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을 짓는 마음
옛날 어느 마을에 구두쇠가 있었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사와 고리대금업을 한 덕에 엄청난 돈을 모으게 됐다. 재물이 흡족할 만큼 생기게 되자 이제는 일 년쯤 편히 쉬며 안락한 생활을 즐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돈 모으기를 중단하고 편히 쉬려고 하던 바로 그때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그의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구두쇠는 이제껏 죽을힘을 다해 돈 모으는데 만 자신의 시간을 썼기 때문에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억울했다. 구두쇠는 온갖 지혜를 짜내어 저승사자를 돌려보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구두쇠가 말했다.
“더도 말고 딱 사흘만 여유를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제껏 모은 재산의 3분의 1을 당신에게 떼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들은 체를 하지 않았다.
“정 그러시면 단 하루라도 여유를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3백만 냥이나 되는 내 재산을 몽땅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단 하루의 여유조차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구두쇠는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발 글 한 줄 쓸 시간이라도 주십시오.”
그러자 저승사자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구두쇠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어 얼른 혈서를 썼다.
‘사람들아,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 나는 3백만 냥을 갖고도 단 한 시간도 내 인생을 살지 못했다.’
돈을 모으느라 자신의 인생과 모든 즐거움을 희생하고 나니 구두쇠에게 남은 것은 회한뿐이었다.
이처럼 애써 돈을 모았다 한들 늙고 나면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빈 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이 구두쇠가 조금이라도 자신과 남을 위해 돈을 썼더라면 아마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돈과 인생을 맞바꾸려 했던 이 구두쇠의 얘기처럼 우리도 헛된 재물 욕심에만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삼 일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요. 백 년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 티끌과 같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았다 한들 그것은 삼일 닦은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남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풂을 행하는 것이 진정한 참삶이요, 또한 생사의 고해를 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수행이 보시행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이 보시란 자비로운 마음으로 조건 없이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며,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생활이 보시행인 것이다.
보시는 남을 기쁘게 하며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예전과 같지 않은 각박한 인심을 느끼게 된다.
콩 한 쪽이 생겨도 나누어 먹을 줄 알았던 우리 조상들의 훈훈한 인정미가 요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 같다.
재산은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어느 할머니가 김밥 장사를 해가며 평생 모은 수억 원의 돈을 대학교 장학기금으로 선뜻 내놓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제대로 고운 옷 한번 입지도, 맛난 음식 배부르게 한번 먹지도 않고 꼼꼼히 모은 돈을 진정 가치 있는 선행에 쓰고자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또 돈이 많은 재산가라 해서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우리에게 훈훈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얘기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와 같은 선행을 드러내지 않고 꾸준히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택시 기사 분들 중에는 얼마 되지도 않는 수입의 10분의 1을 꼭 떼 내어 남을 돕는 사람이 있고, 장애인을
무료로 태워주는 사람, 내게 요금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하루에 20분이라도 날마다 선행을 하는 갸륵하고,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내 마음은 행복해진다.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기에 우리가 모여 사는 이 세상이 깨끗해지고 선하게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의 탁해가는 물을 청정하게 정화시키는 정화수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이처럼 남에게 선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복을 짓는 일이다.
내 얘기를 하나 하겠다.
부산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는 내가 매일 아침마다 단골로 들르는 곳이 하나 있다. 자비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그랜드 호텔 안에 있는 목욕탕이다. 처음 간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하루는 돈 받는 창구에서 어느 직원이 나를 보더니 ‘목욕탕 사장의 지시’라고 하면서 스님한테는 특별히 목욕비를 반값으로 할인해서 받으라고 했다며 값을 깎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욕탕 사장이 직접 나를 보자고 했다. 사장은 자신이 불교 신자라고 소개하면서, 스님은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이니 반값도 필요 없고 아예 그냥 하시라는 거였다.
이런 친절을 받고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고마운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 탓에 5시 반이면 나는 어김없이 그 목욕탕으로 향하곤 했다.
그렇게 해오기를 3년째. 그동안몇 번 주인이 바뀌었지만 새로 오는 사람마다 우연하게도 모두가 불교 신자라 그전처럼 무료로 다닐 것을 내게 부탁하곤 했다. 그런데 사실로 말하자면 내 속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속담에 ‘벼룩도 낯짝이 있다.’라고 했거늘 그것도 한두 번이면 괜찮겠지만 매번 이렇듯 공짜 목욕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창구에 있는 아가씨 보기가 민망하고 탕 안의 비누 한 장도, 타월을 쓰는 것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이대로는 내가 불편해서 안 되겠다. 차라리 돈을 내고 떳떳이 다니는 것이 낫겠다.’싶은 마음에 여러 번 돈을 내려 했다. 그럴 때마다, “기왕 이렇게 해 오신 것이니 이대로 그냥 하십시오. 그래야 저희도 복을 짓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무색한 답변만 듣게 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좋은 기회가 생기게 됐다. 2년 전 주인이 호텔 직영으로 다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꼭 돈을 내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먹었지만 결국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일주일 전 마침 누가 나를 보자는 전갈이 왔다. 안 상무라고 불리는 그 호텔 총지배인이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를 왜 보자고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밀린 목욕 요금을 모두 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껏 밀린 요금을 모두 합산해서 내는 도리밖에 없지.’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실 그간 안 상무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도 고개가 수그러지고 웬지 주눅이 드는 나 자신을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 이번 기회에 나도 남들처럼 떳떳이 요금을 내고 다녀야겠다.’ 나는 다짐을 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다. 마침 안 상무는 사무실에서 혼자 있었다. 반기며 나를 자리에 앉게 한 뒤 그는, “스님, 제가 뵙자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간 목욕탕을 호텔서 직영으로 해오다 이번에 새로 대전서 주인이 오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나는 “염려 마십시오. 앞으론 제가 돈을 내고 다니지요.”라고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미안한 말을 꺼내기 어려워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스님, 그게 아닙니다. 실은 이번에 새로 오는 주인에게 제가 특별히 스님에 대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론 이 표를 창구에 내시면 됩니다.”
그가 정색을 하더니 전철표 같이 생긴 종이 한 장을 건네주는 것이다. “아닙니다. 앞으론 제가 돈을 내고 다니겠습니다. 이렇게 오래 거저 다니다보니 제 마음도 실은 불편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간곡하게 사정했다. “저도 현생에 복을 짓도록 스님, 좀 도와주십시오!”
그는 오히려 내게 사정을 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고마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고 말았다. ‘내 마음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것이 그를 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참자.’
요즘도 어쩌다 길에서 안 상무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는 왜 요새 자주 안 오시는가 묻는다. 그럴 때 내 대답은 ‘바빠서요, 죄송합니다.’하고 얼버무리게 된다.
사실 예전보다 더 바빠진 게 사실이지만, ‘자주 좀 오시라.’는 그의 말이 참으로 고맙다. 또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그토록 과분한 친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목욕물 보시를 받을 만한 진정한 스님인가? 그들의 기대에 부끄럽지 않게끔 앞으론 더욱 열심히 돌아다니고 이 육신 아끼지 말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해야겠다.
목욕탕에 갈 적마다 몸과 마음의 대를 말끔히 씻게 될 뿐만 아니라 남들 앞에서 한층 낮아지는 겸손함을 배운다. 또 이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수행에 정진하려는 마음이 된다.
그러므로 목욕탕에 가는 시간은 내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