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조선 사대부들의 더러운 권력투쟁 이야기 입니다. 노비 종모법 아래에서의 백성은 대를 이어 노비나 생산하는 소나 말이 었으니, 조선 사대부들의 의식 속에는 백성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역사적 증거 입니다. 미당 서정주가 남긴 시 <자화상>이 떠오르는 새벽입니다. 미당이 왜 이런 시를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남겼을까요? 앞으로도 영원히, 자자 손손 대를 이어 권력을 쥔 자신들만의 천년왕국을 만들어 가려는 사악한 영혼들에게 우리 인간 본연의 순결한 영혼이 유린되지 않기를 추자도의 십자가 앞에서 두 손모아 기도 합니다. (2026.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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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의 십자가
수필가 정임표
추자(楸子)는 재래종 호두의 다른 이름입니다. 정순왕후는 나이 열다섯에 66세가 된 늙은 영조의 계비로 궁궐에 들어옵니다. 경주 김씨입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어머니인 정순왕후보다 10살이 더 많았습니다.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와 동갑이었으니 새파란 손아래 동생을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운명의 굴레에 빠진 것입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열 살이나 어린 계비에게 어머니로서 예를 갖추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다녔을 것입니다.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서열상으로야 '어머니'였지만, 이미 궁궐의 실세이자 자기보다 나이 많은 의붓아들의 문후를 받는 일 자체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후궁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몸에서 태어났으니 조선의 신분제도 하에서는 정순왕후가 아들이라도 생산한다면 죽은 목숨입니다. 광해군과 영창대군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정순왕후에게 사도세자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고, 사도세자에게 정순왕후는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을지도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둘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물 밑에서 전전긍긍한 싸움을 전개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증폭작용을 하는 게 있는데 영조 자신이 천민 무수리가 낳은 아들이라는 트라우마입니다. 조선은 철저한 유교 사회고 신분제 사회입니다. 조선이 만들어 놓은 “노비종모법”의 틀이 나라의 지존인 임금과 그 아들에게 올가미로 씌워져 버린 것입니다. 이게 사도세자의 빈이었던 혜경궁 홍씨(풍산 홍씨)가 남긴 한중록(閑中錄)의 뿌리인 한(恨)입니다.
여기에 두 여인의 친정 집안이 조정 정치에 거물로 등장하는데 벽파의 뿌리가 되는 경주 김씨의 거두 김한구(정순왕후 아버지)와 김귀주 (정순 왕후 오라버니)입니다. 김한구는 딸을 영조에게 시집보낸 뒤, 사도세자를 비판하며 영조의 눈과 귀를 가렸던 인물이며, 김귀주는 사도세자의 허물을 공격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제거해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벽파(僻派: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수구파)의 핵심입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과 오라버니 홍인한은 사도세자와 정조를 지켜야 했던 시파(時派) 세력의 중심인물입니다. 신분제도의 모순을 업보로 물려받은 양가 집안싸움으로 시작된 시벽의 권력 투쟁에서 정조가 즉위함으로써 시파가 승리합니다.
정조 즉위 후 정순왕후 집안은 '사도세자를 모함한 원흉'으로 지목되고 김한구의 관직을 추탈하여 명예를 완전히 짓밟아버렸고, 정순왕후 오라버니 김귀주는 흑산도로 유배되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사건이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시파(남인)를 몰살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새로운 한중록의 서사가 됩니다.
다산 정약용의 집안은 혜경궁 홍씨 집안과 혼인으로 얽혀 있었고, 많은 형제들이 천주교를 신앙합니다. 요즘 말로 개명된 집안이고 개화파의 원조가 되는 셈입니다. 정조는 이들을 대거 중용하고 개명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며, 모든 사람은 천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서학사상(천주교)에 너그러운 태도를 취합니다. 자신의 뿌리에 신분제의 트라우마가 깊었으니 당연합니다.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그의 친할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수렴청정을 하지 못한 이유는 사도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혜경궁 홍씨는 왕실의 신분 서열에서 밀려난 것이지요. 세조 조에 의경세자빈이었던 인수대비가 남편이 왕이 아니었음에도 파격적으로 대비의 자리에 올랐던 전례가 있었지만, 혜경궁 홍씨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성종 시대에는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건재하여 수렴청정을 주도하며 며느리인 인수대비의 지위를 보장해주었으나, 순조 시대의 정순왕후는 혜경궁 홍씨에게 결코 권력의 틈을 내어줄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정조 사후에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 가문을 위해 신유박해를 일으켜 시파(남인)와 천주교도를 몰살합니다. 친자식도 없고, 남편도 죽고, 의붓손자(정조)는 자신을 원수로 보고 자기 친정을 도륙했으니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를 가래나무 열매(楸子)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두고 40년간 묻어두었던 그 한을 폭발시킬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천주학을 무부무군의 사악한 종교로 프레임을 씌우면 일거에 시파 무리들을 대역부도의 죄로 도륙할 명분이 생깁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니 아무리 똑똑한 학자(정약용 등)라도 단숨에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사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공포의 정세 속에서 황사영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백서)를 쓴 것이 적발됩니다.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이자 추자도 갯바위에 피붙이 아들을 내려놓고 제주도의 관비로 끌려간 정난주 마리아의 남편입니다. 어미가 노비가 되면 그 아들도 노비가 됩니다. 왕부터 노비의 아들이었던 자가당착의 모순세상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식과 그걸 변혁시키려는 의식 간의 세력 싸움에서 이 편지는 벽파에게 "거봐라, 이놈들은 나라를 팔아먹을 놈들이다"라는 확증 편향을 심어주는 결정적 빌미가 됩니다.
그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은 그 아이가 추자도에 버려진 아이 황경한 입니다. 결국 추자도의 눈물은 한 여인의 종교적 고난이기 이전에, 왕실의 할머니(정순왕후)와 어머니(혜경궁 홍씨) 사이의 한(恨)풀이의 대리전, 그리고 노론과 남인이 벌인 “만인 평등사상 확산”을 둘러싼 100년간의 이념전쟁의 결과물인 셈입니다. 그런데 거기 그 자리에 십자가가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사랑 이외는 이 세상을 구원한 길이 없다는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이겠습니다.( 추자도에 있는 '눈물의 십자가'는 천주교 제주교구에서 정난주 마리아와 아들 황경한의 아픈 역사와 신앙의 의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
신유박해로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신부 등 약 300여 명이 처형되고 유배 및 옥사자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약 1만 명 정도였다고 전하는데, 한양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로 박해의 칼날이 뻗어 나갔습니다. 그 이후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그리고 대원군이 일으킨 가장 규모가 컸던 병인박해(1866)까지 약 100년 동안 천주교 박해는 신분제도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민중의식을 탄압하며 되풀이되었습니다. 동학혁명도 거기에 뿌리를 두고 일어납니다. 아무튼 오랜 세월 동안 고착화된 반상의 신분제를 허무는 데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한 우리 선조들의 엄청난 피의 희생 덕분이었으며, 오늘날의 자유는 그분들의 거룩한 순교로 얻어진 것이라는 고난의 십자가 정신을 우리 후세인들이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조경숙 수필가님이 대구수필가협회 카페에 올리신 <추자도 십자가> 사진이 오늘의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등대처럼 빛이 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이 글을 집필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2026.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