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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끝청 주변
一錫來何所 석장을 짚고 어디에서 오시는가
千重雪嶽寒 첩첩산중 차디찬 설악산이라네
山中知有雨 깊숙한 산속에는 비가 내리는지
衣濕未全乾 승복이 젖어 마르지 않았구나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최병준 (역) | 2015
――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 1563~1628), 「포천 도중에 한 승려를 만났는데 설악산에서 왔다 하였다
(抱川道中遇一僧云自雪嶽山來)」
▶ 산행일시 : 2021년 2월 27일(토), 흐림, 안개, 가루눈
▶ 산행인원 : 2명
▶ 산행시간 : 8시간 7분
▶ 산행거리 : 이정표 거리 19.7km
▶ 갈 때 : 동서울터미널에서 06 : 30 출발 버스 타고 한계령에 감
▶ 올 때 : 설악동 소공원 버스주차장에서 시내버스 타고 속초 시외버스터미널로 와서, 우등버스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옴
▶ 구간별 시간
06 : 30 - 동서울터미날 출발
08 : 43 - 한계령, 산행시작
09 : 28 - 1,306.3m봉
09 : 58 - 한계령삼거리(1,353m), ┳자 갈림길
10 : 57 - 1,454.9m봉
11 : 42 - 끝청(1,609.6m)
12 : 09 - 중청(1,664.5m)
12 : 17 ~ 12 : 42 - 중청대피소, 점심
12 : 58 - 소청(1,581.0m)
13 : 34 - 희운각대피소
14 : 00 - 신선대(1,233.1m)
14 : 17 - 무너미고개
14 : 58 - 양폭대피소
15 : 36 - 귀면암
16 : 02 - 비선대
16 : 50 - 설악동 소공원주차장, 산행종료(17 : 00 속초시외버스터미널 향발)
17 : 40 - 속초시외버스터미널(19 : 00 동서울 향발)
21 : 45 - 동서울터미널, 해산
2. 아래는 석고당골
3. 아래는 석고당골
4. 귀때기청 남릉의 상투바위
▶ 끝청(1,609.6m)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했다. 캐이 님과 제임스 님이 무박으로 설악산 독주골을 간다고 하기에 나도 갑자기 설악
산이 가고 싶어졌다. 대룡산을 가자고 하는 메아리 님을 1박 2일 동안 꼬드겨 당일로 설악산을 가기로 했다. 서
둘러 동서울에서 한계령 가는 6시 30분발 첫 버스를 예매했다.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3일
연휴가 시작되고 설악산 대부분의 탐방로가 봄철 산불예방 및 자연자원보호기간으로 오는 3월 2일부터 5월 14
일까지 통제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테고, 한계령 가는 길은 물론 서울 오는 길도 순탄하지 않을 거
라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남양주 요금소를 순조롭게 통과하여 서울홍천고속도로를 무난하게 달리고 인제와 원통, 한계
령 가는 길도 원활하다. 다만, 버스 좌석이 거의 꽉 찬다. 대부분 설악산을 가는 등산객들이다. 그 절반은 한계
령에서 내린다. 나머지 절반은 오색에서 내릴 것이다. 한계령에 오르자 일기가 급변한다. 오는 도중 흐리기는
했지만 푸근하고 시야는 멀리 트였다. 그런데 한계령은 안개가 자욱하고 찬바람은 눈발을 뿌려댄다.
지난주 산행의 느슨한 산행복장 그대로 왔는데 경솔했다. 한계령 화장실에서 등산화 끈을 조이는 등 산행준비
를 마친다. 데크 전망대에 다가가도 건너편 흘림골 등선대는 캄캄 가렸다. 고개 푹 수그리고 108계단 오르고 설
악루와 위령비 지나 돌길을 오른다. 한편, 이런 궂은 날이라야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등로가 발걸음은 즐거
운 험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품을 던다. 오늘은 등로 벗어난 경점을 들를 필요가 없다. 내내 점봉
산도 가리봉도 귀때기청봉도 가린다.
그래도 1,306.3m봉 암릉은 직등하여 석고당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간다. 북사면 내리막은 빙판이다. 앞서
오간 등산객들의 아이젠이 빙판을 쪼아놓은 덕분에 그리 미끄럽지는 않다. 오를 때는 곧 넘어갈 듯 가쁜 숨을
내릴 때 고르기를 반복한다. 안개가 잠깐 소홀한 틈에 얼른 수렴 걷어 들여다본 상투바위가 다른 때보다 더 의
연해 보인다. 이런 때는 사진 찍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거친 숨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한참 진정하여 셔터
를 눌러야 한다.
마른 골짜기를 두 차례 건너며 가파른 슬랩 덮은 데크계단으로 봉봉을 오르다가 산허리 길게 돌아 한계령삼거
리다. 쉬지 않고 대번에 올랐다. 여러 등산객들이 쉬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공터에 배낭 벗어놓고
휴식한다. 국립공원에서 금지한다는 입산주 탁주를 차마 우리만 여러 등산객들이 보란 듯이 마실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술맛은 더 난다. 주변의 설경이 또한 건 안주다.
혼자 와서 이곳 갈림길에 서면 망설이기 마련인데 오늘은 메아리 님과 함께 와서 한결 편하다. 귀때기청봉을
넘어 대승령 지나 장수대나 안산, 십이선녀탕계곡으로도 가고 싶지만 거기는 무엇보다 서울 가는 교통이 불편
하다. 백운동계곡 한 번 들여다보고 끝청을 향한다. 잔 너덜은 눈으로 메운 다음 빙판으로 마감했으니 걷기 좋
다. 줄달음한다. 봉우리 2개를 데크계단과 너덜사면으로 돌아 넘고 돌길 오르막이다.
가도 가도 ‘안개 속 풍경’이다. 원경은 물론 지척도 캄캄하다. 가루눈 뿌린다. 주변의 일목일초가 상고대 서리꽃
을 피웠다. 고도를 높일수록 더욱 가경이다. 그러니 걸음걸음이 바쁘다. 안은 땀에 젖고 밖은 눈에 젖는다.
1,454.9m봉. 날이 맑으면 조망이 빼어난 곳이다. 조금 더 가면 온정골에서 오르는 지능선과 만난다. 작년 늦가
을의 그곳 협곡이 벌써 그립다. 이다음 1,464.8m봉 오른쪽은 독주골로 간다. 캐이 님 일행은 오늘 훨씬 전에 이
곳을 올랐을 것. 눈이 녹아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끝청 오름 길. 눈길이다. 잘 다져졌다. 앞의 설경은 또 어떨까 궁금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많은 등산객들과 만
난다. 그때마다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고서 수인사 나눈다.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남자 등산객 한 분은 우리더러 아이젠을 매지 않고서 어쩌면 그리도 잘 가시느냐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메아리
님에게 나이가 대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갑장이다. 반갑다고 서로 악수한다.
키 작은 관목 숲길 올라 끝청이다. 만천만지한 안개라 사방이 막막하다. 다행히 등로 주변에는 서리꽃이 흐드러
지게 피었다. 숨 한 번 크게 내쉬기라도 하면 그만 상하고 말 것 같은 서리꽃이다. 설국의 산상 화원이다. 원로
를 조심스레 간다. 열 걸음에 아홉 걸음은 가다 말고 구경한다. 중청은 철조망을 둘러친 데까지 오른다. 대청봉
도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 대부분 오색에서 대청봉을 넘어 왔고, 대청봉을 넘어 오색으로 간다. 마주친 등산
객에게 중청대피소가 잠깐이라도 대피할 틈이 있더냐고 묻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두 분 자리는 있을 거
라고 한다.
5. 한계령삼거리에서 바라본 백운동계곡 주변
6. 등로 주변
7. 등로 주변
8. 등로 주변, 상고대 서리꽃이 만발하였다
9. 끝청 가기 전 1,454.9m봉
10. 끝청 가는 길
11. 가문비나무(?)
12. 끝청 주변
13. 끝청 주변
▶ 중청(1,664.5m), 소청(1,581.0m), 희운각대피소
모처럼 중청대피소를 들른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나는 ‘대피소’라는 무지막지한(?) 명칭이 썩 마음에 들지 않
는다. 마치 위급한 상황에 부딪칠 때나 피하는 장소로 받아들이게 되어 그렇다. 예전처럼 산장이라고 고쳐 부르
면 좋겠다. 산장은 즐거운 추억과 한때의 낭만이 깃들었고 앞으로도 그럴 곳이다. 덧붙이자면 오오시마 료오끼
치(大島亮吉, 1899~1929)가 『山-硏究와 隨想』에서 말하는 그런 산장에 가고 깊다.
“거기는 산허리의 경사가 부드러운 곳. 맑고 깨끗한 개울가. 뒤로 날카로운 산마루가 솟고 앞으로 멀리 넓은 들
이 내다보인다. 그리고 저녁에는 나뭇가지와 가지를 낙조가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이 산장은 단순한 등산용 산
장이 아니다. 우리가 여름이건 가을이건 찾아가서 마음을 풀어놓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이것저것 마련된 소박한
휫테(Hütte)여야 한다. 그래서 작은 샬레(Châlet, 오두막)처럼 만들어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 산장에서 난로에 장작을 지피고 둘러앉아 담배 연기로 몸을 감싸며 이야기 꽃을 피울 즐거운 겨울날이
언제 오는가.”
중청대피소 취사장으로 들어간다. 벽면을 마주보고 널찍하게 자리 잡는다. 보온밥통 도시락 꺼낸다. 점심식사
도 속도전이다. 탁주병은 라벨을 미리 떼고, 잔은 노란 양재기가 아닌 컵으로 가지고 올 것을 잘못했다. 어느 해
겨울 치밭목대피소에서 둘러앉아 탁주를 마시려다가 모니터로 관찰하던 공단직원에게 적발된 일이 있었던 터
라 부쩍 신경이 쓰인다. 중청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는 편도 0.6km다. 들르지 않는다. 거기나 여기나 안개 자욱
하여 다를 바 없다.
소청 가는 하늘 길이 트인다. 희운각 쪽으로 가는 등산객은 드물다. 햇볕과 바람이 안개를 몰아내느라 무척 애
를 쓴다. 이러면 놓아두려고 했던 신선대를 다시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발아래 용아능선이 언뜻언뜻 희미한
실루엣으로 보인다. 가경이 트일까 일부러 발걸음을 늦춘다. 소청 지나 희운각 내리는 길은 눈길 1급 슬로프로
변했다. 절반인 돌길은 눈이 메웠고 절반은 데크계단이다. 나는 아이젠을 맸다. 슬로프 한 가운데로 뚜벅뚜벅
내리고, 아이젠을 매지 않은 메아리 님은 생사면의 눈을 지쳐 내린다.
다시 어둑한 안개 속으로 든다. 희운각대피소는 대대적인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그 옆에 간이막사가 있다. 예전
의 희운각대피소는 희운 최태묵(喜雲 崔泰黙, 1920~1991)이 1969년 10월 사재를 털어서 지었다. 그의 호를 따
서 희운각(喜雲閣)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곳에 희운각을 지은 건 다음의 우리나라 등반사에 오래도
록 남을 사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해 2월에 소위 ‘죽음의 계곡’에서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대 10명의 산악인이
눈사태로 매몰되어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3월 3일에야 발굴되었다.
1969.2.25.자 동아일보의 관련기사의 일부다.
“(……) 24일 오후 날씨가 갬에 따라 비선대까지 진출, 전진캠프를 설치했는데 25일 오후에도 조난지점을 목표
로 강행군, 양폭을 거쳐 이날 오후 1시 반 「죽음의 계곡」 어귀에 들어섰으며 2시경에는 조난현장인 一百m 폭
포 밑에 당도, 유류품을 찾고 있다. 조난현장에 도착, 현지답사 중인 수색대원들이 수색본부에 무전으로 보고해
온 바에 의하면 「죽음의 계곡」의 양쪽 가파른 설벽에는 곧 무너져 내릴 듯한 눈 더미가 쌓여 있었고, 계곡은 깊
이를 잴 수 없는 눈으로 덮여 七十m 폭의 눈의 강을 이루었으며, 조난자들이 빙벽등반을 하던 절벽은 十五m가
량의 꼭대기 부분만 남겨둔 채 완전히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의 계곡은 이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은 것이 아니다. 월간 「사람과 산」 2002년 6월호 별책부록
의 ‘설악산’에서 관련내용을 발췌한다.
“양폭에서 희운각으로 오르기 전 좌측의 대청봉 방향에서 내려온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죽음의 계곡에 이른다.
예전에는 고요의 계곡이라고도 불렀으며, 계곡 상부에 30미터쯤 되는 건폭은 본격 빙벽 등반을 해야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전담 씨가 슈타인만(Stein man) 클럽의 회원들과 함께 1956년 여름 천불동 계곡의 천당폭포를 넘
어 이곳을 찾았을 때 소리가 끊기고 갑자기 조용해져서 누군가 죽음의 계곡이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서울로 돌
아와서 등반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마치 죽음의 계곡 같다고 표현했는데 이후에 그 이름이 굳어져 사용되고 있
다.”
14. 끝청 주변
15. 중청 가는 길
16. 중청 가는 길
17. 중청 주변
18. 중청 서쪽 사면
19. 소청 가면서 뒤돌아 본 중청
20. 무너미고개
21. 신선대에서
22. 천불동계곡 주변
▶ 신선대(1,233.1m), 천불동계곡
희운각대피소 주변은 짙은 안개 속이지만 방금 전의 소청에서의 날씨로 보면 신선대는 갠지도 모를 일이다. 공
룡능선은 가지 않더라도 그 첫 관문인 신선대에 올라 겨울의 공룡능선을 보고 싶다. 무너미고개에서 왕복
1.6km이다. 산허리 길게 돌아 골짜기로 내리고 가파른 대슬랩을 오른다. 장갑 낀 손으로 붙잡는 철봉의 핸드레
일이 미끄럽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잡기에는 너무 차다. 이다음의 암릉 직등은 어렵다. 왼쪽의 사면의 돌계단을
오른다. 여전히 안개로 사방이 캄캄하다.
신선대에 내려오는 홀로 등산객을 만난다. 수인사 나눈다. 내가 공룡능선을 타려는 줄로 알고, 마등령 주변은
아침에 비가 많이 내려 등로가 험로로 변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섣불리 신선대는 안
개가 걷혔더냐? 혹은 경치가 어떻더냐? 물었다가 지금 여기처럼 캄캄하더라고 하면 지금껏 깔아놓은 발걸음이
얼마인데 뒤돌아 가야 할 것 같아서다. 모세의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른다.
신선대. 안개가 자욱하다. 가루눈 흩날리고 지척도 가렸다. 암벽 틈에 몇 그루 진달래가 눈을 뒤집어쓰고 지키
고 있다. 혹시나 하고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기다려 보지만 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운하지만 뒤돌아
선다. 무너미고개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내리쏟는다. 천불동계곡 계류는 동면 중이다. 조용하다. 계곡 주변
의 가부좌 튼 천불(千佛)을 구경하며 간다. 여태의 빈 눈을 벌충한다. 놓친 천불이 있을까봐 수시로 뒤돌아본다.
천당폭포도 양폭도 동면 중이다. 데크계단 한 피치 올라 귀면암이다. 귀면암 동쪽 벽에 박혀 있는 동판이 궁금
하여 사진 찍고 확대하여 판독하였다. 안타까운 사연이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이시여!
84.8.21. 홀리 颱風의 怒雨 속에서
登山客의 安全下山을 誘導하다 52才의
나이를 急流에 흘려보낸
故 柳萬錫의 義로운 넋이
머무른 곳이오니 뜻 있는 者 발걸음 멈춰
冥福을 빌자
1984.9.7.
赤十字雪岳山岳救助隊雪岳案內員一同
동판의 故 柳萬錫 씨는 대단한 산꾼이었다. 1981.2.14.자 동아일보의 “山脈 타고 國土縱斷 2000里” 제하의 기사
의 일부다.
“산이 좋아 산에 묻혀 사는 속칭 「雪嶽의 산지기」 두 산사나이가 雪嶽山 大靑峰(1,708m)에서부터 국토의 맨 남
쪽 漢拏山 白鹿潭(1,950m)까지 태산준령을 타고 넘는 국토종단 1천 8백리 답파의 길에 나서기로 하고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다.
雪嶽山에 몸담은 지 19년째인 柳萬錫 씨(50)와 7년째인 길길도(吉吉道) 씨(28)는 산에서 닦아온 야성의 연륜과
패기로 팀워크를 이뤄 ‘太白산맥에서 小白산맥으로 이어지는 해발 평균 9백m의 산등성이를 계속 타고 木浦에
도착, 다시 漢拏山 정상까지 걷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막아놓은 잦은바윗골, 설악골, 토막골을 차례로 들여다보며 간다. 악우들과 함께 거기 올랐던 때를 회상하는 것
이 퍽 즐겁다. 비선대. 장군봉과 적벽을 우러르고 어둑해진 숲길을 간다. 미산 한장석(眉山 韓章錫, 1832~1895)
의 「천불동에 들어가서(入千佛洞)」의 일부다. 금강산의 천불동이나 이곳 천불동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본다.
未信壺中藏日月 호리병 속에 일월 들어 있단 말 믿지 않았는데
誰敎天上起樓臺 누가 하늘 위에 누대를 서게 했는가
名山自是初看好 명산이 이제부터 비로소 보기 좋으니
兩岸桃花待我開 양 언덕 복사꽃이 나를 기다려 피었도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김영봉 (역) | 2015
호리병 속 일월은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
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는 하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曹溪仙風始源道場雪嶽山門’이라는 거창한 현판의 일주문을 나와 설악동 소공원 주차장이다. 시내버스는 20분
마다 있다. 동서울은 속초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 한다. 시내버스는 시내를 관통하여 40분 정도 걸린다. 터미널
맞은편 음식점에서 제육볶음으로 저녁을 먹는다. 반주는 태백산(太白産) 가두리 더덕주다. 산행시간이 예상보
다 덜 걸렸다. 서울 가는 우등버스를 20시로 예약하였는데 1시간이나 남았다. 매표소에 가서 그 앞의 버스표가
있는지 물었더니 19시에 출발하는 버스표가 딱 두 장이 있다고 한다. 운이 좋다. 맨 뒷좌석이다. 오늘의 산행을
떠올리며 졸 일만 남았다.
23. 아래 건물은 양폭대피소
24. 천불동계곡 주변
25. 칠선봉 릿지
26. 천불동계곡 주변
27. 왼쪽이 귀면암
28. 천불동계곡 주변
29. 비선대에서 올려다본 장군봉
30. 왼쪽이 장군봉이고 오른쪽은 적벽
31. 설악동 소공원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