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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울림이 있는 말씀한편을 소개합니다.
권연경 교수는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신약학자입니다. 신학연구 30년, 주님앞에서의 양심고백이라는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 학력 사항
박사 학위(Ph.D.):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King's College London)
석사 학위(S.T.M.): 예일대학교 신학부 (Yale Divinity School)
석사 학위(M.Div.): 풀러신학교 (Fuller Theological Seminary)
학사 학위: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주요 경력 및 활동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과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안양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 (2003년 귀국 후)
뉴욕의 한인교회에서 약 3년간 부교역자로 섬김
📚 주요 저서 및 역서
권연경 교수는 바울 서신,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다수의 저서와 역서를 발표했습니다.
주요 저서:
『로마서 산책』
『행위 없는 구원』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주요 역서 (공역 포함):
『IVP 성경신학사전』
『예수의 정치학』
그를 통하여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귀를 기울인다면
한국교회에 큰 변화가 일어날 큰 울림의 말씀이다.
◈ 재미있는 실험이야기 ◈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4개 던집니다. 그리고 반응을 비교하는 실험입니다.
중학생들
문1/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맞습니까?
답:네!
문2/ 근데 이 믿음은 껍데기 믿음이 아니고 살아 있는 믿음이라야 됩니다. 맞습니까?
답: 네!
문3/ 그럼 살아 있는 믿음은 뭐죠?
답: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을 말해요
문4/ 그러면 행함이 없이는 구원 못 받는 거네요.
답: 네!
똑같은 실험을 어른들에게 가지고 합니다.
문1/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어른 답: 아멘
문2/ 근데 이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 살아 있는 믿음이라 됩니다.
어른 답: 아멘
문3/ 근데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입니다.
어른 답: 아멘
문4/ 우리가 그러면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네요.
어른 답: ???
문5/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럼 결국 구원 못 받는 거네요?
어른 답: 침묵
왜 어른 들은 답을 모를까요? 중학생보다 멍청해서 그럴까요? 그건 아니겠죠. 근데 왜 대답 안 하냐면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논리적으로는 예라고 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받아들이기 싫은 거지요.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요.
앞뒤 안 맞을 때 우리는 늘 우리에게 편리한 것만 선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들 바라볼 때는 야고보 식으로 사유합니다. 다른 사람 행동을 보면서 믿음이 있나 없나를 판단해요. 그리고 나를 볼 때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고쳐도 믿음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주여 하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나는 그래도 되요.
왜? 그게 복음이니까. 남한테는 그렇게 안 해. 이처럼 우리는 이중적으로 살아갈 때가 많은 거죠.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리가 우스갯 소리로 이렇게 말하죠. “천국가 보면 다들 입만 와 있을 거다.”
천국에 가있을 사람 중에 가장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직업 중의 하나가 총알 택시 운전수다.
왜?
총알 택시만 타면 주여! 주여! 제발 회개하오니, 살려만 주시옵소서 하니까요
천국가면 놀랄게 3가지라 그러잖아요?
내가 와 있다고 하는 것,
둘째는 그 사람 올 줄 알았는데, 안 왔다는 것
셋째는 이 사람은 못 올줄 알았는데, 와 있다는 것!
하나님의 가치판단과 우리의 판단이 다른 것이지요.
우리는 성경에 맞게 우리의 신앙을 궤도수정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한국교인들은 <영적축지법>을 배운 것 같아요.
하나님의 계획은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우리 교인들은 광야는 거치지 않고, 애굽을 떠나면 바로 가나안이야, 예수 믿고 바로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보면 이게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불량품을 만든 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모든 것을 다 통치는 것으로 이해해요. 구원받으면 모든 과정이 다 무사통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원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해버리면, 그 많은 신약의 경고와 책망들이 하나도 우리에게 와 닿지 않아요.
뼈를 때리는 경험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진지한 신앙, 성숙한 신앙, 제대로 된 신앙을 할 수 없어요. 왜요?
나는 이미 다 구원받았는데,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렇지 않아요.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병에서 낳은 것도 구원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감옥에서 나가는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1세기 당시에 아주 흔하게 쓰이던 단어예요. 뭔가로부터 벗어나면 구원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이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썼잖아요. 그죠? 이제 옥중 서신이라고 불리는데 다시 말하면 모든 얘기는 지금 감옥에 사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 1:19)
풍랑속에서 건짐받은 것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
성경적 구원은
갈라디아에서, 로마서에서, 에베소서에서 구원은 미래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구원의 소망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텐데, 갈라디아서 같은 데는 이 구원이라는 말은 안 나오거든요. 근데 의의 소망 혹은 우리가 장차 상속받게 될 상속, 혹은 상속 못 받게 될 하나님 나라 미래 행위에요. 그리고 6장 끝에도 우리가 영생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
(갈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렇게 신실한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12]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빌 3:12-15새번역)
그러면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죠.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심판 때 최종적인 구원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여전히 풍랑속을 가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앞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을 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오늘이 중요해지는 거니까 지금 우리가 잘못하면 큰 일 날 수도 있는 거죠. 이거는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위험이 되는 거죠. 여기서 우리의 일상의 삶이 중요해진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서 차별하지 않으세요.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말로 표현이 됩니다. 이걸 우리가 까먹는 거니까 그걸 까먹다 보니까 너무 구원을 쉽게 생각해요.
가장 자주 인용하는 구약 구절 중에 하나가 이거예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2)
근데 하나님은 이게 구약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신약에 이게 자주 나옵니다.
그 부분을 예수님이 인용해요. 천사들과 함께 자기 영광 중에 올 때 그때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베드로도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시면 1장 17절에 보면 사람을 외적인조건으로 따지지 않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을 여러분들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야고보서 내용 잘 아시죠? 행함이 없으면 꽝이다 하는 이야기. 요한계시록 보시면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평하셔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20)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히브리서 같은데도 믿음을 얘기할 때 믿음이 뭐냐? 믿어야죠. 뭘 믿어야 되냐? 히브리서 11장 6절 유명한 구절
있죠?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다. 살아 계신다. 다시 말하면 있으나 마나한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눈을 시퍼렇게 떠고 살아 계셔요. 그 이게 무슨 얘기냐? 그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된다. 이게 번역이 좀 약간 아쉬운데요. 상 준다는 뜻이 아니라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냥 prize(상)를 준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에게 갚아 주시는 페이백(pay back).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새번역)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하는 장사와 같아요. 우리가 잘하면 영생으로 갚아 주시고 우리가 못하면 심판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울도 똑같아요. 바울도 로마서 2장에서 이신칭의를 시작하기 직전에 이렇게 얘기하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개정)
말하자면이 복음이 우리 컴퓨터로 치자면 윈도우처럼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 윈도우 프로그램 속에서 다른 프로그램이 작동하잖아요. 그것처럼 <행위 심판 사상>이 바닥에 깔려 있고 기본 바탕으로 그 위에서 다른 것들이 작동한다는 얘기잖아. 이 공평하신 하나님을 놓치면 우리가 다 놓치는 거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공평하셔요. 왜? 우리의 삶을 무시하지 않거든요.
우리의 삶을 무시하면 책임을 안 물어도 되겠죠. 근데 그건 해답이 아닌거니까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해서 해답이 되는 순간은 없겠죠. 하나님 그런 전략은 절대 취하지 않으세요..
은혜는 구원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은혜는 사실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개념 중에 하나인데요. 이 이 은혜를 우리가 오해하는 이유가 뭐냐면 자동적으로 우리 행위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해서 그렇죠.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근데 그게 사실 바울서신을 크게 오해한 건데 처음에는 맞죠. 우리의 행위로 필요해서 아무 조건도 필요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는 건 맞아요. 우리가 그걸로 모든 그림을 다 설명하려고 한다는데 있는 거죠.
근데 실제로 바울이 은혜를 사용할 때 우리 해당 본문들을 잘 살펴보시면 핵심적인 포인트가 뭐냐면 우리가
도덕적으로 순종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고 하나님은 쓸데없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그 계급장
뗀다는 얘기하고 똑같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이제 다 필요 없어. 할례 뭐 할례 다 필요 없어. 학벌 필요
없어. 권력 필요 없어. 집안 배경 필요 없어. 아무나 이게 은혜예요. 은혜는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는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럼 은혜가 그 조건을 따지는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왔어요. 와서 어떻게 하냐? 은혜가
우리를 통치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다스린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를 다스려요.
혹은 디도서 표현처럼 우리를 가르쳐요. 우리를 양육해요. 우리 교육, 우리를 가르치는데
어떻게 훌륭한 사람 되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우리를 가르쳐 가는 거죠.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능력이라는 개념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인간적인 쓸데없는 조건 따지는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우리를 가르치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은해를 우리가 사실 잘 알면 많은 오해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https://youtu.be/bePtVo1jZ4k?list=PLaLfC_Mdht_CkPdwav7ViGvDOMTlF4an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