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12연기법을 너무 남용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무지 사용하며,
그것은 불법의 핵심이다, 중심이다.. 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12연기법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즉 코끼리라는 12연기법은 알고 있는 데.. 장님처럼 자기가 만지는 것을 12연기법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해서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 12연기법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행히 우리가 장님이라 해도 자신이 만진 부분은 적지 않으니.. 조금만 더 만져보면 코끼리 거의 전부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1. 어느 방에서 ‘불교는 무명이 시작이다’ 라고 했는데.. 나는 ‘고가 시작’이라 했습니다.
그게 그것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무명이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12연기법의 [순관]을 보고 있는 게 되며,
고가 시작이라는 것은 12연기법의 [역관]을 보고 있는 게 됩니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각묵스님은 무명을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는.. 하여 고가 멸하는 것을 역관이라 했더군요.
아마 역관을 그렇게 아는 회원님도 이곳에 있을 겁니다. 그것을 역관이라 이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역관은 그런 게 아니지요. 생과 멸의 관계는 순과 역의 관계와는 다르지요.
그뿐 아니라 [생, 멸, 순, 역] 이 바로 12연기법과 4성제를 연결시켜 이해하는 고리 아닌가요?..
그러니 12연기법에서 순관인 [유전문의 멸]을 역관이라고 하는 것은 [심각한 착오]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연기법은 먼저 생멸의 관점에서 유전문과 환멸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은 순관과 역관이 있지요.
12연기법의 첫 번째 접근은 유전문의 역관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유전문의 역관의 시작은 [고(苦)가 지금 여기에 있다] 는 것입니다.
불교의 시작이 고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럴 경우 불교의 끝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고(苦)가 지금 여기서 멸(滅)했다] 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즉 불교의 시작은 유전문의 역관이며, 불교의 종점은 환멸문의 순관이라는 것입니다.
환멸문의 순관이란..
무명을 멸하면 행이 멸하고, 식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고, 6입이 멸하며,
촉이 멸하고, 느낌이, 애가, 취가, 유가, 생과 노사가 멸하니..
고가 멸한다 이지요.
이때 생과 노사를 3세양중인과설에서 보듯 사람의 생사로 보면.. 생사 멸은 죽음이 되니..
즉 [죽으면 고(苦)가 멸한다]고 해석이 됩니다.
그렇게 도올은 불교를 이해했기에 그의 책 <금강경 해석(?)>에서 ‘불교는 죽음 예찬하는 종교다’ 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명을 멸한 석가세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죽었습니까?..
그 후로 45년 살아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무명을 멸했다하여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6입을 멸했다하여 생명(6근)이 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도올의 똥 철학.. 6입을 멸해 부처가 되었다(=열반) 하여 똥을 안 싸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6입은 6근이 아님을 12연기법에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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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차원을 넘어면 6입도 6근이 될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6입이 6근이 된다는 표현은. . 거시기 하지만 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알 듯 합니다.^^()..
초심님은 많은 것을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연기의 순관과 역관은 여기서 확정적으로 정리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에는 남전대장경. 한역대장경, 일본불교 사전은 무명을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는.. 하여 고가 멸하는 것을 역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12연기의 설명에 이와 같이 되어 있는 곳이 많습니다. 이중표교수님은 초심님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학인은 시간을 두고 함께 참구하는 것이 좋을것으로 생각합니다.
장미님, 초심자라면 역관을 무엇으로 알든 별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그런데 불교를 깊이 공부하는 이라면.. 12연기법의 생,멸, 순, 역이 바로 4성제 구조임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분명히 보면서 어찌 역관과 멸문을 혼동할 수 있겠습니까?..
님이 말하듯, [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결국 고가 멸한다]는 설명을 3자에게 보여주면.. 그것은 멸에 대한 내용으로 [멸문]이라 하면 되겠네. 하지 않을까요? 산에 올라가는 게 순관이라면 산에서 내려오는 게 역관 아닙니까?
순관과 역관에 대한 나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장 3 남전장경 한역 대장경 권이있는 불교 사전에 있는 내용을 소개한 것이니까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댓글도 자신의 의견에 앞서서 이해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해 줄 수 없는지 아쉽네요.
장미님.. 초심은 님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환멸문의 순관]을 [역관]이라 잘못 오기해 왔다는 것을 알면.. 바꾸어어야 하는데.. 한글로 그것도 팔리어 본을 번역하는 이들 역시 [역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번역본을 본 젊은 불자들은 [환멸문 순관]을 [역관]이라고 알게 되는 게 아닙니까?.. 저 역시 환멸문의 순관을 역관이라 알고 지내다 어느 날 역관이 아님을 알고 그것은 순관이라 하니.. 무슨 말이냐고 난리를 치더군요^^..
저는 장미님이 잘 보신 후 어떤 결정을 하실지..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단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은 할 것입니다.()..
세존 사이트에서..
12연기의 순관이란 무명에서 행, 식. 노사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관하는 방법으로,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고, 식이 있으므로 명색이 있다는 식으로 관하여 노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관이란 노사에서 시작하여 노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유가 멸한다고 관하여 무명까지 멸한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순관이든 역관이든 관건은 '이것이 있
불교는 어떤 것도 결론아나 흙백론리보다는 여기 말씀 하시는 내용은 결론 보다는 각자의 공부인들이 공부해가는 과정이 어떤 경을 같고 어떻게 공부해 가는 지도 함께 참구해가는 학인들의 자세를 말씀 하시는 것으로 이해 합니다.
불법은 어떤것의 치우침 보다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을 어떻게 참구해가고 있는지를 같이 배워가는 과정이므로 어떤 것의 결론 보다는 서로가 어떤 뜻으로 참구하고 있는 지 도 알아가는 중요한 것을 시사하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반듯이 이래야만 하는데.. ^^
육근이 청정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근에 때가 묻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청정해질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청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육근의 인식작용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겠구요. 육근의 인식작용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것을 육입이라 표현한 것 아닐까 합니다. 십이연기에서 환멸문으로 진행될 때 멸해야 하는 것이 무명이므로 무명이 멸하면 육입도 멸하고 육근이 청정해 지는 것, 그런 개념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것을 굳이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육입과 육근이 동일한 것이라면 십이연기의 환멸문의 결과 남는 것이 뭐가 있겠는지요, 단멸 그 자체일뿐...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불교를 누가 추구하고 받들어 배우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예찬하는 종교라는 오명도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구요.
진짜 문제는...6입은 마음에서 생겼다 하니.. 그런 게 6입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멸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6입 멸이 그리 쉬운 거 입니까?.. 먼저 욕계를 멸해야 하고, 이어서 색계를 멸해 4선정을 성취해야 하는데.. 여기에 이르기만 해도.. 성인이라 존경받는단계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인 무색선정 까지 성취한다면......................... 말로 이미 표현할 단계가 넘어갔지요....................................................... 그런데 멸진정은 또 그 단계를 넘어 있다고 하니...................................... 그리고 [6입멸]은 멸진정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 했는데...........................
그래도 [6입멸]이 마음만 먹으면 되는 성취입니까?..................................... 아니! 지요.
그 마음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정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겠네요. 그 마음이 그 마음이 아닌 것인데.
그리고 지금까지 6근과 6입을 둘로 보지 않았던 우리 전통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미님의 지적처럼 불교사전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데.. 감히 누가 그것을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