위에서 동료들과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복을 입은 세 사내가 철침대 위에 묶인 한 사내를 고문하는 내용의 연극이었습니다. 저는 제복 입는 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통받는 이는 역사의 상처로 피 흘리는 폴란드, 혹은 가톨릭의 신성한 수난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박운형이 히스테리성 마비를 일으켰다는 사노크의 무대가 떠올랐다.
“신성한 수난이라면 십자가적 의미를 뜻합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구원은 개인의 속죄를 필요로 한다는 폴란드 낭만주의 연극이었으니까요. 고통받는 이는 자기희생으로 악을 끊을 수 있다고 믿는 투명한 정신의 인간입니다. 제복 입은 자들은 그를 모욕하고 학대하다가 마침내 살해합니다. 무대의 조명이 고통 받는 이의 얼굴로 집중되는 것은, 고통을 신성으로 승화하는 배우의 얼굴 연기가 연극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수난자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의 소리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저의 내부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체를 약간 굽히면서 나를 응시했다.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몸의 내부에서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 번 꿈틀거릴 때마다 몸 전체가 전율에 휩싸였습니다. 짐승처럼 몸을 뒤척이며 위로 올라온 그것은 제 영혼을 움켜쥐었습니다. 그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늑대의 이빨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억의 섬광이 내부를 갈랐습니다. 칼로 사람의 몸을 찔러본 적 이 있습니까?”
돌연한 그의 물음에 나는 다소 당황하면서 없다고 했다.
“광주에서 전…… 그렇게…… 했습니다. 칼이 몸속으로 파고들 때 몸은 반항을 하지요. 죽음에 대한 반항 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경련이지요. 칼을 움켜쥔 손안에 가득한 경련은, 그 경련은, 뭐라고 할까요, 생명의 모든 에너지가 압축된 움직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한 인간의 생명이 손안에, 이 작은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죠. 마치 어떤 물질처럼. 그 물질은 돌멩이처럼 단단한 것이 아닙니다. 달걀처럼 으깨지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자기와 똑같은 한 생명을 그렇게 쥘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
입니다.”
그는 한기가 드는 듯 몸을 웅크렸다.
“몸의 깊숙한 어딘가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솟구치고 있었습니다. 제 손이 한 생명을 쥐었듯, 뜨거운 불덩이는 제 영혼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렇게 쥐어진 영혼은 물처럼 흘러내렸습니다. 흘러내린 영혼이 제 몸뚱이를 적실 때 전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입술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을 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 때문이었을까요? 고통을 불러일으키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연상시키는 기억을 억누름으로써 고통을 회피하는 본능적 활동 말입니다.”
“쾌감이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쾌감이었지요. 더구나 그것은 반역사적 폭력이었습니다. 죄의식의 칼날은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 칼날을 막기 위한 갑옷이 망각이었습니다.”
“그 갑옷을 무대 위에서 벗었군요.”
“망각이라는 갑옷을 벗는 순간 저는 제가 서 있는 곳이 무대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칭찬에 인색한 연출가로부터 연기가 정말 훌륭했다는 이례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후 무대에 설 때마다 저는 핏빛 쾌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죽이는 자의 연기를 할 때 쾌감은 저의 얼굴에 완벽한 가면을 씌워줍니다.”
“죽는 자의 역할은 제대로 못하였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자, 죽음을 당하는 자의 연기도 마찬가집니다. 왠지 아십니까? 가난한 연극은 언제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핵심은 고통의 넘어섬, 곧 희열입니다. 고통의 극점은 죽음이며, 죽음의 극점은 쾌감입니다. 제가 사노크의 무대에서 마비를 일으킨 것은 죽음의 희열 때문이었습니다. 그 희열이 죽음의 상태를 갈망한 것이지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뉴욕에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을 본 순간 왜 제가 무대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했는지. 힘 때문이었습니다. 무대에서 견딜 수 있는 힘 말입니다. 그로토프스키의 연극은 저의 내부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광주였습니다.”
“놀랍군요.”
나는 신음처럼 말했다.
“무대는 세계의 상징입니다. 그 상징을 몸을 통해 드러내는 존재가 배우입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온갖 옷을 다 입히지만, 무대는 그 옷을 벗기고 있습니다. 문명의 시선으로 보면 배우란 저주받은 존재지요.”
그의 두 손이 메마른 얼굴을 쓸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제 몸이 텅 비어 있음을 느낍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껍질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느낌이지요. 그럴 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멍하니 있거나 잠만 자지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채워지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행복하다든지, 아니면 불행하다든가……”
나는 질문을 해놓고도 그 유치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글쎄요.”
그는 흐릿하게 웃었다.
“어떤 사물이든 형태를 지배하는 맹목적인 힘이 있습니다. 사물이 그럴진대 인간은 더 그렇겠지요. 인간이란 존재 형태를 지배하는 힘, 운명에서 흘러나오는 보이지 않는 힘을 거역하는 힘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전 지금 운명의 손에 꽉 붙들려 있습니다. 그 완강한 손의 힘을 뚜렷이 느낍니다. 그것이 불행이든 아니든 저에게는 운명을 거역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운명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유일한 확신이지요.”
그는 일어설 채비를 했다.
“왜 아우슈비츠에 가는 걸 꺼려하셨죠?”
나는 궁금했던 것을 끄집어내었다. 그가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는 오히려 되묻고 있었다.
“카토비체 호텔에서 박 형에게 아우슈비츠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박 형은 무척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계속 침울해하셨고, 또……아우슈비츠까지 갔는데도 들어가지 않았지요. 김성균 씨도 남았습니다만, 그건 박 형 때문이었지요. 민영수 씨 얘기로는…….”
“유 기자님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두려움이라면?”
“자신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자신의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죠?”
“알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 두려움이야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종종 이런 의문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배우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인간입니다.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면 연기가 불가능합니다. 의사가 배를 갈라 환자의 내장을 들여다보듯 배우는 냉철한 눈으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봅니다. 깊숙이 감추어진 생명의 내부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의 바다를.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간이 축조하는 문명의 세계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모래 위의 집처럼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무섭고 뼈저리게 알게 되지요. 언젠가부터 아우슈비츠가, 그 어둡고 황폐한 풍경이……”
그는 말을 멈추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길고 마른 손이 창백했다.
“제 내부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가 두렵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박운형은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거리는 안개로 자욱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절문 하나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 잠깐만.”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말을 해놓고 보니 어색했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유 기자님 소설의 몫일 것 같은데요. 운명의 힘과 맞서는 사랑의 힘이 초점이 되겠지요. 유 기자님은 어떤 쪽을 택하실 겁니까? 대부분의 작가들은 사랑의 승리 쪽을 택하더군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상상이 갖고 있는 미덕인지도 모르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통해 위안을 얻고 있으니까요. 작가들은 왜 대부분 사랑의 승리를 택할까요? 저 자욱한 안개를 보십시오. 안개는 저렇게 사람들 사이로 흘러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손에 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들은 손에 쥘 수 있지요. 상상으로 말입니다. 구레츠키는 슬픔의 강 너머 빛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강을 어떻게 건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그는 돌아서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귓속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일어서고 있었다. 현악기의 한없이 낮은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이어 깊은 슬픔의 노래가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우는 신의 새여
그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오
신의 작은 꽃이여 ,
내 아이가 행복히 잠들 수 있도록
활짝 꽃을 피워주오
『현대문학』 485호(1995. 5); 『아늑한 길』 (문학과지성사 1995)
* 2006년 6월 작가가 부분 수정함
정찬(鄭贊)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 에 중편소설 「말의 탑」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말과 권력의 관계, 그리고 신성(神性)의 의미를 파고든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 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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