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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서리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긴 겨울도 결국은 생명의 봄을 잉태하고 있다. 화사한 햇살에서 땅의 따사로운 훈기에서, 그리고 처녀의 속눈섭 안에서 봄은 초록으로 싹튼다.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1703-70년)가 그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은 핑크빛 꽃을 가득 안은, 우아한 청록의 드레스를 입은 퐁파두르 부인이 그 투명한 살빛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는 듯한 그림이다.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는 로코코 시대의 문화 엘리트였지만 시대의 현실은 그녀를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루이 15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고 59년의 재위기간 동안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이 상황은 루이 15세 때까지 이어져 결론적으로 루이 15세가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게 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시대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면이 그들의 전부를 설명한다고는 할 수 없다. 루이 15세 시대는 볼테르(Vo1taire)나 루소(Rousseau)와 같은 사상가를 배출했고, 로코코 양식을 뚜렷이 형성하였으며 , 무엇보다 프랑스 정신이 유럽에 가장 확실하게 전파된 시기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루이 15세는 각료회의를 하던 중에도 베르사유宮 2층에 있는 퐁파두르의 방으로 사라져 각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그녀의 미모 못지않은 품격 높은 문화 성향에서 오는 흡인력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퐁파두르 부인의 독서 폭은 광범위해서 서가에만도 책이 3,500여 권이나 꽃혀 있었다. 궁중에서 아마추어 소극장을 운영하며 자신이 직접 배우로 출연하거나 노래까지 하였고 도자기에 대한 애착도 대단해서 왕실 도자원을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는 이런 그녀의 취향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오른손에 든 책, 거울에 반사되는 시계와 도자기 장식, 꽃과 잎으로 로코코 장식성을 살린 거울의 테두리, 탁자 서랍에 꽃힌 깃털 펜, 그리고 발끝에 놓인 두루마리 악보글이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에는 왠지 모를 우울함과 권태가 배어 나오는 듯해 곧 이어 닥칠 절대왕조의 쇠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1780년 프랑스를 방문한 영국의 농경학자 아서 영(Arthur Young)은 프랑스 사회에 상치되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는 것을 즉시 간파하였다. 거기에는 풍성한 문화가 있는가 하면 무지와 폭력이 있었고, 절대주의 아래서도 사회적 분화 현상은 싹트기 시작했으며, 무능력한 지배층은 각계각층에서 불어 닥친 개혁의 급박한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막강한 태양왕 루이 14세 때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절대주의의 모순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기득권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선에서 해결하기란 불가능했다. 혁명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가 농축되어 폭발할 때 사람들은 이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