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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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15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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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목계와 가흥을 지난 남한강은 점동면 삼합리에서 섬강과 청미천을 합하여 신륵사 부근으로 흐른다. 남한강에 대해 이중환은 『택리지』 「복거총론」의 ‘산수’편에서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고 쓰고서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영월루 아래에 있는 마암은 한강변에 있는 큰 바위로, 표면에 ‘마암(馬岩)’이란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물결이 치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데, 그곳에 큰 굴이 있다. 옛날에 그 굴에서 큰 가라말(털빛이 온통 검은 말)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황려(黃驪, 여주의 옛 이름)란 고을이 생겼다고 하며, 여흥 민씨의 시조가 이 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마암에는 고려 말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던 5월 어느 날 여강에 한 척의 배가 떠 있었는데, 그 배에는 고려 말의 충신이었으며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 말의 3은으로 알려진 목은 이색과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이색은 태조가 내린 벼슬을 거절한 채 초야에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후에 이색은 술 한 병을 꺼냈다. 이성계가 보낸 술이었다. 그는 그 술을 한잔 마시고 배 위에서 그만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색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조선 태조가 옛 친구인 이색을 여러 번 청하자 그 청을 못 이겨 서울에 간 이색은 태조를 보고서 “앉을 자리가 없다” 하고는 도로 나와 배를 타고 고향 가정리로 오는 길에 신륵사 앞에 이르렀다. 그때 경기감사가 태조가 내린 어주라며 보내왔는데, 이 술을 태연히 받은 이색은 조릿대 잎으로 막은 술병 마개를 빼 강물에 던지면서 “내가 평생을 사욕이나 권력으로 살았다면 이 댓잎이 그대로 강물에 떠내려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멀지 않은 곳에 가서 뿌리를 박고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하고는 그 술을 마시고 곧바로 죽었다. 그 댓잎이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지금의 여주읍 하리 양섬에 있는 삿갓바위 근처에 뿌리를 박고 무성하게 번졌다고 하여, 지금도 그 대를 ‘삿갓바위 대’라고 부른다.
“흐름을 따라 내려가니 뱃사공이 한가하도다. 험한 곳을 만나면 경각 사이에 놀라 외친다. 늦게 사장에 닿으니 바람과 이슬이 냉한데, 한 등잔이 깜박깜박하여 구름 산을 비친다”라는 시는 그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이색의 제자들은 고려의 신하였으면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편에는 신륵사가 있다.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자리한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양주 회암사에서 설법하던 나옹선사는 병이 깊었는데도 왕명을 따라 밀양의 형원사로 내려가던 중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그때의 일을 이색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날 진시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씻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 보 안에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 155과를 얻었다. 신령스러운 광채가 여드레 동안이나 나더니 없어졌다.
나옹선사가 입적하고 3개월이 지난 뒤 절의 북쪽 언덕에 진골 사리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광주의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 인근에 있는 능서면 왕대리로 이전해오면서부터 다시 중창되었다. 세종의 깊은 불심을 헤아린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로 삼았고 절 이름도 잠시 보은사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소되어 당시 건축물로는 드물게 대들보가 없는 조사당만 남았다가 현종 12년에 중건하면서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었다. 남한강을 굽어보는 강월헌은 본래 석탑 밑에 있던 6각 모양의 누각으로, 1977년에 큰 홍수로 떠내려가 새로 지은 것이다.
신륵사 극락보전
나옹화상의 부도가 있는 신륵사는 강변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극락보전 왼편으로는 강월헌이 있는데 남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정자다.
여주, 이천 사람들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로 “여주, 이천 사람은 참새에 굴레 씌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이 참새보다 더 약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여주에는 사대부가가 많아서 대를 이어 산다”라고 기록했듯이 이곳에서 인물이 많이 났는데,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과 매국노로 알려진 이완용 그리고 명성황후의 고향이 이곳 여주다. 광복 후 잠시 귀국했던 서재필 박사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강연 중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다.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그들 또한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다. 나까지 끼여 다섯 명의 지기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하였다. 한데 그 다섯 명이 명성황후 앞에 가면 반드시 기선을 잡히고 만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나오게 마련이었다. 명성황후는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의 걸물이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국 왕실의 국립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가 1895년 1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주한영국총영사 힐리어(W. C. Hillier)의 집에 투숙하였다. 이때 비숍은 5주간 머물면서 언더우드 부인의 소개로 네 차례에 걸쳐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였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날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칠흑 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주색 가루를 뿌린 듯하였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도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 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이 전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 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하였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두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비숍이 만나보고 평가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모습을 그려보면 서재필의 평가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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