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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자세
살전 2:7-12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 2:7-12 / 우리는 자녀를 키우고 돌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여러분을 따뜻하게 대해 왔습니다. 8) 우리는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하였습니다. 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 가고자 밤낮으로 땀 흘려 가며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10) 또 여러분 누구에게나 순수하고 정직하게 대하고 비난받지 않게 행동한 것을 여러분은 물론 하나님께서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11) 우리는 여러분에게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타이르듯이 권고하고 격려하고 가르쳤습니다. 설마 그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테지요? 12) 그래서 여러분의 일상생활이 하나님께 걱정을 끼치기보다는 도리어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여 그 나라에 초청해 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애써 왔습니다.
바울과 전도일행은 복음 사역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사랑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너희를 사모하여(7-8) 사도로서 바울과 실라는 교인들에게 일정한 재정적인 도움과 같은 필요한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6). 그러나 바울은 교인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장막을 짓는 일을 했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잘 전해지는 것이었으며 이 일이 방해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고전 9:7-14). 그럼에도 바울은 유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처럼 자기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지극한 염려와 헌신, 겸손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바울의 핵심적인 사역의 키워드가 ‘사모하여’, ‘기뻐함’, ‘사랑하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의 이러한 모습은 당시 순회 교사들의 거만하고 교만한 자세와는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수고와 애쓴 것을(9-10) 바울 일행의 선교활동의 모습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모습과 복음 앞에서의 신앙인으로서의 삶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도는 ‘수고’와 ‘애쓴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려움 중에도 바울의 관심은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선교 일행은 그들의 일상의 삶, 신앙인으로서의 삶도 절제되고 거룩한 삶으로 흠이 없었음을 바울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모범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히(11-12) 앞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유모의 겸손과 부드러움, 사랑으로 대했다면 이제 그의 역할을 아버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권면’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불러서 권위있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로’는 고난에 빠져 있는 성도들의 형편에 동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계’는 바른 길을 증거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이 아버지의 역할을 말하는 것은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비록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현재 고난 가운데 있고 거짓 가르침이 있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부르셨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도록 섭리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재림의 신앙은 헛되지 않은 것임을 바울은 다시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적 용 : 바울과 전도 일행은 복음 전파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도로서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며 희생과 헌신을 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불신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살펴봅시다.
말을 타고 길을 가던 한 신사가 재목을 운반하기 위해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군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편안히 앉아 구경만 하는 상사가 있어,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같이 일을 하지 않으십니까?” 상사는 주저 없이 “나는 졸병이 아니고 명령을 하는 상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자 신사는 말에서 내려 윗옷을 벗어 놓고 병사들과 함께 재목을 운반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상사에게 “앞으로 목재를 운반할 일이 있거든 총사령관을 부르십시오.” 그 신사가 유유히 자리를 떠나갈 때 즈음 상사와 병사들은 그 신사가 조지 워싱턴 장군임을 알았습니다. 권위나 지위는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먼저 섬기는 겸손한 자에게 리더십의 기회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거룩한 증인이 되자
데살로니가전서 2장 9-10절
데이비드 제러마이어라는 목사님이 쓴 책 중에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아주 귀한 예화가 하나 소개 됩니다. 그 예화의 얘기는 낙타의 이야기입니다. 아기 낙타가 엄마 낙타에게 묻습니다. “엄마 이상해, 왜 내 발가락은 이렇게 세 개씩 큰 발가락이 있지?”하고 물었습니다. 엄마 낙타가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래사막을 오래 다니기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긴 발가락 세 개가 있는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럼 엄마 왜 나는 이렇게 눈썹이 길지?” “아~ 그것은 모래 바람이 불어 올 때 모래가 눈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눈썹이 긴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왜 엄마 내 등에는 왜 이렇게 큰 혹이 있지?” “아 그것은 사막을 다닐 때 목이 마르면 안 되니까 거기에 물을 저장해 놓는 거야.” 그러니까 이 아기 낙타가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이래서 발가락이 세 개 있구나. 눈썹이 긴 것이구나. 또 등이 이렇게 큰 물통이 있구나. 그런데 엄마 이상해. 왜 우리는 동물원에만 갇혀서 살지?” 한 번도 사막에 나가지도 못하고 동물원에 갇혀 사는데 그것이 왜 필요 하느냐는 것이죠.
어찌 보면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이야기입니다. 낙타는 사막에 가서 짐을 메고 사막을 달려야 그 모든 것이 필요한데 동물원에 갇혀서는 아무 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오늘 너무 온실 속에서 갇혀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아침에 일어나서 힘들게 예배에 한 번 참석하면 내 할 일 다 했다고 여러분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세워주셨는데 우리는 예배 한 번 드리면 내 할 일 다 했다! 그것도 예배도 못 드려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캐나다에 로키산맥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산 등성이에 올라가니까 길옆에 도로 표지판이 있는데 “짐승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어요.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혹 짐승이 나타나면 비스켓도 던져 주고 사탕도 던져 주고 그러니까 짐승들이 그것을 얻어먹어요. 관광객이 많을 때는... 그러니까 자기 먹이를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둔해 집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어요. 던져 주는 것만 먹어도 충분해요. 살이 쪄 버려요. 그 다음에 언덕을 기어오르지 못하고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해요. 관광객들이 없는 겨울이 오면 굶어 죽어 갑니다.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절벽도 오를 수 없고 언덕도 오르지 못하는 비둔한 짐승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의 야성을 잃어버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교회 교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핍박이 와도 순교가 눈앞에 닥쳐와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핍박과 순교는커녕 교회에 와서 찬양하는 것 외에는 우리 입술로 복음을 증거 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것은 뭔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아니면 우리가 복음을 잘못 배웠고 복음을 잘못 우리 삶에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집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밤낮 일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복음을 전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옳은 일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시고 당신들이 증인입니다. 이렇게 말하죠.
자 오늘 우리 성경 10절 말씀을 한 번만 더 읽어볼까요?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아멘. 이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말이에요. 바울의 자랑처럼 들리는 거예요.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거룩한 사람이요. 나는 옳은 사람이요. 나는 흠이 없는 사람이요.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니 얼른 들으면 아니 바울이 미쳤나봐. 왜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해. 자화자찬 아닙니까? 여러분, 칭찬이라는 것은 남이 해줘야지 자기가 자기 칭찬을 하면 되겠어요? 만약에 제가 여기에 서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그래도 이영무목사가 괜찮은 목사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래도 근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여러분 뭐라고 해요? “아이고 밥 맛 없다. 자기 자기를 괜찮은 목사래. 저 목사가 좀 이상한데 미쳤나봐.” 이런 생각 안 들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면 오히려 점수를 깎기는 거예요. 칭찬이라는 것은 남이 하는 것이지 내가 나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근데 오늘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나는 거룩한 사람이요. 옳고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거룩한 행위가 따라와야 됩니다. 근데 바울은 정말 자기 자신을 향해서 감히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얼마 전만 해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대제사장에게 넘겨서 고문 받고 죽임 당하게 했던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연 자기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자화자찬할 수 있는가?
요즘 신문에 IS라고 나오는 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입니다. 언젠가 누가 저한테 영상을 보내줬는데 그 극단주의자들이 IS가 콥틱 기독교인들인지 그분들을 살해하는 장면이에요. 한 10명에서 20명을 뒤로 손을 묶어서 쭉 눕혀놨어요. 그러더니 사람들 위에 올라타서 머리를 잡아요. 목에다 칼을 대고 마치 닭의 목을 끊듯이 돼지의 목을 끊듯이 순식간에 목을 잘라버려요. 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그렇게 악명 높은 일들을 하고 있어요. 그 중에 존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IS요원 중에 악명으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아주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이에요. 어찌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어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 사도 바울이에요. 그런 그가 자신을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말이에요.
여러분 거룩이란 말은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목사님 장로님 거룩하다. 아니 그것도 안 맞는 거예요.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만 거룩하신 것이지 인간에겐 거룩이란 말을 붙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감히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내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도 양심이 있으면 자기가 이 표현을 하면서 오해받을 소지가 있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사도 바울이 10절에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건 물론 데살로니가전서를 사도 바울이 쓴 개인적인 편지이지만 이는 바울이 혼자 쓴 것이 아니에요. 누가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바울의 마음속에 “바울아! 복음 증거 하는 너는 거룩한 사람이야.” 그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일을 했습니다. Tent maker로서 장막업을 하고 텐트를 만들어 팔고 그것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고 자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바울아 너의 일은 거룩한 일이야. 너는 지금 옳고 흠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성령께서 그 마음에 놀라운 감동을 주셨어요. 바울이 자기 자랑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불가항력적으로 바울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았습니다. 과거를 회개하고 용서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사도가 되었어요. 그가 초대 선교사가 되어서 각지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이렇게 조직된 교회가 없습니다. 선교사가 가도 사례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해도 누가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거 바울이 어떻게 해요. 스스로가 일을 해가지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노라.” 그 얘기는 바울이 개인 직업을 가졌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Tent maker’ 혹은 ‘자비량 선교사’ 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오늘날도 자기 스스로가 자기 선교비를 벌어서 선교하는 사람을 자비량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그런 평신도 선교사가 외국에 많이 나가 있습니다. 자기가 공장을 운영하면서 선교합니다. 자기가 엔지니어 기술자로 선교합니다. 의사로서 돈 벌어 가지고 선교합니다. 자비량 선교사가 많습니다. 그 분들 때문에 어찌 보면 이런 선교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선교사 한 사람이 가서 선교하려면 적어도 300만원 500만원의 후원금이 있어야 되는데 여러분 그게 쉬운 일입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파송한 선교사만 해도 10,000명이 넘습니다.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비량 선교사들이 가서 곳곳의 아프리카고, 뭐 브라질이고 어디고 가서 자기가 의사로서, 엔지니어 기술자로서, 사업가로서 일하면서 복음을 증거 하니까 이렇게 한국이 열심히 선교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이 선교사는 선교만 해야 되는데 이 필요한 헌금은 이 사람이 그렇게 받아야 되는데 받을 수 없어. 왜 이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없어요. 아직 미숙해요. 헌금을 낼 정도의 믿음이 안 돼요. 여러분 내가 길에서 전도하면서 당신 예수 믿음세요. 내가 전도했으니까 헌금 내세요! 누가 내겠습니까? 미쳤다 그러지. 그 분들은 헌금을 낼 정도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내가 밤낮 열심히 일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바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가 직장을 가지고 일하고, 애 쓰는 그 모습을 보고 “너는 거룩하다. 너는 참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너는 정말 흠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을 벌어도 자신을 위해 돈을 벌면 별 의미가 없지만, 주님을 위해서 돈 버는 겁니다. 복음 선교를 위해서 돈 버는 겁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돈을 번다면 그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시장에서 내가 떡볶이 장사를 해서 그 얼마 벌어가지고 교회에다 선교헌금하고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다면 그 떡볶이는 정말 거룩한 직업인 줄로 믿습니다. 그 자리가 아름다운 거예요. 아무리 사회적으로 근사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주님의 복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주님과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는 그냥 거룩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러나 그가 어떤 직업에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복음의 증인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의 일이 영혼 구원에 앞장서고 있다면 그 일은 거룩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은 우리의 직업은 부업이 되어야 한다. 부업! 그리고 우리의 본업은 뭐예요? 선교하는 겁니다.
주님의 증인되는 것이 우리의 본업이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내 직장이 본업이 아닙니다. 그건 부업이에요. 왜?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해야 복음을 전하고 또 일할 수 있으니까 직장에 가서 일하는 거예요. 그건 부업이에요. 선생님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예수의 향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볼 때 아 너의 직업은 거룩함이구나. 너는 지금 거룩한 일을 하는구나. 복음의 증인되는 일은 거룩한 일이예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 줄로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은 바로 복음의 증인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라는 것이 뭐에요? 여러분. 목격자에요. 목격자. 내가 목격한 복음의 사건을 내가 영접한 예수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는 게 증인의 사명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제 증인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길 축원합니다.
우리교회 야구를 하는 학생이 야구를 너무 열심히 팔이 좀 문제가 생겼어요. 이 학생이 그랬어요. 너 왜 야구하려고 하느냐. 내가 훌륭한 야구 선수 되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미국에 유명한 커셔 라고 하는 투수가 있습니다. 아주 세계적인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야구를 너무너무 잘해요. 그의 사는 목적이 선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어마어마하게 돈을 많이 벌지만, 그는 아프리카에 재단을 만들어서 어마어마하게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사회적인 직업이 있든지 어떤 지위에 있든지 그것이 내 본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인되기 위한 도구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내가 직장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향기 나는 증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증인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그렇기에 바래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어요. 저 사람은 경건하지 않아. 자기가 랍비라고 하면서 매번 죄인들 하고 어울려 예수님이 왜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세리들에게 창기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신 거예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네가 진정 거룩한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하늘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전도자의 삶이었고 복음의 증인되는 삶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증인으로 살면 거룩해 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거룩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요. 거룩하면 욕도 안하고 깨끗하게 살고 저 산속에 들어가서 묵상이나 하고 기도나 하고 성경이나 읽고 세속과 이렇게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을 거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극히 거룩의 일부지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거룩하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수도사들이 모여 있으면 거룩한 것입니까.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 복음의 증인되는 것이 최고의 거룩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향해서 그가 비록 텐트메이커로서 장막을 만들고 복음을 전하지만, 너의 그 일은 너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온전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증인으로 살면 거룩해집니다. 그가 하는 말이 거룩하고 그가 하는 행동이 거룩합니다.
떡볶이 장사를 하더라도 내가 복음 증거 하는 자리가 된다면 그것이 거룩한 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요양보호사를 하면서도 내가 섬기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증거 할 기회를 갖습니다. 그것이 거룩한 거예요. 대리운전을 하면서도 교회를 돌보는 개척교회 목사님의 삶은 너무너무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거룩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근사한 옷 입고 젊잖게 걸어가면 아 저사람 참 거룩해 보인다. 담배냄새도 안 나고 술도 안 먹고 참 거룩하네. 그것은 거룩이 아니에요. 그냥 깨끗하게 사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은 복음에 증인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피 묻은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입술이 거룩한 입술이고 거룩한 삶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군 선교사 회장을 지내는 김철기 목사님이라고 계시는데 이분은 두 손이 장애인 이예요. 손을 다 못써요. 한쪽 손도 두 손가락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성경을 넘기고 설교를 합니다. 목사님인데. 또 그분이 여기다 팔을 감아가지고 테니스를 잘 친다고 합니다. 뭐 선수급은 아니지만 게임할 정도는 된다고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의 아내가 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해요. 그것을 해가지고 군 선교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엄 집사라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 이분은 토요일마다 이슬람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켜줍니다. 또 자기가 회사에서 번 돈을 매달 1 천 만 원 씩 선교 헌금으로 드린다고 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이 그의 본업입니다. 근 봉제 공장을 운영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선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 공장은 정말 거룩한 공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전남 신안군 증도에 가면 문준경 전도사님의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그분은 정말 결혼을 잘못해서 이미 아내가 있는 집에 결혼을 했는데 고생을 많이 했죠. 그러나 그는 신학교를 졸업해서 여 전도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증도 땅에 우상섬기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일생을 선교 합니다. 6.25때 그는 순교 당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너무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 문준경 선교사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한국교회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와서 부흥회 인도하셨던 치유집회 신학교에 정태기 박사님. 바로 그 문준경 선교사님한테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CCC에 대부라고 하시는 김준곤 박사님. 그분도 바로 문준경 전도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아가지고 훌륭한 인물이 되었어요. 성결교회 돌아가셨지만 이만식 목사님 그런 분들이 다 문준경 전도사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일이죠. 전남 신안군 증도에 가면 거의 95%가 크리스찬입니다. 아 정말 그런 마을이 없어요. 한 사람의 희생이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한 동네를 완전히 바꾸어 놓아 버렸어요. 위대한 일이지요.
우리가 지난번에 2월 12일인가 구역지도자 수련회를 성막 체험을 하고 또 그전에 용인 순교자 기념관에 간 적이 있었어요. 현관에 들어가면 2개의 큰 겉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의 그름은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와서 배가 파산되니까 거기 와서 이 성경책 던져주다가 참수 당하는 모습이 큰 사진으로 걸려있습니다. 또 하나 다른 사진은 꼭 130년 뒤에 여의도에서 100만 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한 번 와보지도 않은 이 땅위에 와서 피 흘려 죽은 토마스 선교사의 피 값으로
100만 명이 집회를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은 너무나도 거룩한 순교인줄로 믿습니다. 그분의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어떤 삶보다도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러한 수고와 헌신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수고를 인정해 줍니다. 당신은 정말 위대한 사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삶을 기억하시고 축복해주시는데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선교비가 끊기지 않게 후원하게 해주십니다. 가는 곳마다 능력의 열매를 맺고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도바울만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직장이 선교지가 되게 한다는 기도를 가지고 나간다면 여러분을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요셉을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주시잖아요. 여러분이 기업에서 이 기업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는 기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 기업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젊잖게 걸어가는 것, 그것이 거룩이 아니라 복음의 증인된 삶이 거룩의 삶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신자 된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 주간의 삶이 복음의 증인되는 삶이 된다면 어쩌면 난 거룩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목사고 집사고 장로고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한주간의 삶이 복음과 아무 상관없다면 나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복음의 증인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증인되기를 원하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결국엔 고역이 아닙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건강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초대교회인들은 집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몇 달 전인가요 신문에 보니깐 미혼모가 아기를 기르는데 컴퓨터 게임을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아이를 묶어놓고 PC방에가서 게임을 날을 세면서 했어요. 그러다가 아이가 굶어 죽었어요. 그게 신문에 나니깐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왜 굶겨 죽이냐 다른 곳에 맡기지. 욕을 하고 분노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러한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내가 기도해야할 영혼이 있는데 방치해 두고 나만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간다면 우리도 비난받아 마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돌보아야 될 영혼들이 있는데 그들은 다 방치해 두고 나는 그저 예배한번 드리고 헌금 내고 가면은 내 할 일은 훌륭하게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바로 비난받을 그리스도임에 틀림이 없다 하는 것 입니다. 우리 주위에 방치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증인으로 살고자 하면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다고 인정해 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증인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증인되어 주십니다.
한번 따라 해보세요. “우리가 주님의 증인 되면 주님이 우리의 증인되어 주신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 저 아무개 집사님은 전도 열심히 하다 왔습니다. 제가 너무 잘 압니다. 우리의 증인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의 증인되면 주님의 증인되면 하나님이 나의 증인되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를 아름다운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의 증인되면 하나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우리 사랑하는 여신도들 이제 목요일 노방전도 전체여신도 노방전도에 나와서 전도하십시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틈을 내서 직장에서 전도하십시오. 주일날도 전도하실 수 있어요. 우리 남신도 들은 직장에 나가니까 뭐 시간 내기가 어려우시죠?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면 우리 남신도들 끼리 커피한잔 하고 두명 세명씩 짝을 지어 나가서 교회 앞에서 전도지를 돌려도 훌륭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 창피한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서 그 조롱과 멸시를 감당하며 죽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그 전도지 하나 돌리는 것도 창피해서 못 돌린다면 어찌 우리가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순절에 주님의 증인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거룩하다. 나는 흠이 없다. 나는 옳은 일을 행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이라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삶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이 아름다운 복음의 증인 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