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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말씀 : 딤후4:1-5
제목 : 복음 전파의 사명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에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을 통해 증거되고 나타나며, 그 최종목적은 복음 전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 전파자의 사명과 책임에는 남다른 무장과 긴장감과 다짐이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고유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때는 ‘부득불 강압적인’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십자가와 부활의 최종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전할 때 무엇을 선포해야 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하나님의 생각과 사상과 뜻과 의중을 외적으로 표현해 놓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로고스’이며, 예수님께서는 로고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사상과 정신과 계획과 뜻인 예수 그리스도로 요약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전해야 하며, 둘 중 하나만 전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전파자의 직책은 무엇입니까? ‘사자’, ‘선교사적 사명’으로 설명드렸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라는 고전9장 말씀이 그 직책과 사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고전1:17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입니다. 십자가의 도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복음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장황하게 설명하지 말고 십자가의 도를 단순히 선포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은 복음의 긴급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전파자의 사명을 이어받을 디모데가 얼마나 수고하며 어떻게 훈련받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딤후4:1-5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것은 바울의 유언입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복음을 전파하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복음 전파자의 태도와 자세가 어떻게 변질될지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언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동일한 명령입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체험한 고난과 어려움은 복음의 수호자로서의 사역을 온전히 완수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부담과 각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을 단순히 알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사명과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준엄한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살펴보면서 그와 함께하신 영이 우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새로운 영역과 시각으로 십자가의 도를 전할 수 있도록 도전과 권면을 받기 원합니다.
행20:17-20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밀레도교회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을 통해 우리는 그의 수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의 태도와 자세는 생명의 복음 전파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것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고후6:4-5에서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수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또한 고후4:1-3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바울은 많은 심령들을 주께로 이끄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이를 위해 간사한 계교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다른 교회를 잘 다니고 있는 성도들을 우리 교회로 인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 부끄러운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전도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합니다. 물론 다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도가 구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사들을 형식적으로, 그리고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할 때는 오직 ‘십자가의 도’만 의지해야 하며, ‘십자가의 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개방해놓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몇몇 사람들만의 조직, 프로그램, 영적 계급이나 그들만이 안다고 주장하는 비밀스러운 진리는 구원에 방해가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담을 세워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그룹의 구조나 진리를 나만 알고 있는 영적 비밀로 간주하는 사고, 교만 등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 진리를 나만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더 확대해서 보면 특별한 영적 진리를 안다거나 자기 혼자 특허 낸 듯한 비밀스러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며 교인들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이단들이 이런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단으로도 많이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천지에서 한때 수많은 영혼들을 유혹해서 빼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배도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의 도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왜 결과가 미미할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정보만 제공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에게 내재화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십자가와 부활이 성령을 통해 성도들에게 내재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런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제공한 정보를 듣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로 한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그것을 내재화시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나 자신을 드리는 삶,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신앙은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십자가만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이 있어야 그 의미가 설명되며, 부활은 십자가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쪽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실제화, 내재화되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배도하지 않습니다.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성경 주석가 코니베어는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구절을 ‘그림을 크게 그려서 플래카드에 붙여 높이 들어 보여주었거늘’이라고 풀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도 누가 유혹한다고 넘어가느냐는 말입니다, 분명하고 명확한데 왜 이것을 보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가느냐는 지적입니다.
둘째, 성령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이 내재화되면 ‘십자가의 도’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로고스이고, 로고스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정신, 사상, 계획, 뜻이 형상화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십자가의 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내재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림을 크고 선명하게 그려 붙인 플래카드를 갈라디아인들의 눈앞에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나팔 소리를 크게 불고 외치는 심령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는가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그대로 살아있는 교회는 맡기신 책임과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긍휼이 교회를 덮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올리신 중보기도는 무엇입니까?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죄 사함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응답 됨으로써 세상을 향해 교회가 응답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성자 하나님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 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예수님의 기도 응답의 한 예입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시고 복음을 전할 때마다 삼천 명이 회개한 사건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 주위를 맴돌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행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행2:37-3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건은 성자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응답은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긍휼한 마음, 십자가에서 품으셨던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계속하는 교회로 세워진다면 십자가의 기도 응답을 반드시 체험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나 여러분들 모두 십자가의 죄 사함의 기도 응답의 열매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들을 십자가 아래로,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과 직분과 책임을 반드시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응답과 부르심을 받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잊으면 교회의 기능과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전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응답의 역사를 이루는 곳이 교회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위의 성자 하나님은 과거에 범한 모든 죄, 그리고 현재 범하고 있는 모든 죄를 바라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하신 기도입니다. 속죄 제물이 되신 상황에서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지금도 응답 되고 있다는 첫 번째 증거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교회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로운 자로 세우셨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 우리는 천국을 꿈꾸게 되었고, 그 나라를 준비하는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죄 사함의 말씀을 지금 교회가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죄 사함의 기도가 지금 교회를 통해 응답 되고 있다는 두 번째 증거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회개의 삶을 살도록 일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또한 죄 사함의 기쁜 소식의 전파의 시작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얼음덩어리가 아무리 커도 불로 녹일 수 없는 얼음은 없습니다. 산봉우리같이 높게 죄가 쌓여 있어도 성령의 불로 녹여내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늘 교회에서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소멸할 수 있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값없이 용서해 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는 그곳을 바라보는 특권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왜 응답의 보증이 되는지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간구하신 그 능력이 교회를 통해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자리에 두루 행하시며 보증하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주님의 응답이며, 교회를 통해 응답을 이루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성도들이 돌이킬 수 있는 영적 반환점도 십자가 아래라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주님의 기도가 응답 되고 있고, 그것을 교회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긍휼함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 아래로 나와서 우리의 죄 사함을 간구하시는 주님을 붙잡기 전에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평강과 소망도, 슬픔을 벗은 기쁨의 삶도 불가능합니다. 십자가 아래로 나아갈 때만 우리의 방황을 끝내고 영적인 퇴보를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부득불 전해야 합니다. 중압감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알고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