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제 평양이다
미군이 만든 환영 피켓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지금 평양을 향하는 길목에서 과연 선두에 서 있을까라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와 선두의 경쟁을 벌이는 미 1기병사단은 지금 어디를 통과했을까. 전투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터라 사실 미 1기병사단의 위치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군이 “탱크 컨트리(Tank country)”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던 평양의 길목을 지나면서는 그에 생각이 미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미군과의 경쟁이었다. 그 역시 싸움 아닐까.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선두 경쟁에서 이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군 공지(空地) 연락장교를 불렀다. “지금 우리가 미 1기병사단의 앞에 서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즉시 공중에 떠다니고 있던 모스키토 정찰기와 교신을 시도했다. 그는 “미 1기병사단은 지금 중화리 지역을 통과하고 있다”고 얘기해줬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선두에 서 있는 셈이었다. 속으로 ‘우리가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1번 전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예전처럼 지프로 갈아타고서 움직였다. 저 멀리 대동강이 보였다. 긴 철교가 눈에 들어왔다. 내 고향 선교리였다. 우리가 작전상 닿는 지점은 그곳 선교리였다. 누가 먼저 선교리에 도착하느냐에 따라 평양 입성의 승부가 갈리는 것으로 정해진 터였다.
그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내 뒤의 지프에 올라타고서 따라오던 석주암 참모장의 지프가 지뢰를 밟았던 것이다. 차는 뒤집혔다. 석주암 대령이 크게 다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앞을 지났는데도 지뢰를 밟지 않았으나 그의 차는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집혀진 그의 차량을 살피고, 병력을 움직여 그를 후방으로 실어 날랐다. 이어 지프에 올라타고 대동강 철교를 향해 이동했다. 나에 앞서 먼저 도착한 미군 전차병들이 길 양쪽을 에워싸고 목표지점에 도착하는 우리 1사단 지휘부 행렬을 반겨줬다.
미군 전차병들은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적을 몰아내고 적도(敵都)에 먼저 닿았다는 자부심이 보였다. 아울러 함께 대열을 형성하며 도착한 한국군 1사단에 대한 성원(聲援)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대형 피켓을 들고 있었다. ‘Welcome 1st Cav. Division-from 1st ROK Division Paik(환영 미 1기병사단, 한국군 1사단 백)’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선두로 도착했다고 해도 미 1기병사단의 체면을 너무 짓밟는 듯하다. 피켓을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무슨 말이냐? 엄연한 경쟁에서 이겼다. 우리도 한국군 1사단인 셈이다. 승리를 축하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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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의 뒤를 따르던 석주암 당시 참모장의 차량이 북한군 매설 지뢰를 밟아 전복해 있다.
30분 뒤 도착한 미 1기병사단할 수 없었다. 그들은 승리의 기쁨에 흥분한 상태였다. 일체감을 이룬 그들에게 내가 뭐라고 더 말할 내용은 없었다. 국적과 인종을 건너뛰어 한국군 1사단과 강렬한 동질감을 표시하는 그런 미군이 한편으로는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50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선착하는 기록을 남겼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멀리서 미 장성이 탄 지프 행렬이 보였다. 우리가 배속한 미 1군단의 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의 대열이었다.
그는 지프에서 내려 내게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면서 말을 건네는 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와 동행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보낸 로우(Low) 소장이었다. 전쟁에서 적의 수도를 점령하는 일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런 감격스런 장면을 직접 보고 상세한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평양 초입의 선교리 로터리는 완연한 축제 분위기였다. 밤을 낮 삼아 걷고 또 걸어 미군의 빠른 기동력을 앞질렀던 국군 1사단 장병의 기쁨이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격 그 자체였다. 미군도 로터리에 도착하는 대로 서로 얼싸 안고 악수를 건네면서 기쁨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본격적인 행사는 그 뒤에 벌어졌다. 밀번 군단장 일행이 선교리 로터리에 도착한 뒤 다시 15분 정도 흘렀다. 선두에 호바트 게이 미 1기병사단장이 탄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담담하게 차에서 내렸다. 밀번 군단장의 지시로 야트막한 단(壇) 하나가 금세 만들어졌다.
아군의 평양 점령을 축하하는 의식이 벌어졌다. 밀번 군단장은 우선 나와 게이 소장을 불러 단에 오르게 했다. 밀번 군단장의 뜻에 따라나와 게이 소장은 악수했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한국군 1사단 장병, 그에 배속한 미군 10 고사포여단과 6전차대대 장병, 뒤이어 도착한 미 1기병사단의 장병이 뿜어내는 소리였다.
로터리 일대는 그런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뒤덮였다. 모두 기뻐하고 있었지만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장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선두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의 1기병사단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필리핀 마닐라, 일본의 도쿄(東京)에 먼저 선착하는 부대의 전통으로 평양에 첫 입성(入城)한다는 확신에 차서 길을 내달았던 사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감회에 젖었다. 1945년 12월 월남(越南)을 감행하면서 떠났던 고향 선교리로 5년 만에 돌아온 순간이었다. 휘하 1만 5000명의 막강한 한미 연합군을 이끌고서 말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3남매를 데리고 평양에서 살다가 생활이 힘에 겨워 우리와 함께 세상을 하직고자 대동강 물에 몸을 던지려 했던 어머니의 생각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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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선착을 눈앞에 둔 백선엽 1사단장이 미군 군사고문과 구수회의를 하고 있다.
어머니 생각도 잠시이제 대동강을 넘어 평양을 거쳐 청천강, 최종 목표인 압록강에 도달하면 우리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마친 뒤 국토를 온전케 하는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다. 감회가 감회로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는 시절이었다. 간단하게 의식을 마친 뒤 나는 제 자리를 찾았다. 평양에 들어서기 전에 각 연대의 임무를 분담토록 한 게 작전상 주효했다. 평양은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가 선교리에 도착한 시간에 1사단 11연대는 평양 서부비행장을 점령했다. 이어 그들은 평양 시내로 곧장 진격했다.
강동(江東) 방면으로 우회토록 한 15연대도 작전을 잘 펼쳤다. 그곳은 대동강 상류에 해당해 수심이 얕았다. 도섭(渡涉)이 훨씬 용이했던 터라 진격이 빨랐다. 그들은 곧장 모란봉 일대로 치고 들어갔다. 아울러 평양의 한복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전적(戰績)을 올렸다. 평양에 남아 있던 적은 그래서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평양 초입에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당도했고, 북쪽에서는 국군 1사단 11연대, 동북쪽에서는 1사단 15연대가 밀려와 아군의 협격(挾擊)에 몸을 드러낸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초 선교리의 대동강 유역(流域) 건너편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곳으로 넘어오는 국군과 미군의 주력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군 1사단 11, 15연대가 후방에서 협격을 하자 진지를 버리고 쉽게 도망치고 말았다.
밀번 군단장은 내게 다가와 “어떻게 그런 공격로를 구상했느냐?”면서 신기해했다. 나는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곳이 내 고향이고, 어렸을 적부터 나는 대동강에서 자라 어느 곳의 수심이 깊고 얕은지를 잘 알았다”고 했다. 아울러 청일(淸日) 전쟁 때 평양을 지키는 청나라 군대를 일본군이 어떻게 공략했는지도 일찌감치 살폈다는 점을 말해줬다. 그는 연신 “아주 잘했다, 정말 잘했다”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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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첫 입성의 기록을 남긴 선교리 도착 직전의 백선엽 사단장 모습이다.
이제는 평양을 평정(平定)하는 일이 남아있다. 시내에서는 시가전(市街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도망을 치지 않은 북한군 잔존 병력이 시내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군들이 신속히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대신할 부교(浮橋) 설치작업에 나선 정황을 살폈다.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다리를 만들어냈다.
우리 1사단은 선교리 초등학교에 사단 본부를 설치했다. 고무보트를 동원해 그 위에 목판(木板)을 깔아 만들었던 부교 위로 아군 병력이 강을 건넜다. 강 북안(北岸)에는 강동으로 우회했던 1사단 15연대 병력이 벌써 도착한 상태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