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제3권 =문목(問目)-퇴계 선생께 올림 병인년(1566, 명종21)〔上退溪先生 丙寅〕
문: 《심경찬(心經贊)》에서 의(義)를 인(仁)보다 먼저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답 무릇 말이란 근본에서 말단으로 나가는 것이 있고 작용[用]에서 본체[體]로 나가는 것이 있네. 이것은 작용에서 본체로 나가는 것이네. 간혹 또 우연히 글자를 취해서 읽기에 편하도록 한 것일 뿐이네.
문: 예(禮)와 지(智)라 하지 않고 중(中)과 정(正)이라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답 주자가 이것에 대해 논한 적이 있는데 “중(中)과 정(正)이 더욱 딱 맞다. 중은 예(禮)가 알맞은 곳이고, 정은 지(智)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곳이다. 예와 지는 말이 오히려 느슨하지만 중과 정은 절실하게 된다. 예라고 한다면 오히려 들어맞지 않은 곳이 있게 되지만, 중이라 한다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고 예에 맞지 않는 예가 없게 되어 예의가 매우 훌륭하게 된다. 지라고 한다면 오히려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이 있게 되지만 정이라고 한다면 옳고 그름이 분명하게 되니 바로 지의 실제가 된다.”라고 하였네.
문: 무릇 이 네 가지를 말하는데, 혹은 성(性)으로, 혹은 정(情)으로, 혹은 음양(陰陽)으로, 혹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存心]과 일을 제어하는 것[制事]으로 했는데, 이것은 정(情)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까?
선생 답 이것은 성(性)과 정(情)을 아울러 말한 것이지 오직 정을 말한 것은 아니네. 또 음양으로 말한 것은 음양이 바로 이 네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음양을 가지고 네 가지의 동정(動靜)을 구분한 것일 뿐이네.
문: 그러면 어느 것이 동(動)이고 어느 것이 정(靜)입니까?
선생 답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서는 정(正)과 의(義)를 체(體)로 삼고 - 음(陰)과 정(靜)에 속한다 - 중(中)과 인(仁)을 용(用)으로 삼았고, - 양(陽)과 동(動)에 속한다 - 장남헌(張南軒)과 여동래(呂東萊)에게 답한 두 편지는 모두 중과 인을 체로 삼고 정과 의를 용으로 삼았네. - 뜻을 취한 것이 또 다르다 -
문: 몇 가지 설 중에서 어느 설이 뛰어납니까? 어찌하여 하나로 정해진 논의가 없습니까?
선생 답 서로 번갈아 가며 체와 용이 되어 서로 방해되지 않네. 나도 전부터 이 점에 대해 의심을 했는데 오래도록 사색하여 그 설을 이해하였네. 〈도설(圖說)〉의 ‘입천지도장(立天之道章)’ 소주에 어떤 사람이 주자에게 “인은 용이 되고 의는 체가 되는데 체통(體統)으로 논한다면 인이 체가 되고 의가 용이 됩니다.”라고 물으니, 주자가 “인이 체가 되고 의가 용이 됩니다. 측은(惻隱)은 동이고 인은 정이며, 수오는 동이고 의는 정입니다.”라고 하고, 또 “주정(主靜)은 정(正)과 의(義)를 위주로 합니다.”라고 하였네. 또 묻기를 “지금 이 마음이 적연하여 욕심 없이 고요하게 있을 때에 정과 의를 보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말하기를 “이(理)의 정체(定體)가 바로 이것이다.” 하였네. 이제 네 가지가 서로 번갈아 가며 체와 용이 된다는 설로 미루어 보건대, 중과 인의 정처를 체로 삼아서 말한다면 정과 의의 동처가 바로 용이 되고, 정과 의의 정처(靜處)를 체로 삼아 말한다면 중과 인의 동처(動處)가 바로 용이네. 이 네 가지는 모두 절로 체와 용이 있기 때문에 서로 체와 용이 될 뿐이네.
문: 이 네 가지가 서로 체와 용이 되는 것은 그러하겠습니다만, 주자가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에 대하여 “생겨나는 순서로 말하면 수와 목은 양(陽)이고 화와 금은 음(陰)이며, 운행하는 순서로 말하면 목과 화는 양이고 금과 수는 음이다.”라고 하여 모두 다른 이유를 말했습니다.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에 대해서 〈도설(圖說)〉의 주(註)가 장남헌과 여동래에게 답한 편지와 다른데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이것에 대해 시원하게 이해한 적이 없습니다. 근래에 〈도설〉의 소주(小註)와 《맹자》 수장(首章)의 주를 살펴보니 모두 주자의 설명이 있는데, “인(仁)은 마음에 존재하므로 성(性)의 체가 된 것이고, 의(義)는 일을 다스림으로 성의 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性)으로 말하면 모두 체이고, 정(情)으로 말하면 모두 용이다. 음양으로 말하면 의는 체이고 인은 용이고, 마음에 존재하고 일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인은 체이고 의는 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도설〉에서 음양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정(正)과 의(義)를 체로 삼고 중(中)과 인(仁)을 용으로 삼았으며, 장남헌과 여동래에게 답한 편지는 마음에 존재하고 일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했기 때문에 중과 인을 체로 삼고 정과 의를 용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이 설명이 중과 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울러 거론한 것은 인과 의를 들면 중과 정이 그 가운데 포함되기 때문입니까?
선생 답 중ㆍ정ㆍ인ㆍ의를 체와 용으로 나누는 설에 대하여 전날 말했던 것은 본래 모두 주 선생(朱先生)의 설명을 따라 추구하여 말한 것이지 감히 내가 주장하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네. 그러나 끝내 미진한 이치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네. 지금 인용한 한 단락은 주 선생의 설 가운데서 가장 조리 있고 명쾌한 것인데 알려주어서 매우 다행이네. 다만 중(中)은 마음에 존재함을 말하고 정(正)은 일을 다스림을 말했다고 한 부분은 주 선생의 본뜻이 아닌 듯하니, 이것은 다시 자세하게 살펴야 하네. 마지막 단락에 말한 것은 공이 끄집어내어 언급하지 않았다면 늙고 혼미한 사람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매우 다행이네.
문: 맹자가 “몸에는 귀천이 있고 대소가 있다.[體有貴賤有大小]”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마음을 귀와 눈 따위와 대소를 구분하였는데, 또 하나의 손가락으로 어깨와 등의 크고 작은 것으로 비유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답 이 장은 본래 입과 배는 몸에서 소체가 되고 마음과 뜻은 몸에서 대체가 되는 것으로 보았네. 그러나 소체는 형체가 있어 보기 쉽지만 대체는 형체가 없어 알기가 어려우니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에 다시 형체가 있는 것에 나아가 크고 작고 귀하고 천하고를 구분하여 비유한 것이네.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는 크면서 귀한 것이고 대추나무와 가시나무는 작으면서 천한 것이라 정원사로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을 기르느냐에 있어 그 선택을 잘못한다면 천한 정원사가 될 것이네. 그러나 이 비유는 멀리 사물에서 취한 것이어서 그다지 절실하지 못하다고 여겨 다시 내 몸에서 비유를 들었네. 우선 대체에 관한 것은 한편에 놓아두고 다만 소체를 가지고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하였으니, 하나의 손가락의 작음과 어깨와 등의 큼은 뚜렷이 쉽게 보고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네. 사람이 만약 손가락 하나만 기르고 어깨나 등을 버려둔다면 어찌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본래 소체 중에서도 오히려 작은 것을 기르고 큰 것을 버려둘 수 없는 것이 이러한데, 하물며 입이나 배 같은 소체만 기르고 마음이나 뜻 같은 대체를 버려둔다면 그 사람의 천박함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맹자가 비유를 잘 하고 논리가 탁월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는 점이네.
[주-D001] 심경찬(心經贊) :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경전(經傳)과 송나라 도학자 등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心性修養)에 관한 격언을 모아 《심경(心經)》이란 책으로 편찬하고, 자신이 지은 〈심경찬〉을 덧붙여 놓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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