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일기
4일과 9일이 양양 장이란다.
워낙 장을 좋아하니 한번 가보라고 주위사람들이 권한다.
예전에 양구에 근무할 때였다. 근무처 가까이 장터가 있었다. 5일과 10일-. 천치같이 워낙 숫자놀음에 둔한 내가 그 장을 어김없이 기억하는 것은 5의 배수니 얼마나 쉬운가!
그래서 양구에서는 늘 장을 잊지 않고 장 구경을 나가곤 했다. 물론 나뿐만 아니다. 기관장들이 오후면 너 나 할 것 없이 잠깐씩 장을 들린다. 생필품이 없어 산다고는 하나 대개는 그 장에서 삶의 맛을 더불어 느껴보기 위함이 아닐까? 얼마나 신선한가!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성 있는 얼굴처럼 시장 양쪽 옆으로 쪼그리고 앉아 두부면 두부, 고구마 줄기면 줄기, 노오란 병아리면 병아리들을 앞에 놓고 자기 물건만이 최고라고 설명하는 모습은 너무 재미있고 신선하다.
물건값 역시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차이가 난다. 대개는 깎아주는 편이다. 철새나 어류들이 기류를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장을 따라 다니는 장돌뱅이들의 익살스런 모습들은 장터를 돌면서 이골이 나 있다.
어제 양양 장에서 만난 찐빵, 감자떡, 튀김을 차에서 파는 아줌마도 양구 농협 앞에서 만난 아줌마였다. 담임반 학생들 주려고 5 천원씩 사가면서 늘 다툼이 벌어졌던 아줌마! 몇 개씩 더 넣어주어 내 깐에는 무엇이 그리도 많이 이윤이 남는다고 그러느냐고 안 된다고 하면 굳이 넣어주던 아줌마-.훈훈한 이야기가 내게 양식처럼 남아있다. 그때도 어디서 장을 보러 오시느냐고 궁금증을 털어놓았더니 동해안 거진이란다. 그곳이면 예전에 근무하던 곳인데 아직도 바다가 푸르냐고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시장을 가면 그곳을 들려오는 게 습관처럼 되었다. 심지어 어느 장날에 그 자리가 텅 비어 있으면 장을 보고와도 마음이 허전하고 여러가지 걱정들이 불순물처럼 나를 괴롭혔다. 어디가 아프신가? 아니면 한바탕 아저씨와 다투셨나? 그 아저씨가 차에 앉아서 반죽을 계속 해대고 아줌마는 핫도그를 신기하게 만들어 낸다. 너무 반가운 날이었다.
어느 날 색깔 있는 감자떡을 먹어보라고 해 간이의자에 앉도록 하질 않나, 어느 날은 텔레비젼에 나와 딸 가정교육을 한 아버지의 모습이 천연 선생님 같다고 혹 딸이 미국에 가지 않았느냐고 분에 넘치는 질문을 하던 장돌뱅이 아줌마는 늘 작은 키에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 아줌마를 양양 장에서 만났다. 작달막한 키에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은 아줌마를 본 것은 내 측이었다.
워낙 기대를 크게 먹고 와서 그런지 실망 또한 컸다. 장터에서 먹은 순대국이 실미지근한게 비계며 순대가 알토란같지 않았다. 국물 또한 멀개서 한참을 막국수처럼 이것저것을 넣었지만 끓이지 않으니 깊은 맛이 울겨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춘천 팔호광장 동부시장 지하의 순대국 맛을 보라! 가히 일품이다. 오지 뚝배기에 단 한 그릇이라도 가득 넣고 끓여주는 맛에 비견하면 너무 떨어진다. 또 양양이라는 특유의 제품이 없다.
시골 아낙네들이 산에서 캐 온 상품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장을 따라 헤엄치는 자들의 물건이 아닌가! 오미자차를 파는 한약재료 아저씨도 그렇고, 골동품 파는 아저씨도 서울 인사동에서 오신 분이다.
그래도 환한 감색 침 담근 감이나 홍시가 장을 장식해 다행이었다.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젖무덤처럼 아주 품종이 유별나게 큰 감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내가 사온 것은 인삼 벤저민이었다. 그 화초가 워낙 비싸 늘 사고 싶었던 것인데 유별나게 싸게 주어 샀다.
양양 장을 돌면서 주민들을 유심히 접근해 예전부터 맨발로 십리를 뛴다는 영동의 하와이 사람의 근성을 엿보려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를 했지만 좀처럼 발견할 아무것도 없었다. 국거리를 산다고 하니까 김장배추 파는 아줌마가 비싼 배추가 아닌 통배추를 천원에 주고 무우도 단단한 놈을 세 개에 2천원을 받아 어찌나 미안한지-.아줌마! 배추 한 30폭 정도는 사드려야 하는데 죄송해요!! 아니예요. 다음에 또 오세요 하는 수줍음에 냉한 추위가 마냥 포근했다.
사과 만 원어치를 파는 아저씨에게 아내가 먼 춘천에서 장 구경 왔다고 많이 달라고 하자 두개를 더 넣어주면서 우린 대구에서 왔는데 누가 머냐고 반박해 박장대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훈훈한 손길과 다듬어지지 않은 대화, 그리고 저마다 색다른 미소가 있는 장이기에 나귀가 없어도 늘 장날하면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주머니가 비어있는 사람도 들리고 싶은 곳이 아닐까?
마지막 공터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품이 있었다. 아니 농협에서도 느꼈다. 보리가루로 만든 건빵이 세 봉에 천원이니 얼마나 저렴한가! 늘 그것을 많이 사와 수능 보는 녀석들이 도서관에서 문제를 풀 때면 나누어주던 메뉴였다. 그 건빵이 이곳에서 한푸대에 오천 원이라니 -.무엇이 남을까? 신발도 말표 겨울 슬리퍼가 단돈 만원이란다. 그것을 또 빼달라고 하자 중국산들이 밀려와 이 정도 다운해 판다며 단돈 십원도 뺄 수 없다고 해 머쓱해서 산 아내가 이날 따라 날 웃겼다.
네시가 넘자 벌써 어둠이 서성거려 귀향하면서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보지 않던 낙산사 경내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온통 산불로 나무들은 지옥의 경내에 서있는 나무처럼 검은 옷을 입고 팔 벌려 있었다.
행여나 하고 까맣게 그을린 나무들은 완전히 꺾으면 딱하고 죽어있다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큰일이었다. 곳곳에 써 붙인 방처럼 앞으로 이곳 스님들은 50년 백년을 내다보며 차분히 더 좋은 불도의 장을 만들기 위해 조바심하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서두르지 않고 나무 하나 심는 것까지 찬찬히 가꿔나가겠다는 비장한 결심에 이곳을 찾는 이들은 무언으로 동감을 표하며 성금을 나름대로 내기도 했다.
귀동냥으로 들었다. 부처님 옷 한 벌에 수 백 만원-. 기와 10만원, 종교가 다른 내자는 우리는 천주교가 천 원이요, 불교는 부해서 단가가 높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정성스런 마음이지 액수야 상관이 있을까만 느낌들이 천차만별이었다.
해수관음보살은 익히 알고 있으렷다. 그 뜨거운 화마가 눈앞으로 훨훨 날며 경내를 휘저으며 노략질하고 갖은 횡포를 자행하며 모든 것을 불태우던 것을-. 그 때 어느 마귀가 불을 싸질렀으며 누가 의상대 앞의 수 백년 묶은 노송의 몸뚱이에 불 고문을 했는지 몰래 카메라처럼 녹화는 해 놓고 있겠지만, 그저 묵묵히 동해를 굽어보는 해수관음상-.세인들에게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보타사의 천수관음상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저 예를 올리는 중생들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주시고 계시다.
12시부터 오후 1시에 무료로 나누어준다는 국수집도 예전 같고 홍연암 마루 바닥 밑으로 철썩거리며 백일기도하는 중생에게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파도 역시 예전과 같지만, 여기저기 불타 없어진 범종과 동종, 그리고 낙산사 중심 사찰만이 잔인한 4월의 희생자가 되어 아픔을 전해주고 있었다.
백 오십 리도 못되는 곳에서 찾아간 중생의 마음이 이렇게 감회가 남다른데 멀리서 찾아온 중생들이야 오죽하랴!
어둠 속에 해변을 보고 서있는 전북 승용차가 혼자 안개등을 키고 있어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랴부랴 주인에게 알리고 돌아왔다. 몇 번씩 당한 동병상련이렷다. 양양 장에서 사온 청무가 승용차 뒷좌석을 넓게 쓰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모과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나보다.
멀리 화진포가 원시인처럼 반긴다.
낙산사 해수욕장에 비하면 정말 아직 때묻지 않은 화진포-. 잡혀와 어설프게 서 있는 호말도 없고,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에 현란한 간판도 없다. 들어오시라고 정말 귀찮게 말을 거는 호객행위도 없는 화진포가 어둠 속에서 마치 조선시대 규수 댁이 외출할 때 장옷을 쓰고 빼꼼히 내다보는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끝)2005. 11/19
첫댓글 화진포가 어둠속에서, 조선시대 규수! 외출할때 장옷을 쓰고 빼꼼히 내다보는 모습으로 우리를 내다 보고 있었다. 너무 멋스런 표현! 그만 가슴이 설래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서양화가: 정정신
모처럼 살아 있는 글을 읽으니 기분도 좋고, 자꾸만 화진포가 정답게 느껴집니다. 덕전님 만이 가능한 명품 끝 대목, 정 화백님과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서은선생님의 명 강의를 놓치어 아주 속상하답니다. 아시지요. 덕전선생님의 글 에 같은 생각이라 하심도 아주 기쁘고요. 아해가 어르신과 같은 생각을 할수 있었다니요. 하하하. 너무 기쁘고요. 그리고 덕전선생님 ! 오늘 영동수필집 잘 받아 사랑하는 님들의 작품 느껴 보았습니다. 서양화가: 정정신
감사합니다. 강아지님과 서은님-.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 좋은 것 같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