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헌 스투파(Votive Stupa, 奉獻 Stupa)는 승려나 신도들이 개개인의 공덕을 쌓고(공덕積聚), 소원을 기원하거나,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헌(기부)하여 세운 소형 불탑(스투파)을 말한다.
사찰이나 대형 성지의 중심이 되는 ‘주 스투파(Main Stupa)’ 주변에 신도들의 기부로 수십, 수백 개씩 빼곡하게 둘러싸며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대형 중심 스투파와 달리, 개인이나 가문이 제작비를 부담하여 세웠기 때문에 크기가 수십 cm에서 1~2m 내외로 작고 아담한 경우가 많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기운과 사리가 모여 있는 주 스투파(중심 탑) 주위에 헌성되므로, 산치, 사르나트, 부다가야, 탁실라 등 인도의 주요 불교 성지 유적지에 가면 대형 스투파를 둘러싼 수많은 소형 봉헌 스투파 부속군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실제 유골(진신사리)을 넣을 수 없기 때문에, 내부에는 작은 토판(토제 불상/토제 스투파), 소형 경전(다라니), 또는 기원문이 적힌 점토판 등을 집어넣어 사리를 대신했다.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불탑을 조성하거나 장엄하는 행위 자체가 매우 큰 공덕이 된다는 신앙이 널리 퍼졌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 현세의 복락을 빌거나, 세상을 떠난 부모와 친족이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목적에서 제작·봉헌된다.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들이 자신의 방문을 기념하고 지극한 신심을 시각적으로 남기는 예경의 방법이었다.
인도와 간다라, 티베트 등지에서 번성한 봉헌 스투파 양식은 동아시아로 건너오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신앙과 결합하게 된다.
신라 시대 대형 석탑을 세울 때 탑 내부에 수십~수백 개의 소형 목탑이나 토탑(소형 흙탑)을 넣어 봉안했던 전통(예: 화엄사 사자빈신사지 석탑 내부 소탑 등)이나, 고려 시대 소형 청동탑·금동탑을 봉헌했던 문화가 바로 이 '봉헌 스투파' 신앙의 연장선에 있다.
《라슈미비말라비슈다프라바 나마다라니(Raśmivimalaviśuddhaprabhā-nāma-dhāraṇī)무구정광다다라니경垢淨光大陀羅尼經
"떼(垢)가 없는 맑고 깨끗한(淨) 빛(光)을 발하는 위대한 다라니(신성한 주문)"*를 담고 있는 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나라에서 승려 미타산(彌陀山) 등에 의해 701년~704년 사이에 한문으로 번역(한역)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완전한 산스크리트어(범어) 원전 사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인도 원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Central Asia와 네팔, 티베트 등 주변 지역의 기록과 유물을 통해 그 흔적이 남아있다.
완전한 산스크리트어 사본은 없지만, 실크로드 및 주변 지역을 통해 다음과 같은 형태로 원전의 흔적이 확인된다.
티베트 대장경에 번역 봉안된 사본과 중앙아시아 사경 단편을 통해 원래 산스크리트어 경전명이《라슈미비말라비슈다프라바 나마 다라니(Raśmivimalaviśuddhaprabhā-nāma-dhāraṇī)》였음이 밝혀져 산스크리트어 제목의 재구성되었다.
호탄(Khotan) 단행본 사본 발견
중앙아시아 호탄 지역 유적에서 이 경전의 호탄어(Khotanese) 번역본과 일부 범어(Sanskrit) 주문(다라니) 단편이 적힌 필사본 스크롤이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기도 했다.
티베트어 번역본(Kanjur)
인도에서 직접 건너간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바탕으로 8~9세기경 티베트어로 직역한 경전이 티베트 대장경 속에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인도 본토에는 완본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나라 한역본(미타산 번역), 티베트어 번역본, 그리고 중앙아시아 출토 범어·호탄어 단편들을 비교·연구함으로써 원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원전 내용을 복원해내고 있다.
결국 인도의 원전은 사라졌지만, 신라의 석가탑 목판 인쇄본과 동아시아의 한역본, 티베트 사본이 남아 원본의 가치를 오늘날까지 증명해 주는 셈이다.
소탑 신앙의 핵심 원리:
경전에서 "다라니를 외우고 99개 또는 77개의 작은 탑을 만들어 본탑 안에 모시면 공덕을 받는다"라고 규정한 행위 자체가, 과거 인도의 순례자들이 부처님의 사리탑 주변에 수많은 작은 스투파(소탑)를 세우며 복을 빌던 인도 본토의 '봉헌 스투파(Votive Stupa)' 문화를 경전의 형태로 구조화한 것이다.
사상적 발전:
인도에서는 실제로 돌과 흙으로 손으로 일일이 작은 탑을 만들어 헌성하던 행동 형태가, 밀교 및 대승불교의 발전 과정을 거치며 "소탑 + 다라니 봉안"이라는 구체적인 儀軌(의궤/신앙 매뉴얼)를 담은 경전의 형태로 정리되었다.
경전 내에 규정된 '소탑 봉안 의식'은 인도의 봉헌 스투파 신앙이 경전화되어 동아시아로 전래된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당나라 승려 미타산(彌陀山) 등에 의해 701년~704년 사이에 한역된 무구정경은 706년(성덕왕 5년) 이전에 신라에 전해졌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중수하며 이 경전을 탑 안에 모셨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이다. 한역된 지 불과 2~5년 만에 신라 왕실과 승려들에게 유입되어 신앙으로 실천되었다는 뜻이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보수할 때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神龍二年(706년) ... 垢淨光陀羅尼經一卷(무구정광다라니경 1권) ... 籠於第二層塔身(제2층 탑신에 모셨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보·문화 유통 속도를 고려할 때, 최신 불교 사상과 신앙 경향이 신라로 실시간에 가깝게 매우 신속하게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결국 700년대 초반 이미 신라 왕실을 중심으로 ‘다라니를 외우고 소탑을 봉안하여 복을 빌고 죄를 씻는 다라니/소탑 신앙’이 깊이 자리 잡았고, 그 문화적 토양 위에서 751년경 불국사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목판 인쇄본이라는 세계적 문화유산이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무구정경)》가 봉안된 이후 신라에는 이 신앙을 근거로한 다라니경 소탑/장엄구를 봉안한 석탑이 급격히 유행하게 된다.
706년 황복사탑(기록)과 751년 석가탑(실물)을 시작으로 싹튼 무구정경 신앙은, 통일신라 후기(9~10세기)로 가면서 신라 전역의 석탑에 '소탑 봉안'이라는 보편적인 석탑 양식으로 확산·정착되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 나원리 오층석탑,
인도에서 싹튼 소탑 신앙이 신라에서 꽃피우기까지, 그 다리 역할을 했던 중국(당나라·송나라)에서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 신앙 역시 대단히 흥미롭고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 《무구정경》은 번역, 황실 신앙, 국가적 인쇄 사업, 그리고 탑파 양식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깊은 흔적을 남겼다.
704년(당나라 측천무후 집권기), 인도 승려 미타산(彌陀山)이 당나라 수도 장안의 광복사(光福寺)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당시 측천무후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국운을 빌기 위해 대대적인 불교 후원 정책을 펼쳤다. 새로 번역된 《무구정경》은 황실의 액운을 물리치고 정권의 안정을 비는 핵심 경전으로 발탁되었다.
측천무후가 만든 독자적인 한자(武周制字)들이 《무구정경》 한역본 초기 텍스트에 적용되었으며, 이는 석가탑 발견본에서도 확인되어 시대적 연대를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중국 현지에서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탑 내부에서 《무구정경》에 근거한 소탑과 다라니 사경·인쇄본이 대거 출토되었다.
당나라 수도 지역의 사찰 터와 당대 무덤, 탑 기단부에서 토제(흙) 소탑 및 소형 다라니 묵서/목판 인쇄본이 출토되었다.
돈황 석굴에서 발견된 사경 문서 가운데 《무구정경》 본문 및 그에 따른 다라니 주문이 적힌 단편들이 다수 확보되어, 실크로드 길목까지 이 신앙이 보급되었음을 입증한다.
중국에서 《무구정경》 신앙의 피크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자료는 오대십국 시대 오월국 국왕 전홍숙(錢弘俶, 929~988)의 봉헌 활동이다.
전홍숙은 《무구정경》 및 《보협인다라니경》의 가르침에 따라 8만 4천 개의 소형 구리/철제 소탑(팔만사천 아육왕탑(阿育王塔)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고 탑 속에 봉안했다.
항저우 서호의 유명한 탑인 뇌봉탑(雷峰塔)을 해체 조사할 때, 벽돌(전) 구멍 속에 정교하게 말아 넣은 10세기 목판 인쇄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이는 신라의 석가탑 다라니경과 함께 동아시아 목판 인쇄 및 다라니 신앙을 잇는 쌍벽을 이룬다.
중국에서의 《무구정경》 자료는 "인도의 범어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된 용광로이자, 목판 인쇄술 및 소탑 제작이 대규모 국가 사업 형태로 진화한 현장"을 잘 보여준다.
당나라 장안에서 번역된 이 뜨거운 신앙이 곧바로 신라로 전해져 (706년 황복사탑) 신라 고유의 석탑 문화 속에 녹아들고, 다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770년)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다라니 로드(Dhāraṇī Road)의 중앙 고리가 바로 중국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