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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사회에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삶의 발달단계를 거쳐 가는 각 연령층에 있는 모든 이가 외로움과 씨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로움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개인적·사회적 문제다. 가령 핵가족화 되는 사회 속에서 부부의 별거나 이혼 혹은 사별로 인해 특히 40-50대 남성의 고독사 사례가 늘고 있다. 기독교인 중에도 별거와 이혼이 늘면서 가족 간 단절이 일어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외로움과 소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근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로 인해 현장 예배가 회복됐어도 수평적 코이노니아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교인들이 많다. 특히 옆자리에 앉아 있는 교인이 같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 ‘코이노니아가 이뤄지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기가 어렵다. 여러 소그룹 모임이 있지만 본연적으로 느끼는 외로움을 해소하기란 어려운 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다.
사회학자들은 21세기가 가장 외로움을 호소하는 시대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외로움 유행병’(loneliness epidemic)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 경제와 국가 간의 왕래를 거의 마비시킬 정도로 영향을 끼쳤지만, 외로움이라는 팬데믹은 점점 심각해지며 고질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도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증상으로 지적한 것 중에서 첫 번째 증상인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외로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병리적인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한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 사람의 모습에서 점점 팽배해지고 있다. 특히 MZ세대들은 뚜렷하게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여 준다. 결혼율과 출산율의 급격한 감소는 어려운 경제적인 형편과 함께 보편화되는 개인주의적인 가치관과 밀접한 상관관계성을 보여 준다.
이런 시대적 정황 속에 살아가면서 외로움과 씨름하는 현대 한국의 기독교인과 일반인을 위해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목회적인 방안을 제안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외로움이 가진 양면성,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에서 언급한 다음 목회적 관점에서 방안을 제시하겠다.
외로움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성찰
하나님은 천지창조 과정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시고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셨다. 아담이 혼자 있는 모습을 좋지 않게 보셨다는 점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될 때,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영적 존재가 될 때 인간다움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현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상호관계성에 대해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상호 관계의 중요성 이해에 신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다.
인간은 연결 짓기와 구별 짓기를 잘할 때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연결된 존재로서 ‘우리’라는 경험과 구별된 존재로서 ‘나’라는 경험에 균형이 있을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이 균형감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가족과의 관계에서조차 구별 짓기의 기능이 균형 있게 작용해야 각 개인은 연결된 존재이자 독립된 존재로서 살 수 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용해’(fusion)가 될 정도로 개인의 ‘경계선’(boundary)이 흐려지거나 없어지면 ‘자기 개별화’(self-differentiation)의 수준이 매우 낮은 역기능적인 가족 시스템으로 전락한다.
이와 반대로 다른 가족 구성원과 지나치게 구별 짓기를 하면 ‘감정적 단절’(emotional cut-off)이 발생해서 가족 간 정서적 교류나 의사소통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역기능적인 시스템 속에서 사는 가족 구성원들은 필요한 의존 욕구가 거의 채워지지 않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고립과 소외, 그리고 외로움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이런 가족 시스템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과도한 의존 욕구와 씨름해야 하고 동반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갈망과 욕구가 있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본성적인 욕구는 죄로 인해 왜곡돼 경험되며 표현된다. 이 욕구가 하나님이 아닌 대상들로부터 채워지는 것을 심리학적으로는 ‘중독’이라고 규명하며 신학적으로는 ‘우상숭배’(idolatry)라고 규정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우상은 인간의 관계 욕구를 일시적, 잠정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모든 중독 현상에는 이런 역동성이 존재한다. 각종 중독은 외로움의 고통을 잠정적으로 경감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하나님 또는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 경험이 이뤄지지 않을 때 인간은 유사한 관계 경험을 대신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 마치 꿩 대신 닭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어느 정도 ‘연결 짓기’를 하며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애완동물과 더불어 사는 것, 자연을 벗삼아 지내는 것도 외로움을 달래 주는 역할을 한다.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외로움은 구원과 영생의 삶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고난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처럼 어떤 이들에게는 외로움은 고통을 통해 교회와 연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녀가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핵심 이슈를 해결해 주셨다.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 했던 메시아와의 참 만남과 치유의 순간이 찾아왔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원한 생수이신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그들에게 자신 있게 전함으로써 그들과의 관계에서도 소통과 회복이 일어나는 이차적인 유익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씨름해 왔던 근본적인 외로움은 예수님께 남편이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하게 했다. 마침내 그녀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경험을 하는 존재로 변화됐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외로움과 친숙한 사람이었다. 비록 세상에서 그는 한 부자의 대문 밖에서 피부병과 씨름하는 거지의 삶을 살았고,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적인 기여나 관계를 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았지만 구원받는 자가 됐다. 나사로는 이름이 기억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표상하며 부자는 익명으로 음부에서 계속 고통을 주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표상한다. 기독교인은 이 땅에서 나그네이자 외국인으로 살면서 세상 속에 뿌리내릴 수 없는 본연적인 외로움과 씨름하는 자다. 그러나 이런 외로움은 가치가 있다. 바울이 고통의 의미를 표현한 본문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외로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외로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로 표현할 만큼 성도의 외로움은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sublimation)되고 의미 있는 경험으로 재해석(reframing)될 수 있다.
욥은 고통 속에서 외로움을 호소했다. 그를 찾아온 세 친구들과 그의 아내조차 그의 고난과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외로움과 극심한 고독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대면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외로움과 고독 너머에서 펼쳐진 새로운 삶의 장(chapter)을 경험한 신앙의 선배로서 외로움과 씨름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 신앙의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는 실존적인 존재다. 죽음의 자리에는 배우자도 자식도 동행할 수 없다. 1인 가구가 많아지는 현대사회가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면, 외로움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다 ‘잠정적 관계’며 의지하며 사랑하는 대상들조차 다 ‘잠정적 대상’(transitional objects)임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외로움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영원한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외로움을 승화시키며 대처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쓴 약’ 경험이 될 수 있다. 마치 모든 우울증이 항우울제를 복용함으로써 증상을 ‘없애야만 하는’ 경험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외로움도 외로움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여러 치료적 방법으로 그 증상을 없애야만 하는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크리스천 부부는 사별 후에도 홀로서기 할 수 있는 심리적 성숙과 영적 성숙을 이뤄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성령의 내주와 임재를 의식화함으로써 어떤 외로움의 상황에서도 함몰되지 않는 능력과 위로를 경험해야 한다. 또한 외로움을 대처하는 방안으로써 크리스천들은 비신자들에게 없는 많은 자원(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성경 말씀과 기도, 교회 공동체 등)을 갖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어떻게 목회적 접근을 할까?
첫째, 인간을 이해하는 목회가 필요하다. 남성의 심리와 여성의 심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대부분의 목회자가 남성인 상황에서 여성 성도들의 심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은 좀 더 연결 짓기의 욕구와 언어적인 나눔의 욕구가 있다. 반면에 남성은 대화를 통한 관계 욕구보다는 일과 사역을 통해서 함께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는 것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 물론 지나친 일반화는 금물이다.
모든 사람이 관계의 욕구를 갖고 있으리라고 가정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관계의 욕구가 매우 강하거나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이 욕구의 강도와 빈번도는 연속선상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매우 내향적인 사람들이나 조현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은 관계의 욕구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들에게는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이 관계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대방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은 결국 지쳐서 화가 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의존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에게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관계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설명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성인은 심리적으로 어린아이나 청소년 수준의 삶을 산다는 점을 깨닫게 해야 한다. 어릴 때는 의존의 욕구가 잘 채워져야 심리적으로 성장이 일어나지만 성인이 돼서는 의존 욕구를 계속 채우는 방식으로는 심리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한다. 목회자 중에 동반 의존의 이슈를 갖고 성장기를 보낸 이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외로움을 호소하는 모든 성도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자신의 역전이 역동성에 휘둘려 신경증적인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힘들어할 수 있다. 또한 교인들에게 정서적으로 의존돼 있어서 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확인을 받지 않으면 자신이 목회를 잘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목회자는 본연적으로 겪는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는 동반 의존 수준의 ‘용해’ 관계를 ‘성도의 교제’가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성도들이 외로움을 건강하게 대처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관계하도록 도우려면 리더인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가 자신이 성장한 가정 환경에서의 심리적 이슈에 대해서 잘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동반 의존성을 성경적이며 정상적인 것으로 교인들에게 가르치거나 요구하는 것이 각 성도의 심리적·신앙적 성장을 저해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 목회자의 역전이 역동성이 외로움과 씨름하는 교인들이나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인 목회적 도움을 제공하는 데 긍·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성도 가운데 목회자 자신이 겪는 고독감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목회자가 자신의 외로움을 그들의 외로움과 잘 연결하면 그들을 공감하며 적절한 관심을 쏟을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외로움을 부인하거나 억압하면 외로움을 호소하는 교인이나 세상의 부르짖는 소리를 흘려 듣거나 애써 눈길을 돌려 고통을 회피하는 피상적인 목회를 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감이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데 디딤돌로 쓰임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넷째,1인 가구가 많아지는 현실 속에서 싱글 성도들을 몇 명씩 묶어 서로 네트워킹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전도서 4:9-12 말씀처럼 홀로 있어서 넘어질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룹 리더들을 임명하고 그들이 너무 부담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룹을 응집력 있게 인도해 가도록 리더 교육과 슈퍼 비전을 정기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모임을 순기능적으로 이끌어 가도록 그룹의 역동성에 대해 리더들이 지식과 기술 그리고 개인적인 성품과 자질을 함양하도록 교육하며 슈퍼 비전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로움을 호소하는 교인 또는 교회 밖 소외 계층에게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지탱하기(sustaining)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특별히 위기적인 상황에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하는 방법으로 단기적인 목회 상담을 제공할 수 있다. 목회자가 제공할 수도 있고 훈련된 평신도 상담사를 통해서 무료 상담 또는 저렴한 유료 상담 형식으로 제공할 수도 있다. 외부 기독 상담 전문가나 관련된 복지 기관에 의뢰하거나 연대해서 돕는 방안도 있다. 교인의 경우에는 집단적으로는 순모임, 구역 모임 등의 소그룹 모임에서 각자의 삶을 신뢰하면서 나눌 수 있도록 소그룹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눔을 통해서 ‘나만 외로운 게 아니구나’라는 자각만 생겨도 집단 상담의 치료적 요인 중 하나인 ‘고난의 보편성’을 인식함으로써 상대적 외로움의 고통이 경감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과 연결 짓기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탈진의 위험에 처했던 모세에게 장인 이드로가 제안했던 것처럼 리더들을 세워 그들에게 권위와 책임을 위임하며 분담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목회자가 리더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서로 공감하며 식사도 같이하는 모임을 할 때 리더들도 외로움과 탈진을 극복할 수 있다. 리더를 중심으로 소그룹 모임을 할 때 반드시 성경 공부를 목적으로 모여야 한다는 강박적인 틀에서 벗어나 교회 공동체에 유기적으로 소속된 ‘식구’로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모임이 장기적으로 유익하다. 매주 한 번씩 만나서 편하게 삶을 나누고 밥을 같이 먹고 잠시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는 정도의 만남을 가질 수만 있어도 외로움 극복에 각 성도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모임을 운용할 때는 참여 성도들이 다음 모임이 기다려지고, 구성원들이 보고 싶어질 수 있도록 모임의 응집력이 있는 ‘좋은 대상’(good object)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목회자는 외로움이 여러 정신 질환의 증상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외로움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기도 하다. 엘리야도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우울에 빠진 적이 있었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은 많은 사람이 외로움과 씨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만이 외로운 존재처럼 느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살고 있는데 자신만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주관적으로 경험한다. 우울증이 깊어지면 자살 충동을 경험하며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로움과 사회적 철수(social withdrawal)를 보이는 교인에게는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돌볼 필요가 있다. 순번을 짜서 전화나 문자로 격려하고 안전을 확인하는 것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우울증뿐만 아니라 경계성(borderline)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외로울 때 자신이 버려졌다는 생각과 느낌을 강하게 갖는 특징이 있다. 이들에게는 소외감, 거절감, 유기감이 심리 저변에 핵심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사고, 정서, 충동 조절 능력, 대인 관계가 매우 불안정한 것이 특징이다. 우울증 환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경계성 성격장애자들의 경우에도 충동적 자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도움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단기 상담을 할 때 상담 중에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서면상의 약속을 하고 상담하는 것이 내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여섯째, 다른 성도들과 연결되는 것을 별로 원치 않는 성도들의 경우에는 불안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에서 담임목회자가 한 번씩 개인적인 글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카톡이나 이메일 메시지를 써서 안부를 묻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상투적인 글이 아니면서 각 성도의 상황과 특성에 맞게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도 연락을 취한다면 외로움을 겪는 교인들이 교회 공동체에 유기적인 소속감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담임목사와 라포만 형성돼 있다면 도움이 꼭 필요한 상황에 처할 때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
일곱째, 자기 개별화의 수준이 낮은 교인들에게 외로움이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지나친 외로움은 심리적·영적인 ‘자기 구조물’(self-structure)이 안정되고 응집력 있게 형성되지 못함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증상임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증상을 완화하는 접근으로는 근본적인 변화와 치유가 일어나기 어렵다.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교인들은 지속적으로 의존 욕구를 느끼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며 탈진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중독적인 관계를 맺거나 중독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증상에 수반되는 통증을 경감시키려는 이들에게는 장기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여덟째, 교회의 리더들은 이단이 외로움과 씨름하는 교인들을 유혹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단은 외로운 자들의 욕구를 잠정적으로 채워 준다. 역기능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낸 성인아이들이 성장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관심과 따스함, 유사 공감을 이단 공동체에서 경험한 후 기성 교회를 가치절하하고 이단 공동체를 이상화해서 그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순응하며 가스라이팅 되는 줄도 모르고 이단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기 개별화의 수준이 낮은 교인들이 이단 공동체의 교인들과 관계중독에 빠지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의지력이 작동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방적 차원에서 모든 성도가 정통 교리에 기반을 둔 지성과 영성이 발달되도록 평소에 교리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울러 심리적인 발달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감적인 ‘품어 주는 환경’을 지역 교회 공동체가 제공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환경이 되려면 교회가 어느 정도의 순기능적인 가족 시스템으로 변화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일차적 사명과 정체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구원의 방주 역할이다. 물론 삶의 모든 영역에 관심을 갖는 전인구원적인 폭넓은 시각은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적 욕구를 채우는 기능을 우선시한다면 이 땅에서의 삶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사회복지기관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자는 항상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노력을 강구해도 세상에는 가난과 외로움과 사회적 불의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는 것은 귀한 사역이며 필요한 일이지만 ‘잠정적 유익’을 제공할 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아야 한다.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채 살아가는 외로운 자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체험하며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목회가 될 때 목회자들과 교회는 탈진하지 않고 사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