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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창세기 28:1-22 “ 벧 엘 ”
이삭의 축복을 받아 내기 위하여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이삭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삭의 최고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이삭 자신의 기호나 취미로 축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 것임을 알고서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축복을 받고 나서 에서가 들어와서 축복을 간청할 때 이삭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7:33절에서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히 떨면서 하는 이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이나 잘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따라 고기 한 접시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변개시키려 한 것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의 사건을 통하여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렇게 축복을 애원하는 에서에게 축복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뿐인데 복수로 형제들의 주가 되겠다고 한 것은 나중에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주가 되어 축복하는 것까지 연결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에서가 야곱을 죽일 작정을 합니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나서 내가 야곱을 죽여버려야지 하는 말을 리브가가 듣고서는 결혼을 빌미로 야곱을 자기의 친정으로 보내도록 이삭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렇게 하도록 하면서 야곱에게 축복을 다시 합니다. 이것은 전에 에서인줄 알고 축복한 내용이지만 이제는 야곱인줄 알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28:1-4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그 복을 네가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전달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축복을 받고서 밧단 아람의 라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삭과 리브가가 하는 모습을 보고서 에서가 어떻게 합니까? 8-9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이스마엘에게로 가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삭의 축복을 받아 볼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언약밖의 사람들이 같은 모양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육적인 아들입니다. 그러니 에서와 이스마엘이 함께 통하는 라인이고, 이삭과 야곱이 언약의 라인인데 에서의 의도는 그렇게 해서라도 이삭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도가 자연인의 종교적인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도 이러한 위장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동일하게 주의 일이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구별이 됩니까?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가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자랑과 또는 억지로 마지못해 사람눈치 때문에 하는가? 자기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자발적인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좀더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기를 소원하여 진행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일만 지나다보면 내가 괜히 새벽기도 차량오라고 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의 살길이 말씀과 기도에 있음을 더욱 인식하고 주를 더 알아가고 주를 더욱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기를 바랍니다. 에서처럼 어줍잖은 흉내를 내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삭의 축복을 다시 받고서 길을 떠난 야곱입니다. 늘 집안에 있던 사람이 홀로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형님이 죽이려하는 곳에서 더 이상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두렵고 외롭고 힘드는 여행길입니다. 이렇게 도망가는 야곱의 나이가 몇 세쯤 되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부분 젊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 에서는 결혼 하였지만 야곱은 결혼을 안하였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에 보니 나이를 계산해 놓았습니다. 야곱이 바로왕을 만날 때 나이가 130세,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에 총리가 되고 7년 풍년과 2년 흉년을 지나 39세입니다. 그러니 야곱 91세에 요셉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요셉을 낳은 때는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14년 후에 낳습니다. 그러니 91세에서 14년을 빼면 77세입니다. 77세에 도망을 가다가 저녁이 되어서 광야에서 노숙을 합니다. 돌로 베게를 삼아 잠을 잡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꿈을 꿉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나 섰는데 땅과 하늘이 연결된 사닥다리입니다. 그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이미 죄로 인하여 생명과 단절이 되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사다리를 만들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하늘에 사다리를 놓겠습니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사다리를 만들어 하늘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공적을 쌓아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늘까지 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꿈에 사다리가 나타나고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계시를 야곱에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이삭이 아니라 야곱에게 나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한마디도 책망의 말씀이 없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것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주실 때 어떠한 사람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본질상 진노의 사람이고 본질상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자꾸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이 강조를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잘못된 하나님의 상이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이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야곱에게 직접주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이 13-15절입니다. 이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기에 이것을 이제 야곱에게 직접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이삭에게서 두 번 이 언약을 받고 이제 세 번째로 하나님께 직접 이 언약을 받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2) 네 자손이 땅에 편만할지며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3)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란 자기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언약을 받은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엘이 하나님이고 베이트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이란 고정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셨는데 이제는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받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고 이 후손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데 그 언약의 절정 최고의 자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절을 봅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는 복을 예수님 때문에 받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이미 야곱에게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고나서 야곱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두려움입니다. 17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 야곱이 벧엘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그 곳에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기념과 성별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서원을 하는데 서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나를 지키시고 먹고 입을 것을 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서원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이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믿고서 아멘 하면 될 텐데 그 언약을 자기가 또다시 조건화 하여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를 보탬으로 자기의 안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서원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자기의 서원에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신변의 보호 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돌아올 때도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작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서원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보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그렇게 서원한 것인데 스스로 이 서원을 지켜내지 아니하는 야곱임을 그의 생애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이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셔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짓습니까? 아니지요? 세 번째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데 한번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형 에서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지만 서원은 서원이고 자기의 뜻대로 삽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속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할 수없이 벧엘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형이 기다리는데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31:41절에 보면 라반이 야곱을 열 번이나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라반에게서 도망하여 형에게로 벧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벧엘로 가는 것이 누구의 일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1:13, 이곳을 떠나 벧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벧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다가 세겜에 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겜의 추장과의 사건이 있고나서 또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5:1절입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3절에서 야곱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구약에서는 장소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벧엘이란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여로보암왕 때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도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언약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11:12-12:6절을 봅니다. “봉독”
벧엘의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북 이스라엘 남 유다 모두가 하나님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행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라.
야곱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언약을 하신 것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벧엘은 어디 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정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전부임을 고백한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처럼 자기 살길 바빠서 불철주야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하지만 열 번이나 속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쓸데없이 고생하고 방황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벧엘로 돌아갑니까?
벧엘로 돌아가는 자세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43. 창세기 28:16-22 “ 서 원 ”
야곱의 서원을 통하여 성경전체적인 서원의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서원이란 개념은 우리의 소원의 간절함과 긴박함에 따라 즉 나의 절실한 필요에 의하여 서원을 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란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든 아니면 생소한 대상이든 간에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만한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그러한 대상에게 자기의 소원을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비는 것 보다는 서원을 하면 더 잘 들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할 때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 쉽게 해줄 수 있는 입장이라도 한마디 하는데 무엇입니까? 맨입으로 되겠나 하는 말을 하지요. 이러니 우리가 정말 다급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서원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일반적인 서원이란 것은 이것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들어만 주신다면 제가 이것은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서원한다는 기본적이 생각입니다.
야곱도 이런 생각과 별 차이 없이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형은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자신은 77세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길을 떠나야 하니 고대 사회일수록 혼자서 다니다가 강도를 당하여도 죽어도 어디서 항변도 못하는 시대인데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이곳에 돌아오게 하고 너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반복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받는 사람은 다르더라도 언약의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주시는 것은 언약을 받는 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이 언약을 받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고서 야곱은 나름대로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서도 또 자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여 주시고 자기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주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겠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이러한 서원은 자기를 지켜주시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조건하에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함께 하시겠다고 지키겠다고 자기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 까지 떠나지 아니 하시겠다고 하셨는데도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차원보다는 자기의 신변보호가 우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세 가지 서원을 살펴봅시다. 자기를 보호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과 하나님의 전을 짓는 것과 십일조에 대하여 야곱이 그 서원대로 행하였는가를 보면 야곱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부르기는 합니다만 이것이 그 서원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오신 것이기에 야곱이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조건을 이루어 주었기 때문에 자기의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의미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뜻은 다른 것입니다. 야곱의 함께 한다는 생각은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 정도의 함께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혀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되심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하여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5:41절을 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후자죠.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어떠한 신을 선택한다면 그런 신은 사실 우상입니다. 분명히 나의 필요와 나의 편의와 완급경중에 선택하고 부르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예수님 하여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중심이 아닌 나를 위한 하나님 예수님이 되어 버리면 결국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도 자기의 위급중에 꿈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서원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노년에의 고백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보면 나를 나의 뜻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 때문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오늘날 또다시 쓸데없는 서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전체에서 서원에 대하여 살펴보면 처음으로 서원하는 자가 야곱이고 그 나머지의 서원의 말은 주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편과 잠언 전도서에 조금 나오고 사사기와 사무엘서와 소선지서에 조금 나오고 신약에는 사도행전에서 꼭 두 번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란 말이 구약적인 용어이며 그리고 서원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쓰이는 경우는 자기의 어떠한 특정한 소원을 위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기간 또는 자세가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실인으로서의 서원과 같은 것입니다.
민수기 6:2절입니다. 민수기 6장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인데 남자나 여자나 나실인으로 서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 30:2절입니다. 민수기 30장은 일반적인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서원을 하는 동기가 마음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게는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기가 서원인데 그러한 서원을 하는 경우에 결혼 안한 자녀이면 부모가 그 서원을 파기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동의하면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아내의 서원은 남편이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어떠한 절박한 자기의 소원을 관철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고 괴롭게 하기 위한 그런 서원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서로 분방하는 것 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너무 무리한 서원을 하면서 무엇을 드리겠다고 하였을 경우 그 사람이 그 서원을 갚을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레위기 27:8절을 봅니다. 레위기 27장의 서원은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다면 나이에 따라 그 값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가를 정하여 주는데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는데 너무 가난하여 그 대속의 돈을 드리지 못할 때는 제사장이 보고서 그 형편대로 깎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물건중에서 서원한 것이 있다면 우열간에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 부정하면 그 가치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내고 혹시 서원하였다가 그 짐승이나 집이나 간에 무르려고 하면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서원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서원입니다. 자기의 어떠한 소원을 조건으로 내어 걸고 서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헌신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 외에 조건부 서원도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입다의 서원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를 사사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부릅니다. 그러자 한때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내어 좇아놓고 위험할 때 자기를 구하여 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암몬자손을 나에게 붙여 주시면 과연 나를 당신들의 지도자로 삼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입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입다가 서원하기를 자기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기를 환영하는 가장 먼저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데 누가 나옵니까?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 영접하러 제일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의 태도를 봅시다. 사사기 11:36절입니다.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에 자신이 희생이 됨. 그러나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는데 이것을 참으로 번제로 드렸는가, 아니면 처녀로 시집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막을 봉사하기 위하여 평생 드려졌는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서원에서 보면 서원을 통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서원에는 서원의 대가가 있고 서원에 따른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서원의 의미를 봅니다. 전도서 5:5-6절입니다.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안하는 것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원하였다면 갚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서원은 갚으라고 시편15편 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이 신약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단지 두 곳에서 나오는데 바울이 무슨 서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서원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과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서 서원한 자들이 네 사람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자들에게 힐난을 받지 않도록 결례와 머리를 깎는 일을 합니다. 이외에는 서원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맹세에 대하여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서원과 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맹세에 대하여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33-37절입니다.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인데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도 못하면서 무슨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한다거나 서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서원이고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서원이나 맹세를 하지 말 것이고 단지 우리에게는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하고자 서원하신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면 됩니다.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급한 일이 있거나 사업이나 인생의 중요한 계획을 세울 때 어떤 자세로 하면 됩니까? 서원을 하고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사실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있다면 주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나 맹세보다는 이런 말씀을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고보서 4:13-16절입니다. 우리가 안개인데 무슨 서원이나 맹세를 합니까? 주님이 허락하시면 이것도 저것도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전체의 흐름에서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표가 서원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의 급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원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고 입다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에 대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서원에서 자기가 서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한다고 하시고 성전도 야곱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온전한 성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전한 십일조가 되신 주님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날마다 서원하고 날마다 서원을 파기하는 부도수표를 남발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의 마음과 돌아설 때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 불이행자를 대속하신 분이 계시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서원을 하나님앞에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온전한 서원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서원을 온전히 이루어 내신 주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급한 필요를 위하여 서원하기보다 예수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