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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수도회] 인내하는 거룩한 인생 순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12,4-7.11-15
† 복음 마르 6,1-6
★ 오늘 독서에서는 히브리인들에게 시련과 인내에 대하여 독려한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제1독서)
★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능력에 놀랐다. 그러나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태도에 놀라셨을 만큼 사람들은 가까운 진리에 걸려
넘어졌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내가 나쁜 여자일까요? 내 남편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편이 능력
있고 성실하며 자상한 성품이라고 칭찬하면서 그이를 잘 만났다고 해요.
그런데 가정에서는 조금도 아니거든요. 밖에서는 그렇게 친절하고
헌신적이며 인기가 좋은데 나와 아이들에게는 너무 아닌 거예요. 아이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도 모르고 살아요. 말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 붙들고
있거나 컴퓨터 게임만 하고 ……. 하숙생 같아요. 그러니 늘 가정불화가
생기는 거죠.”
본성상 남자는 가지지 못한 것을 얻어 내려는 외향성이 강한 반면, 여자는
가진 것을 지키려는 속성이 강하다고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건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함께 사는 가족을 비롯해 친구, 이웃, 관심 있는 대상 등을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 지지하는 것이 조화로운 삶의 기초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적 삶을 존중하기보다는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에 더 주목한다. 내 가족이나 이웃보다는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얼굴을 우상처럼 더 믿는다. 영웅은 보이지 않은 커튼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래서
유명인사일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성품에 대해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사람의 미래는 변화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살아온 삶은 이미 발자국으로
남아 있어 현재와 미래의 성향을 검증하는 거울이 된다. 함께 살아온
이에게는 자신의 인간성과 품성을 속이지 못한다. 위대한 예언자로 등장한
이가 자기 동네 청년이라면, 그의 됨됨이를 알고 있어 더욱 좋지, 기저귀
차던 시절의 눈으로 볼 이유가 무엇일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빛의 순례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뉴튼수도원 86일째),
히브12,4-7 마르6,1-6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빛의 순례
장차 출간이 기대되는, 신앙적 관점에서 내용과 사진이 잘 정리 조화된
황석선루치아(사진작가) 자매의 책 제목이 좋아 강론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빛의 순례' 말마디가 곱고 아름다와 마음을 환하고 설레게 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부단한 탈출의 여정이 빛의 순례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의 삶은 '빛의 순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2.3일 창밖이 환해서 눈뜨니 새벽 1:30분, 달력을 보니
음력 12.15일 보름입니다.
보름달이라 그리도 밝았습니다. 주님의 달빛이 저를 깨웠습니다.
끊임없는 빛의 순례 중에 있는 달은 해와 더불어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마침 카톡 소리에 눈떠 열어보니 '立春大吉'이란 문자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2.4일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입니다.
입춘대길의 기운을 품고 크게 좋은 날인 입춘날에
'봄'이 되어 뉴튼수도원을 떠나니 참 의미가 깊습니다.
빛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빛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나 공동체는 닫혀있는 섬이 아닙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하여 자기로부터, 공동체로부터 빛을 향한
부단한 내적 탈출이 절박합니다.
이래야 빛이신 하느님 향한 활짝 열린 생명과 빛의 삶입니다.
빛의 순례중 첫째 요소가 하느님입니다.
빛의 하느님을 향해 부단히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시련에 상처 받지 않습니다.
시련에 좌절하지도 않고 '시련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 또한 빛의 순례 중의 한 과정일뿐 시련을 견뎌낼 힘도 생깁니다.
시련은 하느님의 훈육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아, 빛을 향할 때,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달려갈 때 이런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우리의 부단한 탈출을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맥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내적 탈출과 더불어 영육의 치유요 활력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마치 고립된 섬같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에 놀라 열리는듯 하나 곧 닫혀 버립니다. 온갖
회의와 더불어 마침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문을 닫아 버리는
순간 고향 마을은 하나의 무덤이, 감옥이 되어 버립니다.
어제의 순간적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수도자의 방이 흡사 감옥처럼, 무덤처럼 보였습니다.
도대체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묻게 됩니다. 방이든
개인이든 공동체든 닫혀 빛에 차단되면 어둠의 감옥이자 무덤이요
죽음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어찌보면 고향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기적은 없습니다.
이렇게 편견으로 닫혀있으면 주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하여 예수님도 별
기적을 행하지 못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워 하시며 그들을
떠나십니다.
빛의 순례중 둘째 요소가 빛들의 연대(連帶) 공동체입니다.
혼자 고립단절되면 개인도 공동체도 끝없는 '심연의 늪'이 되어버리고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섬같이 떨어져 있어도 내적으로는 앞문은 세상을
향해,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려 연대의 빛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서로 연대하여 공동체를 형성하여 빛의 순례 여정에 올라야 삽니다.
혼자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존재이유도 존재의미도 정체성도 완전 실종입니다.
아무리 좋은 구두도 한짝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이 되고, 묵주알도
줄에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쓸모가 없어져 버리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끊임없는 빛의 연대를 향한 탈출만이 살 길입니다.
제가 사막 같은 수도원에 있어도 내적으로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앞문은 세상의 형제자매들과 이렇게 말씀을 나눔으로
주님 안에서 협의(狹義)의 수도공동체에 이어
광의(廣義)의 연대공동체를 이루기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예수님 역시 혼자가 아니라 늘 제자들의 공동체와 함께 했으며
여러 마을의 믿는 이들과 광의의 연대 공동체를 형성했음을 깨닫습니다.
빛의 순례 중 셋째 요소가 질서있는 삶입니다.
무질서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외적질서와 상응하는 내적질서입니다.
나름대로 리듬에 따른 규칙적인 삶이 제일입니다.
이래야 고립단절의 섬이 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의 규칙적인 삶의 일과표가 현실적 지혜입니다.
'회개의 시스템화', '탈출의 시스템화'가 바로 일과표이기 때문입니다.
내적 탈출을, 내적 회개를 부단히 실현시켜 주는,
빛의 내적 순례를 가능케 해주는 수도원마다의 일과표가 그 좋은 예입니다.
이런 일과표에 따라 살아야 '자기의 늪'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언뜻 보면 외적으로 무질서해 보여도 밤의 외딴곳에서의
관상기도와 낮의 사목활동이 규칙적 리듬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빛의 하느님, 빛의 연대(連帶) 공동체, 일과표에 따른 탈출의 시스템화,
모두 빛의 순례에 결정적 요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중 1독서 히브리서를 통해 빛의 순례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신신당부하시며 또 이렇게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1.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2.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3.
부주의하고 무분별한 삶으로 혼란을 일으켜 주위 사람들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시편34.9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인내하는 거룩한 인생 순례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마르 6,1-6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인내하는 거룩한 인생 순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업적을 보고 매우 놀라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향사람들과 친척들은 장인으로
통했던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기
어려웠음을 말해주지만 결국 그들은 불신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6,3).
거져 굴러들어온 복덩어리를 발로 걷어 차버린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이 무디고 믿음이 없는 그들을 보시고 ‘놀라셨다’(6,6). 그러나
그들을 꾸짖거나 그런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분노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견뎌내시며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6,6) 예수님께서는
인내로써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거룩한 순례의 모범을 통해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고자 하신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12,14) 인내는 거룩함의 속성이요 순례자의 중요한 삶의
태도이다. 인내(?πομον?)는 성서적으로 하나의 종말론적인 태도로서
견고히 섬, 기대나 기다림을 뜻한다. 인내는 하느님을 향해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2테살 3,5). 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균형을
이루는 그리스도께 대한 한결같은 고대를 뜻한다. 묵시록에서도 인내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 고난과 박해를 참는 것으로 본다. 또한 인내란
세상을 향하여 굳건히 견디는 것을 뜻한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인내는
믿음과 소망에서 나오며, 악하고 불의한 현시대에서의 견딤을 나타낸다
(로마 12,2; 1코린 3,7).
인내는 선행을 만들어 내며(로마 2,7), 시련을 통해 믿음이 강해지고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내는 참고 견디어내며
기다리는 능력이다. 그것은 일상에서의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참는
능력이다. 인내하는 사람은 감정에 따라 반사적으로 행동하거나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마음속에 하느님 뜻에 맞는 목적을 간직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처리해
나가는 사람이다. 인내의 열매는 일이 잘 될 때보다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맺어진다.
인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배반 앞에서도 사랑으로 기다리고
받아주는 하느님의 마음이다. 인내란 내 사고의 틀에 다른 사람을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인내란 일부가 아닌
약점과 결점까지도 포함한 전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내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그
무엇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여 대신 속죄할 마음까지
갖는 것이다. 인내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인내란 '하느님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인은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그 어떤 불편 가운데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 누구 앞에서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아픔 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를 외치며 살아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거룩함이요, 순례자의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사람들과 친척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으시고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6,6)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인생길도 예수님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더라도 침묵
중에 인내하며 걷는 나자렛에서 갈릴래아를 향한 사랑의 순례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굳게
믿으며 매순간을 기적으로 체험하는 순례의 길을 떠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연중 제4주간 수요일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지난 주일에 ‘청소년 사목 희망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젊은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미사는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에서 있었고
‘서울교구, 수원교구, 의정부교구, 광주교구’의 젊은이들과 신부님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는 젊은이들의 공연과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가 제 마음에 깊게 남았습니다. ‘세상은 2G, 3G를 넘어서
광대역 LTE로 가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까지 공중전화를 고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셨고,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꿈을 펼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정성과
마음을 기울여 ‘청사희망’이라는 공연을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은 그동안
21차례의 공연을 하셨고, 2030년까지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끼’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젊은이들을 보니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신부님의 바람처럼 청소년들이
교회의 울타리에서 신나게 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원, 경쟁, 공부,
성공’이라는 벽에 갇혀서 숨막혀하는 청소년들이 ‘자유, 소통, 꿈,
나눔’의 날개를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당 단위로 부족하다면 지구차원에서 연대하면 좋겠습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사목센터를 더 많이 만들고, 청소년들이 소통할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하면 좋겠습니다. 성공과 출세라는 목표를 향해서 아이들을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는 너무나 큰 에너지의 낭비입니다.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경쟁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넘어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꽃밭에는 서로 다른 꽃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장미, 채송화, 코스모스, 나팔꽃’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율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는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자유는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위와
질서라는 벽에 갇혀있는 분들의 눈에 자칫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신부님과 젊은이들의 공연은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고, 좋은 대학교에 가서 취직을 하고 돈을 많이 벌면 되는
것이라는 ‘틀’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시간낭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시련과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서는 어쩌면 시련과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성서는 그런 시련과 고통 속에서 부활의 꽃이 핀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욥은 하느님을 섬기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욥은
건강과 자녀를 축복으로 받았고 많은 재물을 얻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악한 세력인 사탄은 하느님과 내기를 합니다. 만일 욥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면 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탄에게 말을 합니다. 욥의 목숨을 제외하고 그가
가진 것들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때부터 욥은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재물도, 가족도, 건강도 잃어 버렸습니다. 욥은 탄식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더욱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욥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결국 욥은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욥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사탄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단식기도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인 사탄은
극도로 지친 예수님께 와서 유혹을 합니다. 이것은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3가지 유혹입니다. 배고픈 예수님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이야기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말을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지켜 줄
것이니 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보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말을
합니다. 나에게 절을 하면 나에게 무릎을 꿇으면 이 모든 것을 주겠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성서는 이야기 합니다.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나갔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 사탄은 가장 큰 유혹을 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악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로마의 총독은
황제를 섬기려 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악은 분명하게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빈
무덤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악이 이긴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악의 세력이 물러났지만 아직
영적인 전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선하신 하느님을 따르려는
사람들과 악의 편에 서서 세상을 악으로 물들게 하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늘 긴장하고, 악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래로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의 유혹은 시간을 따지지
않습니다. 공간을 정해 놓지 않습니다. 악의 유혹은 게으른 사람에게도
성실한 사람에게도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도 계속되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악의 유혹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2.04.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르 6,3)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놀랍니다.
"정말 놀랄만한 지혜구나.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은 것일까?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데 이런 훌륭하고 좋은 일을 바라보며 놀라면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네요.
왜 지혜와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출신성분을 문제시하며 못마땅해 할까요?
예수님이 마을 유지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도 어떤 사람의 선행이나 훌륭한 가르침을 접하고서도
그 사람에 대해 존경과 신망을 보내기보단 "알고보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더라"는 풍문 때문에
그 사람의 선행과 훌륭한 가르침마저도 못마땅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치 말고
그사람의 행동이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겠습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사람이라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그 사람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과소평가 말아야겠지요.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해야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해서야 되겠습니까?
말씀 사랑을 전해주는 이가 신부님이든 수사님이든 평신도이든
그에 따라 말씀의 가치를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가 말씀사랑의 실명을 밝히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말씀 자체이지 그 말씀을 전해주는 이가 아님을
명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하늘로 부터 옵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마르 6,1-6)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하늘로 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야 할 정부와 여당이 정책혼선으로 오히려 국민이 정부를 걱정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정책이 입안되고 문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였을 때
서슴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지도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상식선으로 말고 깊은 신뢰로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 상식선으로 말고 깊은 신뢰로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 이런 말은 정말 모두에게 맞는 말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외에 지식 상식 그리고 느낌 신뢰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단순 간단한 게 아니라 참 미묘 복잡하다는 것 누구나 압니다.
내 자식 내 사랑이지만 너무 아는 체 하고 큰소리내면 괴롭히는 겁니다.
내가 좀 아는 관계라며 내 마음대로 하다간 귀한 관계를 잃게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인간들의 상식선으로 말고 깊은 신뢰로 다져 나갑시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코 6,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알고 보니 그것은 사랑
2015년 나해 2월4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알고 보니 그것은 사랑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아주 특별한 서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읽을수록 ‘알쏭달쏭’, ‘아리까리’해지는
재미있는 성경입니다. 수많은 성경학자들이 히브리 서간의 저자가
누구인가 규명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바오로? 바르나바? 필립보? 이 사람 저 사람 추정을 해보지만
오리게네스의 대답이 가장 정확한 듯합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다른 서간과는 달리 서간 첫 부분에 통상적으로 삽입되는 인사말도
없습니다. 편지의 발신인도 수신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수신자들이 히브리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가 활발히 복음을 선포하던 시절 수많은 유다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 나가던 시절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유다인만 3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개종 작업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분위기였는데,
지상천국이 조만간 도래할 듯한 예감이었는데...화려한 기적과 치유는
잠시뿐 이제 고통스럽고 지루한 광야 여정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상심이
컸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둘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누군가’가 이 히브리 서간을 쓴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을 읽다보면 때로 지나치게 강한 경고 말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고 말씀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어 감동적입니다.
요즘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한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저 좋은 관계로
지내는 것? 서로의 한계나 취약점을 외면하며 지내는 것? 때로 쓴 소리를
좀 하고 싶어도 관계가 깨질까봐 덮어두고 지나가는 것?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양보하고 적당한 선을 그으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한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그릇된 판단을 할 때,
그래서 길이 아닌 길을 갈 때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직언’을 해주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그의 새 출발과 쇄신을 위해서 때로
진심에서 우러난 충고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히브리서도 명확히 적시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히브리서 12장 7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매일 매일 시련과 환난의 거친 환난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에게 위 말씀을 참으로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에게 예방주사를 맞히듯이 더 혹독하게 단련을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답니다.
우리는 그간 채찍질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분노요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당신
아들로 인정하는 표시가 채찍질이었습니다. 또한 그간 힘겹게만 느껴졌던
시련과 단련이 사실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지상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역경 앞에 설 때 마다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마다 기억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우선 당장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충만한 결실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올 때 까지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목표를 올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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