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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4월이 가고 있습니다. 날씨도 들쭉날쭉하더니 이제 좀 안정이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봄 가뭄이 없다는 것도 다행이고 복입니다. 아직은. 낮 기온이 다시 오르려고 하는데 얼마나 올라갈지, 우리 물가보다 더 올라갈지, 그러잖아도 열나는데 땀 흘리며 계절의 여왕을 맞아야 할지, 기대가 됩니다. 심판이라고 떠들었는데 심판을 한 것인지, 심판을 당한 것인지 아직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아우성만 요란할 뿐 뭐 되는 게 없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그 밥이 그 밥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기분입니다. 내려가는 것은 오로지 출산률뿐인 듯합니다. 이게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지 깨닫지 못한 모양입니다. 모두 자기 시대에 해결하려는 욕심만 있으니 감감합니다.
세상이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저 멀리 전쟁의 바람은 그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뉴스로 생사를 걸고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여기는 여기대로 힘들지요. 그래도 강산은 세월 따라 계절 따라 잘도 가는데 우리네 삶은 어찌 따라가기가 이다지도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게 사람 때문입니다. 꽃들은 때를 따라 피고지고 산들은 초록으로 물들어갑니다. 그렇게 우리네 마음도 시원해지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으니 다행이고 희망이 있습니다. 포탄이 오가는 하늘 아래 있지 않다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떵떵거리던 사람들도 다 땅에 묻힐 것입니다. 살아남으면 이기는 겁니다. 버텨야지요. ㅋㅋ
4월이 가고 있습니다. 다시 희망을 심어야지요. 건강하게 마음만이라도 하늘을 담고 신나는 주말을 맞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합시다. ^)^
2024년 4월 27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 : 36 - 37)
<댓글부대>
자식들도 아비의 말보다는 신문이나 인터넷에 떠다니는 뉴스를 더 신뢰합니다. 그만큼 언론사의 보도를 더 의지합니다. 부모의 말이 경험에 의한 실제 효력 있는 자료라 하더라도 언론사의 언급을 훨씬 강하게 신뢰합니다. 그러니 언론사의 보도는 그 책임을 더 무겁게 져야 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도되는 내용 가운데는 독자나 시청자의 제보에 의해서 꾸며진 것들도 꽤 됩니다. 문제는 그 제보에 대하여 확인이 제대로 되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자칫 ‘특종’에 현혹되어 어설픈 확인으로 사회에 문제와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로 인한 피해는 특정 개인일 수도 있고 단체나 기업 또는 사회 전반에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보 공유나 의사소통이 여러 가지 유익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SNS라는 금세기 문명의 이기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세상 많은 사람들의 이용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한 영향과 더불어 악영향 또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소위 ‘악플’로 인하여 목숨까지 내버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고 유익한 정보들을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통해서 주고받습니다. 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댓글이 때로는 힘도 되고 위로도 되고 격려도 됩니다. 반면 악플을 접하고는 실망과 낙심 나아가 우울증까지 유발시킵니다. 결국 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강제추방까지 몰립니다. 까짓것 지우면 그만이지만 일단 상처 받으면 오래 남습니다.
사람들이 유익한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전에는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한없이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매개로 돈까지 버는 직업인도 생겨났습니다. 이름 있는 유튜버들은 웬만한 직장인보다도 벌이가 높은 줄 압니다. 아무튼 이런 정보 산업이 이제는 어느 기업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 또는 소규모 모임조차도 조그만 방에서 아니면 길을 돌아다니면서도 사업을 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대형 언론기관에 특별한 정보를 매매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정보산업 사회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신문이라는 구식 정보 전달 수단이 여전히 작용합니다. 종이와 문자로 이루어진 정보 전달은 나름대로의 이점이 있습니다.
모니터가 이루지 못하는 신문만의 이점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점은 상시상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면이 사라지면 다시 찾아내야 하는 수고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항상 옆에 두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없어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고 옆에 두고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신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신문의 위력이기도 합니다. 그 일간지의 톱기사라면 대단한 힘을 지닙니다.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특별대우를 받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열심히 찾아다니는 거겠지요. 유명한 대기업이 혹 자사 내에 몰래 댓글부대를 설치하고 여론을 조작하여 회사의 가치를 높이고 매상을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보를 받습니다. 그야말로 특종이지요. 유명해지려면 유명인사를 붙잡아 쓰러뜨리면 빠릅니다. 그렇게 잘 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확인 제보이면 어떻게 되지요? 아니 이미 기사로 나가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데 잘못된 정보라면 결과는 뻔합니다.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는 사회적 비난을 받을 것이고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쫓겨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된 것인지는 또 어떻게 증명합니까? 제보자를 추적합니다. 쫓아다닌 결과 알아보지만 자신도 이게 정말인지 가짜인지 헷갈립니다. 그런데 하는 말을 들어보니 기막힐 일입니다. 사람들은 진짜를 믿을까요, 진짜 같은 가짜를 믿을까요? 그래서 나온 결론은 가짜가 섞인 진짜를, 반대로 진짜가 섞인 가짜를 더 잘 믿는다는 것입니다. 곱씹어볼 만한 말입니다.
때로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보기도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일까? 자신이 보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본 것에 대해서조차 확신하기 어려워집니다. 어쩌면 그래서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증거 채택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이 힘을 얻겠지만 때로는 보았다는 그 사람의 목격한 것이 불분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듣고자 하는 것을 들으려 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시험해볼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어보면 됩니다. 인쇄된 글자대로 읽어야 하지만 한참 가다보면 조금 다르게 읽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나타난 글자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읽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야기 흐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기야 이런 문명의 이기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은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짐작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화면 따로 생각 따로 가기도 합니다. 미안하지만 관객도 매우 제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려한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나는 활극도 아니고, 속 시원한 전투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 따라가다 스르르 눈을 감을 수도 있습니다. ㅎㅎ 그냥 궁금해서 보았는데 머리 굴려보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영화 ‘댓글부대’(Troll Factory)를 보았습니다.
언제 이루시나? )
모든 국가에는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있습니다. 꽃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도 그것을 나타내려는 상징물이 있습니다. 옛날 독일의 나치즘을 나타내는 상징물은 아마도 다 잘 알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오히려 절이나 불교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상징은 초승달입니다. 20세기 칼 맑스의 사상을 기초로 세워진 나라 소련의 깃발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농부와 공장의 노동자를 대표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현실로 나타난 것은 그들을 짓밟고 소수 독재자를 배불리는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공산주의 나라들이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상징이 표현하고 있는 유토피아가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유대교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잘 아는 다윗의 별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의 상징은 누구나 잘 아는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시기에는 십자가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전 1 : 23절에서 말씀하듯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자기의 신분을 은밀히 전하려 사용한 것은 물고기였습니다. 헬라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문장의 각 단어 앞 글자를 모으니까 물고기라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십자가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어머니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그가 꿈을 꾸었는데 ‘십자가로 승리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그 후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우리는 금방 그 위에서 못 박혀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러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매우 상반되는 일이지요. 무시무시한 형틀, 그 누구도 가까이하기 싫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주님이 계셨기에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형벌이라는 십자가에 우리 주님이 달리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셨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고전 1 :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이제 그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1. 그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대속’이라는 말이 일반 세상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유독 우리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뜻은 ‘대신 갚는다,’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었습니다. 왜 죽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롬 6 : 23 “죄의 삯은 사망” 곧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답은 간단합니다. 죄 값을 치르면 되는 것입니다. 대속이란 바로 그 값을 대신 치렀다는 뜻입니다. 대속이라는 말보다는 흔히 속죄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실 그 말은 구약시대 말입니다. ‘속죄'라는 말은 죄 값을 치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은 속죄제를 거행하게 하셨고 속죄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는 생명을 요구하였고 그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씀하셨기에(레 17 : 11) 짐승의 피를 받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려면 반드시 속죄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속죄제를 드렸고 사람을 대신하여 짐승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것은 단지 예표이며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해마다 때마다 드려야 했습니다. 히 10 : 3 - 4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언제까지 이 제사가 유효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당신의 몸으로 드릴 때까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당신의 몸으로 친히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러준 것입니다. 히 10 :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그리하여 그 말씀대로 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일이고 성경에 기록하여 전해주셨습니다. 사 53 :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멘! 창세 때에 이미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하셨고 남자의 몸을 거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이 속죄의 일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여러 곳에서 증거합니다.
갈 3 :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이 ‘속량’이라는 말도 ‘값을 치르고 놓아준다,’는 말이니 대속과 비슷하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 값을 치르고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벧전 2 :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아멘!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지요. 벧전 3 :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다시 좀 더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기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 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마땅히 거기 내가 달려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달리셨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롬 5 : 8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2. 그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엡 2 : 14 - 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죄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으로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는 말씀이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화평 즉 화해는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죄의 용서 없이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17 - 19절에서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아멘! 그리하여 우리가 감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손님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권속이고 식구이며 시민입니다.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전쟁 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두 팔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동생이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이 나서서 용서를 구합니다. 국가는 그가 얼마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였는가 참작하여 그의 동생의 목숨만은 살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 형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형이 되는 것입니다. 롬 8 :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시니 우리의 맏형이 되어 동생 된 우리들을 살리려 간청하셨습니다. 롬 8 :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멘! 우리가 양자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친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동생 된 우리들을 살리려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형의 공로를 생각하여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대면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도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직접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히 4 :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이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없다면 하나님의 용서 또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갈 6 :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의 은총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3. 그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오실 수가 없습니다. 사 59 : 1 - 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즉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떼어놓았고 분리시켰습니다. 담이 생겼고 불화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요구합니다. 형벌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고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 담을 헐어야 합니다. 관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방법은 죄를 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노의 담을 쌓았습니다. 이 담이 허물어져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허물 수 있느냐? 엡 2 : 14 - 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아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운명하시던 그 순간 성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 27 : 50 - 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둘로 찢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보다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 10 : 19 - 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땅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동안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졌던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롬 1 :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유대인 헬라인 즉 이방인, 이 차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한 하나님의 백성이고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땅위에 아직도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종차별 남녀차별 빈부차별 지방차별 신분차별 등등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되어야 할 담들입니다.
초대 교회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습니까? 주인이 나와서 예배드리고 그 종도 함께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던 빌레몬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내용은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니 용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맞아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적질하고 도망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주인에게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당연히 주인의 손에 죽을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면 사람들 사이의 불가능한 문제도 통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사람들과의 진정한 화목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그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골 2 : 13 - 15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아멘! 우리는 근본 죄인들이었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육체로도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옛날 한창 인기 있던 사극에 비유한다면 살생부에 그 명단이 올라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이 홀로 지고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의 목록을 도말하였습니다. 지워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전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의인의 반열에 우리를 세워주셨고 종이 아니라 자녀의 명단에 넣어준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서 나온 것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쳐다보기도 싫었던 십자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던 그 십자가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죽음이 있었지만 또한 놀랍고도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 죽음 뒤에 부활의 승리가 따라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망 권세를 깨뜨린 주님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또한 그 십자가를 즐거이 지고 주님을 따라가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할!
여기까지가 여태 예수님 다녀가시고 난 2천 년 동안 지녀왔던 믿음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고난을 기리며 사순절을 지키고 부활절을 지켜 왔습니다. 그렇게도 과거의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물론 과거의 사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시간은 앞으로 갑니다. 우리도 앞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 앞에 주님의 오시는 시간이 닥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2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임의로 시간을 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경계를 해야 합니다. 처음 오셨을 때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눅 12 : 56 - 57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당시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자기네 눈앞에 있었는데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으로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더구나 그 백성이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얼마나 기막힐 일입니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선민이라 하던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을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백성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들,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알아볼까요? 그게 소망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알아보겠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초림 때처럼 못 알아본다면 그들처럼 버림받을 것입니다. 한 평생 하나님 부르며 신앙생활 했다고 해도 말짱 꽝 되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전후 사정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신앙생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자기 좋을 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러지 말기 바랍니다. 물론 여태 다른 교회에서 그렇게 신앙해 왔다고 해도 더 이상 그러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래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알고 신앙생활 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그 분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과거 기념하는 신앙에 매이지 말고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기 바랍니다. 왜 돌아가셨습니까? 왜 다시 오신다고 합니까? 그 분명한 목적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신앙해야 할 것인지 명확해집니다. 히 9 :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말씀 안에 주님이 오신 목적과 오실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초림, 처음에는 왜 오셨답니까? 죄를 담당하시려고. 두 번째 왜 오신답니까?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맞지요?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며 신앙해야 합니다. 기념만 하지 말고 기대하며 신앙생활 하기 바랍니다.
그 날짜는 모릅니다. 마 24 :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지만 그 오실 징조는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시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 마지막 때에 대해서 질문하였고 예수님이 답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답이 있기 때문이지요.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래서 예수님이 4절부터 길게 그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매우 중요하지요? 그런데 몰라도 되겠습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모르면 시대를 분변할 수 없게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신앙생활 이제는 끝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예언 곧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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