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를 슬퍼함
구양근 kooyangkeun@hanmail.net
미국에 이민을 하신 선배님 한 분이 한국에 나왔다고 해서 지인들 대여섯 명과 같이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 선배님, 갓 이발을 한 파르스름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종로에서 3천 원에 했다고 자랑이다. 세상에 3천 원짜리 이발이 다 있어요. 우리는 모두 탄성을 발했다.
이발이라 하면 나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나이가 50쯤 되니 흰머리가 섞이더니 점점 많은 숫이 따라서 하얘졌다. 염색을 해야겠다 하고 이발을 한 김에 염색까지 해달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말썽이었다. 내 피부는 유별나게 약해서 가렵고 물집이 생기고 야단법석이다. 아무리 이발소를 옮겨가면서 시험해 보아도 별무효과였다. 종국에는 강남의 쟈××× 이라는 외국 프랜차이즈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고 염색을 하였더니 아무런 탈이 없고 말짱하였다. 옳지 이제부터는 여기서만 해야지. 다른 곳에 비해 비싼 줄 알면서도 그곳만 가서 이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단 이발 기간을 최대한도로 늦춰 거의 두 달에 한 번꼴로 하였다. 그러나 가격이 얼마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이발료와 염색료, 케어료 등을 따로 지그재그로 적립하여 까나가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계산대에서 일일이 개별 가격을 불러 달라고 해서 합산하여 보았다. 와! 185,000원. 내가 이렇게 비싼 이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개혁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사람의 체질도 변한다는 사실을 안 나는 홈쇼핑에서 파는 염색약을 주문해 사용해 보았다. 웬걸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다. 옳지 그렇다면 이제 나도 종로에 가서 3천 원짜리 이발을 한 번 해보자. 전철로 종로3가에서 내려서 두리번거리니 이제 가격이 올랐는지 3천 원짜리는 없고 5천 원짜리 이발소가 보인다. 들어가서 머리를 맡겼더니 차차차차 싸싸싸싸 자르고 다듬는 기술이 참으로 일품이다. 나는 언제나 우리 전통 이발사 아저씨들의 이발 기술은 세계 제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나는 세계 어느 곳도 한국처럼 잘한 이발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감아드릴까요?”
“아닙니다. 집에 가서 감겠습니다.”
나는 모처럼 5천 원짜리 이발의 진가를 에누리 없이 누려보고 싶었다. 아저씨는 진공청소기 같은 파이프로 휘휘휙 머리털을 빨아들이고 털털 털어주며 끝났다고 한다. 하도 기분이 좋아서 내가 평소에 강남에서 하던 가격과 비교해 보니 무려 37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싼 곳에 온 김에 뭘 좀 사 가고 싶어졌다. 길가에 큼지막한 석류가 4개에 만원이라고 쓰여 있다. 한 봉지만 샀는데도 묵직하였다. 다음에는 어느 세일이 라고 요란한 글씨들이 펄럭거리고 스피커가 흘러나오는 점방을 들어서니 대저 모든 것이 거저먹기인 것 같았다. 가죽장갑 한 켤레를 추켜들고 얼마냐고 했더니 3천 원이란다. 물론 진짜 가죽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 자리서 사서 끼고 희희낙락이었다. 걷다 보니 종로 5가까지 오게 되었다. 광장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온갖 먹거리, 싼 물건들이 천지에 가득하다. 가판대에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 파자마가 사고 싶었다. 하나에 불과 7천 원이란다. 옷감도 좋고 안감을 보니 기모처리가 되어있으며 양쪽 포켓은 지퍼가 달려있고 허리끈은 고무줄과 끈으로 이중으로 묶을 수 있게 많이 신경 쓴 파자마다. 그런데 그런 파자마가 커피 한 잔 값밖에 되지 않는다니 신기한 나라에 온 것이 분명했다. 내가 3장을 골랐더니 2만 원에 가져가란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강남에 가져와서 길이를 줄여달라고 맡겼더니 하나에 5천 원을 달라고 한다. 밑동을 가위로 싹둑 자르고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주는 가격이 원 완성품 가격에 상응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강남에서 나서 강남에서만 자란 딸내미가 어느 날 강북에 갔다 오더니,
“아빠 강북에 갔더니 도로가 꾸불꾸불해요.”
하며 마치 시골 어느 도시를 갔다 온 기분으로 체험담을 이야기했다. 어쩌다 강북이 강남과 이렇게 차이가 나고 말았을까. 처음에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란 말이 유행했을 때, 강북은 강남보다 5년은 뒤진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에 갔더니 10년 차이는 나는 것 같았다. 요즘 가서 보니 최소한 강남보다 15년은 뒤진 것 같다.
내가 시골 초롱불 밑에서 공부하다가 대학 입시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 왔을 때, 처음 본 광화문 네거리와 종로는 어느 별나라를 온 기분이었다. 대학을 다니다가도 가끔 종로 구경을 나왔다. 그때 종로에 고려당이라는 제과점이 있었다. 그 제과점에서 우유 한 잔을 시키고 곰보빵(소보로)을 하나 시키면 최고의 데이트코스가 되었다. 또한 종로에 종로서적이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은 은사이신 장 교수님 댁에서 경영하던 곳인데, 종로에 나온 김에 문학책 한 권을 사면, 예쁜 점원 아가씨가 종로서적 포장지를 능숙한 솜씨로 접어서 예쁘게 겉장을 싸준다. 그 책 한 권을 옆구리에 끼고 버스를 타고 오는 길은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신바람 나는 날이었다. 동대문 앞에는 노상 전철 정거장이 있었고, 노상 전철에서 내린 모던 걸을 보고 가슴 두근거리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지금은 시대에 한참 뒤진 곳이 되고 말았단다.
얼마 전, 사무실이 종로에 있는 문학회에서 모임이 끝나고 한일장에서 전통 갈비탕을 먹었다. 문학회 고참이신 분이 차를 한잔하고 가자고 해서 바로 옆 건물인 국일관으로 들어갔다. 국일관은 해방 전부터 있었던 우리나라 최신 건물이었고 김두한의 주 무대기도 하다. 그곳이 바로 해방정국에서 세기의 사기꾼 박인수가 해군 대위를 사칭하고 무려 100여 명의 여대생, 처녀들을 춤으로 꼬드겨 농락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카바레 장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차를 마시러 가는 국일관의 엘리베이터 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찼다. 9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서자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르르 다 내린다.
우리도 엉겁결에 잘못 따라나섰더니 거기가 그 소문난 콜라텍 카바레였다. 젊은이 두세 명이 시장 경매장 거간꾼처럼 “이리 와요. 이리이리. 줄 줄.” 하면서 반말로 함부로 안내하며 카바레로 몰아넣었고, 카바레 안에서는 현란한 음악과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소위 15층 스카이라운지 다방을 갔다. 거기는 노인들만 가득히 앉아있었고, 내가 경험한 반세기 전 그대로의 장식에 입술연지를 짙게 한 구식 마담이 우리를 맞이한다. 역시 반세기 전 그대로 옆에 앉아 나도 한잔 시켜 먹어도 되느냐고 애교를 부린다. 나는 쓴웃음이 나와서 피식 웃고 비싼 쌍화차를 한 잔 시켜 드렸다.
* 구양근 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겸 총장, 주대만한국대표부 대사 역임. 수필집 ≪새벽을 깨는 새≫ ≪우리는 왜 노하지 않는가≫ ≪어느 방랑자의 어머니≫ 등. 소설 ≪칼춤≫ ≪붉은 전쟁≫ ≪안개군함≫ ≪모리화≫ ≪임곡역≫ 등.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김만중문학상, 국제문예대상, 탐미문학상대상 등
/ 그린에세이 2021. 3-4호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