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떠나며
여행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잃는 것이 있다. 참고 감내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상대적으로 얻는 것도 있다. 뜻밖의 수확이기도 하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런 것이 여행의 감칠맛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 절충하고 상계하며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므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면 된다. 당장은 불편하고 힘겨울 수 있으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여행에서는 우선 배가 불러야 한다. 그래야 즐거우며 자연스럽다. 선조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였다. 여행은 교통문제 못지않게 잠자리에 먹을거리를 걱정한다.
육체(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영혼)도 그렇다. 먹을수록 배고픔을 느낀다고 한다. 먹어본 사람이 더 찾고 먹는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싶다. 마음은 좀 더 까다로워 뭔가를 얻어내려고 한다. 칠월 초인데 태풍이 남부지방을 훑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여파로 아침에도 빗방울이 떨어져 우산을 펼쳐 들고 눈치 보일 만큼 애매모호 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현지에서 하루 더 편안히 쉬고 아침에 출발하여 한낮에 돌아오는 몽골항공 편을 선택하였다. 멀리 떠나는 날 날씨라도 기분 좋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이면 좋을 텐데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잔뜩 찌푸렸다.
몽골항공은 확실히 대한항공보다 시설이나 서비스가 떨어진다. 기내 좌석이 2.3.2. 7줄인데 뒤쪽은 아주 좁다. 체격 좋은 사람은 큰 불편을 겪을 것 같다. 옷도 저 정도면 꽉 쪼여 투덜거릴 것이다. 그나마 운 좋게 좌석이 창가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으니 숨통이 트여 다행스럽다. 그런데 찌푸렸던 지상의 날씨와 천상의 날씨는 사뭇 다르다. 구름 위는 아주 활짝 갠 하늘이다. 대기권에 들어서니 기존의 땅과 하늘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순백의 설원에 신비스럽도록 시퍼런 하늘이 산뜻하게 만년설의 설산으로 둘러쳤다. 요정의 나라처럼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에 손색없다.
02. 몽골 다시 챙겨보기
몽골은 지구상에서 가장 험난한 산악지대에 있는 나라 중 하나다. 국토의 평균 고도가 해발 1580m로 우리나라의 지리산 능선보다도 높다. 바다라고는 조금도 접하지 않은 순수한 내륙국가다. 북쪽은 러시아와 3,000km, 남쪽은 중국과 4,670km라는 거대한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북보다는 동서로 길쭉하게 생긴 나라로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양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정치적인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을 만큼 숨 막히는 나라다. 국토의 남쪽은 고비사막 지역으로 국토의 11%를 차지하면서 인구는 고작 4만여 명 안팎으로 대부분 불모지이면서 한국인과 몽골인은 외관상 가장 많이 닮았다.
몽골은 인천공항에서 수도인 울란바토르공항까지는 불과 3시간여 거리이며 한 시간 늦은 시차가 적용된다. ‘몽골’이란 ‘용감함’이란 의미가 담긴 부족 명칭이다. 몽골은 중앙아시아이면서 우리나라와 함께 동북아시아로 분류되기도 한다.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했는데 거꾸로 청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200년여 전에 외몽고 일부가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100년여 전에는 몽고공화국을 건립하기 위해서 내몽고를 통째로 중국에 내주어 가장 큰 자치구가 되었다. 그래도 국토가 한국의 16배가량 된다. 인구는 한국이 5천만 명을 넘어섰고 몽골은 300만 명을 약간 넘는데 그중에 절반이 울란바토르에 산다.
‘파란 하늘의 나라’로 알려진 몽골은 겨울이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로 7개월이나 된다. 기온은 겨울에는 영하 20도, 여름에는 영상 20도까지 올라가 연중 40도나 차이가 난다. 강수량은 우리나라가 연평균 1,300mm, 세계평균이 880mm 몽골은 고작 250mm밖에 되지 않는다. 몽골은 라마교라는 불교국가다. 사람과 짐승의 죽음을 자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보면서 개를 유독 소중하게 여긴다. 사람은 사후에 개로 태어났다가 다시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윤회의 내세관을 믿는다고 한다. 사람은 개를 신뢰하고 개는 사람에게 복종하며 집을 지키고 가축을 보호하는데 한몫 톡톡히 한다.
03. 칭기즈칸 제국의 세계 제패
몽골 하면, 맨 먼저 칭기즈칸이 떠오른다. 거친 산악지대면서 끝 모를 초원을 내닫는 기마민족이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꿋꿋함이 있다. 그런데 그 화려했던 문화는 이슬처럼 슬그머니 사라지고 허무함마저 사치스러울 만큼 지금은 빈곤에 주저앉아 허덕이는 후예면서 다시 여명의 새벽을 열고 있다.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진이다. 장래 반역할 기미가 엿보이는 부족은 초토화하는 전략을 쓰면서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그것이 정복도 중하지만 사후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원나라를 세웠으며 원의 태조로 추증되었다.
테무진은 유목민 부족들을 몽골로 통일하고 1206년에 칭기즈칸에 추대되면서 세계역사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칸’이란 ‘전 세계의 군주’라는 아주 오묘한 뜻이 담겨있다. 칭기즈칸은 영토를 중국에서 유럽의 지중해 북부 아드리아해까지 넓혔다. 아시아 민족이 세계를 휩쓸며 지배한 유일한 시대이기도 하다. 테무진은 칸(汗)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라 칭하고 대몽골국을 세웠다. 칭기즈칸은 ‘대양의 군주’ 혹은 ‘황제 중 황제’ 등으로 해석된다. 칭기즈칸은 1207년부터 주위의 서하국, 금, 서요국 등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러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골의 대외원정은 1227년 칭기즈칸의 사망 후에도 오고타이(태종), 정종, 헌종, 쿠빌라이(세조)로 이어졌다. 유라시아로 진격하면서 대부분 굴복시켜 몽골제국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제국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분봉(分封)하였다. 이로부터 차가타이, 오고타이, 킵차크, 등의 한국(汗國)으로 분리되었다.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인 툴루이가 다스렸다. 중국을 정복한 뒤 1271년(원종)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었다. 요동지역은 막내동생 우치긴에게 분봉하였으며 고려 침략은 그의 몫이 되었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1218년(고종)에 몽골군이 거란의 유민을 추격하여 고려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04. 몽골(원)의 고려 짓밟기
만주지방에 있던 요나라가 멸망한 뒤에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족이 1211년(고려 희종)부터 몽골의 도움을 받아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지배층의 내분으로 야율유가가 몽골에 투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몽골이 거란을 공격하자 이에 쫓긴 거란의 유민이 1216년(고종) 고려를 침범하였다. 당시 고려는 이들에 의해 개경까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격을 가하여 이들을 서경(평양) 동쪽의 강동성으로 몰아넣었다. 그 사이 몽골은 동진국과 연합하여 거란의 유민을 뒤쫓아 고려에 들어왔다. 추위를 겪으며 군량까지 부족하여 곤경에 처하게 되자 고려에 군량과 원병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몽골의 청을 받아들여 조충과 김취려가 군사를 이끌고 몽골군과 합세하여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섬멸하였다. 그 직후 몽골의 요구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형제맹약을 맺으면서 고려는 몽골에 굴복하고 말았다. 고려는 몽골을 형님의 나라로 섬기며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몽골은 고려에 공납을 강요하였고 고려는 몽골의 과중한 요구와 몽골 사신들의 고압적인 자세에 반발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침 공납을 독촉하기 위해 고려에 파견된 몽골 사신 ‘저고여’가 돌아가는 길에 무참하게 피살되면서 고려의 소행이라 하여 단교하였다.
단교는 곧바로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는 직접적인 명분이 되었다. 그간 1259년까지 29년 동안 7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여 괴롭히다가 원나라 때 고려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40여 년 동안이나 항쟁하였으나 삼별초의 몰락 이후에 갈수록 약탈과 공녀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면서 견뎌내지 못했다. 끝내는 왕자를 인질로 데려가 부마국으로 삼고 왕권까지 좌지우지하며, 왕의 호칭에 충(忠)을 붙여 충렬왕이라 부르면서 충성을 강요하였다. 더 나아가 여몽 연합군을 만들어 일본에 2차례나 원정하였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방어와 바닷길의 높은 파고로 좌절되면서 포기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