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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역사
서기15년 백제온조왕33년-고룡군
서기196년 초고왕31년 -대방군으로 개칭
서기685년 통일신라떄 남원소경 설치
남원 이라부른 호칭은==
서기757년 신라 경덕왕떄 남원5소경 으로지정하면서부터
남원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합니다
서기757년 남원으로개칭하였담니다
서기940년 고려태조 왕건이 남원부로 승격하였다 합니다
서기1413년 조선태종때 남원도호부로승격==호수1300호 인구수4912명
서기1910년 일정떄 48방을 22개면으로 개편
서기1914년 남원군으로개칭 인구수92000명
1931년11월1일 - 남원면이-남원읍 으로승격 1읍16개면
서기1981년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남원시와=군으로 분리
서기1995년 도농통합 남원시로 통합하였습니다
1- -사랑의 문화---남원광한루 600주년 역사글
2--예절의 고장 --- 남원향교 연혁
3--역사의 문화 --- 만인의총- 萬人義塚
4--왜군을멸살한---황산대첩- 荒山大捷
5--4~19주역이된---김주열 열사
남원 열차운행과정
1931년10월 남원역 개통
2004년4월 현남원역으로 이전
2011년10월5일 kTX 운행
성춘향-은
1675년 조선19대 숙종 음력 4월8일 출생
성씨를 가진참판과 退妓 월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합니다
16세가되던 단오날 사또자제 이몽룡과 광한루에서 처음사랑을 맺는다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가는 부친을 따라 떠난후
후임 사또에 의하여 온갖 고초를 겪게되고 죽기직전에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에의하여 다시행복을 찾게된다
남원관광 명승지 글 을 편집한사람-소암 조재훈
역사의 문화 고장 남원시내 전경입니다
940년3월에 고려태조23년에남원부 설치 표석 자리입니다
광한루 남쪽 정문입니다
淸 虛 府
광한루 남쪽 정문
광한루원의 정문인 청허부 를 통하여 들어가면
달나라 월궁에 들어옴을 상징한 뜻의
편액 글문 이랍니다
광한루 광장입니다
1418년 황희정승 이 유배와
그다음년도 1419년 에 건립하였든 광통루 모습입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하동정씨] 광한루로 고처부르게하여
광한루로 불렇다 합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일본 놈들이 불태워 소실되었습니다
2019년이 광한루 를 황희정승이 건립한지 600주년 이 되는년도입니다
광한루의 역사글
1171년 고려 의종때===정종부 와 이의방 이 무인난을 일의키자
왕실에서 문서정리를 하든 전중감 인 황공유가 난을 피하여 고향인 장수로 피신을 하였는데
장수에까지 황공유를 잡으려 오자===황공유는 다시 남원광한루 부근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합니다
황공유의 5세손인 황석부가 광한루 터에다 일제라는 서실을 건립하여
남원에 청소년을 교육을 시키었다 합니다
그후 황희 아버지가 개성에서 살면서 황희정승을 출생하게 되었다 합니다
황희정승은 개성에서 성장하여 고려 조정에 입문한지 3년만에 이성계 반정이 일어나자
개성에 두문동 산속에 고려충신72현이 숨어살았는데=====
황희는 그당시 나이가30세로 제일나이가 어리자
72현들꼐서 너는내려가 백성을 위하여 좋은정치를하라고 내려보내어 내려와
이방원의 비서직을 하던중 양녕의 세자폐출론에 상소를 올려다가 태종의 미움을사
남원으로 1418년에 귀향을 와 그다음년도인 1419년에 5대조부인 황감평이 건립한 일제 서실을 헐고
그자리에다 루각을 건립하여 이루각을 광통루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1444년 하동부사 정인지가 경치가 아름다우니 광한루로 고처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1419년 황희정승이 건립한 광통루
1461년 부사 장의국 이 요천수 물을 끓여들여 연못을 만들고
오작교를 가설하여 견우 직녀가 만나도록하였다는 전설이있습니다
오작교 이름은==가마귀오===까치작 로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만들었다합니다
1597년 정유재란시에 왜군들이 불을 질려 소실되었습니다
1626년 남원 부사 신감이 재건한 광한루 입니다
광한루 야경모습 입니다
남원광한루 600주년역사글
2008년1월8일 명승 제33호 지정
지정구역면적---69795m [21113평
최초광한루---
황희 의6대조 인 황감평이 일제라는 서실을지어
남원의 젊은이 에게 교육을 시키었다합니다
황희(黃喜, 1363-1452)는 본관이 장수(長水 : 장수 황씨)이고, 개성(開城)에서 출생했으며,
아호(雅號)는 방촌(庬村)이고, 시호(諡號)는 익성{익성(翼成) : 익성공(翼成公)}이다.
그는 사후(死後)에 전북 장수(長水)의 창계서원(滄溪書院), 경북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전북 진안(鎭安)의 화산서원(華山書院), 경기도 파주(坡州)의 반구정(伴鷗亭)에
영정(影幀, 초상)이 봉안되었다. 그의 문집으로는 『방촌집(庬村集)』이 있다.
태종재위4년-1404년에---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태종18년-1418년에 폐위하고 대군으로 봉하고
세째 충령대군을 세자책봉한일이있자---황희정승이 상소를하여
태종의 노여움으로---남원으로 3년간 유배당하여 있으면서
6대조인 황감평 선조가 지은---일제라는 서실을 헐고
그자리에다 1419년에 광통루를 건립하였다 합니다
공조판서 때인 1418년(태종 18년) 황희가 양녕대군을 지지한 문제로 남원(南原)으로유배를 하였다
. 1419년(세종 1년) 누각(樓閣)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누각이 광한루(廣寒樓)의 전신(全身)인 ‘광통루(廣通樓)’였다.
황희는 6대조 황감평(黃鑑平, ?-?)이 세운 서재 ‘일재(逸齋)’를 헐고, 그 자리에
더 큰 규모의 누각을 세우고, 그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했고, 독서로 소일했다.
황희는 이전에도 많은 독서를 했지만, 그때의 독서가 후일 명재상이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1444년(세종 26년)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내려와
광통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상찬(賞讚)하여 “달나라 미인 항아(姮娥)가 사는 월궁(月宮) 속에 있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같다”라고 하여 ‘광한루(廣寒樓)’로 개명했다.합니다
1461년(세조 6년--건립후42년만에 남원부사(南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이 보수했고,
요천(蓼川)의 물을 끌어다가 하늘의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고,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난다는 오작교(烏鵲橋)를 만들었다.이 오작교는 무지개다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58m)이다.
1582년(선조 15년) 건립후163년만에--전라도관찰사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1536-1593)은
광한루를 크게 증축(增築)하고,
연못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을
상징하는 봉래섬‧방장섬‧영주섬을 만들고, 봉래섬에는 배롱나무(목백일홍),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었고, 영주섬에는 정자 ‘영주각(瀛州閣)’을 세웠다.
섬과 섬 사이를 사다리꼴의 다리로 연결한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누원(樓苑)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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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광한루가 1597년 8월 14일 왜군의침략 방화(放火)에 의해 불타버렸다.
그 날 광한루의 방화는 남원성의 함락과 1만 명의 조‧명 연합군과 조선 백성 순절(殉節)의
애환이되었습니다.
1597년 8월 13~15일---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셋째 날인 1597년 8월 15일 왜군은 성을 포위하여 조총과 대포로 번갈아 공격하는 한편,
성 밖의 풀과 볏짚을 베어와 쌓기 시작했다. 명군(明軍)은 그것을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공성전(攻城戰)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왜군은
그 풀과 볏짚을 성벽 가까이에 쌓기 시작했다.
넷째 날인 1597년 8월 16일 왜군은 본격적으로 총공격을 폈다. 왜군은 풀과 볏짚 더미를
딛거나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기 시작했다. 동문과 서문의 명군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 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명군 중에는 북문을 통해 달아나는 병사도 있었다.
성 안에서 벌어진 백병전(白兵戰)에서 1대16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명군은 맥없이 스러져 갔다.
명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달아나다가 살해당하는 병사도 있었다.
명군 3,000명은 거의 다 전사했다.
명군 부총병관 양원(楊元)의 휘하 장수로서 동문을 맡았던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1597),
서문을 맡았던 천총(千摠) 모승선(毛承先, ?-1597),
남문을 맡았던 천총(千摠) 장표(蔣表, ?-1597)도 전사했다.
북문을 맡은 조선군은 잘 방어하고 있었으나, 얼마 후 배후(背後)에서 파도처럼 밀어닥친
왜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라병마사 이복남(李福男, ?-1597)과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1597)는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사(殉死)했다. 조선군 1,000명은 거의 다
장렬히 전사했다. 남원부 민간인 6,000-7,000명도 도륙(屠戮)당했다. 이렇게 하여
남원성(南原城)은 왜군에게 비참하게 함락되었다.
명군의 부총병관 양원(楊元, ?-?)은 말을 타고 달아나 전주(全州)로 갔다.
그는 명나라로 소환되어서 처형되었다.
그렇게 정유재란(1597) 남원성전투에서 불타버린 광한루는
1607년(선조 40년) 작은 누각이 복구되었고,
1626년(인조 4년) 남원부사(南原府使) 신감(申鑑, 1570-1631)에 의해 광한루가 복원되었다.
편액 ‘廣寒樓’(광한루)는 선조의 부마(夫馬 : 왕의 사위)이자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 중의 한 명으로서 명필이었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글씨이다.
지금의 ‘廣寒樓’(광한루) 편액은
대한민국 제2, 4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정훈(趙定勳, 1914-1987)의 글씨이다.
광한루 뒷면에 있는 편액 ‘湖南第一關’(호남제일관)은 1855년(철종 6년)에
남원부사 이상억(李象億, ?-?)의 글씨이다. 『
춘향전(春香傳)』의 배경으로서의 광한루는
1626년(인조 4년)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복원된 바로 그 광한루입니다
그 후 1794년(정조 18년) 남원부사 이만길(李萬吉, ?-?)이 영주섬의 영주각(瀛州閣)을 복원했고,
1869년(고종 6년)에는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북쪽에 다락을 세우고 층층대를 만들어출입하였다
1925년 수리공사 때 누의 동쪽 구석에 직실(直室)을 마련했다.
1931년11월1일 남원면이-남원읍으로 승격하였다
1931년 춘향사(春香祠)를 짓고, ‘萬古烈女春香祠’(만고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의 춘향 초상을 봉정했다.
1963년에는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호수 주위를 정비하여 국악원, 월매(月梅)의 집과 방장섬에
육모정(六茅亭)을 세웠고, 광한루를 문화재 보물 제281호로 지정했다.
1964년에는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을 건립했고, 1965년에는 영주각(瀛州閣)을 단청했으며,
1971년에 최봉채군수가-경내를확장 하고 호수를 확장하여 수중누각 완월정(琓月亭)을 세우고
북쪽의 정문을 후문으로 하고,
남쪽에 정문을 신축하여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1981년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하였습니다
1983년 경역(境域)을 더욱 확장, 정비하여 광한루를 사적(史蹟)으로 지정했고,
1995년 도농통합하여 남원시로 통합하였습니다
2008년에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을 명승 제33호로 지정했다.
2016년에 이환주 시장이 예촌문화시설을 건립하여 관광의 편익을 도모합니다
광한루와 광한루원 확장 또는 정비 사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한루역사이야기
1170년무신난 정종부 이의방의난으로
공조판서였든-황공유가-[황희의10대조]
무신난을 피하여 장수고향으로 피신을하였는데
장수에서도 이의방의 군사들이 내려와 잡의려들자
다시 남원광한루 부근으로 피신하여 살았다합니다
그후손인 황감평이-[황희6대조] 조그만한 서실을 지어 남원의 젊은이들에게
후학양성 교육을 시키어 인재양성을 시키면서 살았다합니다
황희출생은---1363년에 개성 은두리 에서 황군서의 둘채아들로 출생하여
1388년고려창왕때급제하여고려말에조정에들어가 관료직을수행중3년만에
1392년이성계의 반정으로조정에서 물러나 두임금을 섬길수없다는일편단심으로
고려충신 72현과같이 두문동 깊은산에들어가
사는데 황히가 당시30세로 제일 나이가 어리어 72현들께서--
너는내려가서 나라를위하여
정치를 잘하라고 내려보내어 조정에들어가 태조의 비서역을하든중에
1418년에--양녕 세자책봉관계로
태종에게--세자 양녕대군의 폐출불가론을 상소하였다가
태종의 노여움으로인하여-------------
남원으로유배되어 1419년에 —고조 황감평이지은 일제서실을허물고
누각 을 건립하여 --광통루라 이름부르고--후대에-광한루 역사가 시작됨니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하늘에 청허부와 같다하여
광한루라고 고처부르게되었다합니다
1597년8월14일 정유재란때 왜군놈들이 방화하여 완전소실되었답니다
건축한지 179년만에 소실되었다
1626년에소실된지29년된때에 부사 신감이 재건 복원하여
2018년 현재재건한지--392년이되었습니다
우리조선의 4대누각은--
평양에-부벽루-남원에 광한루- 진주에 촉석루-밀양에 영남루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